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말씀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거듭난 삶 2018. 6. 26. 0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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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 입성

 

: [ 19:28-40] 예수께서 말씀을 하시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앞서서 가시더라

29) 감람원이라 불리는 산쪽에 있는 벳바게와 베다니에 가까이 가셨을 때에 제자 둘을 보내시며

30) 이르시되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아직 아무도 보지 않은 나귀 새끼가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라

31) 만일 누가 너희에게 어찌하여 푸느냐 묻거든 말하기를 주가 쓰시겠다 하라 하시매

32) 보내심을 받은 자들이 가서 말씀하신 대로 만난지라

33) 나귀 새끼를 때에 임자들이 이르되 어찌하여 나귀 새끼를 푸느냐

34) 대답하되 주께서 쓰시겠다 하고

35) 그것을 예수께로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나귀 새끼 위에 걸쳐 놓고 예수를 태우니

36) 가실 때에 그들이 자기의 겉옷을 길에 펴더라

37) 이미 감람 내리막길에 가까이 오시매 제자의 무리가 자기들이 모든 능한 일로 인하여 기뻐하며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여

38) 이르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 하니

39) 무리 어떤 바리새인들이 말하되 선생이여 당신의 제자들을 책망하소서 하거늘

40)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사람들이 침묵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 하시니라.

 

 

[ 19:28] 예수께서 말씀을 하시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앞서서 가시더라 - 누가는 므나의 비유와 예루살렘 입성을 자연스럽게 연결시키기 위해 ' 말씀을 하시고'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다.

 

뒤이어 예수는 예루살렘을 향하여 앞장서서 가는 것으로 묘사되는데 이와 비슷한 장면이 10:32에도 나온다.

 

( 10:32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에 예수께서 그들 앞에 서서 가시는데 그들이 놀라고 따르는 자들은 두려워하더라 이에 다시 열두 제자를 데리시고 자기가 당할 일을 말씀하여 이르시되)

 

이는 장군이 부대 앞에서 진두지휘 함으로써 부대의 사기를 높이듯이, 예루살렘에서의 수난과 죽음을 향하여 조금도 두려움 없이 단호하게 걷는 장면이다.

 

한편 구절에서부터는 주께서 십자가 수난을 겪으시기에 앞서 맞이하신 마지막 주간의 생애가 전개되기 시작한다.

 

 

[ 19:29] 감람원이라 불리는 산쪽에 있는 벳바게와 베다니에 가까이 가셨을 때에 제자 둘을 보내시며

 

감람원이라 불리는 산쪽에 있는 벳바게와 베다니 - 감람원이라는 산은 '감람산' 또는 '올리브산'이라고 하는 예루살렘 교외의 동쪽에 위치한 곳이다.

 

산은 .북으로 4km 길이가 되며, 예루살렘보다 약간 높은 나즈막한 산이다.

산에 벳바게라는 지명이 언급되는데 .구약 성서 전체에 걸쳐 오직 내용에서만 나오는 지명이다.

 

( 21:1 그들이 예루살렘에 가까이 가서 감람 벳바게에 이르렀을 때에 예수께서 제자를 보내시며;

 

11:1 그들이 예루살렘에 가까이 와서 감람 벳바게와 베다니에 이르렀을 때에 예수께서 제자 둘을 보내시며).

 

탈무드에서는 곳이 감람산 서쪽에 있는 것으로 언급되기도 하나 확인할 길이 없다.

다만 베다니라는 지명과 함께 사용된 점으로 보아 베다니 근처, 혹은 인접한 곳에 위치한 마을 이름인 같다(Lightfoot, Godet).

 

한편 사랑의 집이라는 뜻을 가진 '베다니' 예루살렘으로부터 3.5km, 그리고 여리고로부터 24km 정도 떨어진 곳으로, 감람산 동쪽에 위치한 마을이다.

 

현재는 ' 라자리'(El Azariyeh) 혹은 '라자리에'라는 지명으로 알려져 있는데 아마도 마르다, 마리아, 그리고 나사로의 이야기에서 유래된 듯하다. *참조-( 11:1-44).

 

제자 - 본문에서 어느 제자를 보냈는지 길이 없으나 22:8에서 유월절 식사를 준비하기 위해 베드로와 요한을 보낸 점을 보아 역시 여기서도 베드로와 요한인 듯하다.

