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계시록

계시록은 어떠한 책인가?

거듭난 삶 2023. 3. 3. 0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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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시록(묵시록)은 어떠한 글()인가?

 

성서 중에 계시록이라는 글()이 있다.

 

권말에 있고, 22장이나 되는 글()이다.

그 지위에서 말하거나, 길이에서 말하거나,

특히 신도의 주의를 끌 글()이 아니어서는 안 된다.

 

그런데 실제는 어떤가하면,

그리스도 신자로서 이 글을 읽는 자는 극히 적다.

불신자가 이것을 조소하고, 이것을 돌아보지 않을 뿐 아니다.

신자로서 그 가치와 실용을 인정하는 자는 아주 적다.

 

그들의 대다수에게 있어서는, 이 글은

일곱 개의 인으로서 봉인된, 안팎에 문자 있는 두루 마리’(5:1일역)같은 것이다.

 

즉 그들 중

한 사람도 이 두루 마리를 펴고, 또 이것을 보기에 합당한’(5:4일역)자가

없다고 해도 좋을 정도이다.

 

계시록은 대개의 신자에게 있어서는 불가해의 글이다. 있으나 마나한 글()이다.

그 가운데 2, 3의 경구(警句), 2, 3의 위로의 말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전체로서는 감추인 측량해 알 수 없는 글이다.

 

그렇지만, 계시록은 과연 그러한 성질의 글일까?

계시록은 과연 불가해의 글일까?

이는 전연 해득하기 어려운 글이 아니면,

또 이에 반하여 어떻게도 해득할 수 있는 글일까?

 

계시록은, 하나님이 사람의 돈지(기지)를 시험하기 위해

특히 세상에 주신 수수께끼(미어)일까?

말을 바꾸어 하면, 계시록은,

신자가 이것을 읽지 않는대서 아무런 손해도 느끼게 되는 일 없는 글일까?

즉 신앙적 생애를 보내는데 있어서 아무 실익도 없는 글일까?

오인은 그렇게 생각할 수는 없다.

 

계시록은 성서의 일부이다.

그 위에 더구나 중요한 일부분이다.

그리고 만약 성서가 해득될 글()이라면,

계시록도 해득될 글이 아니어서는 안 된다.

 

계시록은 수수께끼(미어 mystery)는 아니다.

그 이름이 이미 계시록이다.

즉 사람에게 보인 일의 기록이다. 이것이 해득되지 못할 리 없다.

 

그리고 계시록 자신이 그 해석을 독자에게 촉구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이다. , 하나님께서,

그로서, 속히 일어날 일을 그의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그에게 주신 것이다’(1:1일역)

 

이 예언의 글을 읽는 자와, 이것을 듣고서 그 중에 기록된 것을

지키는 사람들은 복이 있다’(2:11일역)

 

이러한 말씀에 의해 본대도, 계시록 기자가 불가해의 글로서

이 글을 아시아의 제교회에 보낸 것이 아님은 분명하다.

 

물론 그중에 해득하기 어려운 곳이 있다. 수수께끼 같은 곳이 있다.

저 유명한 13장 말절(末節) 같은 것은 이것이다.

 

이 짐승의 수의 뜻을 아는 자는 지혜 있다.

재지(才知) 있는 자는 이 짐승의 수를 세어보라. 짐승의 수는 사람의 수이다.

그 수는 육백육십육이다’(일역)

 

이것은 확실히 난해의 말이다.

하지만, 이에 유사한 말씀은 성서의 다른 곳에 얼마든지 있다.

데살로니가후서 27절 같은 것은 이유이다.

 

(살후 2:7 불법의 신비가 이미 일하고 있으나 다만 지금 막고 있는 이가 길에서 옮겨지기까지 막으리라)

 

기타, 구약의 다니엘서 같은 것, 스가랴서 같은 것,

또 신약의 마태복음 제24장 같은 것, 모두 난해의 말임을 면할 수 없다.

 

해득하기 어려운 것은 계시록에 한하지 않는다.

성서 전체가, 육의 마음으로서 읽으면, 닫힌(봉해진)글이다.

