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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러운 귀신이 그 사람에게 경련을 일으키고 큰 소리를 지르며 나오는지라

거듭난 삶 2024. 3. 21. 0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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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릴리 호반의 하루

 

마가복음 1 21-34그들이 가버나움에 들어가니라 예수께서 곧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시매

22) 뭇 사람이 그의 교훈에 놀라니 이는 그가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23) 마침 그들의 회당에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있어 소리 질러 이르되

24)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25) 예수께서 꾸짖어 이르시되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시니

26) 더러운 귀신이 그 사람에게 경련을 일으키고 큰 소리를 지르며 나오는지라

27) 다 놀라 서로 물어 이르되 이는 어찜이냐 권위 있는 새 교훈이로다 더러운 귀신들에게 명한즉 순종하는도다 하더라

28) 예수의 소문이 곧 온 갈릴리 사방에 퍼지더라

29) 회당에서 나와 곧 야고보와 요한과 함께 시몬과 안드레의 집에 들어가시니

30) 시몬의 장모가 열병으로 누워 있는지라 사람들이 곧 그 여자에 대하여 예수께 여짜온대

31) 나아가사 그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열병이 떠나고 여자가 그들에게 수종드니라

32) 저물어 해 질 때에 모든 병자와 귀신 들린 자를 예수께 데려오니

33) 온 동네가 그 문 앞에 모였더라

34) 예수께서 각종 병이 든 많은 사람을 고치시며 많은 귀신을 내쫓으시되 귀신이 자기를 알므로 그 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시니라.

 

*비교 : (마태복음 814-17, 누가복음 431-41)

 

 

세상에 과연 기적 있느냐는 질문에 대하여 나는 대답하여 말한다.

 

있다고 보는 눈으로서 보면,

만물 모두 기적이다.

 

자연 그것이 기이 불가사의하다.

쇠붙이가 기이(불가사의)하다.

연이 기이하다. 땅이 기이하다.

천연의 법칙이라고 일컫는 것은 인류의 경험을 설명하기 위한 가정적 법칙에 지나지 않는다.

 

지금은 기적은 있을 수 없다는 사람은 오히려 종교가 또는 신학자이고, ()학자 또는 천연학자는 아니다.

 

인류가 천연에 대하여 아는 것은 너무나도 근소하다.

이 근소한 지식에 기초하여 어떠한 학자라도 기적은 있을 수 없다는 단정을 내릴 수는 없다.

 

만물은 불가사의이다.

이에 맞추어 사람의 능력은 무한이다.

 

사람은 약한 자이다라는 것은, 죄를 범하고 하나님을 떠난 사람에 대하여 말하는 것으로서,

죄를 모르시는 능력의 원천이신 하나님께 연합되는 사람에 대하여 말하는 것은 아니다.

 

사람은 어떻게 창조되었는가는 별문제로 하고, 사람이 사람으로 된 때에, 그는 초자연자로 된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사람은, 하나님을 닮아 자연을 지배할 자이고, 자연에게 지배될 자는 아니다.

 

천지 만물 모두가 기이하나, 그 안에서 가장 기이(불가사의)한 것은 사람이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창조된 자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닮아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할 수 있을 자이다.

 

그런데 사실은 어떠한가 하면, 사람은 하나님을 닮기보다는, 보다 많이 짐승을 닮아,

하나님의 아들이라 부르기보다는 오히려 짐승의 자손이라 일컬어야 할 자이다.

 

하지만 이는 사람의 천성이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범한 죄가 그렇게 하는 것이라고, 성서는 명백하게 가르치는 것이다.

 

죄를 범치 않은 사람, 하나님이 창조한 그대로의 사람, 아버지의 품에서 나온 하나님의 아들,

즉 순정한 사람의 능력은 무한이다.

 

그러한 사람은 인심을 지배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천연도 지배할 수 있는 것이다.

 

사람은 죄를 범하여, 천성의 능력을 잃은 것이다.

, 이는 능력의 소멸자이다.

