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말씀

또 이르시되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거듭난 삶 2018. 5. 18. 0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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탕자의 비유

 

: [ 15:11-24] 이르시되 어떤 사람에게 아들이 있는데

12) 둘째가 아버지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아버지가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더니

13) 며칠이 되어 둘째 아들이 재물을 모아 가지고 나라에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재산을 낭비하더니

14) 없앤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그가 비로소 궁핍한지라

15) 가서 나라 백성 사람에게 붙여 사니 그가 그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

16) 그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

17) 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18)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19)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20)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21) 아들이 이르되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하나

22)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23)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24)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그들이 즐거워하더라.

 

 

 

[ 15:11] 이르시되 어떤 사람에게 아들이 있는데

 

사복음서 오직 본서에만 기록된

'탕자의 비유' 앞의 비유와 마찬가지로 죄인을 찾는

하나님의 사랑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다.

 

비유는 세부 묘사가 매우 생생하며 당시의 관습과 법적인 절차를

반영하고 있으며 영적인 감동과 충격을 우리에게 안겨준다.

 

비유의 번째 부분(11-24) 앞의 비유와 같이 잃었던 것을 다시 찾는데 대한 기쁨을 말하고 있으며,

번째 부분(25-32) 대조적으로 맏아들의 냉혹한 태도를 다루고 있다.

 

다시 말해서 앞부분은 하나님이 인생의 죄악을 사하기 원하시되 신속하게 그리고 완벽하게 사하기 원하신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어 뒷부분은 이기적 탐욕으로 가득한 입으로써 하나님의 자비를 오히려 비방하는 자들의 왜곡된 모습을 적나라하게 지적하고 있다.

 

비유가 일명 '돌아온 탕자의 비유' 알려져 있지만,

보다 엄밀한 의미에서 보면 여기 등장하는 아들 모두가

소위 '잃어버린' 자들이라 있다.

 

호색과 방탕으로 가진 소유를 깡그리 탕진 하고서 아버지께 돌아온 탕자가

하나님을 모르고 방황하는 모든 죄인들을 상징함은 분명한 사실이거니와,

아들 또한 진정한 의미에서 하나님을 모르는 자가 있다는 점에서

'잃어버린 '였던 것이다.

 

한편 탕자가 아버지를 떠나 타락한 과정을 거치고

다시금 아들로서의 지위를 회복하는 과정은

 

각각 7단계로 구분될 있는데 이를 도식화하면 다음과 같다.

 

 

[ 15:12] 둘째가 아버지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아버지가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더니

 

둘째가 - 서리나 죄인(1) 또는 이방인과 같이 뒤늦게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얻게 ,

혹은 사회적으로 억압당하던 천민계층을 상징한다고 봄이 무난하겠다.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 이러한 요구는 둘째 아들이신 21:17 나오는 재산 상속의 율법을 알고 있음을 나타낸다.

 

(21:17 너희가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21:17에는 재산 상속시 장자에게 재산의 2/3, 차자에게 1/3 나누어 것을 규정하고 있다.

 

( 21:17 반드시 미움을 받는 자의 아들을 장자로 인정하여 자기의 소유에서 그에게는 몫을 것이니 그는 자기의 기력의 시작이라 장자의 권리가 그에게 있음이니라)

 

그런데 둘째 아들의 같은 요구는 사실상 관례에 어긋난 것이었다.

왜냐하면 재산의 상속은 아버지의 임종(臨終) 임박할 행해지는 것이

일반적 관습이었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은 자식에게 정식으로 재산을 상속해 주기 전까지는

적당한 재산을 선물로 주곤 했다.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더니 - 작은 아들이 자기 몫을 완전히 물려 받았고

아들도 역시 자신의 몫을 양도받은 같다.

 

그러나 작은 아들은 사용권이 여전히 아버지에게 있는 그의 재산을

아버지의 동의없이도 마음대로 처분한 것에 반해서 아들은

사용권을 여전히 아버지에게 두고 있었음을 있다.

