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거워하던 고을이여 너의 죽임을 당한 자가 칼에 죽은 것도 아니요 전쟁에 사망한 것도 아니며
예루살렘에 대한 심판
성 경: [사 22:1-6] 이상 골짜기에 관한 경고라 네가 지붕에 올라감은 어찜인고
2) 훤화하며 떠들던 성, 즐거워하던 고을이여 너의 죽임을 당한 자가 칼에 죽은 것도 아니요 전쟁에 사망한 것도 아니며
3) 너의 관원들은 다 함께 도망하였다가 활을 버리고 결박을 당하였고 너의 멀리 도망한 자도 발견되어 다 함께 결박을 당하였도다
4) 이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돌이켜 나를 보지 말지어다 나는 슬피 통곡하겠노라 내 딸 백성이 패멸하였음을 인하여 나를 위로하려고 힘쓰지 말지니라
5) 이상의 골짜기에 주 만군의 여호와께로서 이르는 분요와 밟힘과 혼란의 날이여 성벽의 무너뜨림과 산악에 사무치는 부르짖는 소리로다
6) 엘람 사람은 전통을 졌고 병거탄 자와 마병이 함께 하였고 기르 사람은 방패를 들어내었으니,
[사 22:1] 이상 골짜기에 관한 경고라 네가 지붕에 올라감은 어찜인고
▶ 이상(異像) 골짜기에 관한 경고라 - '이상 골짜기'(게 히자욘)는
예루살렘을 가리키는 상징적인 이름이다
(5절 그것은 주 만군의 하나님께서 환상 골짜기에 고난과 짓밟음과 혼란이 임하게 하시므로 성벽이 무너져 내리는 날이요, 산을 향해 부르짖는 날이로다).
'골짜기'는 다윗 성이 서 있는 언덕(산) 기슭에서 마주치는
힌놈, 기드론 등의 골짜기에서 연유된 듯하고,
'이상'은 그곳에 선지자의 거주지가 있고 하나님의 도성
예루살렘이 '시온 산'이라 불렸음을 생각할 때,
'이상 골짜기'라는 이름에는 경멸적인 의미가 내포되어 있음이 분명하다.
이는 '산' 과 '골짜기'의 대조에서 확연히 드러난다.
산의 높은 곳에서는 먼 데까지도 전망이 가능하나,
어두운 골짜기에서는 아무것도 내다보지 못한다.
'이상'에 관한 한, 예루살렘은 골짜기와 같다.
선지자가 그 이름을 통해서 풍자하고 있는 바,
미래를 예측하는 시력을 상실한 예루살렘은
임박한 재난 앞에서도 회개하기는커녕,
기쁨으로 소동하며 분요하는 모습만을 연출하고 있는 것이다.
(2절 소동으로 가득하며 소란한 도시 곧 기뻐하는 도시여, 죽임을 당한 네 사람들은 칼에 죽지도 아니하고 전쟁에서 사망하지도 아니하였느니라).
▶ 네가 지붕에 올라감은 어찜인고 - '어찜인고'(마-라크)는
직역하면 '네게 무슨 일이냐?'(What to you)이다.
이 물음에는 상대방에 대한 비난과 조롱의 뜻이 담겨 있다.
(삿 18:23 단 자손을 크게 부르므로 그들이 얼굴을 돌이켜 미가에게 이르되, 네가 무슨 일로 괴로워서 이 무리와 함께 왔느냐? 하매).
예루살렘 주민들이 떼를 지어 지붕에 올라감은
(삿 16:27 이제 그 집에는 남녀가 가득하며 블레셋 사람들의 모든 영주들도 거기 있고 지붕에도 삼천 명가량의 남녀가 있었는데 그들이 삼손이 재주 부리는 것을 보더라)
아마도 (퇴각하는) 적군(산헤립의 군대)의 모습을 지켜보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Gray, Leupold).
(36:22 그때에 힐기야의 아들로서 집안을 감독하던 엘리아김과 서기관 셉나와 아삽의 아들 기록관 요아가 자기들의 옷을 찢고 히스기야에게 나아가 그에게 랍사게의 말을 고하니라)
본문과 관련되는 역사적 배경에 대하여 학자들 간에 이견(異見)이 분분하다.
사실 여기서 제시되는 주장들은 기껏해야 개연성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한다.
가장 일반적인 견해는, 본문의 상황이
B.C. 701년에 있었던 앗수르 군대의 예루살렘 포위와 유사하다는 것이다.
당시 산헤립은 히스기야로부터 상당한 양의 공물을 받고 그의 군대를 철수시켰다.
