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의 신이 나를 빙자하여 말씀하심이여 그 말씀이 내 혀에 있도다
다윗의 신앙 고백
성 경: [삼하 23:1-3] 이는 다윗의 마지막 말이라 이새의 아들 다윗이 말함이여 높이 올리운 자, 야곱의 하나님에게 기름 부음 받은자 이스라엘의 노래 잘하는 자가 말하도다
2) 여호와의 신이 나를 빙자하여 말씀하심이여 그 말씀이 내 혀에 있도다
3)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말씀하시며 이스라엘의 바위가 내게 이르시기를 사람을 공의로 다스리는 자,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다스리는 자여,
[삼하 23:1] 이는 다윗의 마지막 말이라 이새의 아들 다윗이 말함이여 높이 올리운 자, 야곱의 하나님에게 기름 부음 받은자 이스라엘의 노래 잘하는 자가 말하도다
▶ 이는 다윗의 마지막 말이라 - 본장의 노래는 22장의
다윗의 시(詩) 다음에 배열되어 있지만,
이 두 시는 시기적으로 각기 다른 시간대에 저작되었다.
즉, 22장의 시는 다윗이 주변의 이방 국가들을 정복한 직후,
곧 그의 이스라엘 통치 초기에 저작된 것인 반면
(22:1 주께서 다윗을 그의 모든 원수들의 손과 사울의 손에서 구해 내신 그 날에, 다윗이 이 노랫말을 주께 고하여),
본장의 시는 모든 역경과 좌절을 맛본 다윗 통치 말년,
곧 다윗이 자신의 죽음을 눈앞에 두고 저작한 시이다.
(Thenius, Lange, Hertzberg, Payne).
곧 전장의 시가 노래의 활기찬 흐름으로 보아 다윗의 최전성기에 기록되었다면,
본장은 그의 인생을 마감하던 때 곧 범죄 이후
하나님의 공의로우신 섭리와 그와 동시에 베풀어지는
그분의 사랑에 감격했던 상황을 기록한 것이다.
특히 이 고백적 찬양은
단순한 다윗 개인의 신앙과 감사를 다룬 것이 아니라,
미래에 완성될 공의로운 메시야 왕국을 예언했다는 점에서
'선지자적 찬양'이라 일컬어지기도 한다.
이런 점에서 본 시를 22장과 연결시켜
같은 종류의 감사시로 보는 카일(Keil)의 입장은 받아들일 수 없다.
결국 본시는 22장의 감사시와는 성격상 다른 것으로서,
모세가 죽기 전에 축복의 시를 지었듯이(신 33장)
다윗이 임종하기 전에 그의 마지막 소원을 노래한 것이다(Hertzberg).
그러나 그 소원은 다윗의 개인적인 소원이라기 보다는
성령에 의해 감동된 '메시야적 소원'으로서,
나단 선지자를 통해 베푸신 '다윗 언약'에 기초한 소원이었다.
(7:8-16 그러므로 이제 너는 내 종 다윗에게 말할지니라. '만군의 주께서 이같이 말하노라. 내가 너를 양 무리에서, 양을 따르는 데서 데려와 내 백성 이스라엘을 다스릴 치리자로 삼았느니라.
9) 나는 네가 가는 곳마다 너와 함께 있었고, 네 눈 앞에서 네 모든 원수를 너와 단절케 하였으며, 너를 세상에 사는 위대한 사람들의 이름과 같이 위대한 이름으로 만들었도다.
10) 또 내가 내 백성 이스라엘을 위하여 한 곳을 정하여 그들을 심을 것이며, 그들로 자기들의 장소에 거하게 하여 다시는 옮기지 않게 할 것이요, 악의 자손들이 전처럼 다시는 그들을 괴롭히지 못하게 하리라.
11) 내가 재판관들을 명하여 내 백성 이스라엘을 다스리게 한 이후처럼 내가 너를 너의 모든 원수들로부터 쉬게 하였노라. 주가 네게 말하노니, 그가 너를 위하여 한 집을 이루리라.
12) 네 연수가 차서 네가 네 조상들과 함께 잠들 때, 내가 네 몸에서 나올 네 씨를 네 뒤에 세우고, 그의 왕국을 견고하게 하리라.
13)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한 집을 세울 것이요, 내가 그의 왕국의 보좌를 영원히 견고하게 하리라.
14) 나는 그의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나의 아들이 되리니, 만일 그가 죄악을 범하면 내가 사람의 막대기로 그를 징책하고 사람의 자식의 채찍으로 징책하리라.