 

(31 아버지가 이르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것이 것이로되).

 

유대에서는 만일 아버지가 생존해 있을 재산을 물려 받았을 경우

상속자는 이를 자신의 임의대로 사용할 없었다.

 

만일 아버지가 생존해 있을 상속자가 재산으로 장사를 해서

이익금을 남겼다 해도 이익들을 임의대로 사용하지 못하고

아버지에게 돌려야 했다(Jeremias,Parabes of Jesus,P.128-29).

 

 

[ 15:13] 며칠이 되어 둘째 아들이 재물을 모아 가지고 나라에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재산을 낭비하더니

 

재물을 모아 가지고 - '모아 가지고' 해당하는 헬라어'쉬나고'에는 '거두어 들이다' 외에도 '헌금으로 바꾼다' 의미가 들어있다고 보기도 한다(Greed).

 

이러한 둘째의 태도로 보아 그는 고향에서 농사를 짓는 일엔 전혀 관심이 없고

오히려 도시에 나가 장사와 같은 업종에 종사하려고 했던 같다.

 

허랑방탕하여 - NIV에는 '거친 삶을 사는 '(wild living)이라 표현한다.

 

한편 여기서 그가 나라로 떠난 것은 그가 얼마나 부모의 품으로부터

벗어나 자기 나름대로의 삶을 살고 싶어 했는지를

또한 계획이 순간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오래전부터 계획된 것임을 나타내 준다.

 

뿐만 아니라 재산을 모두 허랑 방탕한 생활에 소비해 버린 것은

그가 계획한 모든 생각들이 육적인 쾌락을 향해 있었음을 증명해 준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가 청운의 꿈을 가지고 나라로 갔지만

그곳에서 세상의 온갖 유혹을 받아 타락했다고도 있다.

 

어쨌든 아버지의 집을 떠난 그는 걷잡을 없는 타락의 길을 걷게 되었고

종국에는 그가 가진 모든 재산을 탕진해 버리는 결과를 초래했다.

 

 

[ 15:14] 없앤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그가 비로소 궁핍한지라

 

궁핍한지라 - 방탕한 아들에게는

 

(1) 가진 모든 재산을 허비하고

(2) 설상가상(雪上加霜)으로 기근까지 겹치는 어려움이 몰려왔다.

 

그런데 기근은 단지 지역에만 국한 되었던 것이 아니고

그가 이상향으로 생각하고 찾아왔던 나라 전체를 엄습했다.

 

이제까지 부족함이 없이 온갖 즐거움과 자유를 누렸던 그는

'비로소' 궁핍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에게 닥친 이러한 어려움은 그로 하여금 새로운 안목을 갖게 하는

기회가 되었고 아버지의 집이 행복의 근원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하였으며

아버지의 집을 향해 발걸음을 돌리도록 결단하게 만드는 동인(動因) 되었다.

 

성도가 하나님이 정해주신 구역 안에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야 함은 물고기가 물을 떠나 없음과 같다.

 

( 16:6 내게 줄로 재어 구역은 아름다운 곳에 있음이여 나의 기업이 실로 아름답도다)

 

 

[ 15:15] 가서 나라 백성 사람에게 붙여 사니 그가 그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

 

나라 - 유대 민족은 팔레스틴에 50 정도만 남아 있었고

4백만 정도가 디아스포라(Diaspora) (유대땅) 떠나

흩어져 사는 유대인들의 셍활) 살았다고 한다.

 

나라에 대해서 어떤 사람은

이집트 혹은 이디오피아 등으로 추정하기도 하지만 분명한 것은 아니며

확실한 것은 적어도 유대 밖이라고 하는 사실이다.

 

(13 며칠이 되어 둘째 아들이 재물을 모아 가지고 나라에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재산을 낭비하더니)

 

붙여 사니 - 이는 '더부살이하다' 의미로 그의 밑바닥의 삶을

그대로 드러내는 표현이다.

