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dengol 2

이 죽은 개가 어찌 내 주 왕을 저주하리이까 청컨대 나로 건너가서 저의 머리를 베게 하소서

거듭난 삶 2021. 10. 26. 00:18
728x90

다윗의 안내

 

성 경: [삼하 16:9-14] 스루야의 아들 아비새가 왕께 여짜오되 이 죽은 개가 어찌 내 주 왕을 저주하리이까 청컨대 나로 건너가서 저의 머리를 베게 하소서

10) 왕이 가로되 스루야의 아들들아 내가 너희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저가 저주하는 것은 여호와께서 저에게 다윗을 저주하라 하심이니 네가 어찌 그리하였느냐 할 자가 누구겠느냐 하고

11) 또 아비새와 모든 신복에게 이르되 내 몸에서 난 아들도 내 생명을 해하려 하거든 하물며 이 베냐민 사람이랴 여호와께서 저에게 명하신 것이니 저로 저주하게 버려두라

12) 혹시 여호와께서 나의 원통함을 감찰하시리니 오늘날 그 저주 까닭에 선으로 내게 갚아 주시리라 하고

13) 다윗과 그 종자들이 길을 갈 때에 시므이는 산비탈로 따라가면서 저주하고 저를 향하여 돌을 던지며 티끌을 날리더라

14) 왕과 그 함께 있는 백성들이 다 곤비하여 한 곳에 이르러 거기서 쉬니라.

 

 

 

[삼하 16:9] 스루야의 아들 아비새가 왕께 여짜오되 이 죽은 개가 어찌 내 주 왕을 저주하리이까 청컨대 나로 건너가서 저의 머리를 베게 하소서

 

아비새 - 요압의 동생으로

 

(2:18 거기에 스루야의 세 아들 요압과 아비새와 아사헬이 있었는데 아사헬은 발이 들노루같이 가볍더라),

 

다윗 왕의 조카이자 그의 충성스런 신하이다.

 

(3:30 요압과 그의 동생 아비새가 이같이 아브넬을 죽였으니 이는 그가 기브온에서의 싸움에서 자기들의 동생 아사헬을 죽였기 때문이더라;

 

10:10 또 그가 백성의 남은 자들을 자기 동생 아비새의 손에 넘겨주어 그가 암몬 자손을 향해 전열을 갖추게 하고).

 

 

죽은 개 - 가장 보기 싫고 하찮은 인간을 뜻하는 히브리적 은어(隱語)이다.

 

(3:8 그때에 아브넬이 이스보셋의 말로 인해 심히 노하여 이르되, 내가 개의 머리냐? 내가 유다를 대적하고 이 날 당신의 아버지 사울의 집과 그의 형제들과 그의 친구들에게 친절을 베풀고 당신을 다윗의 손에 넘겨주지 아니하였거늘 당신이 오늘 이 여인에 대한 허물로 나를 비난하는도다;

 

9:8 그가 절하여 이르되, 주의 종이 무엇이기에 왕께서 나같이 죽은 개를 돌아보시나이까? 하니라).

 

 

 

[삼하 16:10] 왕이 가로되 스루야의 아들들아 내가 너희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저가 저주하는 것은 여호와께서 저에게 다윗을 저주하라 하심이니 네가 어찌 그리하였느냐 할 자가 누구겠느냐 하고

 

스루야의 아들들아 - 스루야(Zeruiah))는 아비새의 어미이다.

 

(2:18 거기에 스루야의 세 아들 요압과 아비새와 아사헬이 있었는데 아사헬은 발이 들노루같이 가볍더라).

 

그런데 여기서 '아들들'이란 복수(plural number)로 보아

아비새 곁에는 그의 형 요압도 함께 있었던 것에 분명하다.

요압은 아마도 시므이를 단칼에 목 베어 버리자는 아비새의 의견을 지지했을 것이다.

 

(9절 이에 스루야의 아들 아비새가 왕께 이르되, 이 죽은 개가 어찌 내 주 왕을 저주하리이까? 원하건대 내가 건너가서 그의 머리를 베게 하소서, 하매)

 

 

내가 너희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 아비새의 제의(9)를 일축해 버리는 말로서,

 

'나의 생각과 너희의 생각은 본질적으로 다르다'

함축적 의미를 가진다.

 

(왕상 17:18 그녀가 엘리야에게 이르되, 오 하나님의 사람이여, 내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당신이 내 죄를 생각나게 하고 또 내 아들을 죽게 하려고 내게 오셨나이까? 하매;

 

22:24 우리가 그 일을 행한 것은 우리가 이르기를, 이후에 너희 자손이 우리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되, 너희가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과 무슨 상관이 있느냐?).

