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주 성주그룹 회장은 카메라가 자신을 향하자마자 성큼 탁자 위로 한쪽 다리를 올렸다. 예외 없이 빨간 운동화다. 자신의 무엇이 화제를 일으키고 있는지 잘 알고 있었던 거다. 김 회장은 커다란 시계 앞에서 포즈를 취하며 “우리 모두 미래를 향해 열심히 가보자고요, 파이팅!”이라며 분위기를 돋웠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오 마이 갓(Oh, my God)….”
김성주(56) 성주그룹 회장이 요즘 종종 내뱉는 말이다. 2주 전만 해도 그는 패션 브랜드 ‘MCM’으로 유명한 최고경영자(CEO)였다. 현재는 새누리당 박근혜 대선 후보의 공동선거대책위원장이란 옷을 하나 더 입었다. 정치, 그것도 대선정국의 한복판에 섰다.
지난 12일 임명장을 받고 나서 밝힌 첫 소감은 이랬다. “저는 정치는 깡무식이지만 한국을 확 뒤집어서 혁명을 하러 왔다.” 새누리당에선 듣기 어려웠던 ‘문법’이다. “나는 재벌좌파다. 정략결혼을 안 해서 집에서 쫓겨나 뉴욕 뒷골목에서 바닥 생활을 했다”는 말은 또 어떤가.
말뿐이 아니다. 검은 스키니진에 빨간 운동화, 맨발까지. 하나부터 열까지 파격이다. 박근혜 대통령 후보와는 상반된다.
추석명절이 개천절 황금연휴로 이어지던 10월의 첫 주. 김 회장은 홍콩과 태국 시장을 둘러보고 있었다. 한국에 돌아온 건 4일 새벽. 5일 아침 그는 청담동 회사로 출근했고 그날 오후 박근혜 후보가 강남으로 달려왔다. 이틀 뒤, 김 회장은 박 후보를 하루에 두 번이나 만났다. 그리고 11일 새누리당의 공동선대위원장에 임명된다. 그사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MCM 본사 지하 카페에서 김 회장을 만나 얘기를 들었다. “안녕하세요 회장님~, 아니 위원장님으로 부를까요?”
새빨간 입술에 난처한 웃음이 번진다. “오 마이 갓…. 이젠 불리는 대로 받아들여야죠!”
● 머리는 언제부터 쇼트커트예요.
“1983년 여름부터죠. 영국에서 공부를 하고 있었는데 펑크가 한창 유행이었어요. 그땐 머리가 굉장히 길어서 미장원에서 ‘사자머리’를 했어요. 제 머리카락이 아주 강해서 삐죽삐죽 잘 섰거든요. 그리고 한국에 돌아와 딱 김포공항에 내렸는데 마중 나온 어머니가 ‘이게 내 딸이란 말이냐’고 충격을 받으셔서 그 자리에서 바로 미장원으로 끌려갔어요. 거기서 잘라버린 거죠. 싹뚝. 삭발이죠 거의.”
● 아무 저항도 없이?
“웬 걸요. 비명을 질렀죠. ‘이게 얼마나 공 들인 머린데!’ 그때 미장원 선생님이 그랬어요. ‘당신은 얼굴이 작으면서 동글동글해서 자르면 딱 오드리 헵번 같을 거예요.’ 그땐 제가 좀 예뻤거든요. 지금은 완전히 맛이 갔지만(웃음). 그래서 마음이 확 흔들렸는데 ‘자르면 얼마나 편한데요. 몰랐어요?’ 하는 거예요. 그대로 설득당했죠. 그 후로 29년째 그 선생님에게 머리를 잘라요. 한국 최고의 장인이에요. 김화숙씨라고.”
변화에 민감해야 할 패션기업 CEO가 29년째 같은 사람에게 머리를 맡기는 이유가 뭘까.