 

그러므로 난해의 이유로서 이 글을 불가해의 글로 보아서는 안 된다.

 

계시록은 해득될 수 있는 글이다.

그리고 해득하여 가장 이익 많은 글이다.

계시록을 놓치고서, 우리들은 성서 중의 가장 좋은 부분을 놓쳐버리는 것이다.

 

여기에 위자와 희망과 용기와 환희와의 보장이 우리 위해 예비되어 있는 것이다.

 

우리들은 이것을 여는 열쇠를 받아,

우리들의 아버지가 그중에 저장해 놓은 미식의 향연(banquet)에 참여할 것이다.

 

계시록은 어떠한 글인가 하건대,

일독하여 누구에게도 알 수 있는 것은,

그것이 특히 위자(慰藉)의 글이라는 것이다.

 

계시록은 불신자와 거짓 신자와의 박해하는 바로된

크리스천을 위로하려고 기록된 글이다.

 

이것은, 어떤 학자가 말하는 것같이,

그리스도 역사철학을 세상에 주고자 하여 저술된 글을 아니다.

 

또 어떤 다른 학자가 말하는 것 같이,

그리스도교회의 운명을 희곡으로 엮은 것은 아니다.

 

계시록의 목적은 문학적인 것 아니다. 실제적이다.

이것은 철학의 서는 아니다. 또 문예의 서는 아니다.

위자의 서이다.

흐르는 눈물을 닦기 위한 글이다.

인내를 권하기 위한 글이다.

회답을 주기 위한 글이다.

 

계시록의 이 실제 동기를 놓쳐버리고서는,

이 글의 의미를 해득하거나, 그 가치를 알 수는 없다.

 

너는, 장차 받으려는 고난을 두려워 말라.

악마 장차 너희중의 어떤 사람을 옥에 넣고, 너희를 시험하려 한다.

너희는 열흘 동안(어떤 부정의 시간동안) 환난을 받을 것이다.

너는, 죽음에 이르기까지 충신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2:10일역)

 

이후, 내가 보니, 여러 나라, 여러 족속, 여러 백성, 여러 언어 중에서,

누구도 다 셀 수 없을 만큼의 많은 사람,

흰옷을 입고, 손에 종려나무 잎을 가지고, 보좌와 어린양 앞에 와서 섰다

그들은 커다란 간난을 거쳐 왔다. 일찍이 어린양의 피로 그 옷을 씻고,

이것을 회개한 자이다.

이러므로, 그들은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다.

또 하나님의 성전에서 밤낮 하나님을 섬긴다

그들은 다시 주리지도 않고, 다시 목마르지도 않고,

또 해나 열기도 그들을 상치 않을 것이다.

그것은 보좌 앞에 있는 어린양,

그들을 기르고 그들을 생명의 샘물로 인도하시고,

또 하나님, 그들의 눈물을 그 눈에서 씻어주실 것이기 때문이다’(7:9일하 일역)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았다.

이전의 하늘과 이전의 땅은 이미 지나가고,

바다(혼란의 상태)도 또 없어졌다.

나는 거룩한 도시인 새 예루살렘, 잘 예비되어 하나님의 곳을 나와,

하늘에서 내려옴을 보았다.

그 모양은, 신부가 그 신랑을 영접하기 위해 단장한 것 같았다.

나는 큰 소리가 하늘에서 나오는 것을 들었다.

 

이르기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 사이에 있다.

하나님, 사람과 함께 거하시고, 사람,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 또 사람과 함께 계셔서 그 하나님으로 되셨다.

하나님, 그들의 눈의 눈물을 모두 다 씻어 주시고,

또 죽음 없고, 슬픔, 곡함, 고통 없다.

그것은 전의 일 이미 지나갔기 때문이다’(21:1-4일역)

 

이는 계시록의 위자의 말씀의 두, 셋이다.

그리고 전편이 그러한 말씀으로 차 있다.

이는 해득할 수 없는 말이 아닐뿐더러,

가장 아름다운, 가장 기뻐할 말씀이다.

위자의 말로서 이보다 나은 것은 달리 없다.