 

(22:8 예수께서 베드로와 요한을 보내시며 이르시되 가서 우리를 위하여 유월절을 준비하여 우리로 먹게 하라)

 

 

[ 19:30] 이르시되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아직 아무도 보지 않은 나귀 새끼가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라

 

너희는 맞은편 마을 - 29절의 언급 내용으로 보아 벱바게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Bruce).

 

아직 아무도 보지 않은 나귀새끼 - 이같은 묘사는 9:9 예언의 성취라 있다.

 

( 9:9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나귀 새끼니라)

 

예수는 기치창검(旗幟槍劒) 군대를 거느린 무력의 왕으로서가 아니라

 

'바다에서 바다까지 강에서 끝까지 화평을 선포하는'( 9:10) 평강의 왕으로서,

예루살렘에 입성하고자 하신 것이다.

 

그리고 아무도 타지 않은 나귀를 구하신 것은 제물에 바치는 정결한 짐승을 구별하는 종교적 의식법에 맞추려고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 19:2 여호와께서 명령하시는 법의 율례를 이제 이르노니 이스라엘 자손에게 일러서 온전하여 흠이 없고 아직 멍에 메지 아니한 붉은 암송아지를 네게로 끌어오게 하고;

 

21:3 피살된 곳에서 제일 가까운 성읍의 장로들이 성읍에서 아직 부리지 아니하고 멍에를 메지 아니한 암송아지를 취하여;

 

삼상 6:7 그러므로 수레를 하나 만들고 멍에를 메어 보지 아니한 나는 마리를 끌어다가 소에 수레를 메우고 송아지들은 떼어 집으로 돌려보내고).

 

따라서 예루살렘 입성을 준비하는데 있어서 종교적 신비감까지 느끼도록 함으로써 엄숙함을 강조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예수의 지시는 자신의 초자연적 능력을 보여주신 좋은 실례이기도 하다.

 

이러한 신비적 예지의 표현은 한층 예루살렘 입성의 진지함을 증폭시켜 준다.

 

 

[ 19:31] 만일 누가 너희에게 어찌하여 푸느냐 묻거든 말하기를 주가 쓰시겠다 하라 하시매

 

주가 쓰시겠다 하라 - 여기서 '' 해당하는 헬라어 '퀴리오스' 하나님을 가리키는지 예수 자신을 지칭하는지 또는 나귀의 본래 주인을 가리키는 말로 쓰였는지 분명하게 밝힐 길이 없다.

 

그러나 33절에 나귀의 주인이 언급된 점으로 보아 나귀의 주인은 아닌듯하다.

혹자는 미리 나귀 주인과 약속하여 나귀를 준비해 두었던 것이라고 말하고, 나귀의 주인이 예수였다고 본다(Wycliffe). 그러나 그런 추측은 적절치 못하다.

 

현재 나귀를 사용할 사람이 예수라는 점에서 '' 예수 자신으로 보는 것이 문맥상 무리가 없다.

 

따라서 단순히 나귀의 소유주라는 의미의 ''보다는 신앙적 의미에서 '' 이해하는 것이 좋다.

 

이와 같은 이해는 30절에서 언급된 엄숙한 분위기와 부합되는 것으로서 예루살렘 입성 직전의 종교적 신비감(神秘感) 읽을 있다.

 

 

[ 19:32] 보내심을 받은 자들이 가서 말씀하신 대로 만난지라

 

말씀하신 대로 만난지라 - 예수가 예견하신 대로 나귀가 묶여있음을 발견하게 되었다.

 

여기서도 나귀를 사전에 미리 준비해 것인지 멀리서 나귀 새끼가 묶여 있는 것을 보고 지시했던 것인지, 아니면 예수의 초자연적 예지 능력으로 것인지 밝혀져 있지 않다.

이중 예수의 신비적 능력으로 이해하는 것이 가장 타당한 듯하다.

 

그러나 이같은 초자연적 능력에 대한 묘사는 예지 능력 자체에 강조점을 것이라기 보다는 예루살렘 입성의 종교적 엄숙성 또는 예언 성취의 경이감을 표현하는데 관심을 것이라고 있다.

