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dengol 2

왕도 아시려니와 넬의 아들 아브넬의 온 것은 왕을 속임이라

거듭난 삶 2021. 7. 31. 0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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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의 신복 요압이 아브넬을 죽이려는 마음

 

성 경: [삼하 3:22-26] 다윗의 신복들과 요압이 적군을 치고 크게 노략한 물건을 가지고 돌아오니 아브넬은 이미 보냄을 받아 평안히 갔고 다윗과 함께 헤브론에 있지 아니한 때라

23) 요압과 그 함께 한 모든 군사가 돌아오매 혹이 요압에게 고하여 가로되 넬의 아들 아브넬이 왕에게 왔더니 왕이 보내매 저가 평안히 갔나이다

24) 요압이 왕에게 나아가 가로되 어찌 하심이니이까 아브넬이 왕에게 나아왔거늘 어찌하여 저를 보내어 잘 가게 하셨나이까

25) 왕도 아시려니와 넬의 아들 아브넬의 온 것은 왕을 속임이라 왕의 출입하는 것을 알고 모든 하시는 것을 알려 함이니이다 하고

26) 이에 다윗에게서 나와서 사자들을 보내어 아브넬을 쫓아가게 하였더니 시라 우물가에서 저를 데리고 돌아왔으나 다윗은 알지 못하였더라.

 

 

 

[삼하 3:22] 다윗의 신복들과 요압이 적군을 치고 크게 노략한 물건을 가지고 돌아오니 아브넬은 이미 보냄을 받아 평안히 갔고 다윗과 함께 헤브론에 있지 아니한 때라

 

요압이 적군을 치고 크게 노략한 물건을 가지고 돌아오니 - 아마도 요압이

싸움터에 나가있게 된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닐 것이다.

다시 말해서, 다윗은

아브넬과의 중요한 협상을 위해 요압을 일부러 변방에

파견했을 것이라는 말이다(Pulpit Commentary, Lange, The Interpreter's Bible).

 

그것은 아마 다음

두 가지 목적에서였을 것이다.

 

(1) 당시 지나치게 강한 세력을 갖고 있던 요압을 견제하고,

 

(39내가 기름 부음을 받은 왕일지라도 이 날 약하며 이 사람들 곧 스루야의 아들들이 내게 너무 강하니 주께서 악을 행한 자에게 그의 사악함대로 갚으실지로다, 하니라)

 

아브넬과의 협상에서 그의 간섭을 배제하기 위함이다.

 

(2) 요압과 아브넬 사이에 일어날지도 모르는 충돌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함이다.

 

 

크게 노략한 물건 - 요압이 유다를 공격해온 적들을 물리치기 위해

출정(出征)한 것이 아니라 순전히 변경 지대에

약탈하러 나갔었음을 시사해 주는 말이다.

 

그런데 당시에는 이같은 노략물로 군대를 유지하는 것이 보편적 이었다.

 

(삼상 27:8-9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올라가서 그술 족속과 게셀 족속과 아말렉 족속을 침략하였는데 그 민족들은 옛적부터 그 땅 곧 네가 수르로 갈 때에 이집트 땅에까지 이르는 땅의 거주민이었더라.

9) 다윗이 그 땅을 쳐서 남자나 여자나 살려 두지 아니하고 양과 소와 나귀와 낙타와 의복을 취하고 돌아와서 아기스에게 이르매).

 

 

 

[삼하 3:23] 요압과 그 함께 한 모든 군사가 돌아오매 혹이 요압에게 고하여 가로되 넬의 아들 아브넬이 왕에게 왔더니 왕이 보내매 저가 평안히 갔나이다

 

 

왕이 보내매 저가 평안히 갔나이다 - 다윗도 일전에 아브넬에게 죽임당한

아사헬과 같은 유다 지파이자, 더욱이 그의 외삼촌이었는 바,

 

(2:28 그리하여 요압이 나팔을 불매 온 백성이 가만히 서고 더 이상 이스라엘을 추격하지 아니하며 다시는 싸우지 아니하니라)

 

'피의 복수'를 할 의무가 있었다.

 

(14:7 그런데 보소서, 온 가족이 일어나 왕의 여종을 대적하여 말하기를, 자기 형제를 친 자를 넘겨주라. 그가 죽인 그의 형제의 생명을 위하여 우리가 그를 죽이고 또 그 상속자도 멸하리라, 하오니 이처럼 그들이 남아 있는 내 숯불을 꺼서 내 남편을 위하여 이름이나 남은 자를 땅 위에 남겨 두지 아니하려 하나이다, 하매;

 

35:19 피를 복수하는 자가 그 살인자를 직접 죽일지니 그가 그를 만나거든 죽일지니라)

 

 

그런데도 다윗이 아브넬을

그냥 돌려보냈다는 가시 돋친 의미를 담고 있는 말이다.

 

 

 

[삼하 3:24-25] 요압이 왕에게 나아가 가로되 어찌 하심이니이까 아브넬이 왕에게 나아왔거늘 어찌하여 저를 보내어 잘 가게 하셨나이까

25) 왕도 아시려니와 넬의 아들 아브넬의 온 것은 왕을 속임이라 왕의 출입하는 것을 알고 모든 하시는 것을 알려 함이니이다 하고

 

다윗이 아브넬과 모종의 협상을 체결한 후,

그를 평안히 보내준 데 대해 요압이 불평하는 장면이다.

