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가 어찌하여 더 많이 맞으려 하느냐? 너희가 더욱더 반역하려 하는도다
죄의 본원
이사야서 1장 2-9절 : 오 하늘들이여, 들으라. 오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자식들을 먹이고 키웠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
3) 소도 자기 주인을 알며 나귀도 자기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며 내 백성은 깊이 생각하지 못하는도다, 하셨도다.
4) 아, 죄 많은 민족이요, 불법을 짊어진 백성이요, 악을 행하는 자들의 씨요, 부패시키는 자식들이로다. 그들이 주를 버리고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의 분노를 일으키며 뒤로 갔도다.
5) 너희가 어찌하여 더 많이 맞으려 하느냐? 너희가 더욱더 반역하려 하는도다. 온 머리는 병들었고 온 마음은 기진하였으며
6) 발바닥에서부터 머리끝까지 그 안에 성한 곳이 없이 상한 것과 멍든 것과 곪은 종기뿐이거늘 그것들을 꿰매고 싸매고 향유를 발라 아픔을 달래지 못하였도다.
7) 너희의 나라는 황폐하게 되고 너희의 도시들은 불에 탔으며 너희의 땅은 너희 앞에서 낯선 자들이 삼키매 낯선 자들이 뒤엎은 것 같이 황폐하게 되었고
8) 시온의 딸은 포도원의 원두막같이, 오이 밭의 오두막같이, 포위당한 도시같이 남게 되었도다.
9) 만군의 주께서 우리를 위하여 아주 소수의 남은 자를 남겨 두지 아니하셨더라면 우리가 소돔같이 되고 고모라같이 되었으리로다.(한글KJV)
율법이라든가,
예언, 복음 등 운위하는 것,
그 목적은 하나로, 사람을 죄에서 구함에 있다.
죄를 책함은 죄를 알게 하렴에서이다.
그리고 죄를 알게 하기 위해
죄의 본원을 보여주지 않으면 안 된다.
죄는 단순히 과오는 아니다.
또 흠(결점)은 아니다.
세상의 소위 죄란,
죄의 결과이지, 죄 그것은 아니다.
이사야서가 죄의 본원의 지적으로써 시작함은,
이 글(책)에 가장 적절한 것이다.
예언자(선지자)는 여호와를 대신하여,
이스라엘을 송사하여 이르기를
'내가 자식을 기르고 키웠는데, 그들은 나를 거역했도다'(일역)라고.
아버지가 그 자식을 송사하는 말이다.
이스라엘은 그 아버지 여호와에게 불효의 죄를 범했다고 한다.
죄는 많다 고 하지만
최대의 죄는 불효의 죄이다.
자식을 가져보고 깨닫는
어버이(부모)의 은혜라고 한다.
참으로 그런 것이다.
한 자식을 키워 내는 어버이의 고생걱정,
이루 다 말할 수가 없다.
그리고 그 어버이에게 거역할 때,
자식은 최대의 죄를 범하는 것이다.
실로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이다.
만약 자식이,
어버이(부모)가 자기를 위해 다한 심노신고(心勞辛苦)를 안다면,
이에 거역할 리가 없다.
사람인 어버이에 있어서 그러하다.
하물며 하나님이신 어버이에 있어서랴!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노력은 실로 절대하셨다.
근세 과학은 잘 그것을 보여준다.
소위 진화의 과정이 그것이다.
지구의 역사, 생물의 역사, 인류의 역사가 그것을 분명히 한다.
사람은 쉽게 이룩된 것 아니다.
억만년의 하나님의 신고로 이룩된 것이다.
만물의 영장이라 함은,
조화의 최후의 작이라 함이다.
그것이 하나님께 거역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실망, 탄식, 실로 비할 수 없는 것이다.
사람인 부모의 탄식 형언키 어려운데,
하나님이신 아버지의 탄식은 특별하다.
하나님에게도 견디기 어려운 탄식이 있다.
어버이(부모)가 그 자식의 배반을 당한 때의 탄식에 천만배한 탄식이다.
생각하는 것마저 두려운 바가 있다.
이스라엘은, 이 죄를 범한 것이다.
그리고 인류 전체가, 지금도 이 죄를 범하고 있다.
나도, 당신도, 이 죄를 범한 것이다.
소는 그 소유주를 알고,
나귀는 그 주인이 주는 구유(그릇)를 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모른다.