“그분은 기술과 재주가 뛰어난데도 온갖 우여곡절을 겪었어요. 결혼해서 애를 낳았는데 남편이 죽고 그동안 번 돈으로 가까스로 미장원을 차렸더니 보증을 잘못 서서 다 날렸어요. 그래서 훌쩍훌쩍 울면서 자기 집 경대를 펴 놓고 남의 머리를 잘랐어요. 제가 거길 쫓아갔어요. 머리를 그 집 화장실 쪽으로 들여놓고 바닥에 누우면 선생님이 머리를 잘라주고….”
김 회장은 키가 1m76㎝다. 장신의 여자가 한 평 남짓한 화장실 앞에 길게 누워 있다?
당시 김 회장의 어린 딸은 엄마의 기괴한 모습에 겁을 먹었다. 김 회장은 “얘야, 장인의 손길은 어디서든 아름다운 거야. 우리는 어려울수록 도와야 해”라고 했다. 김화숙씨는 그 뒤 미장원을 분양받아 자립했고 김 회장은 여전히 그를 찾는다. 재미있는 사실은 박근혜 후보도 그 올림머리를 20년 넘게 같은 사람이 매만져 준다는 거다. 이 말에 김 회장은 “그래요? 역시 뭔가 통하는 것 같아요. 우리가 첫눈에 반했거든요. 펠 인 러브(fell in love)!”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 사실은 정치에 원래 관심이 있었지요?
“전혀요. 사실 매년 대선 때마다, 심지어 대선 이후에도 정치권에선 저를 오라고 들볶았어요. 이번에도 세 후보 모두 저를 찾았죠. 이해가 안 갔어요. 한국에 하고많은 교수, 컨설턴트들이 있고, 정치하고 싶어하는 사람이 많은데 왜 숨어 사는 중소기업인을 부를까. 게다가 살아생전 아버지의 훈시가 있었거든요.”
김 회장의 아버지는 에너지기업 대성그룹의 창업자인 고(故) 김수근 회장이다.
● 아버지의 훈시가 뭐였는지.
“첫째, 절대 신의를 저버리지 마라. 계약서가 100장이라도 신뢰가 없으면 그 관계는 깨진다. 반대로 서로 악수만 해도 신뢰하면 어떤 어려움도 같이 극복할 수 있다. 둘째, 소탐대실하지 마라. 절대 단기간 이익에 휘둘려 장기적인 안목을 잃지 마라. 당시엔 너무 추상적이라 ‘에이, 배운 게 없네.’ 실망했어요. 그런데 지금은 그 말씀이 너무 가슴 깊이 와 닿아요. 23년째 사업을 하는 동안 저를 함정에 빠지지 않게 해줬죠. 그리고 셋째가 절대 정치를 가까이 하지 말라였어요. 지금 이걸 어기고 있는 거죠.”
● 정치를 멀리하라시던 이유가 뭐예요.
“아버지는 에너지 사업을 했고, 당시엔 동력자원부가 있어서 정부에서 연탄·석유·도시가스 가격을 지정해줬어요. 정부에 잘 보이면 잘 벌고, 못 보이면 망하는 거죠. 그리고 부끄럽지만 기업 하는 사람은 예외 없이 정치자금을 내야 했어요. 그때 아버지는 머리가 좋았어요. 나라에 수해가 나고 큰 재난이 났을 때 80억, 100억원씩 탁 내놓았는데 영수증을 꼭 받고 줬어요. 모든 신문에 기사도 내고. 본인은 아주 투명하게 내신 거죠. 어쨌든 정경유착, 이런 데 신물이 나서 절대 정치인 옆에는 가지 말라셨어요.”
김 회장이 아버지의 조언을 어기게 된 계기는 1997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 97년에 무슨 일이.
“당시 장충동 사무실에서 일을 하고 있는데 저녁 무렵 팩스가 하나 왔어요. 발신인이 ‘세계경제포럼(WEF)’이었는데 중간에 알파벳이 다 뭉개져서 잘 안 보이길래 무슨 멤버십 가입하라는 전단인 줄 알고 구겨서 휴지통에 던져버렸죠.”