 

하나님, 그들의 눈의 눈물을 모두 다 씻어 주실 것이다라고 있음을 읽고서,

우리들의 눈에 다시 감사의 눈물이 떠오르는 것이다.

우리들은 그러한 약속의 말씀에 접하여,

환희에 차서 외치는 것이다.

 

오라, 환난. 오라, 박해. 나는 죽음에 이르기까지,

주의 인도하시는 곳으로 따라 가리라.

 

그 목적에 있어서 계시록과 아주 비슷한 글은 베드로전서이다.

이자 그 문체를 달리 하지만, 그 내용은 한가지이다.

 

너희가, 지금 잠시 동안 여러 가지 간난을 만나 근심하지 않을 수 없다 해도,

도리어 기뻐한다. 너희의 신앙을 시험하는 것은,

썩을 금이 불에 시험되는 것보다도 귀하여,

너희가,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

칭찬과, 존귀와, 영광을 얻기에 이를 것이다’(베드로전서 1:6-7일역)

 

이것을 옮겨다가 계시록의 서문으로 할 수가 있다.

 

계시록은 이 원리를 구체적으로 말한 것이다.

더구나 베드로 이상의 묘사적 재능으로서 진술한 것이다.

그 기록된 시대에서 말한대도,

그 주안으로 하는 목적에서 말한대도,

계시록은 베드로전서에 극히 가까운 글이다.

 

특히 위자의 글인 계시록은, 매우 진실한 글이다.

물론 성서 중에 불성실한 글()이란 하나도 없다.

 

그러나 성실에도 도가 있다.

적열(red head)의 성실함이 있는가 하면

백열(최고조 climax)의 성실도 있다.

그리고 계시록의 성실은 백열의 그것이다.

 

이것은 누가복음처럼, 경모하는 나머지

구주의 미를 예찬(찬미)한 글()은 아니다.

 

또 로마서처럼, 역사에 나타난 하나님의 섭리를 말한

역사철학 같은 글은 아니다.

 

또 갈라디아서처럼, 복음의 교의를 논한 의론은 아니다.

 

계시록은 전쟁의 한 가운데 피로서 기록된 신앙의 서이다.

그 문체가 현저히 전투적인 것은 전혀 이것 때문이다.

 

왈 말, 왈 나팔, 왈 하나님의 진노를 담은 금그릇(대접)이라고.

, 나는 예수의 증인 및 하나님의 말씀 위해 목 베임 당한 자의 영혼을 보았다(20:4).

 

선혈임리란 이것이다.

계시록은 저술가의 서재에서 많은 참고서에 대조하여 쓴 글은 아니다.

그 펜을 신도의 박해의 피에 담가 쓴 글이다.

이 글의 문체가 얼마쯤 기괴한데서, 이것을 작자가

한 때(일시)의 감흥에 편승하여 엮은 일종의 희작(오락위주작)으로 보는 것은

커다란 잘못이다.

 

이제 크리스천에게 대 박해가 생겨나고,

무덤()은 입을 열어 그들을 삼키려하고 있다.

 

지금 희곡을 초(집필)할 때는 아니다.

지금 철학을 강론할 때는 아니다.

지금 세계의 미래에 대하여 무익한 공상을 농할 때는 아니다.

지금은 시련의 때이다.

죽음으로서 신앙을 시험받을 때이다.

 

이때에 있어서 이룩된 이 글,

백열(최고조)의 성실이 안 되려야 안 될 수 없었다.

 

계시록을 읽고서, 이 성실을 알지 못하는 자는,

그 저자의 적심을 유린(trampling)하는 자이다.

그러한 한가한, 불성실한, 즉 아직 피로써 신앙위해 싸운 일 는 독자 위해,

이 글의 최후의 말씀을 써서 더 한 것이다.

 

나는, 이 글()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자에게 증거를 한다.

만약 이 글의 예언의 말씀에 더하는 자있으면,

하나님께서, 이 글에 기록한 재난으로서 이에 더할 것이다.

만약 이 글의 예언의 말씀을 삭제하는 자 있으면,

하나님께서, 이를, 이 글()에 기록한 생명나무의 열매와

거룩한 도성에 참여하는 일없게 할 것이다’(22:18-19일역)

 

이것을 일독 할 때, 과대한 말처럼 보인다.