 

 

여호와께서 저에게 다윗을 저주하라 하심이니 - 시므이의 악독한 저주를

신앙 안에서 받아들이는 다윗의 모습이다.

 

즉 다윗은 압살롬의 반역은 물론 시므이의 저주까지 포함하여,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런의 모든 사건들이 결코 우연한 것이 아니라

과거에 저질렀던 그의 용서받지 못할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임을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12:10-12 네가 나를 업신여기고 헷 족속 우리야의 아내를 빼앗아 네 아내로 삼았은즉 이제 그런 까닭에 칼이 네 집에서 결코 떠나지 아니하리라.

11) 주가 이같이 말하노라. 보라, 내가 네 집에서 너를 대적하는 재앙을 일으키고 내가 네 아내들을 네 눈앞에서 가져다가 네 이웃에게 주리니 이 해가 보는 데서 그가 네 아내들과 함께 누우리라.

12) 너는 그 일을 은밀히 행하였으나 나는 이스라엘 앞에서 해 앞에서 이 일을 행하리라, 하매)

 

따라서 이 상황에서 다윗은 자기를 괴롭히는 어느 누구에 대해서도

보복하거나 불평하기 보다는,

자신을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 마땅한 죄인으로 여기고

철저히 근신(謹愼)하는 자세를 취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분명 과거 실수한 자리에서 벗어나,

이제 인간에게 당하는 억울함 보다는

하나님 앞에서 저질렀던

자기의 추악한 죄를 먼저 생각하는

다윗의 새로운 신앙 자세가 아닐 수 없다.

 

 

 

[삼하 16:11] 또 아비새와 모든 신복에게 이르되 내 몸에서 난 아들도 내 생명을 해하려 하거든 하물며 이 베냐민 사람이랴 여호와께서 저에게 명하신 것이니 저로 저주하게 버려두라

 

내 몸에서 난 아들도 내 생명을 해하려 하거든 하물며 이 베냐민 사람이랴 이는

시므이의 저주 역시 하나님의 징계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다윗의 역설(力說)이다.

 

즉 자신의 아들 압살롬도 자신에게 반기(反旗)를 들었는데

 

(15:10-12 그러나 압살롬이 정탐꾼들을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들에게 두루 보내어 이르되, 너희는 나팔 소리를 듣거든 곧 말하기를, 압살롬이 헤브론에서 통치한다, 하라, 하니라.

11) 그때에 초청 받은 이백 명이 예루살렘에서 나와 압살롬과 함께 갔는데 그들은 단순히 가고 아무것도 알지 못하였더라.

12) 압살롬이 희생물을 드릴 때에 사람을 보내어 다윗의 조언자인 길로 사람 아히도벨을 그의 도시 곧 길로에서 청하여 오니라. 압살롬과 함께하는 백성이 계속해서 불어났으므로 그 음모가 커졌더라),

 

하물며 다른 지파 출신인 시므이가

자신에게 저주의 말 한 마디 쯤이야

하나님의 징계치고는 대수로운 것이 아니지 않겠느냐는 반문이다.

 

 

 

[삼하 16:12] 혹시 여호와께서 나의 원통함을 감찰하시리니 오늘날 그 저주 까닭에 선으로 내게 갚아 주시리라 하고

 

나의 원통함을 감찰하시리니 오늘날 그 저주 까닭에 선으로 내게 갚아주시리라 -

 

다윗이 하나님의 자비를 바라고 있는 본 구절에는

'원통함''저주'라는 용어가 서로 대조되고 있다.

 

이 중 '원통함'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아인'

, 사악한 행동을 의미하는 말로서

여기서는 과거 다윗이 실제로 범했던 죄(11)를 의미한다.

 

반면, '저주'

시므이가 다윗에게 행한 저주를 의미하는 바,

곧 다윗이 사울가의 어느 누구도 죽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사울가의 피를 흘린 자라는 저주를 받은 것을 가리킨다.

 

(7-8절 시므이가 저주하며 이같이 말하니라. 너 피를 흘리는 자여, 너 벨리알의 사람이여, 가거라, 가거라.

