제자를 택하심에 대해서
제자의 선정(選定)
누가복음 5장 1-26절
그리스도 이미 자기를 세상에 소개한 후, 그는 곧 제자의 선정으로 옮기셨다.
물론 자기의 세력을 부식(implantation)하기 위해서는 아니다.
자기에게 가까운 자를 선택하여 한없이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였다.
그는 어떠한 사람 사이에서 그의 제자들을 선택하셨던가?
또 어떻게 하여 이것을 선택하셨던가?
그 선정의 범위 및 방법은 극히 참신(novelty)하여,
도저히 사람의 생각이 미치지 못하는 바이다.
누가복음 제5장은 먼저 베드로 및 요한 형제의 선정기사를 싣고 있다.
그러나 베드로 형제가 예수에게 수종 한 것은 이때가 최초는 아니었다.
그들은 앞서 침례요한의 가르침을 듣기 위해 요당강반에 이른 때,
'세상 죄를 진 하나님의 어린양을 보라'는 요한의 말을 듣고서 예수에게 수종 했던 것이다(요한복음 1:29이하).
그들은 어떤 의미에 있어서는 이미 그리스도의 제자였다.
하지만 그들은 이때 처음으로 전도직을 받은 것이다.
그러므로 오히려 이것을 전도사선정이라고 함이 타당하다.
즉 보다 깊은 의미에 있어서의 제자의 선정이었다.
전도사의 선정이라고 한다.
그리스도는 예루살렘에 올라가 성서학자의 문하에서 청년학생의 준재를 선정했던가?
아니, 그의 눈을 끈 것은 갈릴리 호반의 어부였다.
다만 어부라고 하여,
단순히 노동임금을 가지고서 생활하는 무학의 노동자는 아니었다.
그들의 아버지는 상당한 기반(foundation)를 차지한 선주로서,
또한 고용인을 사역하고, 그 자식들도 또한 함께 아버지를 도와 어업에 종사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아들이 아버지를 떠나 그리스도를 따른 후라 해도,
아버지는 아직 그 생활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특히 요한 같은 이는 학문의 소양 있는 인물이었음은 성서상으로 명백하다.
또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하시기 전야,
요한이 따라가서 제사장의 뜰에 이른 때,
지인 있었기 때문에 들어갈 수 있었다는 것이고 보면,
그가 예루살렘의 상류사회에도 교제하고 있었음을 살펴 알 수가 있는 것이다.
요컨대 그들은 독립의 생계를 유지한 사람들이었다.
성서학자가 아니라, 또는 피고용자가 아니라,
독립 어업자의 사이에서, 그리스도는 먼저 그 제자를 선정하셨던 것이다.
그리고 이 사실은 복음의 향방의 중견이 어디에 있는 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복음 본래부터 만인에 대한 것이라 해도,
그 중 특히 어떠한 사람에게 적합한가?
즉 항상 인생의 사실을 문제로 삼고,
그러면서 독립의 지위를 확보하는 사람들이다.
두뇌로서 사색연구에 골몰하는 사람들은 아니다.
또 타인에게 사용되지 않고서는 의식할 수 없는 사람은 아니다.
손으로서 날마다의 노동에 종사하고 독립의 생업(직업)에 분망 하는 사람,
그러한 사람이 가장 복음의 성질에 합체(unification)하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만약 오늘 그리스도 우리들 사이에 오셔서,
그가 ‘복음을 맡길 자는 누구랴?’고 선정하신다면,
역시 같은 일을 행하시리라.
그는 결코 학사, 신학생, 철학자들에게 주목하지 않았으리라.
그렇다고 해서 임금으로서 겨우 날마다의 생활을 지탱하는
피용노동자도 (전도사로서는) 택하지 않으시리라.
그의 선정에 드는 자는 반드시 독립의 지위를 유지하는 실행적 방면의 사람이리라.
그리스도교의 genius(향방; 특질)이 저쪽에 있지 않고
이쪽에 있는 것이다.
베드로, 요한 등으로써 대표된 사람들이
가장 잘 복음을 받기에 적임으로 되 있는 것이다.
다음에 또 그 선정의 방법이 그리스도적이었다.
만약 그리스도가 아니고 보통의 교법사였더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반드시 그 제자를 집에 불러다가 천국의 가르치심을 전수(transmission)하고,
그들이 이것을 해득하기를 기다려,
그런 후에 제자로서 선정했으리라.
하지만 그리스도는 그렇게 하시지는 않았다.
그는 몸소 게네사렛 호숫가에 나가셨다.
그리고 베드로, 요한 등,
종야의 어로(fishing) 헛되어 아무 얻은 것(잡은 것)없어 실망하는 것을 보고,
그 배를 타고 깊은 데로 나가서 그물을 치도록 명하셨다.
베드로가 예수의 명하시는 대로 그물을 치니, 고기가 한없이 잡혀,
그물도 찢어질 정도 되어 친구의 배를 불러다가 돕게 했더니,
드디어 두 배에 넘치는 어획이었다.
여기서 베드로는 자기 스승이 상인(상인보통인)이 아님을 깨달았다.
그는 곧 자기의 죄를 느꼈다. 그러므로 스승의 발아래 엎드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입니다'(8-). 고 했다.
그 때 그리스도는 그의 손을 잡고
'두려워 말라.
