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늙음'을 모른 척하지 말게

거듭난 삶 2015. 12. 25. 1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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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음'을 모른 척하지 말게, 자네도 멀지 않았어

 

 

조선일보

박돈규 기자

입력 : 2015.12.25 03:00

 

[Youth]

 

알프스에서 휴가 보내는 두 노인老年 대하는 상반된 모습 보여줘

 

마이클 케인·하비 케이틀 등 熱演

주제가 부른 조수미, 직접 출연도

 

 

"세월이 거북이처럼 느리다고

20대의 청년이 말했다

 

세월이 유수(流水)처럼 흘러간다고

40대의 중년이 말했다

 

세월이 날아가는 화살이라고

50대의 초로(初老)가 말했다

 

세월이 전광석화(電光石火)라고

70대의 노년이 말했다

 

한평생이 눈 깜짝할 사이라고

마침내 세상을 뜨는 이가 말했다."(임보 시 '세월에 대한 비유')

 

 

새해 17일 개봉하는 영화 '유스(Youth)'를 보고 이 시()를 다시 꺼내 읽었다. 80세 노인이 체감하는 삶의 속도를 40대가 알기는 버겁다. 20대는 아예 흘려 들을지 모른다. 젊은이에게 과거는 짧고 미래는 창창하니까. 그래도 한 가지는 부정할 수 없다. 늙으나 젊으나 매일 24시간만큼 죽음을 향해 다가간다.

 

 

영화유스는 은퇴한 지휘자 프레드(왼쪽·마이클 케인)와 현역 영화감독 믹(하비 케이틀)이 주인공이다. 두 노인이 알프스의 울창한 숲에서 숨 막히는 장면을 목격하고 있다.

 

 

영화유스는 은퇴한 지휘자 프레드(왼쪽·마이클 케인)와 현역 영화감독 믹(하비 케이틀)이 주인공이다. 두 노인이 알프스의 울창한 숲에서 숨 막히는 장면을 목격하고 있다. /그린나래미디어 제공

'유스'는 알프스에 있는 고급 호텔에서 휴가를 보내는 두 노인의 드라마다. 작곡가 겸 지휘자 프레드(마이클 케인)는 삶의 목표를 잃고 은퇴를 선언했다. 오랜 친구인 믹(하비 케이틀)은 같은 곳에서 새 영화 구상에 바쁘다. 의욕을 다 잃은 프레드는 산책과 마사지, 사우나와 건강체크로 무료한 시간을 보낸다. 그때 영국 특사가 찾아온다. "여왕 앞에서 대표곡 '심플 송(Simple Song)'을 연주해 주십시오. 기사 작위도 드릴 겁니다." 그는 딱 잘라 거절한다.

 

이 영화에는 한국이 낳은 소프라노 조수미도 있다. 몸소 출연해 노래를 들려준다. 전설이 된 아르헨티나 축구 스타 디에고 마라도나와 조수미가 같은 영화에 나오리라고 예상한 관객이 있을까. 2014'그레이트 뷰티(The Great Beauty)'로 아카데미와 골든글로브 외국어영화상을 휩쓴 파올로 소렌티노(이탈리아)는 음악을 사랑하는 감독이다. 마라도나가 뛰는 경기를 보러 간 사이에 친부모를 사고로 잃은 개인사도 담겨 있다.

 

'유스'는 늙음 말고도 여러 재료를 경이롭고 아름답게 뭉뚱그렸다. 우정, 사랑, 통증, 상실, 지혜, 환멸. 딸 레나(레이철 와이즈)와 함께 호텔에 투숙한 프레드는 몸과 마음이 지쳤다. 우울한 나태에 빠져 있다. 레나도 남편과 이별한 상처를 다스리는 중이다. 프레드는 사탕 포장지 같은 것을 마구 비비면서 과거를 추억한다. 정반대로 믹은 마지막 명작을 뽑아낼 꿈에 부풀어 있다. 아침마다 "소변은 잘 보았나?" 묻는 사이지만 두 노인은 사뭇 다르다. 한 사람은 과거에 붙잡혀 있고 다른 한 사람은 여전히 미래를 꿈꾼다. 믹이 준비 중인 영화 제목은 '생의 마지막 날'이다.

 

프레드가 그루터기에 앉아 아래에 있는 소떼를 바라보며 지휘하는 대목부터 명장면이 수두룩하다. 소 울음과 방울 소리, 바람과 고요, 새 떼의 비상이 모두 악기처럼 들려온다. 대자연이 빚어내는 즉흥적인 교향곡이다. 영화는 주인공들의 정서를 단단히 뭉쳐서 던진다. 가장 고요한 장면이 가장 멀리 울려 퍼지듯이, ()을 들어내야 풍경이 일어선다. 수영장과 사우나에서 알몸으로 있는 사람들을 비추는 장면은 윌리엄 터너가 그린 풍경화처럼 뿌옇게 다가온다. 노년(老年)은 정신이 흐려지면서 또렷해지는 시간일지도 모른다.

 

'유스'20~40년 뒤 인생의 끝에 대한 대리 체험이다. 당신도 멀지 않았다고, 노년도 긴 시간이라고 말하는 것 같다. 마이클 케인, 하비 케이틀, 레이철 와이즈, 제인 폰다 등 낯익은 배우들의 연기가 믿음직스럽다. 골든글로브 어워드 여우조연상(제인 폰다)과 주제가상(조수미가 부른 '심플 송') 후보도 배출했다. 유머러스한 장면에서는 실컷 웃다가 가슴 한쪽이 서늘해진다. 누구나 알고도 모른 척하는 늙음, 그 돌이킬 수 없는 시간의 진행을 스산하고 담담하게 포착했다. 이 호텔에 온 미녀(미스 유니버스)를 바라보는 두 노인의 시선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엔딩도 아름답다. 124, 15세 관람가..

 

 

[출처] 본 기사는 조선닷컴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