그러나 과대한 말이 아니다.

속인의 설독(불경 profanity)을 제거하려한 적성(진심)의 맹세이다.

적성은, 여호와 하나님같이 질투 깊은 것이다.

즉 적성 외에, 스스로 저촉하는 것을 허용치 않는 것이다.

 

열혈로서 기록된 이 글()!

그 저자는 여기서, 세상의 비평가, 거짓된 예언자, 문예가 무리가,

그 더러워진 손을 이 글에 저촉하는 일없기를 구한 것이다.

 

위자(慰藉)의 글이며, 진지(진실)한 글인 계시록은,

또 현대의 글이었다.

즉 특히 후세를 가르치려 하여 기록된 글은 아니고,

그 당시의 필요에 응하여 이룩된 글이다.

 

계시록은 즉 역사적인 가치를 가지는 글이다.

계시록은 미래기는 아니다.

어떤 주해자가 말한 것 같이,

혹은 모하메트(마호메트 796역주)의 출현을 예언하고,

혹은 루터(1119역주)의 궐기를 예언하고,

혹은 나뽈레옹(4권역주)의 횡행을 예언하고,

심지어는 제20세기 초에 있어서의 일본국의 발흥까지도 예언했다는 등,

놀라운 미래선견의 글()은 아니다.

 

계시록은 제1세기의 끝에 있어서의 로마제국의 상태를 서술하여,

고통 받는 크리스천을 위로하려한 글이다.

그러므로 이것을 해득하는데, 당시의 역사적 지식이 필요하다.

 

그 당시, 심히 크리스천을 박해한 로마제왕으로서

네로와 도미티아누스가 있었다.

그들은 제왕숭배를 제국민에게 강요하고, 제민의 신앙적 통일을 꾀하려 했다.

그리고 크리스천이 예수를 왕으로 모시는데서,

로마정부는 난신국적으로서 심히 그들을 핍박했던 것이다.

이때에 있어서 그들을 위로하려 한 것이 이 계시록이다.

 

이 일곱 머리는, 여인이 앉은 일곱 산이다.

일곱 왕 있다. 그 다섯은 이미 넘어졌고, 하나는 아직 있다.

나머지의 하나는 아직 오지 않았다. 오면, 잠시 머물 것이다.

전에 있고 지금 없는 짐승은 여덟째이다.

즉 일곱 왕에게서 나온 것으로서, 마침내 멸망해 버릴 것이다’(17:9-11일역)

 

이는 확실히 당시의 역사에 직접 관계 있는 말이다.

여인이란, 말할 것도 없이 제도 로마이다.

앉은 일곱 산이란, 유명한 로마의 일곱 언덕(칠구릉)’이다.

일곱 왕이란 아우구스투스 이후 7인의 제왕이다.

5인은 이미 없어지고, 한 사람은 지금, 위에 있다.

 

전에 있다가 지금 없는 짐승이란, 네로가 아니면 도미티아누스이다.

이자 모두 짐승의 이름을 붙일만한 학주였음은,

역사가가 한가지로 인정하는 바이다.

물론 당시의 정치적 상태의 상세에 대하여 지금 이것을 알 수는 없다.

 

그리고 묵시록(계시록)을 상세하게 해득할 수 없는 하나의 이유는,

당시의 역사에 대하여 오인이 아는 바가 극히 불완전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타키투스(11200역주), 디온, 스에토니우스등,

로마제국 당시의 역사가의 기사에서 미루어 보아,

오인은 그 당시의 상태를 거의 분명히 할 수가 있다.

 

그리고 계시록은 그 당시의 역사의 신앙적 해석으로 볼 때,

그 흥미는 일층 깊이 느껴지는 것이다.

 

계시록은 현대의 글로서 역사의 글()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영구한 글()이 아닌 것 아니다.

 

역사는 시대적이고 신앙은 영구적이다.

그리고 로마역사를 신앙적으로 해석한 그 원리로서,

오인은 오늘의 세계역사 또는 일본역사를 해석할 수가 있다.