 

유대인들은 예로부터 동족은 종으로 부리지 않을 뿐만 아니라

다른 족속의 종이 되는 것을 가장 수치로 여겼다.

 

만약에 동족 중에서 그가 빚이나 형벌로 인해서 종으로 부리게 된다고

하더라도 유대인에게는 50 마다 모든 노예를 무조건 해방하는 것을 정한

희년(禧年) 규정이 있었다.

 

( 25:54 그가 이같이 속량되지 못하면 희년에 이르러는 그와 그의 자녀가 자유하리니).

 

둘째 아들은 아버지의 간섭을 벗어나 마음껏 자유를 만끽하기 위해

이국땅으로 떠나갔지만 결국 종살이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는 우리 신앙생활 증에서도 혼히 체험되는 바이기도 하다.

그리스도 안에서 요구되는 삶의 질서와 법도를 때로는 무시하며

거역함으로써 소위 자유로운 삶을 살고자 해보지만,

결국에는 세상과 죄악의 속박에 얽매여 마치 노예와도 같은

부자유스러운 상태에서 고뇌하게 되는 것이다.

 

진정한 행복과 자유는 그리스도 안에 붙잡힌 됨으로써만 오히려 가능하다,

왜냐하면 오직 진리가 우리를 자유케 하겠기 때문이다.

 

( 8:22 유대인들이 이르되 그가 말하기를 내가 가는 곳에는 너희가 오지 못하리라 하니 그가 자결하려는가).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 -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돼지는 불결한 짐승 중의 하나이다.

 

( 11:7 돼지는 굽이 갈라져 쪽발이로되 새김질을 못하므로 너희에게 부정하니;

 

14:8 돼지는 굽은 갈라졌으나 새김질을 못하므로 너희에게 부정하니 너희는 이런 것의 고기를 먹지 것이며 사체도 만지지 것이니라).

 

따라서 그들은 돼지고기를 먹지도 않을뿐더러 돼지를 치는 것조차 꺼려하며 천시하였다.

 

 

[ 15:16] 그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

 

쥐엄 열매 - 열매는 동부 지중해 연안에서 있는 상록 교목(喬木) 구주 콩나무(carob tree) 열매를 가리킨다.

 

구주 콩나무에는 8-30cm정도 되는 꼬투리가 맺히는데

안에는 5-15개의 열매가 들어있다.

 

혼히 이것은 침례 요한의 (St.John's bread)이라고 불리는데 이유는

광야에서 살았던 침례 요한이 쥐엄 열매를 먹었다는 일설 때문이었다.

 

( 3:4 요한은 낙타털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띠고 음식은 메뚜기와 석청이었더라;

 

1:6 요한은 낙타털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띠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더라).

 

열매의 맛은 약간 단데 주로 가축의 사료로 사용되며 때로는

기근 시에 가난한 사람들의 식량으로 대용되기도 했다.

 

배를 채우고자 하되 - 그가 배고픔을 채우지 못했음과 아울러 상태가 한참 동안이나 계속되었음을 가리킨다.

그는 임금으로 기본적인 생계 문제도 해결할 없을 정도로 적은 액수를

받았는데 물론 최저 생계비 조차도 보장받지 못하는 그러한 상황은

나라에 흉년이 들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의 상황은 오늘날의 저임금 노동자의 그것과 유사하다.

 

주는 자가 없는지라 - 그가 구걸하는 신세가 되었지만 민심은 그로부터 돌아섰다.

결국 말은 그가 모든 사람에게 따돌림을 받게 되어

실제적으로 배고픔으로 인한 고통보다 아픔을 겪게 되었음을 나타낸다.

 

그가 돈을 뿌리며 호의호식할 때에는 많은 사람들이

그의 주변에 몰려들어 함께 먹고 마시며 즐겼을 것이다.

그러나 가진 소유를 깡그리 탕진한 지금에 이르러

그는 모든 사람들로부터 비웃음과 조소(嘲笑) 받았으며

완전히 소외된 (outcast) 되었다.