8) 주께서 사울의 집의 모든 피를 네게로 되돌리셨도다. 그를 대신하여 네가 통치하였으나 주께서 왕국을 네 아들 압살롬의 손에 넘겨주셨도다. 보라, 너는 피를 흘리는 자이므로 네 재난 속에 네가 빠졌느니라, 하니라)

 

따라서 다윗은 자기가 이러한 수욕(受辱)을 묵묵히 감수하다 보면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가해진 과다한 저주를 기억하셔서

자기를 궁휼히 여겨 주실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다윗이 현재 자기의 억울한 형편을

정확히 살펴보시는 하나님을 믿으며,

또한 일정한 징계의 기간이 지나면 하나님께서 자기를

이 위기 가운데서 구원해 주실 것이라는 강한 확신을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삼하 16:13] 다윗과 그 종자들이 길을 갈 때에 시므이는 산비탈로 따라가면서 저주하고 저를 향하여 돌을 던지며 티끌을 날리더라

 

저를 향하여 돌을 던지며 티끌을 날리더라 - 여기서 '티끌을 날리다'는 말은

'먼지를 일으키다'는 뜻이다.

 

즉 시므이는 다윗 앞서 행하면서 다윗을 모독하는 의미로

짐짓 그 앞길에 먼지를 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분명 그 흙먼지는 다윗은 물론

시므이 그 자신의 머리 위에도 덮였을 것이다.

 

이와 관련 우리는 시므이가 다윗에게 퍼부은 저주 역시

흙먼지와 같은 성격을 지닌다는 사실에 유념해야 한다.

 

즉 그것은 시므이가 다윗에게 퍼부은 저주가 합당치 아니한 것일 때

그 저주는 도리어 저주를 발했던 시므이에게로 되돌아갈 뿐이란 사실이다.

 

(12절 혹시 주께서 내 고통을 보시리니 이 날 그의 저주로 인해 주께서 내게 선으로 갚아 주시리라, 하니라).

 

(17:1-6 에브라임 산에 미가라는 이름의 한 사람이 있더라.

2) 그가 자기 어머니에게 이르되, 어머니가 잃어버린 은 천백 세겔에 관하여 어머니께서 저주하시고 내 귀에도 그것에 관하여 말씀하셨사온데, 보소서, 그 은이 내게 있나이다. 내가 그것을 취하였나이다, 하니 그의 어머니가 이르되, 내 아들아, 주께서 네게 복 주시기를 원하노라, 하니라.

3) 미가가 은 천백 세겔을 자기 어머니에게 도로 주매 그의 어머니가 이르되, 내가 내 아들을 위하여 새긴 형상과 부어 만든 형상을 만들려고 이미 내 손에서 이 은을 주께 온전히 봉헌하였노라. 그러므로 내가 이제 이 은을 네게 도로 주리라, 하니라.

4) 그러나 미가가 그 돈을 자기 어머니에게 도로 주므로 그의 어머니가 은 이백 세겔을 취하여 주물공에게 주매 그가 새긴 형상과 부어 만든 형상을 만드니 그 형상들이 미가의 집에 있더라.

5) 이 사람 미가는 신들을 섬기기 위한 집을 가지고 있었으며 에봇과 드라빔을 만들었고 자기 아들들 중에서 하나를 구분하여 자기 제사장으로 삼았더라.

6) 그때에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으므로 사람마다 자기 눈에 옳은 것을 행하였더라).

 

 

 

[삼하 16:14] 왕과 그 함께 있는 백성들이 다 곤비하여 한 곳에 이르러 거기서 쉬니라.

 

곤비하여 - 이 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아예핌'

'피곤하다'는 뜻의 동사 '아이프'의 형용사형으로,

'피곤하여'라고 해석할 수 있는 단어이다(KJV).

 

그런데 혹자는 '아예핌'이 여기서는 지명(地名)을 가리키는

고유 명사로 사용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그들은 그 근거로 본절에서 '' 이라고 하는

지시 부사가 사용되었음을 든다.

 

즉 이 ''이란 용어는 '거기에서'란 뜻으로,

다윗과 그 일행이 휴식을 취한 한 장소를 지시하고 있다는 주장이다.

(Keil, Lange, Pulpit Commentary, The Interpreter's Bible).

 

이 중 어느 견해가 보다 타당한지는 판단키 어렵다.

그러나 둘 중 어느 쪽을 취하여도 문맥에 큰 변동은 없다.

 

다만 '아예핌'을 고유 명사로 볼 경우, 17:18, 21에 의거할 때

 

(17:18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아이가 그들을 보고 압살롬에게 고하였으나 그 두 사람이 빨리 도망하여 바후림에 있던 어떤 사람의 집으로 들어가 그의 뜰에 있던 우물 속으로 내려가니,

 

21 그들이 떠나간 뒤에 그들이 우물에서 올라와 가서 다윗 왕에게 고하고 다윗에게 이르되, 일어나 빨리 물을 건너가소서. 아히도벨이 당신들을 치려고 이같이 계략을 베풀었나이다, 하매)

 

'아예핌'은 바후림을 지나 요단 강 근처에 위치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곳이 정확히 어디에 위치했는지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