 

( 21:4 이는 선지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 19:33] 나귀 새끼를 때에 임자들이 이르되 어찌하여 나귀 새끼를 푸느냐

 

임자들이 이르되 어찌하여 나귀 새끼를 푸느냐 - '임자들'이란 나귀 주인을 가리키는데 평행 본문 11:5에서는 '거기 섰던 사람 어떤 사람'이라고 다소 불명확하게 언급한다.

 

( 11:5 거기 있는 사람 어떤 이들이 이르되 나귀 새끼를 풀어 무엇 하려느냐 하매)

 

또한 그들이 묻는 물음도 누가는 남의 것을 푸느냐는 식의 물음인데 반해,

마가는 '나귀 새끼를 풀어 무엇하려는가'하고 물음으로써 소유권에 대한 전제 없이 나귀새끼의 용도에 대해 묻고 있는 점이 서로 다르다.

 

어쨌든 이야기의 전개는 예수께서 예견하신대로 되어갔다.

그리고 구절의 물음은 무슨 권위로 남의 짐승을 가져가느냐는 의미일 수도 있으나, 아직 새끼에 불과한 나귀를 끌고 가서 무엇에 쓰려는가 하는 의미로도 이해된다.

 

 

[ 19:34] 대답하되 주께서 쓰시겠다 하고

 

주께서 쓰시겠다고 하고 - 말에 대해 나귀의 주인들이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는 전혀 언급이 없다. 그러나 아무런 언급이 없다는 것은 주인들이 제자들의 말을 인정했다는 암시를 준다.

 

따라서 주인들이 이미 예수에 대하여 알고 있었던 사람들이었으리라는 추측이 가능해진다. 어쨌든 이같은 묘사는 예수의 초능력적 예지(豫知) 능력 또는 철저한 예언 성취 등을 알게 하는 것이며 그럼으로써 예루살렘 입성이 하나님의 섭리(providence)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임을 시사한다.

 

 

[ 19:35] 그것을 예수께로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나귀 새끼 위에 걸쳐 놓고 예수를 태우니

 

겉옷을 나귀 새끼 위에 걸쳐 놓고 - 나귀 등에다 겉옷을 걸친 것은 안장 대신 사용하기 위함이기도 했지만 왕이나 귀인에게 보이는 일반적인 존경의 표시로도 간주될 있다.

 

(왕하 9:13 무리가 각각 자기의 옷을 급히 가져다가 섬돌 예후의 밑에 깔고 나팔을 불며 이르되 예후는 왕이라 하니라).

 

그리고 복음서와는 달리 여기서는 예수 스스로 나귀 위에 것이 아니라, 제자들이 예수를 태웠다고 묘사한다.

 

이같은 누가의 독특한 묘사 또는 예수께 대한 제자들의 존경을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왕상 1:33 왕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너희 주의 신하들을 데리고 아들 솔로몬을 노새에 태우고 기혼으로 인도하여 내려가고).

 

 

[ 19:36] 가실 때에 그들이 자기의 겉옷을 길에 펴더라

 

그들이 자기의 겉옷을 길에 펴더라 - 겉옷을 나귀가 지나가는 위에 까는 행위는 왕에 대한 존경과 환영의 표시이다.

 

(왕하 9:13 무리가 각각 자기의 옷을 급히 가져다가 섬돌 예후의 밑에 깔고 나팔을 불며 이르되 예후는 왕이라 하니라).

 

여기서 '그들이' 제자들을 받는 말인데 마가와 마태는 많은 사람 또는 무리의 대부분이라고 묘사하고 있다.

 

그리고 마태, 마가는 겉옷 뿐만 아니라 나뭇가지도 길에 펼쳤다고 했고,

 

( 21:8 무리의 대다수는 그들의 겉옷을 길에 펴고 다른 이들은 나뭇가지를 베어 길에 펴고;

 

11:8 많은 사람들은 자기들의 겉옷을, 다른 이들은 들에서 나뭇가지를 길에 펴며)

 

요한은 그것을 종려나무 가지라고 밝혔다.

( 12:13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맞으러 나가 외치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하더라).

 

또한 요한복음은 환영의 무리가 예루살렘으로부터 나왔다고 기록하고 있으나, 공관복음에는 언급되지 않는다.