(왕하 18:14-16 유다 왕 히스기야가 라기스로 사람을 보내어 아시리아 왕에게 이르되, 내가 죄를 지었나이다. 나를 떠나 돌아가소서. 왕이 내게 짐 지워 주시는 것을 내가 감당하리이다, 하였더니 아시리아 왕이 유다 왕 히스기야에게 은 삼백 달란트와 금 삼십 달란트를 지정해 주니라.
15) 히스기야가 주의 집과 왕의 집의 보고에 있던 은을 다 주었고
16) 또 그때에 유다 왕 히스기야가 주의 성전의 문들과 자기가 금을 입힌 기둥들에서 금을 벗겨 아시리아 왕에게 주었더라).
그러나 이것은 일시적인 조치에 불과하였던 것이다.
자세한 사항에 대하여는 36,37장과 왕하 18장을 참조하라.
[사 22:2] 훤화하며 떠들던 성, 즐거워하던 고을이여 너의 죽임을 당한 자가 칼에 죽은 것도 아니요 전쟁에 사망한 것도 아니며
▶ 훤화하며 떠들던 성, 즐거워하던 고을이여 - 예루살렘 성읍을
떠들석하게 만든 이 소동은 기쁨과 안도감에서 촉발된 것이다.
백성들은 퇴각하는 적군을 바라보면서 모든 위협이 사라진 양, 자만하며
허랑 방탕한 환락에 도취되었다.
그들은 마땅히 하나님께 돌아왔어야 했다.
그러나 그들의 반응은 전혀 실망스러운 것이었다.
'즐거워하다'(알리자)는 말은
헛된 자만에서 분출되는 득의양양한 기쁨을 나타낸다(Delitzch).
(습 2:15 이것은 기뻐하는 도시요, 염려 없이 거하며 마음속으로 이르기를, 나만 있고 나 외에는 아무도 없다, 하던 곳인데 어찌 그녀가 황폐하게 되고 짐승들이 눕는 곳이 되었는가! 그녀의 옆으로 지나가는 자마다 비웃으며 손을 흔들리로다)
[사 22:3] 너의 관원들은 다 함께 도망하였다가 활을 버리고 결박을 당하였고 너의 멀리 도망한 자도 발견되어 다 함께 결박을 당하였도다 -
백성들을 지켜야 할 관원들이 오히려 제 몸을 보전하기 위하여
활도 팽개치고 도망하다가 포로가 되어 결박을 당한다.
명예와 용기가 자취를 감추고 수치와 비겁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이것이 이상을 상실한 백성들의 결국이다.
'활을 버리고'(미케쉐트)는 직역하면 '활로부터'이니,
그 의미는 '활을 쏴보지도 못하고' 혹은 '아예 저항을 포기하고'이다.
유다의 지도자들에 관한 선지자의 부정적인 시선은 1:23;3:2, 3;5:13;7:2;28:7, 14;29:15 등에도 나와있다.
(1:23 네 통치자들은 반역하는 자들이요, 도둑들의 무리이며 모두가 뇌물을 사랑하고 보상을 따라가며 아버지 없는 자들을 위해 재판하지 아니하고 과부의 사정이 자기들에게 이르지 못하게 하는도다;
3:2-3 용사와 전사와 재판관과 대언자와 분별 있는 자와 원로와
3) 오십인 대장과 귀인과 조언자와 노련한 장인과 달변의 연설가를 제거하시느니라;
5:13 그러므로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포로로 잡혀갔으며 그들의 존귀한 자들은 굶주리고 그들의 무리는 갈증으로 목마르도다;
7:2 어떤 이가 다윗의 집에 고하여 이르되, 시리아가 에브라임과 동맹을 맺었다 하므로 왕의 마음과 그의 백성의 마음이 숲의 나무가 바람에 흔들리는 것 같이 흔들리니라;
28:7 그러나 그들도 포도주로 인하여 잘못하며 독주로 인하여 길에서 벗어났도다. 제사장과 대언자도 독주로 인하여 잘못하고 포도주에 잠기며 독주로 인하여 길에서 벗어났도다. 그들이 환상에서 잘못을 범하며 재판에서 걸려 넘어지나니,
14 그러므로 예루살렘에 있는 이 백성을 다스리는 자들 곧 모욕하는 자들아, 너희는 주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29:15 자기 계획을 주께 깊이 숨기려 하는 자들에게 화가 있을지어다! 그들의 일들은 어둠 속에 있은즉 그들이 이르기를, 누가 우리를 보랴? 누가 우리를 알랴? 하나니)
[사 22:4] 이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돌이켜 나를 보지 말지어다 나는 슬피 통곡하겠노라 내 딸 백성이 패멸하였음을 인하여 나를 위로하려고 힘쓰지 말지니라
▶ 돌이켜 나를 보지 말지어다 나는 슬피 통곡하겠노라 - 예루살렘의 미래가 이러하므로
선지자는 기쁨으로 환호하는 성읍의 한 가운데서 홀로 눈물을 흘린다.