 

불란서 혁명사에 있어서 위인 미라보(1293역주), 세력의 절정에 달하여 자기의 능력의 부족을 느끼고, 그 장년 시대에 있어서 몸의 청결을 지키지 못한 것을 크게 뉘우쳐 마지않았다는 한 가지는, 그것으로 이 일을 증명하기에 족하다.

 

인간의 가능성은 단지 그의 육체의 건전과 두뇌의 강건으로서 계량할 수는 없다.

 

그가 그 인격에 있어서 거룩한 하나님의 아들로 됨을 얻는 때에, 그는 진정한 의미에 있어서 만물의 영장이 되고 일언으로서 병을 고치며, 일성으로서 파도를 잔잔케 할 수 있는 것이다.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태어나 광야의 시험에 승리하여, 더 능력의 공급을 받으셨다.

 

예수, 성령의 능력을 가지고서 갈릴리로 돌아오셨다’(4:14)고 누가복음은 기록하여 말한다.

 

그는 자기에 차고 넘치는 이 능력을 가지고서 전도를 시작하셨다.

 

먼저 제 14인의 제자를 부르시고, 그들로 하여금 성업(聖業)의 목격자 또는 공동자 되게 하셨다.

 

그리고 아마도 그 다음 안식일에 공공연하게 메시야로서의 사업을 시작하셨던 것이리라.

 

아침은 가버나움의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시고, 거기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있어서, 권위의 한마디로써 그 귀신을 쫓아내셨다.

 

그날 낮 지나서는 시몬, 안드레의 집에 이르러 시몬의 장모가 열병 앓고 있음을 보시자,

그는 그녀의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열은 곧 떠나고, 그녀는 일어나 그의 일행을 대접했다.

 

저녁이 되니 사람들 모든 병 앓는 자 귀신들린 자를 예수께로 데려왔다.

그 성이 모두 문에 모이고 그는 많은 사람을 고치시고, 또 많은 귀신을 쫓아내셨다고 있다.

 

실로 바쁜 하루였다.

왕성(성대)한 전도의 출발이었다.

이것을 가장 생생하게 그린 것이, 렘브란트(8203역주)의 작 그리스도, 병자를 일으키시다이다.

 

보면 볼수록, 그 의미의 깊이가 알게 되어 온다.

누구나 그 한 장을 실내에 걸어둘 것이다.

 

무엇위한 기적이었던가?

 

물론 사람을 놀라게 하기 위한 기적이 아니었다.

만약, 그렇다면 사탄의 권면에 따라, 벽촌인 가버나움에 있어서 행하지 않고서,

수도인 예루살렘에 있어서 했으리라.

 

또 인심을 수람(grasping)하기 위한 기적이 아니었다.

만약 그렇다고 하면 그것이 널리 세상에 알려지기를 구했으리라.

 

예수의 기적은 자발적으로 그의 선의에서 나온 것이다.

그에게 치유함의 능력 있었으므로, 그는, 병자를 보고 동정을 금치 못하여, 전후를 잊고,

이해를 돌보지 않고서 하고자 하는 일을 하신 것이다.

 

이는 모든 선인이 하는 바로서 특별히 교리적 또는 철학적 의의가 그 안에 있는 것은 아니다.

 

보통의 선인과 예수의 다른 점은, 기사를 행하시는 능력의 유무에 있는 것이고, 선을 행하는 동기에 있어서는 이자 아무 다를 바 없는 것이다.

 

선을 행하고자 하는 마음, 이는 모든 선인에게 있는 바의 것으로서, 특히 현저하게 예수에게 있었던 것이다.

 

예수는 하나님께로부터 성령과 능력을 부음 받으시고 두루 다니시며 선한 일을 행하셨다’ (사도행전 10:38),

 

후에 베드로가 말한 대로 예수는 이날 또한 사람들에게 선한 일을 행하신 것이다.

 

그리하여 갈릴리 호반의 하루는 기적의 하루로서 보아야할 것이 아니라, 선행 연속의 하루로서 해석할 것이다.

 

이 기사는 특히 예수의 기적을 보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그의 성선의 영의 역사(일하심)를 기록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기적을 행하시는 능력을 주시지 않는다.