계시록에 영구적인 가치가 있는 것은 전혀 이것 때문이다.

 

역사는 선과 악과의 충돌이다.

계시록 기자의 말로서 하면, 그리스도와 악마와의 쟁투이다.

 

그리고 악은 어떤 수단을 써서 선에 이기려하는가?

선은 어떠한 무기로서 악에 대하는가?

이것을 로마역사에 있어서 보고 일본역사에 적용할 수가 있다.

 

역사는 되풀이 된다는 것은 이 일이다.

다만 무대에 나타나는 인물(personal)이 다를 뿐이다.

이것을 조종하는

선한 영과 악한 영은, 예나 지금이나 조금도 다름없다.

 

계시록 저자가 자기의 저술을 가리켜 예언의 말씀이라고 한 것은 이것이다.

예언이란 예언이 아니라는 것은, 오인이 종종 본지의 지상에 있어서 말한 바이다.

 

prophesy전에 말한다가 아니라, ‘대신하여 말한다이다.

하나님에 대신하여 말함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사물의 외장을 투시하여 그 진수를 보시는 이시므로,

그 대언자인 예언자는, 시대현상 중에 있는 영구진리를 발견하여

이것을 사람에게 보여주는 자이다.

계시록 저자도 또 이 의미에 있어서의 예언자였다.

 

이사야가 앗수리아 시대의 예언자, 즉 그 당시의 역사의 신앙적 해석자이며,

예레미야가 바벨론시대의 예언자였던 것 같이,

계시록 저자는 로마시대의 예언자였던 것이다.

 

현대역사의 성을 띤 계시록은 특수한 문체로서 기록된 글()이다.

즉 그 당시 유행한 묵시문학의 하나로서 기록된 글이다.

계시록은 묵시록이라는 것은 쓸데없는 말을 하는 것 같지만,

그러나 이것을 마음에 두지 않고서는, 옳게 이 글을 해득할 수는 없다.

이것을 단지 계시록(묵시록)이라함은,

성서 중에 이 이름을 띤 글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것이 처음 저술된 당시에 있어서는,

단지 묵시록이라고 해서는, 그것이 어떠한 묵시록인지는 조금도 알지 못했다.

 

성서의 묵시록이 저술된 당시에 다른 허다한 묵시록이 있었다.

즉 바르크의 묵시록(Apocalypse of Baruch),

아담의 묵시록, 에녹의 묵시록, 에스라의 묵시록의 글이 있었다.

 

그리고 그 목적은 달라도, 그 취향과 문체에 있어서,

이들 묵시록은 성서의 묵시록과 많이 다른바 없었다.

 

그러므로 성서의 묵시록은, 이것을 다른 묵시록과 구별하기 위해,

요한 묵시록(요한 계시록)이라 일컬어지는 것이다.

즉 묵시문체로서 기록된 요한의 글()이라는 말이다.

 

그리고 묵시문체란 어떠한 것인가 하건대,

그 일부는, 이것을 구약의 다니엘서 또는 스가랴서를 읽어서 알 수가 있다.

 

신약의 묵시록은 주로 구약의 다니엘서에 따라 기록된 글이라 하여,

크게 잘못될 것 없다.

 

지금 여기서 이자의 유사에 대하여 자세히 말할 수는 없다.

다만 그 일례를 들면,

예언자 다니엘이 느부갓네살(2100역주)왕에게 한 말로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왕이여, 당신은 한 큰상이 당신 앞에 선 것을 보셨습니다.

그 상은 크고, 그 광채는 보통이 아닙니다. 그 모양은 두렵습니다.

그 상은, 머리는 순금, 가슴과 두 팔은 은, 배와 넓적다리는 동,

종아리는 철, 발은 일부는 철, 일부는 진흙입니다.

당신께서 보고 있는데, 드디어 하나의 돌(), 사람 손에 의하지 않고 끊겨 나와,

그 상의 철과 진흙의 발을 쳐서, 이것을 부수었습니다.

그렇게 하니, 그 철과 진흙과 동과 은과 금은 모두 함께 부수어져,

여름 타작마당의 겨 같이 되어, 바람에 불려, 머문 데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 상을 친 돌은 큰 산이 되어 전지에 가득 찼습니다.