 

사람도 그에게 동물에게 먹일 사료조차 주지않았다고 하는 것은

나라가 극심한 흉년이 들었음을 말함과 아울러 굶어 죽어가는 그에게

어느 누구도 동정을 베풀지 않은 극단적인 상황을 암시한다.

 

굶주림과 철저한 고독이라고 하는 상황은 인간이 절대자를 대면할 있는

기회가 되는 경우가 많다.

 

다시 말해서 사람의 고난은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인식하게 되는 기회가 된다.

 

 

[ 15:17] 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스스로 돌이켜 - 문자 그대로'자신에게로 돌아왔다' 의미로,

정신을 제대로 차린 것을 말한다.

RSV 의하면 본래의 '자신에게로 돌아오다'(come to himself)이다.

 

이러한 표현은 '회개' 대한 히브리적 사고를 나타내 주는 숙어이다.

(Jeremias,parables,P.130).

 

또한 표현은, 육신의 정욕에 이끌려 자행자지(自行自止) 하는 삶은

자신의 존재를 상실케 함을 시사한다.

 

하나님을 떠난 또한 이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참된 자아를 상실한 삶이라 있다.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존재인 인간이

하나님을 거역하는 행위는 자기의 존재 자체를 부인하는 것에 다름 아닌 것이다.

 

아버지에게는 - 그가 회개하게 동기는 배고픔이었으나

그가 되돌아가기를 원하였던 곳은 아버지에게 로였다.

 

'아버지에게로' 길은 자신의 교만과 허랑방탕한 삶에 대한 회개의 길이며

앞으로의 자신의 삶을 아버지의 판단과 처분에 전적으로 맡기는

완전한 순종의 길임을 뜻한다.

 

양식이 풍족한 - 직역하면 '빵으로 둘러싸이다'이다.

이것은 양식이 남아 돌아갈 정도로 가산이 넉넉함을 암시한다.

 

참으로 영원히 주리지 않게 음식은 하나님에게만 있다.

 

( 8:11-13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12) 사람이 바다에서 바다까지, 북쪽에서 동쪽까지 비틀거리며 여호와의 말씀을 구하려고 돌아다녀도 얻지 못하리니

13) 날에 아름다운 처녀와 젊은 남자가 갈하여 쓰러지리라;

 

4:14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 15:18]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 ' 출발하리라' 표현이다.

이러한 말은 그의 '스스로 돌이킴' 결연한 의지를 동반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참된 회개란 마음의 변화에 따른 행동의 변화가 수반(隧伴)되어야 한다.

자리에서 일어나 아버지 집으로 감은 그가 회심한 이후에

최초로 취해진 의지의 결단이었다.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 여기에서 '하늘'이란 하나님을 의미한다.

히브리인들은 종종 하나님 대신에 하늘이란 단어를 사용했었다.

 

아들이 지은 죄악은 다양한 각도에서 있겠으나

그는

 

(1) 아버지의 재산을 마음대로 탕진해 버렸다.

(2) 허랑 방탕한 삼을 살았다.

(3) 부정한 짐승과 접촉했다.

 

이러한 죄를 범하면서 그는 아버지에 대해 불효, 불순종, 불충, 불성실했다는 사실과 함께 그토록 자상하고 사랑이 많은 아버지를 주신 하나님께 범죄 했음을 겸손히 시인했다.

 

또한 구절은 사람에 대한 도리롤 이행하지 못하면 그것이 하나님께 범죄하는 꼴이 되고 만다는 것을 교훈한다.

 

바울은 부모를 안에서 순종하고 공경하는 것이 약속있는 계명이라 했다.

 

( 6:1-3 자녀들아 안에서 너희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2)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은 약속이 있는 계명이니

3) 이로써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

 

한편 아버지와 하나님이 따로 언급되고는 있지만 비유에서 아버지가 행동이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하신 행동을 그려주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사랑이 아버지의 사랑과 유사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 103:13 아버지가 자식을 긍휼히 여김 같이 여호와께서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나니).

