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dengol 2

다윗의 소위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하였더라

거듭난 삶 2021. 9. 13. 0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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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의 타락

 

사무엘하 11:

 

이새의 아들, 목양자인 다윗은,

이제 목적 이상의 목적을 달성하여, 왕위에 오르고,

그 백성에게 공도와 정의를 행하는 이상왕으로 되었다.

변경(邊境)은 모두 그 위덕에 복종하고,

백성은 그 통치를 기뻐하여,

여의치 않는 일 없이, 인생영화의 극에 달했다.

 

그렇지만 여기서 커다란 유혹은 그에게 임했다.

그것도 실로 사소한 동기에 의해 임했다.

영화에 따르는 유혹은,

어느 세상(세대)에도 면할 수 없는 것으로 보인다.

자세한 것은 사무엘하11장에 제기되어 있으므로,

독자는, 이것을 정독할 것이다.

 

그의 신복 및 이스라엘의 전군은,

왕을 위해 생명을 걸고 싸움터에 나가서,

랍바를 공위중이다.

 

이때, 다윗왕은, 어느 해질녘,

옥상을 산보 가다가, 출진중의 용사 우리아의 아름다운 아내가,

몸을 씻는 것을 보고, 마음이 불의로 산란해져,

마침내 말할 수 없는 누추한 죄악을 범했다.

 

그는 그 아내를 빼앗기 위해,

충신 우리아를 죽임에 있어서,

참으로 잔혹한 수단을 취했다.

 

그는 우리아를 싸움터에서 불러다가 죽이려했는데,

그 계획이 성취되지 못하여,

마침내 그 장군 요압에게 편지를 보내어,

우리아를 격전의 선봉이 되게 하여,

그를 전사케 하라고 명했다.

 

더욱이 이 편지를 다른 사람도 있을 것인데,

우리아 자신에게 들려 보낸 것이다.

 

 

참혹 가긍하다.

충의 일관(일철)의 용사 우리아.

자기 아내를 빼앗기 위해 죽이려는 편지인줄도 모르고,

왕에게 부름을 받아 수도로 돌아오기는 했지만,

진영에 있는 전사(戰士)의 노고를 생각하여,

자기 집으로 돌아가 쉬는 일 없이,

싸움터로 되돌아가,

자기가 살해될 편지를 장수 요압에게 건냈다.

 

노회(爐灰)영맹(英猛),

자비도 눈물도 없는 장군 저 요압은,

왕의 마음을 알아채면서,

간언(충언) 한마디도 않고 용사 우리아를 아까와 하는 기색도 없이

적의 칼에 쓰러뜨리게 했다.

 

그리고 전황보고의 사자에게,

왕이 만약 그 전황에 대하여 노를 발한다면,

당신의 종, 헷사람 우리아도 또한 죽었다는 뜻을 포함시켜 보낸

심사의 교회(교활)함이란, 타기(멸시)해야 할 바이다.

 

예상대로, 왕은 사자에게 명하여,

요압을 격려하도록,

 

‘(이 일로 걱정하지 말라)칼은 이 사람이나 저 사람이나 죽이느니라

그 성을 향하여 더욱 힘써 싸워 함락시키라(삼하11:25-)’고 말하게 했다.

 

세상에 이것보다 더한 잔인혹박(혹독박정)한 소행이 있을까?

증오할 대 죄악치고서 다윗이 범한 이죄에 비할 것이 있을까?

 

만약 괴테(1107p 참조), 혹은 실러 하여금 집필케 한다면,

이것만으로도 장편의 대 비극이 생겨나리라.

실로 그는 약간의 마음의 미혹으로,

인간이 범하는 죄 중 가장 크고도,

가장 누추한 것을,

가장 잔혹한 수단으로써 범한 것이다.

 

실로 비열하기 그지없다.

그렇지만 우리들이 감사해야 할 것은,

권위를 두려워하지 않고,

세상에 아부하지 않는 대 역사가 있어서,

이 이상왕의 대실패 대 죄악을 기록하는데,

그렇듯 명세를 다했다는 일이다.

 

우리나라에 있어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로,

역사가의 위대와 존엄은 여기에 있다.

 

다윗은 이미 이 대 죄악을 범하고,

우리아의 아내를 데려다 자기 처로 삼고,

남아를 낳았다고 있다.

 

그런데 두려워해야 할 것은,

 

‘() 다윗의 소위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하였더라(삼하11:27-)’

라는 한 구절이다.

 

실로 두려울진저!

여호와의 눈에 악하였기 때문에,

이후 다윗의 생애는,

곤란 비참의 연속이었고,

선지자 나단이 왕을 책하여 말한 대로,

 

칼이 네 집에 영영히 떠나지 아니(삼하12:10)’했던 것이다.

 

아들은 아들을 살상하고,

어버이의 칼은 가장 사랑하는 자식에게 가해지는

비참하기 그지없는 일이 있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또 이와 함께 다윗이 죄를 통회하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태도도,

자세히 명시되어있다.

 

다윗은 범한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떠난 자가 아니라,

죄의 값을 몸에 지고서 하나님께 용서를 빌며(진사하며),

더욱더 하나님께 매달렸던 것이다.

 

이 상황이 죄와 함께 명세히 기록되어 있다.

이것이 이렇듯 듣기에도 거북한

추악한 죄악을 기록한 글일지라도,

성서 된 까닭인 것이다.

 

이 대 극악죄를 범한 자가 용서받는 길이 우주에 있다면,

누구의 죄인들 용서 받지 못하랴!

 

이는 가장 추악한 간음죄에,

가장 추악한 살인죄를 아울러 범한 다윗을,

 

하나님은 특히 내가 택한 다윗이라 하시고,

혹은 내 종 다윗을 얻어,

이에 내 거룩한 기름을 부었다고 말씀하셨다.

 

이것이 만약 대 진리를 전하는 것이 아니라면,

대 이단이다.

그렇다.

이에 의해 우리들은 하나님과 사람과의 관계에 대하여,

대 진리를 배우는 것이다.

 

여기서 특기해야 할 것은,

선지자 나단이,

여호와의 명을 받고, 왕 앞에 나와,

비유(예화)로써 가증이 여길 죄를 범한 사람에 대해 말하여,

다윗 왕이 그 사람의 일을 크게 노하고,

그런 짓을 행한 자는 죽어야 할 것이라고 한 때에,

엄연히

당신이 그 사람이라(삼하12:7-)’,

조금도 용서하는 일 없이,

그 죄악을 힐책하여 주저치 않은 태도의 훌륭함이란,

신성스럽기 이만 저만이 아니다.

 

장한지고, 저 나단!

참으로 선지자로서 부족 없는 당당한 이스라엘 남자이다.

노희 장군 요압과 비교하여,

그 차이는 천연(천양지차)이상이다.

 

왕 앞에서 이것을 말할 수 있는 자는 실로 국보이다.

그는 실로 다윗 이상이었다.

이 사람 있어서,

이스라엘은 영원히 구원된 것이다.

 

*내촌감삼의 주석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