이제부터 너로 하여금 사람을 낚는 자로 되게 하리라'고 대답하셨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배를 언덕에 가져다 대고서,
모두를 버리고 그리스도에 수종 했던 것이다.
놀라운 부르심의 방법!
실로 이는 아주 완전한 제자 선정의 방법이다.
이는 사람의 계획(지각)이 미치지 못하는 일이다.
어부를 부르시는데 어법으로서 했다.
더구나 실망의 아침이다.
뜻밖에도 주는 모습을 나타내어
'너희는, 좀 방향을 바꾸라'고 명하신다.
이에 따르면 곧 배도 가라앉을 정도의 대어(어획)이다.
경겁(awe)하여 어찌할 바를 알지 못하는 때, 곧.
'두려워 말라. 이제부터 인간의 어부가 되게 하리라'(10). 고 가르치셨다.
그들은 종생이 아침의 일을 잊을 수가 없었다.
후일 전도의 실망에 조우한 때, 몇 번이고 이것을 회상했으리라.
'사람을 낚는다'는 것이다.
다소 어폐(a faulty expression)가 없는 것 아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말에 있어서는 그 의미는 절로 다른데 있다.
사람을 낚기 위한 그물은 무엇이랴?
곧 다만 그리스도의 말씀 있을 뿐.
이 그물이야말로 사람을 낚는데 적합한 유일한 그물이다.
그리고 이에 들어가는 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다.
기타의 그물은 모두 아니(비)이다.
사람을 낚기 위한 그물로서는,
음악도 아니(비)이다.
자선도 아니다. 교육도 아니 이다.
수단, 정략, 더구나 아니(비) 이다.
다만 하나님의 말씀인 성서 뿐, 이것을 써서 가한 것이다.
누가복음 제5장은 다음에 두 개의 기적을 기록하고 있다.
나병의 치료 및 중풍의 치유 이것이다.
나병은 도저히 치료할 수 있는 병은 아니다(당시에 있어서는 그랬으나 오늘은 가능하게 되어 있다-4권 78역주 참조).
일견 전율을 금치 못할 아주 두려운 병이다.
오늘이라 해도 이 병의 치료방법을 발견하는 자 있으면,
의학계의 왕(king)으로서 호칭되리라.
그런데 그리스도는 이것을 고치셨다(당시에 있어서는 불가능한 것을).
이는 그가 인류의 구주이심의 최량의 증거이다.
여기서, 그는 고침 받은 사람에게 명하여,
'가서 제사장 앞에 증거를 보이라'(14)고 하셨다.
즉 교직에 대하여 그 자신의 증명을 행하게 하신 것이다.
그가 구주이심의 자격을 증명할 최량의 면장(증서)은,
그가 행하신 은혜의 기적 그것이다.
그리고 이것을 제사장 앞에 보이게 하신 것은,
결국 그가 나아가 제사장 계급에 대하여 충돌을 초래한 것이리라.
다음으로 그는 중풍을 앓는 자를 고치시고,
'이 사람아, 네 죄가 사해졌다'(20). 고 선고하신 때,
충돌은 다시 일보 더하게 된 것이다.
학자와 바리새인들은 마음으로 이것을 비난했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그것을 알아.
'너희는 심중에 무엇을 논하는가?
네 죄를 사했다고 하는 것과 일어나 걸어가라고 하는 것과,
어느 편이 쉬우랴(22-23)’고 대답하셨다.
죄를 사한다고 하는 것은 쉽지만, 그 사실을 보이기는 어렵다.
내 이제 그 사실을 너희의 안전에 보이리라고 하신 것이다.
알아야 한다.
제자의 선정에 이어 기록된 이들 두 개의 기적의 의미를.
이는 기적 그것보다도 오히려 기적의 결과인 충돌의 기사이다.
그리스도에게 제자가 생김과 동시에 또 적이 생겼다.
그렇듯, 그의 생애를 통하여,
그 세력의 증가 따라 적도 또한 증가했던 것이다.
그 사업이 진척(advance)하는데 비례하여 충돌도 또 격렬을 더했던 것이다.
이는 복음의 깊은 드라마(drama 극적 상태)이다.
누가가 기적의 기사를 여기에 집어넣은 것은
이것을 보이기 위함에 지나지 않았다.
그리고 이것을 아는 일은 복음이 무엇인지를 아는데 필요하다.
복음이 만약 적을 낳지 않을 것인가?
즉 거짓된 복음임의 명증이다.
우리들 그리스도의 은혜에 참여한 자, 역시 그러하다.
복음 위해 증거 하는 일 많으면, 더욱 더 많은 적을 만들지 않을 수 없다.
실로 하는 수 없는 사실이다.
'모든 사람이 너희를 칭찬하면, 너희는, 화 있을진저'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그의 성명이 이 세상에 오르는 때는
반드시 인적 없는 곳으로 물러가 기도하셨다.
복음기사의 붓(pen)은 실로 용의주도이다.
누가복음 5장 15절에 그리스도의 성명(평판 fame)의 훤전(spread abroad)을 기록한 후,
그 다음절에 있어서 그의 기도의 기사를 써서 빠뜨리지 않고 있다.
그리고 5장 전체가 보이고자 하는 바는,
복음의 선양(enhancement)과
이에 대한 악마의 반대와의 병행병진에 있는 것이다.
(2월 11일 등정무필기)
*내촌감삼의 (1917년 4월 '성서지연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