 

 

[ 15:19]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 '감당치 못하다'라고 하는 말은

'알맞지 않다 '합당하지 않다' 하는 의미로 작은 아들은

법적으로나, 도덕적으로 이상 아들의 자격 유지할 없을 정도로

패역된 죄를 저질렀음을 자책하고 있다.

 

자신의 행위에 의해 그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상실되었을 것으로 단정하였다.

그는 이미 상속분을 받았으므로 아무런 권리도 주장할 없을 뿐만 아니라

음식과 의복제공과 같은 것도 이제는 아무런 대가 없이 주어질 없는 것임을

깨닫고 있다.

 

그러나 부자 관계란 어떤 인의적 계약이나 재물의 수수관계에 의해

깨어질 성질의 것이 아니다.

 

아버지의 입장에서 보면 아들은 밉든 곱든 자기 아들이며,

()으로도 마찬가지인 것이다.

 

품꾼의 하나 - 품꾼은 일시적인 기간만 고용되는 사람, 날품팔이를 가리킨다.

따라서 그는 아버지의 아들로서도 그리고 종으로서도 들어가 없고

다만 일시적인 고용인으로서 날품팔이하는 것으로 족하다고 생각하였다.

 

 

[ 15:20]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 굽어진 관계의 회복이 아버지의 주도하에 이루어진다(K.H Rengstorf).

 

아버지의 주도적인 사랑(initiative love) 다음과 같다.

 

(1) 아직 멀리 떨어진 곳에 있는 아들을 먼저 알아보았다는 사실을 미루어

그가 매일같이 아들이 돌아올 것을 기대하며 거리를 살펴보았음을 있다.

 

(2) 회개의 말을 듣기도 전에 힘들고 지친 모습으로 돌아오는 아들의 모습에

측은(側隱) 마음을 느끼게 된다.

 

'측은히 여기다' 도와주지 않으면 마음이 아파 견딜 없게 상태를 의미한다.

따라서 아들의 참회고백 이전에 아버지의 불쌍히 여기는 느낌이 선행한다.

 

(3) 나이 많은 동양인의 경우 아무리 급할 때에라도

달려 나가지 않는 것이 보통인데 비유의 아버지는

자신의 품위가 떨어지는 것을 전혀 개의치 않고(Jeremias) 행동하고 있다.

 

이는 죄인이 하나님께로 돌아올 그분께서 얼마나 기뻐하시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행위이다.

 

또한 아버지가 아들에게 달려갔음은 아버지의 용서 행위가 아들의 사죄 행위보다 우선한 것이었음을 의미한다.

 

인간은 하나님께 천천히 다가가지만 회개한 인간에게 하나님께서는 급히 달려 오셔서 그의 은혜를 베푸신다.

 

(4) 입맞춤은 삼하 14:33 의하면 아들에 대한 무조건적인 용서를 뜻한다.

 

(삼하 14:33 요압이 왕께 나아가서 그에게 아뢰매 왕이 압살롬을 부르니 그가 왕께 나아가 앞에서 얼굴을 땅에 대어 그에게 절하매 왕이 압살롬과 입을 맞추니라)

 

또한 '입맞추니' 뜻인 '카테필레센' 많은 입맞춤 여러 거듭한 입맞춤으로,

번의 의례적 인사와는 달리 돌아온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기쁨을 그대로 드러내는 행위이다.

 

죄를 자백하고 벌을 받으려고 돌아온 아들에 대한 끝없는 용서의 의미가 담겨져 있다.

 

 

[ 15:21] 아들이 이르되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하나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 여러 고본(古本)들에는 19절의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라는 말이 첨가되어 있다.

 

아들은 마음속에 깊이 각오한 회개와 겸비의 뜻을 그대로 아버지 에게 고하고 있다. 아마 그는 자신을 보고 기쁨에 겨워 입맞추는 아버지의 모습에서

용서의 뜻을 감지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감히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부를 면목이 없음을 절실히 깨닫고 있었다.

