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진주만 방문은 사과를 위해서가 아니었다

거듭난 삶 2016. 12. 29. 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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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만의 응어리'마저 푼 아베와 오바마


  • 도쿄=김수혜 특파원

  • 워싱턴=조의준 특파원

  • 조선일보

    입력 : 2016.12.29 03:03

    [2403명 전사한 바로 그곳서… 한발 더 나아간 美·日동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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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습 75년… 美日정상 동행은 처음
    아베, 애리조나 기념관에서 추도… 오바마의 히로시마 방문에 답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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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희생자에 고개 숙인 아베
    참전 老兵 3명 포옹하는 등 공화 매파에 美·日동맹 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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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죄 많은 패전국' 탈출도 노려… 트럼프 집권이 동맹 새 시험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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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日 일부 각료는 야스쿠니 참배
    아베 진주만 추도 불과 7시간 뒤… 관방장관은 "사과 위한 訪美 아냐"

    27일 오전 11 18(현지 시각)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과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미국 하와이 진주만 애리조나기념관을 함께 찾았다. 75년 전 일본군의 공습 때 숨진 미국인 2403명의 이름을 새긴 흰 벽 앞에 꽃을 놓고 묵념했다. 1950년대 일본 총리 3명이 진주만을 찾은 적은 있지만 미·일 정상이 나란히 온 건 이번이 처음이다.

    이날 두 사람은 15도쯤 고개를 숙였다. 자세도, 식순도 지난 5월 오바마가 원폭 도시 히로시마를 방문했을 때와 비슷했다. '누구를 위해 어디를 찾았느냐' 이 점만 달랐다. 히로시마에서는 원폭 희생자 위령비였다. 이날은 진주만 공습 때 침몰한 미 해군 애리조나호 잔해 위에 세운 기념관이었다.

    http://image.chosun.com/sitedata/image/201612/29/2016122900202_0.jpg이미지 크게보기1941년 공습 생존자들에게 '화해의 손' 내민 日총리(왼쪽 사진),

    그때 '애리조나호' 이 배에서만 1177명이 숨졌다 - 아베 신조(왼쪽에서 셋째) 일본 총리와 버락 오바마(맨 오른쪽) 미국 대통령이 27(현지 시각) 미국 하와이 진주만-히캄 합동 기지 킬로 부두에서 2차 대전 참전 군인에게 인사를 건네고 있다. 양국 정상이 이곳을 찾은 것은 진주만 공습 75년 만에 처음이다. 이들은 1941 12 7일 일본의 진주만 공습으로 침몰한 미군 함정 애리조나호(오른쪽 작은 사진) 위에 세워진 희생자 추도 시설인 애리조나기념관을 방문했다. /AP 연합뉴스

    애리조나호는 수심 12.2m 맑은 바다에 조용히 누워 있지만 75년 전에는 여기서 생지옥이 벌어졌다. 일본 전투기 353대가 태평양에서 날아와 선전포고도 없이 140분간 폭탄을 들이부었다. 1177명이 이 배에서 죽었다. 석유 150만갤런이 실린 거함이라 침몰 후에도 사흘간 물 위에 나온 기름이 검은 연기를 뿜었다.

    아베의 이번 진주만 방문은 지난 5월 오바마의 첫 히로시마 방문에 대한 답방 형식으로 두 나라가 2차 대전의 역사를 청산하고 미·일 동맹 관계를 다지기 위한 행보로 분석된다. 두 정상도 이날 과거 대신 '화해'를 강조했다. 오바마 대통령은 "전쟁의 상처가 우애로 바뀔 수 있고, 과거의 적이 동맹이 될 수 있다"면서 "아베 총리의 역사적 행보가 '화해의 힘'을 보여준다"고 했다. 아베 총리도 "미·일을 결합한 건 '화해의 힘'"이라고 했다. 양국의 '화해'는 단순한 미사여구가 아니라 양쪽 모두에 이익을 가져올 '전략'이라고 미·일 주요 언론은 분석했다.

    진주만 방문도 '국익' 차원에서 이루어졌다. 아베 총리와 오바마 대통령은 지난달 20일 오전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가 열린 페루 리마컨벤션센터에서 선 채로 5분간 대화했다. 아베 총리가 먼저 "진주만을 방문하고 싶다"고 했다.

    버락 오바마(맨 왼쪽) 미국 대통령과 아베 신조(왼쪽에서 둘째) 일본 총리가 27일(현지 시각) 미국 하와이 진주만에 있는 진주만 공습 희생자 추도 시설인 애리조나기념관에서 공동 헌화한 뒤 묵념하고 있다. 버락 오바마(맨 왼쪽) 미국 대통령과 아베 신조(왼쪽에서 둘째) 일본 총리가 27(현지 시각) 미국 하와이 진주만에 있는 진주만 공습 희생자 추도 시설인 애리조나기념관에서 공동 헌화한 뒤 묵념하고 있다. 기념관 벽에는 75년 전 일본군의 진주만 공습으로 숨진 미국 군인과 민간인 2403명의 이름이 적혀 있다. /AP 연합뉴스

    오바마가 "억지로 오는 거면 안 와도 된다"는 조건을 달고 오케이했다. 2차 대전 후 처음으로 미·일 현직 정상이 진주만을 나란히 찾는 일이 이때 결정됐다고 아사히신문은 전했다.

    당시 아베 총리는 오바마의 반대를 무릅쓰고 뉴욕에서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 당선인과 회담을 했다. 아베는 트럼프 당선 확정 후 18시간도 안 돼 맨 먼저 통화한 해외 정상 4명 중 하나였다. 두 사람은 번개팅하듯 통화 도중 즉석에서 "만나자"고 결정했다.