15) 그러나 내가 네 앞에서 제거한 사울로부터 나의 자비를 빼앗은 것과 같이, 그것이 그에게서 떠나지는 아니하리니
16) 네 집과 네 왕국이 네 앞에서 영원히 서리라. 네 보좌가 영원히 서리라.' 하라." 하시더라)
▶ 이새의 아들 다윗이 말함이여 - 여기서 다윗은 자신을 '이새의 아들'로 소개하고 있다.
그런데 '이새의 아들'이란 호칭은 사울 왕이 다윗을 비꼬아 말할 때,
나발이 다윗을 비난할 때,
그리고 세바가 다윗을 대항하여 난을 일으켰을 때
각기 사용한 호칭이었다.
(20:1 그때 거기에 한 벨리알의 사람이 있었으니, 베냐민인 비크리의 아들로 그의 이름은 시바더라. 그가 나팔을 불고 말하기를 "우리는 다윗에게 몫도 없고 이새의 아들 안에 유업도 없으니, 오 이스라엘아, 각자 자기 장막으로 돌아가라." 하더라;
삼상 20:30 그러자 사울의 분노가 요나단에게 발하니, 사울이 요나단에게 말하기를 "너 변절하고 반역한 여자의 자식아, 네가 이새의 아들을 택하여 네 자신의 수치와 네 어미의 벌거벗은 수치가 되게 한 것을 내가 알지 못하겠느냐?;
25:10 나발이 다윗의 종들에게 대답하여 말하기를 "다윗이 누구이며 이새의 아들이 누구냐? 요즈음은 자기 주인에게서 떨어져 나간 종들이 많도다).
따라서 다윗에게 있어서 '이새의 아들'이란 호칭은
'이스라엘의 왕'이란 호칭과는 대비되는 호칭으로서,
결코 명예로운 것이 아니었으며
오히려 그의 보잘것없음과 비천함을 드러내는 호칭이었다.
따라서 다윗은 이 거룩한 노래를 시작함에 있어서,
자신의 어떠한 자랑거리도 나타내지 아니함으로써
오직 거룩한 하나님의 영광만을 드러내려고 이 호칭을 사용했던 것이다.
한편, 그리고 여기서 '말함이여'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네움'은
특별히 하나님께로부터 직접 받은 말씀과 관련된 말이다.
즉, 이 말은
선지자가 그의 메시지를 전하기 전에 갖추었던 서론적 형식인
'여호와의 말이니라'에 사용되었던 용어이다.
우리는 이와 같은 사실을 통해 이 시가 단순한 서정시가 아니라,
성령의 감동을 받은 다윗이 하나님의 메시지를
시적 형태로 전달한 것임을 알 수 있다(Keil, Pulpit Commentary).
▶ 높이 올리운 자, 야곱의 하나님에게 기름 부음 받은 자 - 다윗은 본래
양치는 미천한 목동이었으나,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께 선택되어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왕으로 기름 부음 받아 크게 높아진 자가 되었다는 뜻이다.
(22:34 그가 나의 발을 암사슴의 발 같게 하시며, 나를 나의 높은 곳에 세우시는도다,
44 주께서 또 내 백성의 다툼에서 나를 구해 주셨고, 주께서 나를 지켜 이방의 머리가 되게 하셨으니, 내가 알지 못하는 백성이 나를 섬기리이다).
▶ 이스라엘의 노래 잘하는 자 - 실제 다윗은 양치는 소년 시절부터
악기 잘 타는 자로 이스라엘에서 소문이 나 있었기 때문에,
사울 왕궁의 수금 연주자로도 활동했었다.
(삼상 16:16 이제 우리 주는 당신 앞에 있는 종들에게 명하여 하프를 잘타는 사람을 찾게 하소서. 하나님으로부터 온 악령이 왕에게 임할 때 그가 그의 손으로 하프를 타면 왕께서 나으시리이다." 하니,
19 그러므로 사울이 사자들을 이새에게 보내어 말하기를 "양치는 네 아들 다윗을 내게로 보내라." 하니,
23 그러므로 하나님으로부터 온 악령이 사울에게 임하면 다윗이 하프를 들고 그의 손으로 하프를 탔으니, 그렇게 하면 사울이 힘을 얻고 나았으며 악령이 그에게서 떠나더라).
그러나 여기서 '노래'는 세속적인 음악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찬송을 의미한다.
(시 81:3 새 달과 정해진 때, 곧 우리의 엄숙한 명절날에 나팔을 불지니;
98:5 하프로 주께 노래하라. 하프로, 또 시를 말하며 노래하라).
한편 다윗의 이러한 서언은
이전에 발람이 이스라엘과 열방의 미래에 대해 하나님의 메시지를 선포할 때
그 예언 초두에 도입한 서언과 유사하다.