하지만 기타의 여러 가지의 재능을 주신다.

 

혹은 미를 보는 능력을 주신다. 그러한 사람을 가리켜 미술가라고 한다.

혹은 천연의 비밀을 찾는 능력을 주신다. 이를 일컬어 천연학자라고 한다.

기타, 문학자 있다. 정치가 있다. 공학자 있다.

은사는 다르지만, 성령은 하나이시다.

 

그리고 어떠한 동기에 의해 이들 재능을 쓸 것인가?

문제는 여기에 있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께로 부터 예수의 영을 받아 사람은 각자, 예수가 기적을 행하신 것과 같은 정신을 가지고서 그 재능을 나타내는 것이다.

 

즉 선심에 불타서 고생하는 자에 대한 동정을 금치 못해 자발적으로 허다한 경우에 있어서 이해를 돌보지 않고, 전후를 잊고서, 다만 선을 행함의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는 것이다.

 

카임(10113역주)은 예수의 이때를 일컬어 갈릴리의 춘시라고 했다.

 

그 이유는 하나로는 예수의 전도 개시가 아마도 기원의 34년 봄의 3월 무렵이었기 까닭에,

이로는 사람으로서의 예수의 발육이 그 정점에 달하고, 사랑은 동하나 반대는 아직 일어나지 않고, 능력은 넘쳐 은혜 두루 갈릴리 호반에 골고루 미쳤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들도 하나님의 뜻에 따라, 악마와 싸워 이긴 후에 성령, 우리의 영에 임하여 근육은 오르고 두뇌는 명석하게, 시인은 그 노래로써, 음악가는 그 악과 성으로써, 의사는 그 의술로써, 기타, 각자 그 받은 재능으로써 하나님과 사람에게 쓰이는 때에 우리에게도 또 우리들 상응의 갈릴리의 봄이 있는 것이다.

 

기적은 예수의 본직이 아니었다.

그의 본직은 달리 있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이에 순하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성부에게서 기적을 행하는 능력을 받아 그는 사랑 위해 이것을 사용치 않을 수 없었다.

 

즉 예수에게 있어서 기적은 제일 필요는 아니었다.

하지만 하나님의 아들인 그에게 있어서는 기적은 이것을 행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들도 또 그 정신으로서 하나님께로 부터 받은 각자의 재능을 써야 할 것이다.

 

주의해야 할 것은, 예수의 행위의 철저함이다.

 

그가 귀신을 쫓아내니 귀신들린 사람은 완전하게 치유되었다.

그가 열을 치유하시니 병자는 일어나 곧 그에게 씌었다. 기타 모두가 그러했다.

 

그의 치유는 신속하고 완전했다.

그 까닭은 그에게 능력이 차고 넘쳤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금도 역시 하늘에 있어서 그는 그 치유의 기적을 계속하신다.

많은 신자는 신속하게, 완전하게 그 어려운 육체의 병을 고침 받았다.

 

그리고 하나님의 깊은 성지(聖智) 까닭에 육체의 병은 치유되지 않는 경우에 있어서도

영혼의 병의 치유, 사람으로서의 생명의 근본을 범하는 병의 치유는, 한가지로 신속하게 완전히 행해졌다.

 

다만 그를 우러러 보는 일에 의해, 완전한 평화는 그에게 임한다.

다만 믿는 일에 의해 공포와 불안은 완전히 제거되었다.

 

기적은 있을 수 있느냐고 근대인은 물어 말한다.

그리고 있다고 크리스천은 대답하여 말한다.

 

그는 몸에 기적을 입은 자이다.

그도 역시 몸에 갈릴리의 봄을 만난 자이다.

 

그러므로 빙설이 천지를 덮는 이 한 사회에 있어서, 얼마쯤 춘풍을 일으킬 수 있는 것이다.

 

기적 문제는 결국 실험 문제이다.

몸에 은혜의 기적을 입은 자는 철학 또는 신학 또는 심리학의 설명 없이도 쉽게 예수의 기적을 믿을 수 있는 것이다.

 

*내촌감삼의 길릴리의 길을 연재중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