여호와의 백성은 깨닫지 못한다.
금수 역시 은혜를 안다.
하물며 사람에 있어서랴!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고
은혜를 모르는 일에 있어서 사람은 금수보다 못한 것이다.
사람은 무신을 주창하면서 부끄러워 않는다.
하나님에 대한 불효는 그 상성이다.
실로 놀랄 것 밖에 없다.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 이다.
그리고 하나님을 만홀(경홀)히 여기고,
그를 버린 결과는 어떤가?
'온 머리는 병들었고 온 마음은 피곤하였으며
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성한 곳이 없이'된 형편이다.
그 본체(중심부)가 앓는 때,
그 일부(지체)가 앓지 않는 일이 없다.
실로 당연하다.
이스라엘은 여호와를 버리고,
그 거룩하신 자를 업신여겨,
그와 이절했으므로,
이 가증이 여길 상태에 이른 것이다.
그리고 다만 이스라엘에 한하지 않는다.
어떠한 사람도, 사회도, 국가도,
그 조물주이신 하나님을 떠날 때,
이에 이르지 않는 일 없다.
부패, 타락 등, 외부의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 대한 불효의 결과이다.
정치가 및 사회 개량가의 잘못은 여기에 있다.
그들은 죄의 본원에 손대지 않고,
그 표면을 교정하고자 하는 까닭에,
그 목적을 이루지 못하는 것이다.
불효자식에 행복은 오지 않고,
불신의 도배에게 평화는 임하지 않는다.
사람을 근본적으로 고치려고 하면,
그에게 참된 종교를 주지 않으면 안 된다.
서양 속담에 이르기를
Be right with God and all will be right.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들어가라. 그리하면 만사 가하리라)고.
종교는 죄의 본원을 없이하는 길이다.
사람의 하나님에 대한(하나님에 대한 사람의) 반역을 고쳐,
그의 전부를 선히 하는 길이다.
이에 이르러 안다.
그 근본정신에 있어서, 그리스도교와 유교는 다른 바 없음을.
유교의 본원은 효도에 있어서이다.
이르기를
'무릇 효도는 덕의 근본이다. 제 부모를 사랑하는 자는 감히 남을 미워하지 못하고,
제 부모를 공경하는 자는 감히 남을 멸시하지 못한다.
사랑하고 공경하는 마음을 다하면 덕스러운 가르침이
백성들에게까지 미쳐서 천하가 본받게 될 것이다. '(효경)
즉, 효하면 충 또는 인이라는 뜻이다.
그 안에 깊은 진리가 있다.
하지만 그리스도는 보다 깊은 곳까지 효를 옮겨간다.
하나님께 대한 효가, 제덕의 근본이라고 가르친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마태복음 22:37)라고 가르친다.
모든 선행은 여기서 발하고,
모든 복지는 여기서 생긴다.
유교의 근원으로 더듬어 올라가면,
성서의 가르치심에 달하지 않을 수 없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십계명의 제 5조는,
사람의 하나님에 대한(하나님에 대한 사람의) 의무로써 교시된다.
하나님을 사랑함에 의해서만, 참된 효도는 행해진다.
우리나라의 오늘은 어떤가?
정치, 실업, 교육, 종교, 모두가
이제는 더 날 수가 없이 되어 있다.
'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성한 곳이 없이' 되었다는 것은,
또 우리나라 오늘의 상태가 아닌가?
그리고 그것이 그렇게 되어온 원인은 어디에 있는가?
그리스도교를 믿지 않기 때문이라면,
국민의 다수는 노하고, 또 조소하리라.
그러나 천조의 은을 잊었기 때문이라면,
그들이라 해도 부정할 수는 없으리라.
일본인도 역시 은(恩)을 모르는 백성이 되어가고 있다.
그 충군은, 거의 입술의 충군이다.
오늘날 자식의 반역에 처하여,
탄식하는 어버이는 무수하다.
스승 된 자로서 제자의 반역에 직면하지 않는 자는 어디 있는가?
상가는 충실한 고용인을 얻기에 고심하고,
은혜를 베푼대도 그것이 보답되는 예는 거의 없다.
참된 종교가 없기 때문이다.
만물의 창조주이신 아버지 하나님과의 평화(화해)가 없기 때문이다.
*내촌감삼의 (1928년 2월 '성서지연구')를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