(민 24:3-4 그가 그의 비유를 지어 말하기를 "브올의 아들 발라암이 말하며, 눈을 뜬 자가 말하였나니
4) 하나님의 말씀들을 듣는 자, 전능하신 분의 환상을 본 자, 무아지경에 빠졌으나 자기 눈을 뜬 자가 말하였도다).
이로 볼 때 다윗 역시 선지자적 입장에서 자신의 노래를
미래적 차원으로 승화시키고자 시도한 것임을 알 수 있다(Keil, Fay).
[삼하 23:2] 여호와의 신이 나를 빙자하여 말씀하심이여 그 말씀이 내 혀에 있도다
▶ 여호와의 신이 나를 빙자하여 말씀하심이여 – 여기서
'나를 빙자하여 말씀하심이여'란 말을 직역하면,
'내 안에서 말씀하셨다'는 뜻이다.
즉, 이 구절은 본시를 읊기 바로 직전에
하나님의 영에게 감동된 상황을 설명하는 말이다(Keil).
그러므로 여기서 다윗은 자신의 시가 사적 감정에 의한 노래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에 의해 주장받은 계시적 성격의 노래임을 분명히 밝힌 것이다.
▶ 그 말씀이 내 혀에 있도다 - 이는 다윗이 자신의 입술을 주장하는 주체가
자신의 감정이나 의지가 아니라, 여호와의 신 곧 성령임을 고백한 말이다.
즉 지금 자신이 성령의 완전한 지배하에 있음을 고백한 말이다.
이와같은 성령의 완전한 지배를 '성령 충만'이라 부른다.
(엡 5:18-19 술취하지 말라. 그것은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하라.
19) 시와 찬송과 영적인 노래들을 지어 말하고, 너희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아름다운 곡조를 만들고).
그러므로 이것은 다윗의 노래가 신적(神的) 권위를 가질 수 있는
유일한 근거요 충분한 조건이다.
[삼하 23:3]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말씀하시며 이스라엘의 바위가 내게 이르시기를 사람을 공의로 다스리는 자,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다스리는 자여
▶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말씀하시며 - 이는 참된 선지자들이
그들의 메시지를 전하기 전에 취했던 서론적 형식과 일치하는 말이다.
따라서 이 구절은 여기 소개되는 다윗의 노래의 기원이
하나님이심을 밝혀 주는 구절이다.
한편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란
이스라엘을 애굽의 종살이에서 건지시고 그들을 바로의 압제하에서 구원하신
선민의 하나님이란 뜻으로,
당신의 백성과 맺으신 언약을 신실히 이행하시는
하나님의 구속 사역을 강조하는 호칭이다.
다윗이 이 시에서 특별히 이 호칭을 사용한 것은 본시가 하나님의
구속 사역의 주인공이신 의로운 통치자 메시야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 이스라엘의 바위 - 이 역시 하나님에 대한 비유적 호칭으로서,
(22:3 내 반석의 하나님, 그 분을 내가 신뢰하리라. 그는 나의 방패시요, 내 구원의 뿔이시며, 나의 높은 망대시요, 나의 피난처시요, 나의 구주시라. 주께서 나를 폭력으로부터 구원해 주시나이다,
47 주는 살아 계시오니, 내 반석을 송축하며 내 구원의 반석의 하나님을 드높일지어다),
흔들림 없는 하나님의 불변성(不變性)을 강조하는 말이다.
실로 하나님은 거대한 바위 덩어리 같이 영구히 변하지 않으시는 분으로서,
'바위'(추르)와 같은 속성을 지니신다.
(22:3 내 반석의 하나님, 그 분을 내가 신뢰하리라. 그는 나의 방패시요, 내 구원의 뿔이시며, 나의 높은 망대시요, 나의 피난처시요, 나의 구주시라. 주께서 나를 폭력으로부터 구원해 주시나이다).
그러므로 본시는 다윗 언약에 기초한 확신의 시로서,
(7:8-16 그러므로 이제 너는 내 종 다윗에게 말할지니라. '만군의 주께서 이같이 말하노라. 내가 너를 양 무리에서, 양을 따르는 데서 데려와 내 백성 이스라엘을 다스릴 치리자로 삼았느니라.
9) 나는 네가 가는 곳마다 너와 함께 있었고, 네 눈 앞에서 네 모든 원수를 너와 단절케 하였으며, 너를 세상에 사는 위대한 사람들의 이름과 같이 위대한 이름으로 만들었도다.
