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계시록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실과를 맺히되 달마다 그 실과를 맺히고

거듭난 삶 2023. 8. 3. 00:04
728x90

생명수 강과 생명나무

 

성 경: [22:1-5] 또 저가 수정 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서

2)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실과를 맺히되 달마다 그 실과를 맺히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소성하기 위하여 있더라

3) 다시 저주가 없으며 하나님과 그 어린 양의 보좌가 그 가운데 있으리니 그의 종들이 그를 섬기며

4) 그의 얼굴을 볼 터이요 그의 이름도 저희 이마에 있으리라

5)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 데 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저희에게 비취심이라 저희가 세세토록 왕 노릇 하리로다.

 

 

 

[22:1] 또 저가 수정 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서

 

'생명수의 강'은 창 2장과 겔 47장을 반영한다.

에스겔서에 따르면 물은 성전 문지방에서 흘러나와 바다 곧 사해에 도달하여

사해의 죽은 물에 생명을 부여하여 생물이 살 수 있도록 한다.

 

(47:1-12 그 뒤에 그가 다시 나를 데리고 그 집의 문에 이르렀는데, 보라, 그 집의 문지방 밑에서부터 물들이 나와 동쪽으로 흐르더라. 이는 그 집의 앞면이 동쪽을 향해 서 있었기 때문이더라. 그 물들이 그 집의 오른쪽 곧 제단의 남쪽 편에서부터 내려오더라.

2) 그때에 그가 나를 북쪽을 향한 문의 길에서 데려다가 바깥 길로 인도하여 동쪽을 바라보는 길 옆의 바깥문에 이르렀는데, 보라, 거기서 오른쪽에서 물들이 흘러나오더라.

3) 손에 줄을 가진 그 사람이 동쪽으로 나아가며 천 큐빗을 측량한 뒤에 나를 데리고 그 물들을 지나가는데 그 물들이 발목에까지 이르렀더라.

4) 다시 그가 천 큐빗을 측량한 뒤에 나를 데리고 그 물들을 지나가는데 그 물들이 무릎에까지 이르렀으며 다시 그가 천 큐빗을 측량한 뒤에 나를 데리고 지나가는데 그 물들이 허리에까지 이르렀더라.

5) 그 뒤에 그가 천 큐빗을 측량하였는데 그것은 내가 건너지 못할 강이더라. 그 물들이 솟아올라 헤엄칠 물이 되고 건너지 못할 강이 되었더라.

6) 그가 내게 이르되, 사람의 아들아, 네가 이것을 보았느냐? 하고 그 뒤에 나를 데려다가 그 강가로 돌아가게 하기에

7) 이제 내가 돌아왔는데, 보라, 그 강둑의 이쪽과 저쪽에 나무가 심히 많더라.

8) 그때에 그가 내게 이르되, 이 물들이 동쪽 지역을 향해 흘러나와 사막으로 내려가서 바다로 들어가리니 그것들이 바다로 들어갈 때에 그 물들이 치유되리라.

9) 그 강들이 이르는 곳마다 살아서 움직이는 모든 것이 살고 또 물고기가 심히 많으리니 이는 이 물들이 거기에 이르므로 그것들이 치유될 것이기 때문이라. 그 강이 이르는 곳에서는 모든 것이 살리라.

10) 또 어부들이 엔게디에서부터 에네글라임에 이르기까지 그 강 위에 서리니 그 지역들이 그물을 치는 곳이 되리라. 그 지역들의 물고기가 그것들의 종류대로 대해의 물고기같이 심히 많으리라.

11) 그러나 그 지역들의 수렁과 늪지대들은 치유되지 아니하고 소금에게 넘겨지리라.

12) 또 그 강가의 둑 위에는 이쪽과 저쪽에 먹을 것을 맺는 모든 나무가 자라되 그것들의 잎사귀가 시들지 아니하며 열매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그것이 자기의 달들에 따라 새 열매를 맺으리니 이는 그것들이 자기들의 물들을 성소에서 내었기 때문이라. 그것들의 열매는 먹을 것이 되며 잎사귀는 약이 되리라).

 

이러한 배경을 가진 '생명수의 강'에 대한 견해는 네 가지이다.

 

(1) 죽음이 사라지는 것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Ladd).

 

(2) 하나님의 백성이 누리는 풍성한 삶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Barclsy).

 

(3) 성령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Swete, Walvoord).

 

(4) 영생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Morris).

 

네 가지 견해중 마지막 견해가 가장 타당한 듯하다.

한편 에스겔서에서의 물은 성전 문지방에서 비롯되나

본절의 생명수 강은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에서 비롯된다.

 

이것은 하나님과 어린양이 성전임과 동시에

모든 생명의 근원임을 시사한다.

 

(21:22 또 내가 그 안에서 성전을 보지 못하였으니 이는 주 하나님 전능자와 어린양께서 그 도시의 성전이시기 때문이라).

 

 

 

[22:2]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실과를 맺히되 달마다 그 실과를 맺히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소성하기 위하여 있더라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

 

생명수가 흐르는 강 좌우에는 '생명 나무'가 있다.