 

( 12:12-13 이튿날에는 명절에 무리가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오신다는 것을 듣고

13)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맞으러 나가 외치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하더라,

18 이에 무리가 예수를 맞음은 표적 행하심을 들었음이러라)

 

무리들은 대체로 갈릴리에서 부터 따라온 순례자들이었을 것이다.

이렇듯 예수께서는 자신이 이스라엘과 세상의 구원을 위해 오신 메시야라는 사실을 공공연하게 드러내고 계신다.

 

그러나 당시 예수를 환호(歡呼)했던 사람들 대다수는 예수를 정치적, 민족적 메시야로 밖에 여기지 않았다.

 

 

[ 19:37] 이미 감람 내리막길에 가까이 오시매 제자의 무리가 자기들이 모든 능한 일로 인하여 기뻐하며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여

 

이미 감람 내리막길에 가까이 오시매 제자의 무리가 자기들이 모든 능한 일로 인하여 - 다른 복음서에 없는 자세한 장면 묘사이다.

 

이제 감람산 기슭까지 것으로 보인다. 여기 등장하는 군중들은 이미 갈릴리 지역에서부터 동행해온 사람도 있을 것이고, 여리고에서 부터 동행한 사람도 있었을 것으로 보이는데, 벳바게와 베다니 사람들도 있었으리라는 추측도 가능하다.

 

아무튼 모든 사람들이 예수를 환영하며 찬양하는데 찬양은 예수의 모든 능한 일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이들 많은 사람들은 베다니를 오는 동안 나사로의 부활 소식을 들었을 것이며,

 

( 12:17-18 나사로를 무덤에서 불러내어 죽은 가운데서 살리실 때에 함께 있던 무리가 증언한지라

18) 이에 무리가 예수를 맞음은 표적 행하심을 들었음이러라)

 

외에도 예수의 허다한 권능들을 직접 또는 간접으로 보고 들었음에 분명하다.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여 - 구절 역시 누가의 독특한 묘사로서 깊은 신학적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데 예수의 활동을 하나님의 활동과 일치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예수께서 그동안 행하셨던 치병 활동이나 모든 놀라운 가르침과 기적적인 활동 등이 모두 하나님의 능력으로 나타난 것이며 예수로 인해 하나님의 능력과 영광을 체험하였다는 고백이 있다.

 

따라서 이같은 묘사는 예수가 군중들에 의해서 하나님의 대리자로 공개되고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 19:38] 이르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 하니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 이같은 구호는 118:26에서 따온 것으로 있는데,

 

( 118:26 여호와의 이름으로 오는 자가 복이 있음이여 우리가 여호와의 집에서 너희를 축복하였도다)

 

다른 복음서와는 달리 누가는 '왕이여'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다.

예수를 왕으로 묘사하는 것은 이미 '므나의 비유'에서 예견되었거니와,

여기서도 예수를 왕권적 권위를 지니시고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으신 자로 묘사하고 있다.

 

그런데 시편에서 사용된 '여호와의 이름으로 오는...'라는 말은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해 성전에 모이는 자들에 대한 축복의 말이지만, 메시야 예언과 관련된 경우에는 예수의 승리의 입성(入城) 예표(豫表) 것이다.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 - 구절은 2:14에서 나오는 천사들의 합창과 흡사한데, 여기서는 땅에서 평화가 아니라 하늘에서 평화라고 표현함으로써 어색한 느낌을 준다.

 

(2:14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

 

여기서는 땅에서 평화가 아니라 하늘에서 평화라고 표현함으로써 어색한 느낌을 준다.

 

표현 역시 다른 복음서와 다른 독특한 표현이다.

마태와 마가는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라고 외치는 것으로 묘사되는데,

 

( 21:9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무리가 소리 높여 이르되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11:10 찬송하리로다 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누가는 호산나라는 말은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구절의 뜻에 관해,

구원이 아직은 하늘에만 나타났다는 뜻으로 해석하기도 하고, (W.Forester)

또는 사람을 위해 예비한 하늘의 평화라고 말하기도 한다(Easton, Plummer).

사람들에게 평화가 예수께 주어진 것이라는 주장도 있고(J.H.Davies),

예수께서 왕으로 높여짐으로써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평화가 임했다는 의미로 해석하기도 한다(J.H.Marshall).