휴지통에 던져버린 종이는 97년 세계경제포럼의 ‘차세대 지도자 100인’에 선정됐다는 초청장이었다. 아시아 여성 중에 유일했다. 사무실로 전화와 기자들의 인터뷰 요청이 쏟아졌다. 이른바 유명세를 타기 시작한 거다. 김 회장은 스위스 다보스포럼에 참석해 빌 게이츠, 조지 소로스, 빌 클린턴 등과 나란히 앉았다. 어안이 벙벙했다고 한다. 이때부터 한국을 세계에 알려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다양한 해외 활동을 시작했다. 그리고 그해 말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가 터졌다.
● 회사도 위기를 맞았나요.
“매출은 줄고 이자가 늘어나면서 300억원을 잃고 부도 직전까지 몰렸어요. 어쩔 수 없이 당시 가지고 있던 구찌의 한국영업권을 본사에 되팔게 됐죠. 얼마에 팔았는지 알아요? 270억원이에요. 기적의 딜이었어요. 당시 외국인 30명이 회사 자산을 실사하는데 우리가 요구한 금액이 그들이 주겠다는 금액보다 낮았어요. 비자금과 기밀금 없이 투명한 장부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 쪽 설명은 한 치도 어긋난 게 없었어요. 결국 구찌 사람들이 ‘너무 정직한 회사’라며 가장 취약한 시기에 있던 한국 회사에 무릎을 꿇었어요. 정직이 글로벌 경쟁력이란 걸 온몸으로 깨달았죠.”
● 새누리당에 들어간 계기는요.
“지금 우리의 상황이 그때의 그 끔찍한 위기상황을 떠올리게 했어요. 4일 새벽 비행기로 돌아오면서 한국 신문 하나, 외국 신문 하나씩을 집어 봤어요. 그런데 신기하게도 양쪽 다 ‘한국은 110년 전 러시아·중국·일본에 둘러싸여 무참히 당했던 그때와 같다’ ‘한국은 왜 이렇게 잠잠한가’라는 칼럼이 있었어요. 그때 머리가 꽝 하고 울렸어요. 내가 이 모든 위기를 인식하면서 입을 다물고 냉소적인 지식인으로 있어도 되나. 내 회사와 내 애만 잘 키우면 되나, 침묵하는 지식인은 더 해를 끼친다, 지금 나온 대선 후보 중 한 명을 선택해 자문에 응해야겠다란 생각이 들었어요.”
● 왜 박근혜 후보였나요.
“여성이니까요. 여성은 이제 하나의 해결사일 수밖에 없어요. ‘리먼브러더스’가 아니라 ‘리먼시스터스’였으면 경제위기가 안 왔을 거란 말도 있죠. 제가 회사를 정직하고 투명하게 경영해 온 건 바로 아이를 키우는 엄마라서예요. 어머니의 마음으로 나라와 사회를 돌볼 수 있는 건 여성이죠.”
● 단순히 여자라서 선택한 건가요.
“앞으로 3~5년은 우리나라에 너무나 중요하고 위험한 시기예요. 최고의 두뇌파워로 가도 생존할까 말까 한 시기죠. 그런데 우리는 그동안 너무나 분단되고 이념분쟁으로 갈라져 있어요. 과거엔 그나마 미국과 유럽이 건재했지만 만약 앞으로 갈등과 분열로 가면 우리는 또 위기를 맞든가, 그사이 북한체제가 붕괴되든가, 외세의 경제속국이 되든가 세 가지 중 하나예요. 그러니 이 상황에서 모든 걸 포용력 있게 품고 안정 위에 과감한 개혁을 할 사람이 필요하다고 본 거예요.”
김 회장은 지난 5일 아침에 박 후보 측에 만날 용의가 있음을 알렸다. 이 말에 박 후보는 모든 오후 일정을 취소하고 강남 근처로 나왔다고 한다.