이 생명 나무는 두 가지 배경을 갖고 있다.

 

(1) 에덴 동산에서 아담과 하와의 범죄로 인하여

따 먹을 수 없게 된 생명 나무를 가리킨다.

 

(3:22 주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보라, 남자가 우리 가운데 하나같이 되어 선악을 알게 되었도다. 이제 그가 자기 손을 들어 생명나무에서 나는 것도 따서 먹고 영원히 살까 염려하노라, 하시고).

 

이 경우 에덴 동산에서는 먹는 것이 금지되어 있는 반면에

본절에서는 그것이 회복되어 먹을 수 있도록 되어 있다.

 

(2) 에스겔의 환상에 보인 성전에서 나와 흐르는 강가에 있는

각종 실과 나무를 가리킨다.

 

(47:12 또 그 강가의 둑 위에는 이쪽과 저쪽에 먹을 것을 맺는 모든 나무가 자라되 그것들의 잎사귀가 시들지 아니하며 열매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그것이 자기의 달들에 따라 새 열매를 맺으리니 이는 그것들이 자기들의 물들을 성소에서 내었기 때문이라. 그것들의 열매는 먹을 것이 되며 잎사귀는 약이 되리라).

 

이러한 두 가지 배경을 가진 생명 나무는

앞절의 생명수와 같이 영생을 나타내는 상징이다(Morris).

 

 

열 두가지 실과를 맺히되 달마다 그 실과를 맺히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소성하기 위하여 있더라. - 본문은 겔 47;12을 반영하고 있다.

 

여기서 '열 두가지 실과를 맺히되 달마다 그 실과를 맺히고'는 문자적인 의미의

열매가 풍성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 나무의 생명력이

왕성하여 영생을 의미하는 실과가 풍성함을 시사한다(Johnson, Morris, Mounce).

 

왜냐하면 그곳에는 해와 달이 없고 대신 하나님과 어린양이 빛이 되시므로

달마다 지속적으로 열리는 실과가 있다고 보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한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소성하기 위해 있다'는 겔 47:12을 반영한다.

그러나 에스겔서에서는 생명 나무의 열매를 강조하는 반면

본문에서는 잎사귀 자체의 치유 능력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새 예루살렘에서 치유할 수 있는 잎사귀가 존재하는 것은

단순히 새 예루살렘에 질병과 고통이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 나무에 참여하면 전혀 고통이나 부족함이나 질병이 없는

완전함을 누리는 것을 시사한다(Mounce, Ladd).

 

즉 새 예루살렘에 참여하여 생명나무의 과실을 먹는 자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와 사망의 고통에서 온전히 벗어났음을 암시한다.

 

(11: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너희 위에 내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가 너희 혼을 위한 안식을 찾으리니;

 

8:12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을 따라 살도록 육신에게 빚지지 아니하였느니라,

 

19-23 창조물이 간절히 기대하며 기다리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라.

20) 창조물이 헛된 것에 복종하게 된 것은 자진해서 된 것이 아니요, 소망 중에 그것을 복종하게 하신 분으로 인한 것이니

21) 이는 창조물 자신도 썩음의 속박에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스런 자유에 이를 것이기 때문이라.

22) 또 전체 창조물이 지금까지 함께 신음하며 고통 중에 산고를 치르는 줄을 우리가 아나니

23) 그들뿐 아니라 우리 자신 곧 성령의 첫 열매를 소유한 우리까지도 속으로 신음하며 양자 삼으심 즉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림은;

 

2:19 내가 율법을 통해 율법에 대하여 죽었나니 이것은 내가 하나님께 대하여 살고자 함이라).

 

 

 

[22:3] 다시 저주가 없으며 하나님과 그 어린 양의 보좌가 그 가운데 있으리니 그의 종들이 그를 섬기며

 

 

다시 저주가 없으며 하나님과 그 어린양의 보좌가 그 가운데 있으리니. -

 

'저주'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타데마'는 저주를 하는 행위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저주를 받는 것을 가리킨다.

새 예루살렘에서 저주를 받지 않는다는 것은 창 3:14-20

저주 상태에서 회복되었음을 나타내며

 

(3:14-20 주 하나님께서 뱀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 일을 행하였으니 네가 모든 가축과 들의 모든 짐승보다 더 저주를 받아 배로 다니고 평생토록 흙을 먹을지니라.

15) 내가 너와 여자 사이에 또 네 씨와 여자의 씨 사이에 적개심을 두리니 여자의 씨는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16)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고통과 수태를 크게 더하리니 네가 고통 중에 자식을 낳을 것이요, 또 너의 열망이 네 남편에게 있으리니 그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시고

17)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고 명령한 나무에서 나는 것을 먹었은즉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평생토록 고통 중에 땅의 소산을 먹으리라.

18) 또한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리라. 네가 들의 채소를 먹으며

19) 땅으로 돌아가기까지 네 얼굴에 땀을 흘려야 빵을 먹으리니 이는 네가 땅에서 취하여졌기 때문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20) 아담이 자기 아내의 이름을 이브라 하였으니 이는 이브가 모든 산 자의 어머니였기 때문이더라)

 

동시에 슥 14:11의 성취이다.