 

이중 마샬(Marshall) 주장은 상당히 설득력 있다고 있다. 보충하면 탄생 때에 천사들이 땅위의 평화를 노래했던 것처럼 이제 예수가 만왕의 왕으로서 땅에 가져다 평화가 하늘의 평화임을 선포하는 것으로 이해할 있다.

 

 

[ 19:39] 무리 어떤 바리새인들이 말하되 선생이여 당신의 제자들을 책망하소서 하거늘

 

선생이여 당신의 제자들을 책망하소서 - 구절은 다른 복음서에서는 언급되지 않는 누가만의 묘사이다.

 

여기서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대해 사용한 '선생'(디다스칼로스)이라는 호칭은 군중들이 외치는 ''(퀴리오스) 대조되고 있다.

 

한편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제자들을 책망하라고 요청은 가지 다른 각도에서 이해될 있다.

 

(1) 여기 등장하는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대해 호의적인 감정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본다.

 

(7:36 바리새인이 예수께 자기와 함께 잡수시기를 청하니 이에 바리새인의 집에 들어가 앉으셨을 때에;

 

11:37 예수께서 말씀하실 때에 바리새인이 자기와 함께 점심 잡수시기를 청하므로 들어가 앉으셨더니;

 

13:31 때에 어떤 바리새인들이 나아와서 이르되 나가서 여기를 떠나소서 헤롯이 당신을 죽이고자 하나이다;

 

14:1 안식일에 예수께서 바리새인 지도자의 집에 잡수시러 들어가시니 그들이 엿보고 있더라).

 

군중들의 환호는 흥분된 것이었음에 틀림없었을 것이고 이같은 메시야적 행진이 계속되었을 예수의 신변에 물리적 위협이 것이라는 생각 때문에 바리새인들은 흥분된 군중을 자제시켜야 한다고 여겼을 것이다.

 

그들은 이러한 환호의 물결이 시위의 양상을 띰으로써 예루살렘에 주둔(駐屯) 로마 군대와 부딪히게 상황을 두려워했을 있다.

 

(2) 다른 한편으로는 바리새인들이 호의적인 반응이라기보다는 예수께 드린 찬양에 대한 거부의 표시로서 제자들을 책망하라고 요구했을 수도 있다.

 

그들에게는 예수에 대한 찬양이 신성 모독의 소리로 들려졌을 가능성이 높다.

 

전후 문맥상 (2) 견해가 타당한 듯하나, 어쨌든 바리새인들이 신성한 하나님의 역사를 무지한 인간적인 생각으로 막으려 했다는 사실 만큼은 분명하다.

 

( 16:21-23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나타내시니

22)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여 이르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23)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뒤로 물러 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 19:40]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사람들이 침묵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 하시니라.

 

만일 사람들이 침묵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 - 격언구 형태의 구절은 2:11에서 언급된 "담에서 돌이 부르짖고 집에서 들보가 응답하리라" 말을 연상시킨다.

 

( 2:11 담에서 돌이 부르짖고 집에서 들보가 응답하리라)

 

말은 바리새인들의 요구를 마디로 묵살하는 것인데

 

첫째, 예수를 메시야로 환호하는 저들의 찬양이 정당함을 확인하는 것이고

둘째, 반드시 그렇게 찬양되어야만 한다는 필연성을 주장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예수께 대한 메시야적 찬양은 특정한 사람들의 자유의사에 따라 제한될 성질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원하신 섭리와 계획하에 필히 이루어질 사실이었던 것이다.

 

또한 찬양은 계속 선포되어야 내용이므로, 응당 찬양해야 상황에서 침묵을 지키는 것은 죄가 된다는 의미도 함축(含蓄)하고 있다.

 

따라서 구절은 메시야 찬양 때문에 물리적 위협이 닥쳐온다고 해도 계속 외쳐야 것이며 메시야의 행진은 계속 되어야 한다는 의미를 시사함으로써,

 

오늘의 기독교인들에게 어떠한 물리적 위협이나 고난 앞에서도 하나님의 뜻과 주의 복음을 굽힘 없이 선포해야 한다는 당위성을 일깨워 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