이 불평은 표면상 다윗을 위하는 양 표현되었으나

실상 그가 불평한 이유를 보면 다음과 같다.

 

,

 

(1) 다윗이 중요한 협상에서 자기를 배제시킨 데서 느끼는 불쾌감,

(2) 다윗이 자기보다 아브넬을 신뢰하지나 않을까 하는 우려,

(3) 아사헬을 죽인 아브넬에 대한 복수심 등이다.

 

(2:23 그가 치우치기를 거절하므로 아브넬이 창 뒤끝으로 그의 다섯 번째 갈빗대 밑을 찌르니 창이 그의 등 뒤로 나가므로 그가 거기에 쓰러져 그 자리에서 죽으니라. 아사헬이 쓰러져 죽은 곳에 이른 많은 자들이 가만히 섰더라,

 

27 요압이 이르되, 하나님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네가 말을 하지 아니하였더라면 분명히 백성이 아침에 각각 자기 형제 쫓기를 그만두고 올라갔으리라, 하더라,

 

30 요압이 아브넬 쫓기를 그치고 돌아와서 온 백성을 함께 모으니 다윗의 신하들 가운데 열아홉 명과 아사헬이 없더라).

 

 

어찌하여 저를 보내어 잘 가게 하셨나이까 - 요압의 방자(放恣)함이

그대로 드러나 있는 장면이다.

즉 그는 마치 다윗이 국사(國事)를 진행함에 있어서

모든 일을 자신과 의논한 후에 처리했어야 했다는 투로 대들고 있는 것이다.

 

 

왕도 아시려니와 넬의 아들 아브넬의 온 것은 왕을 속임이라 요압은

아브넬의 방문 목적을 매도(罵倒)하기 위하여

먼저 아브넬의 인물 됨됨이에 대하여 다윗의 주의를 환기시킨다.

 

즉 요압은 다윗을 향해

'당신은 아브넬이라는 작자가 도대체 어떤 인간인지 모른단 말입니까?

그 자는 뻔한 놈입니다. 따라서 그가 온 이유 역시

당신을 속이기 위해 온 것이 틀림없습니다'라는 말을 한 것이다.

 

 

출입하는 것 - 이 말은 다음에 나오는

'모든 하시는 것'과 같은 의미의 관용어이다.

 

(28:6 네가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으리라;

 

31:2 그가 그들에게 이르되, 나는 이 날 백이십 세니라. 내가 더 이상 나가고 들어오지 못하겠고 주께서도 내게 말씀하시기를, 너는 이 요르단을 건너지 못하리라, 하셨느니라;

 

왕하 19:27 그러나 내가 너의 거처와 너의 나가고 들어오는 것과 네가 나를 향해 분노하는 것을 아노니;

 

121:8 주께서 너의 나가고 들어오는 것을 지금부터 영원토록 보존하시리로다)

 

 

 

[삼하 3:26] 이에 다윗에게서 나와서 사자들을 보내어 아브넬을 쫓아가게 하였더니 시라 우물가에서 저를 데리고 돌아왔으나 다윗은 알지 못하였더라

 

 

시라 우물 - 이곳이 어디인지에 대하여서는 두 가지 견해가 있다.

 

(1) 이곳은 헤브론 북방 약 4km 지점으로,

거기에는 대상(隊商)들을 위한 숙박 시설이 있었다는 견해이다(Josephus).

 

(2) 헤브론 서북방, 곧 예루살렘 방면으로 2. 4km 지점에 위치한

오늘날의 '아인 사라'(Ain Sarah)저수지라는 견해이다(R. Young).

 

이 두 견해 중 어느 것이 보다 정확한 것인지는 분명치 않다.

그러나 어쨌든간에 아브넬은

뜨거운 사막의 열기를 피하여 이곳에서 쉬면서,

행군하기에 알맞은 서늘한 저녁 때를 기다리다가

요압이 보낸 사자들을 만나게 되었을 것이다(Pulpit Commentary).

 

 

저를 데리고 돌아왔으나 - 요압이 다윗의 이름을 이용하여

아브넬을 데리고 왔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왜냐하면 아브넬은

일전에 요압의 아우 아사헬을 죽인 연고로 요압을 경계했을 것이다.

 

(2:22-23 아브넬이 다시 아사헬에게 이르되, 너는 치우쳐서 나를 쫓지 말라. 어찌하여 내가 너를 쳐서 땅에 쓰러지게 하겠느냐? 그리하면 내가 어떻게 네 형 요압에게 얼굴을 들겠느냐? 하되

23) 그가 치우치기를 거절하므로 아브넬이 창 뒤끝으로 그의 다섯 번째 갈빗대 밑을 찌르니 창이 그의 등 뒤로 나가므로 그가 거기에 쓰러져 그 자리에서 죽으니라. 아사헬이 쓰러져 죽은 곳에 이른 많은 자들이 가만히 섰더라).

 

그리하여 요압이 자신의 이름으로 그를 불렀을 경우

아브넬은 틀림없이 응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요압은 다윗이 미처 아브넬에게 못다한 말이 있는 것처럼 꾸며서

별다른 의심을 사지 않고 아브넬을 헤브론으로 소환했을 것이다.

(Keil & Delitzsch , Lange, Pulpit Commenta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