 

(14:11 사람들이 그 안에 거할 것이요, 다시는 완전한 멸망이 있지 아니하겠고 예루살렘에 사람이 안전히 거주하리로다)

 

저주 상태에서 회복되는 이유는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가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저주로 인하여 하나님과 단절되었으나

이제 새 예루살렘에서는 하나님과 그 어린양이 함께 임재해 주심으로

그 관계가 회복되고 더이상 저주를 받지 않게 된다.

 

 

그의 종들이 그를 섬기며. - ''가 가리키는 대상이 누구인가에 대한

해석의 가능성은 세 가지이다.

 

첫째는 하나님이며

둘째는 어린양이고,

셋째는 둘 다를 가리키는 것이다.

 

세 가지 해석 중 마지막 해석이 가장 타당하다.

 

''로 번역된 헬라어 '아우토'는 단수로서

하나님과 어린양을

하나의 단일체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Beasley-Murray).

 

한편 '섬기며'의 헬라어 '라트류수신'은 예배 행위 때 사용된 단어이다.

이것은 새 예루살렘에 참여하는 모든 구속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제사장으로서

하나님과 그 어린양을 예배하며 경배함을 시사한다(Ladd, Johnson, Morris).

 

 

 

[22:4] 그의 얼굴을 볼 터이요 그의 이름도 저희 이마에 있으리라 -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대면하는 것을 곧 죽음을 의미하였다.

그래서 심지어 모세에게도 얼굴을 대면하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다.

 

(33:20 또 이르시되,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을 터이므로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23 내 손을 거두리니 네가 내 뒷부분은 보되 내 얼굴은 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신약성경에서는 하나님께서 성육신하신 그리스도 안에 계시되었으므로

그리스도를 대면한 것이 곧 하나님을 대면한 것이었다.

 

(14:7 너희가 나를 알았더라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라. 이제부터는 너희가 그분을 알며 또 보았느니라, 하시니라,

9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있었으되 네가 아직도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네가 말하기를, 우리에게 아버지를 보여 주소서, 하느냐?;

 

17:3 영생은 이것이니 곧 그들이 유일하신 참 하나님인 아버지와 아버지께서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그러나 새 예루살렘에서는 하나님과 그 어린양을 직접 대면하여 보게 된다.

 

한편 '그의 이름도 저희 이마에 있으리라'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이

짐승의 표를 이마에 받은 것과 대조를 이룬다.

 

(13:16 그가 입을 벌려 하나님을 대적하며 모독하되 그분의 이름과 그분의 성막과 하늘에 거하는 자들을 모독하더라).

 

여기서 이마에 이름을 받는다는 것은 소유권을 나타내는 것으로

새 예루살렘에 참여한 자들이 하나님과 그 어린양의 소유가 되며

그를 닮아가는 것을 의미한다(Mounce, Morris, Ladd).

 

(3:12 이기는 자는 내가 내 하나님의 성전에서 기둥이 되게 하리니 그가 다시는 나가지 아니하리라. 또 내가 내 하나님의 이름과 내 하나님의 도시 곧 하늘에서 내 하나님으로부터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을 그 위에 기록하고 나의 새 이름을 그 위에 기록하리라),

 

 

 

[22:5]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 데 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저희에게 비취심이라 저희가 세세토록 왕 노릇 하리로다.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데 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저희에게 비취심이라. -

 

본문은 21:23, 25의 반복이다.

 

(21:23 그 도시는 해와 달이 안에서 빛을 비출 필요가 없었으니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그 도시를 밝혀 주었고 어린양께서 그 도시의 광체이시기 때문이라,

25 거기에는 밤이 없을 터이므로 낮에 그 도시의 문들을 결코 닫지 아니하리라)

 

새 예루살렘에는 더이상 밤이 존재하지 않는 낮이 계속된다.

 

(14:7 그것은 주께서 아시는 한 날이 될 터인데 낮도 아니요, 밤도 아니니라. 그러나 저녁때에 그것이 빛이 되리로다).

 

왜냐하면 그곳을 등불이나 햇빛에 의해서 빛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주 하나님 자신이 그곳의 빛이 되시기 때문이다.

이것은 영원한 임재를 통한 하나님의 통치하심과

영원한 영과의 빛이 비취심을 시사한다.

 

 

저희가 세세토록 왕 노릇하리로다. - 본문은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궁극적인 축복이다.

이것은 3:21에서 이미 하나님의 백성에게 하신 약속으로

 

(3:21 이기는 자에게는 나 역시 이긴 뒤에 내 아버지와 함께 그분의 왕좌에 앉게 된 것 같이 내 왕좌에 나와 함께 앉는 것을 내가 허락하리라)

 

하나님의 백성이 그리스도와 함께 왕 노릇하여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온전한 자유와 권위를 갖게 될 것을 시사한다.

 

(20:25-27 예수님께서 그들을 불러 이르시되, 이방인들의 통치자들이 그들에게 지배권을 행사하고 큰 자들이 그들에게 권위를 행사하는 것을 너희가 알거니와

26) 너희끼리는 그리하지 말지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게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27)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될지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