● 당시 후보에게 뭐라고 했나요.
“갑자기 오시겠다고 해서 할 말을 준비할 시간도 없었고, 제가 말을 돌려서 하는 타입도 아니에요. 후보에게 ‘역사를 바꿀 수 있는 시점에 있기 때문에 그걸 받아들이시면 정말 훌륭한 리더가 되는 거고, 못 하시겠다면 한국에 참 안타까운 일이네요’라고 했어요.”
● 후보는 뭐라고 했나요.
“제 생각들을 상당 부분 받아들여주셨어요. 밖에서 볼 때엔 차갑고 딱딱한 줄 알았는데, 가까이서 보니 따뜻하고 여유도 있는 분이었어요. 마음을 확실히 못 정하자 이틀 뒤 다시 저를 만나주셨고, 제가 함께 기도하고 싶다고 하니 그날 저녁 늦게 또다시 오셨어요. 이것도 내 운명인가, 하늘이 주신 은총인가 해서 ‘앞으로 그레이스(Grace) 언니라고 불러도 돼요?’ 그랬더니 웃으면서 그러라고, 아주 좋다고 했어요. 근혜란 이름이 ‘은혜의 뿌리’니까 나름 어울리는 별명이죠?”
● 너무 튀어서 정치판에 안 어울린다는 지적도 있어요.
“하하하. 걱정할 거 없어요. 제가 딸하고 약속한 게 있어요. 딱 두 달만 하겠다고. 대선 끝나면 바로 기업으로 돌아올 거예요. 저는 이 보수정당에 새로운 돌풍이 되고, 별동부대가 돼 후보에게 새로운 이미지와 자신감을 불어넣는 역할일 뿐이에요. 저는 ‘경제체질’이지 ‘정치체질’은 절대 아니니까요.”
● 두 달이라도 정치가 사업보다 힘들지 몰라요.
“딸애가 화상으로 죽다 살아난 때를 생각하면 어떤 것도 다 이겨낼 수 있어요. 회사를 막 시작할 때 외국 손님들과 저녁을 먹고 있는데 병원에서 전화가 왔어요. 가 보니 8개월짜리가 온몸에 3도 화상을 입고 누워 있었어요. 가사도우미가 커피포트에 물을 끓이고 있었는데 애가 전기줄을 잡아당겨서 100도의 물을 뒤집어쓴 거예요. 아이는 열이 43도까지 올라서 혼수상태였어요. 주변에서 죽을 거니까 포기하라고 했어요. 그때 병원 바닥에 그냥 엎드려 ‘하느님, 제 생명 대신 가져가시고 딸 살려주세요’라고 대성통곡을 했어요. 엄마들만이 할 수 있는 통곡이었어요.”
잠시 눈시울이 붉어졌던 김 회장은 이내 밝은 표정이 됐다. 다행히 딸은 화상 입었던 얼굴이 잘 회복돼 지금은 미국에서 러시아 문학을 공부하고 있다. 김 회장은 언젠가 화상(火傷)펀드를 만드는 게 목표다. 3개월 반 동안 서울대 응급실에서 아이와 함께 흰 가운을 입고 지내면서 너무나 많은 사람이 죽어서 나가는 걸 봤고, 너무나 많은 사람이 병원비가 없어 화상이 회복되지 않은 애를 퇴원시켰다가 며칠 후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란다.
● 그 와중에 일은 계속했나요.
“그만두려고 했어요. 3년 동안 딸은 온몸에 미라처럼 붕대를 감고 살았어요. 피부를 다 잃어서 우글우글해지니까요. 내가 일한다고 애를 죽일 뻔했다는 죄책감이 너무 컸어요. 일하는 엄마들이 얼마나 힘들고 고생하는지 절감했죠. 그때 누가 그러더라고요, ‘당신같이 열정이 뻗치는 사람은 집에 있으면 애를 더 괴롭히니까, 밖에서 일하면서 좋은 롤모델이 돼 주는 게 낫다’고요(웃음). 이번에도 딸 허락받고 정치하는 거예요. 전 애 앞에서는 꼼짝 못해요. 죽다 살아난 애니까.”