    오바마 정권 핵심 인사들은 반대했다. '트럼프는 아직 취임도 안 했다. 전례가 없다'는 이유였다. 그걸 무릅쓰고 아베 총리는 뉴욕으로 날아갔다. 미·일은 페루 APEC 회의 때 오바마 임기 중 마지막 미·일 정상회담을 열기 위해 조율 중이었지만, 아베 총리가 트럼프를 만나면서 이 일은 틀어졌다. 그 직후 오바마 대통령을 만난 아베 총리가 진주만 얘길 꺼냈다.

    http://image.chosun.com/sitedata/image/201612/29/2016122900202_2.jpg이미지 크게보기

    오바마 대통령이 흔쾌히 받아들인 이유가 뭘까. 미국 정치 전문가들은 "오바마 대통령이 야심 차게 선언했던 '핵 없는 세상' 공약을 강조하기 위해 마지막 정상회담 상대로 아베를 선택했다"고 본다. 오바마는 재임 8년간 핵안보 정상회의를 네 차례나 열 만큼 '핵 없는 세상' 공약에 매달렸다. 하지만 트럼프는 "핵 능력을 대폭 확장해야 한다"며 오바마표 핵 정책의 폐기를 선언했다. 이런 상황에서 오바마가 자신의 유산을 상징하는 '전쟁 없는 세상'의 이미지를 남기기 위해 아베 총리와 함께 진주만에 갔다는 것이다.

    현실적 이해관계도 있다. 이날 진주만에서 오바마 대통령은 "미·일 동맹은 아시아·태평양 평화와 안정의 주춧돌이고 그 어느 때보다 굳건하다"고 했다. 한·미·일 삼각 동맹을 통해 중국을 견제한다는 것이다.

    아베 총리에게도 진주만 방문은 실리와 역사적 업적을 둘 다 챙길 기회였다. 트럼프 당선으로 아베 총리가 힘을 쏟은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은 물 건너갔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진행 중인 쿠릴열도 4개 섬(일본명 북방 영토) 반환 협상도 벽에 부딪혔다. 일본 정계에서는 아베 총리가 이런 업적을 토대로 내년 1월 중의원을 해산하고 총선을 실시한 뒤 개헌에 박차를 가할 것이라는 시각이 많았다.

    이 모든 것이 불투명해진 지금 진주만 방문은 아베 총리에게 '차선의 돌파구'라는 분석이다. 진주만 답방으로 히로시마를 방문해준 오바마에 대한 '의리'를 지키면서 진주만에서 겸손하게 위령하는 모습을 연출해 공화당 매파를 향해 미·일 동맹의 중요성을 강조했다는 것이다. 이날 아베 총리는 오바마에게 '재임 8'을 상징하는 진주가 8개 달린 커프스 단추를 선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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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죄 많은 패전국'이라는 구도에서 벗어나려는 아베의 개인 소신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아베 총리는 진주만 방문 발표 직후 측근들에게 "내 임기 중에 '전후'에서 탈피하겠다"고 말했다. 28일 진주만에서는 기자회견장 앞줄에 앉은 미국 노병 3명을 차례로 포옹했다. 그중 한 명인 앨프리드 로드리게스(96)씨는 "기대 이상이었다"면서 "사죄할 필요 없다. (아베 총리는) 넘버 원"이라고 했다.

    하지만 오바마와 아베가 만든 지금의 구도가 지속될지는 미지수다. 뉴욕타임스는 "아베 총리의 진주만 방문이 두 정상에겐 상징적인 업적이지만, 트럼프 행정부가 들어서면 양국 관계가 시험대에 오를 수 있다"고 했다. 로이터통신은 "아베는 진주만 방문이라는 ''를 통해 미·일 동맹을 강조하려 하지만, 오히려 중국과 트럼프에게 (미국에 의존한) '안보 무임승차'라는 이미지를 줄 수 있다"고 했다.

    일본 내 반응도 엇갈렸다. 아베 총리는 이날 "전후 70년간 부전(不戰)의 맹세를 지킨 데 대해 긍지를 느낀다"고 했다. 일본 최대 야당 민진당의 렌호 대표는 "그러면서 왜 평화헌법은 고치려고 하느냐"고 했다. 사오토메 가쓰모토(早乙女勝元·84) 도쿄대공습·전쟁자료센터 관장은 "일본은 진주만 공습에 앞서 한국과 중국을 침략하고 말레이반도에 상륙했다" "(미국이 아니라) 아시아에 먼저 사과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했다. 다나카 데루미(田中熙巳·84) 일본 원·수폭피해자단체협의회 사무국장도 "공허하게 느껴졌다"고 했다.

    아베 정권 각료들의 반응은 이런 비판과 온도 차이가 컸다. 스가 요시히데(菅義偉) 관방장관은 "진주만 방문은 전몰자를 위령하기 위해서이지 사과를 위해서가 아니었다 "고 했다. "미국 말고 다른 나라와의 외교에서도 '관용과 화해의 힘'을 내세울 거냐"는 질문엔 "현 시점에선 그럴 계획 없다"고 했다. 아베 총리가 진주만을 방문한 지 불과 7시간 뒤에는 야스쿠니신사를 참배한 각료도 나왔다. 이마무라 마사히로(今村雅弘) 부흥상은 이날 오후 1시 야스쿠니신사를 참배한 뒤 "일본의 안녕과 번영을 기원하기 위해 왔다"고 했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6/12/29/2016122900202.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