 

돌아온 아들을 무조건 적으로 용서하는 아버지의 사랑과

지나간 잘못을 철저히 뉘우치는 아들의 겸비함이 함께 어우러진

장면은 뜨거운 감동을 자아내고 있다.

 

 

[ 15:22]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제일 좋은 - 아버지는 돌아온 아들을 품꾼이 아니라 극빈처럼 대우하였는데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되었을 바로가 하사한 물품과 같은 것들이 지급되었다.

 

( 41:42 자기의 인장 반지를 빼어 요셉의 손에 끼우고 그에게 세마포 옷을 입히고 사슬을 목에 걸고).

 

제일 좋은 옷이란 문자적으로 집에 있는 번째의 옷이다.

제일 좋은 옷은 고대 근동지역에서는 영예를 의미한다.

 

당시에는 훈장(勳章) 없었을 시기였으므로

왕이 공로가 많은 신하를 포상할 귀중한 옷을 하사했다.

 

따라서 아버지의 집에서 가장 좋은 옷을 입혔다고 하는 것은

아들의 죄를 탕감해 주는 것일 뿐만 아니라

아들로서의 모든 권리가 여전히 유효한 것임을 공표하는 행위였다.

 

가락지를 끼우고 - 가락지는 자신의 권위를 나타내는 인장 반지와 같은 것으로서

이를 아들에게 주었다고 하는 것은 자신의 권한을 아들에게 위임한 것으로

이해할 있다.

 

재산을 아들들에게 모두 이어준 아버지가 이제 가지고 있는 권한은

맏아들의 재산에 대한 사용권 뿐이다.

 

따라서 첫째 아들이 아버지에게 불만을 토로한 것도 한편으로는 이해됨직하다.

 

(29-30 아버지께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여러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30)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린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엄밀한 이해타산으로 따지면 그의 아우는 이제 가산(家産) 대한 아무런 권한도 가진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신을 신기라 - 신을 신는다고 하는 것은 그가 자유인의 권리를 회복하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동시에 종들은 맨발로 다녔다.

 

나라에 가서는 다른 사람의 머슴의 신세였던 그가

아버지께로 돌아와서는 다시 자유인으로서 살게 되었는데

이러한 모습은 사람이 하나님을 떠나서는 반드시

죄에게 노릇을 하게 되는 반면에

하나님 안에서는 완전한 자유자가 됨을 의미한다.

 

가지(, 가락지, ) 필요성 때문에

제공된 것이라기보다는 아들을 존귀하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Plummer).

 

 

[ 15:23]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살진 송아지를 - 헬라어 원문에는 송아지라는 단어 앞에 관사'' 붙어있어서 송아지가 바로 준비해 송아지임을 나타낸다.

 

당시 유대인들은 귀한 손님이 경우와 같은 특별한 때에는 자신이 키우던 짐승들 가운데 가장 살진 송아지를 잡아서 손님을 대접하였다.

 

잡으라 - 고대 교부들(Irenaeus,Augustine,Jerome) 중에는 송아지가 그리스도의 희생을 상징한다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구절의 핵심은 앞서 언급한 상징적인 의미보다는

죄인이 회개하여 돌아오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더없이 기뻐하신다는 사실에 있다.

 

( 51:16-17 주께서는 제사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드렸을 것이라 주는 번제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나이다

17)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

 

 

[ 15:24]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그들이 즐거워하더라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 '죽었다가 살아난' 것은 아들 편에서의 영적 죽음과 부활을 뜻하고,

 

'잃었다가 다시 얻음' 아버지 편에서의 아들과의 분리와 재결합을 의미한다.

 

하나님을 떠난 삶은 2:1 요일 3:4 의하면 '허물과 죄로 죽은' 삶을 뜻한다.

 

 

( 2:1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요일 3:4 죄를 짓는 자마다 불법을 행하나니 죄는 불법이라)

 

 

이러한 인간의 죄악된 죽음의 상태는 부활이요 생명이신

 

( 11:2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그리스도의 대속(代贖) 은총에 의해서만 온전히 회복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