● 목표는.
“우선 MCM으로 세계 시장을 정복하고, 그 인프라 위에 한국 브랜드를 많이 키우는 거예요. 한국도 이제 문화 콘텐트 일환인 브랜드를 가져야 해요.”
인터뷰 도중 직원들이 팥죽 한 사발과 오미자 차를 들고 왔다. 그는 밥 먹는 시간도 아까워 사업상 식사 약속이 없을 때에는 늘 빨리 먹을 수 있는 죽으로 끼니를 해결한다고 한다. 아버지 김수근 회장은 귀여운 막내딸이 정해 준 사람과 결혼해 가정을 꾸리기는커녕 자립하겠다며 미국과 영국을 떠돌다 90년 이 회사를 세웠을 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허, 이 녀석 보게. 어떻게 딸인 니가 나를 제일 닮았냐 ….”
김성주 스스로 ‘재벌좌파’라고 소개한 까닭은
“장학생 1000명 키우며 나눔 실천한 어머니가 가진 자의 의무 가르쳐”
최근 경제민주화 논의는 재벌에 과도하게 경제력이 집중되는 걸 막는 쪽으로 흘러가고 있다. 이른바 재벌2세인 김 회장이 재벌을 감싼 것처럼 비춰진 것이다. 새누리당 경제민주화 정책을 총괄하는 김종인 국민행복추진위원장은 “경제민주화를 잘 모르고, (정책)담당도 아니다”고 일축했다. 이에 김 회장은 발을 동동 구르며 안타까워했다. 스스로를 ‘재벌좌파’라고 소개한 이유가 ‘재벌이 모든 것을 독식하는 경제 시스템을 강하게 반대하기 때문’이라는 거다. “어머니가 평생 실천하고 가르쳐 주신 게 ‘가진 자의 의무’와 ‘철저한 나눔’이었어요. 그게 지금 회자되는 경제민주화 아닌가요?”
김 회장의 어머니 여귀옥 대한기독교여자절제회 회장은 2006년 별세했다. 뇌출혈로 쓰러져 8년 동안 식물인간 상태로 투병한 탓에 외부와의 인연도 모두 끊어진 뒤였다. 그런데 장례식에는 가족친지들도 모르는 사람들이 몰려왔다. “제가 서울역에서 깡패짓을 하며 살 때 당신 어머니가 거둬주고 공부시켜줘서 목사가 됐습니다” “무작정 상경해 집창촌으로 팔려갈 뻔했는데 권사님이 재봉기술 가르쳐주고 결혼까지 시켜줬어요. 그래서 애도 있고, 손자손녀도 있어요.”
대성그룹은 한때 대한민국 10대 기업에 속했다. 여 회장은 일명 ‘재벌부인’이었는데도 남편이 주는 돈의 90%를 모아서 1000명에 가까운 장학생을 키웠다.
김 회장은 “어머니는 우리가 가진 게 많다면 그건 절대 우리 것이 아니다. 잘 관리해서 국민들께 돌려줘야 한다고 가르치셨다”고 소개했다.
김 회장은 어머니 장례식에서 딸에게 “이게 바로 우리가 할머니에게 배워야 하는 집안의 전통이야. 우리도 이렇게 살아야 해”라고 말하고, 서로 다짐도 했다고 한다. 김 회장은 사업을 시작한 이래 반드시 이익의 10~30%를 사회에 기부한다. 매년 50여 개 국내외 NGO단체와 문화·자선공연 단체를 지원해 사회적기업이라는 평가도 받는다. 그러나 대선 정국에 뛰어든 그를 이 사회가 어떤 눈길과 잣대로 바라 볼 지 두고볼 일이다.
이소아 기자
김성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