그는 어떠한 위로도 거부한 채 실컷 울기만을 소원한다.
이상을 결여한 시대에 선지자는 얼마나 특이하고 외로운 존재인지!
그는 모두가 잠든 밤에 홀로 깨어 어둠을 응시하며,
(21:11-12 두마에 대한 엄중한 부담이라. 그가 세일에서 나를 불러 이르되, 파수꾼이여, 밤이 어떻게 되었느냐? 파수꾼이여, 밤이 어떻게 되었느냐? 하매
12) 파수꾼이 이르되, 아침이 오나니 또 밤도 오리라. 너희가 물으려거든 물을지어다. 돌이키고 돌아올지니라, 하더라),
모두가 기쁨에 들떠 분요할 때 홀로 슬픔에 잠긴다.
그는 백성을 향하여 선포하는 자이며,
동시에 백성과 그 운명을 함께 나누자는 자이다.
선지자 이사야의 눈물은
백성의 고난에 참예하려는 그의 애끊는 가슴에서 흘러내리는 것이다.
[사 22:5] 이상의 골짜기에 주 만군의 여호와께로서 이르는 분요와 밟힘과 혼란의 날이여 성벽의 무너뜨림과 산악에 사무치는 부르짖는 소리로다
▶ 성벽의 무너뜨림과 산악에 사무치는 부르짖는 소리로다 - 직역하면
'성벽을 무너뜨림과 산악에 대하여 부르짖음(쇼아)이로다'이다.
두 소리가 들린다.
먼저 들리는 소리는 적군의 공격을 받아 성벽이 무너져 내리는 소리요,
그와 때를 같이해서 살려달라는 백성들의 비명소리가
예루살렘을 둘러싸고 있는 산들에서 메아리쳐 울린다.
'쇼아'는 단순한 외침이 아니라 도움을 구하는 간절한 부르짖음이다(Alexander).
[사 22:6] 엘람 사람은 전통을 졌고 병거탄 자와 마병이 함께 하였고 기르 사람은 방패를 들어 내었으니
▶ 엘람 사람은 전통을 졌고 병거탄 자와 마병이 함께 하였고 기르 사람 -
예루살렘 성을 포위 공격하는 앗수르 군대 중에
주도적인 두 나라가 진술된다.
'엘람'과 '기르'는 산헤립 당시에 이미 거대한 앗수르 제국의 한 주(속국)로 편입되었다.
'엘람'은 바벨론 북동쪽에 위치해 있으며 활을 잘 쏘기로 유명하였다.
(21:2 혹독한 환상 계시가 내게 밝히 드러났나니 이르시되, 배신하는 자가 배신하고 노략하는 자가 노략하는도다. 오 엘람이여, 올라갈지어다. 오 메대여, 에워쌀지어다. 그곳의 한숨을 내가 다 그치게 하였노라, 하시는도다),
'기르'는 코카서스에서 발원하여 카스피해로 유입되는
큐로스 강에 근접한 지방으로 알려져 있는데,
성경에서 그곳은 '아람 사람의 기원지'로,
(암 9:7 주가 말하노라. 오 이스라엘의 자손들아, 너희는 내게 이디오피아 사람들의 자손들 같지 아니하냐? 내가 이스라엘을 이집트 땅에서 데려오지 아니하였느냐? 또 블레셋 사람들을 갑돌에서, 시리아 사람들을 기르에서 데려오지 아니하였느냐?)
'아람 사람이 포로로 사로잡혀온 곳'으로,
(암 1:5 내가 다메섹 빗장을 꺾으며 아웬 골짜기에서 그 거민을 끊으며 벧에던에서 홀 잡은 자를 끊으리니 아람 백성이 사로잡혀 길에 이르리라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또는 디글랏 빌레셀이 다메섹 주민을 강제로 이주시킨 장소로 언급되고 있다.
(왕하 16:9 아시리아 왕이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더라. 아시리아 왕이 올라와 다마스커스를 쳐서 점령하고 그곳의 백성을 포로로 사로잡아 기르로 데려가고 또 르신을 죽였더라)
'엘람'과 '기르'는 여기서 각각 바사와 메대 대신 사용되었을 수도 있다(Alexander).
이 두 나라로 대표되는 앗수르 군대의 위용은
궁사들과 전차 부대와 기병대와 보병대로 구성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