이는 그 꿈이었습니다’(다니엘서 2:31-36)

 

이것은 묵시문체의 좋은 표본이다.

그리고 이에 유사한 것은, 창세기에도, 민수기에도, 열왕기에도,

이사야서에도, 에스겔서에도, 요엘서에도, 스가랴서에도 있다.

 

특히 에스겔서 같은 것은 다니엘서에 다음가는 묵시문학이라고 일컬어야 할 것이다.

 

이에 의해 보고, 문체에서 말하여,

신약성서의 묵시록이 결코 독특한 글이 아님을 알 수가 있다.

이에 유사한 글()은 달리도 많이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당시의 유대인이 그 사상을 발표하는데 있어서 종종 쓴 문체였던 것이다.

 

묵시문학이란, 시에 흡사하면서 시는 아니다.

묘사와도 비슷하나 묘사는 아니다.

표호(sign)로서 사상을 나타낸 문체이다.

즉 표호적 문학이라고도 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을 문자대로 해석할 것이 아님은 무엇보다도 분명하다.

 

’()이라고 하여, 성학자가 말하는 별을 가리킨 것은 아니다.

바다’()라고 하여, 지학자가 말하는 바다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나팔이라고 하여, 군기를 말한 것은 아니다.

‘3년 반이라 하여 달력의 3년 반을 말한 것은 아니다.

천년이라 하여, 백년을 십배한 시한을 말한 것은 아니다.

이에는 모두 각자의 의미가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들 표호한 저자가 임의(자의 selfishness)로 주조한 것은 아니고,

그 당시의 독자에게는 잘 알려진 것이었다.

 

처음으로 요한계시록을 읽은 자가,

지금의 많은 그리스도 신자가 읽는 때처럼,

기괴경악의 감으로서 이것을 읽지 않았던 것은 분명하다.

 

그들에게 있어서는, 요한 계시록은 비밀문자는 아니었다.

그들은 바울, 베드로의 서간을 해득한 것 같이

요한 계시록을 해득했음에 틀림이 없다.

만약 그 의미에 해득하기 어려운 바가 있다면,

그것은 그 문자가 아니라 그 정신이었다.

 

육의 사람이 이것을 해득치 못하는 것이지,

보통교육을 가진 영의 사람은,

가장 명백하게, 또 다대한 흥미로서,

이 영의 글을 해득했음에 틀림이 없다.

 

그러므로. 요한 계시록을

문자대로 해석하려는 것처럼, 무익하고 유해한 것은 없다.

마치 시가를 해석하는데 산문의 규준(기준)으로서 하는 것 같이,

그 결과야말로, 웃어야 할 것임은 말할 것도 없다.

 

묵시록을 해석하려 하면 묵시문학의 기준(정규)으로서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그 기준이란,

이것을 모든 묵시문학의 연구에 의해 얻어지지 않으면 안 된다.

 

신약성서의 묵시록이란,

그 대체에 있어서 이상 같은 것이다.

 

위자의 글, 열성의 글(), 시대를 신앙적으로 해석한 글, 표호로써

저자의 심원한 사상을 나타낸 글()이다.

이것을 깊이 연구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연구하여, 그 이익은 실로 무량이다.

 

기이한 것처럼 보이는 이 글은,

고통 받는 그리스도의 종의 최량의 반려(동료)이다.

 

용과 짐승과 거짓 예언자에게 고통 받는 크리스천에게 있어서,

이 글()보다 더 승한 것은 달리 없다.

 

이는 역시 확실히 여호와의 말씀이다.

많은 금보다도, 많은 순금보다도, 더 사모할 것이며,

이것을 꿀에 비한대도, 꿀벌 집에서 떨어지는

송이 꿀에 비한 대도, 더 달’(시편 19:10일역)말씀이다.

 

하나님께서 만약 허락하신다면, 오인은 다시 이 귀한()책에 대하여,

본지의 독자에게 말하고 싶다.

 

*내촌감삼의 (19081성서지연구’)를 발췌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