10) 또 내가 내 백성 이스라엘을 위하여 한 곳을 정하여 그들을 심을 것이며, 그들로 자기들의 장소에 거하게 하여 다시는 옮기지 않게 할 것이요, 악의 자손들이 전처럼 다시는 그들을 괴롭히지 못하게 하리라.
11) 내가 재판관들을 명하여 내 백성 이스라엘을 다스리게 한 이후처럼 내가 너를 너의 모든 원수들로부터 쉬게 하였노라. 주가 네게 말하노니, 그가 너를 위하여 한 집을 이루리라.
12) 네 연수가 차서 네가 네 조상들과 함께 잠들 때, 내가 네 몸에서 나올 네 씨를 네 뒤에 세우고, 그의 왕국을 견고하게 하리라.
13)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한 집을 세울 것이요, 내가 그의 왕국의 보좌를 영원히 견고하게 하리라.
14) 나는 그의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나의 아들이 되리니, 만일 그가 죄악을 범하면 내가 사람의 막대기로 그를 징책하고 사람의 자식의 채찍으로 징책하리라.
15) 그러나 내가 네 앞에서 제거한 사울로부터 나의 자비를 빼앗은 것과 같이, 그것이 그에게서 떠나지는 아니하리니
16) 네 집과 네 왕국이 네 앞에서 영원히 서리라. 네 보좌가 영원히 서리라.' 하라." 하시더라)
한번 약속하신 사실을 결코 변개치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불변성, 또는 신실성을 강조하고 있다.
▶ 사람을 공의로 다스리는 자,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다스리는 자여 – 이는
이상적(理想的)인 신정 국가의 왕의 자세를 보여 주는 구절로서
일차적으로는 다윗 자신을,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메시야'(the Messiah)를 가리킨다.
즉 신정 국가의 이상적인 왕은
인간 사회에 대해서는 정의롭고,
(렘 23:5 주가 말하노라. 보라, 그 날들이 오리니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키리니 한 왕이 치리하고 번성하여 지상에서 심판과 정의를 실행하리라;
33:15 내가 그 날들, 그리고 그 때에 의로운 가지를 다윗에게 자라게 하리니, 그가 이 땅에 심판과 의를 실행하리라),
하나님을 향해서는 경외심을 갖춘,
(시 7:8 주께서 그 백성을 심판하시리니, 오 주여, 나의 의를 따라, 내 안에 있는 나의 성실함을 따라 나를 판단하소서)
바로 그러한 신앙 인격자라야 했다.
다윗 왕은 바로 이러한 이상적인 신정 국가의 왕이었다.
그는 백성을 공의로 다스렸으며 하나님을 경외하였다.
따라서 다윗은 역대 유다 왕들을 하나님께서 판단하실 때
그 기준(基準)이 되었다.
(왕하 14:3 아마샤가 그의 조상 다윗과 같지는 않았으나 주의 목전에 옳은 것을 행하였으니, 그의 아버지 요아스가 행한 모든 것을 따라 행하였더라;
18:3 그가 그의 조상 다윗이 행한 모든 것들 따라 주의 목전에 옳은 것을 행하였더라;
22:2 그가 주의 목전에 옳은 것을 행하며 그의 조상 다윗의 모든 길로 행하여 오른편으로나 왼편으로 치우치지 아니하였더라).
이런 점에서 다윗은 그리스도의 그림자였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여기에 묘사된 이상적인
신정 국가의 왕은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진정 예수 그리스도는 종교. 도덕적으로 무흠하신 분으로서,
모든 인류를 공의로 판단하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한 참된 의미에서의 이상적인 왕이신 것이다.
(시 2:1-2 어찌하여 이방이 분노하며 백성들이 헛된 것을 꾀하는가?
2) 땅의 왕들이 나서고 치리자들이 서로 의논하여 주와 그의 기름 부음 받은 이를 대적하여 말하기를;
겔 34:23-24 내가 한 목자를 그들 위에 세우면 그가 그들을 먹이리니, 곧 나의 종 다윗이라. 그가 그들을 먹일 것이요, 그가 그들의 목자가 되리라.
24) 나 주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내 종 다윗은 그들 가운데 통치자가 되리라. 나 주가 그것을 말하였노라;
사 11:3-5 주를 두려워하는 가운데 그를 속히 명철케 하리니, 그는 자기 눈으로 보는 대로 판단하지 아니하고 귀로 듣는 대로 책망하지도 아니하나
4) 가난한 자를 의로 판단하며 세상의 온유한 자를 위해서는 정직으로 책망하리라. 또 그는 그의 입의 막대기로 세상을 치고 자기 입술의 호흡으로 악인을 죽일 것이라.
5) 의가 그의 허리띠가 되며, 신실함이 그의 옆구리의 띠가 될 것이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