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루살렘 입성
성 경: [눅 19:28-35]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앞서서 가시더라
29) 감람원이라 불리는 산쪽에 있는 벳바게와 베다니에 가까이 가셨을 때에 제자 중 둘을 보내시며
30) 이르시되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아직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가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라
31) 만일 누가 너희에게 어찌하여 푸느냐 묻거든 말하기를 주가 쓰시겠다 하라 하시매
32) 보내심을 받은 자들이 가서 그 말씀하신 대로 만난지라
33) 나귀 새끼를 풀 때에 그 임자들이 이르되 어찌하여 나귀 새끼를 푸느냐
34) 대답하되 주께서 쓰시겠다 하고
35) 그것을 예수께로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나귀 새끼 위에 걸쳐 놓고 예수를 태우니
[눅 19:28]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앞서서 가시더라 - 누가는 므나의 비유와 예루살렘 입성을 자연스럽게 연결시키기 위해 '이 말씀을 하시고'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다.
뒤이어 예수는 예루살렘을 향하여 앞장서서 가는 것으로 묘사되는데 이와 비슷한 장면이 막 10:32에도 나온다.
(막 10:32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에 예수께서 그들 앞에 서서 가시는데 그들이 놀라고 따르는 자들은 두려워하더라 이에 다시 열두 제자를 데리시고 자기가 당할 일을 말씀하여 이르시되)
이는 장군이 부대 앞에서 진두지휘함으로써 부대의 사기를 높이듯이, 예루살렘에서의 수난과 죽음을 향하여 조금도 두려움 없이 단호하게 걷는 장면이다.
한편 본 구절에서부터는 주께서 십자가 수난을 겪으시기에 앞서 맞이하신 마지막 한 주간의 생애가 전개되기 시작한다.
[눅 19:29] 감람원이라 불리는 산쪽에 있는 벳바게와 베다니에 가까이 가셨을 때에 제자 중 둘을 보내시며
▶ 감람원이라 불리는 산쪽에 있는 벳바게와 베다니 - 감람원이라는 산은 '감람산' 또는 '올리브산'이라고 하는 예루살렘 교외의 동쪽에 위치한 곳이다.
이 산은 남.북으로 약 4km의 길이가 되며, 예루살렘보다 약간 높은 나즈막한 산이다.
이 산에 벳바게라는 지명이 언급되는데 신.구약 성서 전체에 걸쳐 오직 이 이 내용에서만 나오는 지명이다.
(마 21:1 그들이 예루살렘에 가까이 가서 감람 산 벳바게에 이르렀을 때에 예수께서 두 제자를 보내시며;
막 11:1 그들이 예루살렘에 가까이 와서 감람 산 벳바게와 베다니에 이르렀을 때에 예수께서 제자 중 둘을 보내시며).
탈무드에서는 이 곳이 감람산 서쪽에 있는 것으로 언급되기도 하나 확인할 길이 없다.
다만 베다니라는 지명과 함께 사용된 점으로 보아 베다니 근처, 혹은 인접한 곳에 위치한 마을 이름인 것 같다(Lightfoot, Godet).
한편 사랑의 집이라는 뜻을 가진 '베다니'는 예루살렘으로부터 약 3.5km, 그리고 여리고로부터 약 24km 정도 떨어진 곳으로, 감람산 동쪽에 위치한 마을이다.
현재는 '엘 라자리'(El Azariyeh) 혹은 '라자리에'라는 지명으로 알려져 있는데 아마도 마르다, 마리아, 그리고 나사로의 이야기에서 유래된 듯하다. *참조-(요 11:1-44).
▶ 제자 중 둘 - 본문에서 어느 제자를 보냈는지 알 길이 없으나 22:8에서 유월절 식사를 준비하기 위해 베드로와 요한을 보낸 점을 보아 역시 여기서도 베드로와 요한인 듯하다.
(22:8 예수께서 베드로와 요한을 보내시며 이르시되 가서 우리를 위하여 유월절을 준비하여 우리로 먹게 하라)
[눅 19:30] 이르시되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아직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가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라
▶ 너희는 맞은편 마을 - 29절의 언급 내용으로 보아 벱바게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Bruce).
▶ 아직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새끼 - 이같은 묘사는 슥 9:9의 예언의 성취라 볼 수 있다.
(슥 9:9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즉 예수는 기치창검(旗幟槍劒)의 군대를 거느린 무력의 왕으로서가 아니라
'바다에서 바다까지 강에서 땅 끝까지 화평을 선포하는'(슥 9:10) 평강의 왕으로서, 예루살렘에 입성하고자 하신 것이다.
그리고 아무도 타지 않은 나귀를 구하신 것은 제물에 바치는 정결한 짐승을 구별하는 종교적 의식법에 맞추려고 한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민 19:2 여호와께서 명령하시는 법의 율례를 이제 이르노니 이스라엘 자손에게 일러서 온전하여 흠이 없고 아직 멍에 메지 아니한 붉은 암송아지를 네게로 끌어오게 하고;
신 21:3 그 피살된 곳에서 제일 가까운 성읍의 장로들이 그 성읍에서 아직 부리지 아니하고 멍에를 메지 아니한 암송아지를 취하여;
삼상 6:7 그러므로 새 수레를 하나 만들고 멍에를 메어 보지 아니한 젖 나는 소 두 마리를 끌어다가 소에 수레를 메우고 그 송아지들은 떼어 집으로 돌려보내고).
따라서 예루살렘 입성을 준비하는데 있어서 종교적 신비감까지 느끼도록 함으로써 그 엄숙함을 강조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예수의 지시는 자신의 초자연적 능력을 보여주신 좋은 실례이기도 하다.
이러한 신비적 예지의 표현은 한층 더 예루살렘 입성의 진지함을 증폭시켜 준다.
[눅 19:31] 만일 누가 너희에게 어찌하여 푸느냐 묻거든 말하기를 주가 쓰시겠다 하라 하시매
▶ 주가 쓰시겠다 하라 - 여기서 '주'에 해당하는 헬라어 'κύριος 퀴리오스'가 하나님을 가리키는지 예수 자신을 지칭하는지 또는 나귀의 본래 주인을 가리키는 말로 쓰였는지 분명하게 밝힐 길이 없다.
그러나 33절에 나귀의 주인이 언급된 점으로 보아 나귀의 주인은 아닌듯하다.
혹자는 미리 나귀 주인과 약속하여 나귀를 준비해 두었던 것이라고 말하고, 나귀의 주인이 예수였다고 본다(Wycliffe). 그러나 그런 추측은 적절치 못하다.
현재 나귀를 사용할 사람이 예수라는 점에서 '주'를 예수 자신으로 보는 것이 문맥상 무리가 없다.
따라서 단순히 나귀의 소유주라는 의미의 '주'보다는 신앙적 의미에서 '주'로 이해하는 것이 좋다.
이와 같은 이해는 30절에서 언급된 엄숙한 분위기와 잘 부합되는 것으로서 예루살렘 입성 직전의 종교적 신비감(神秘感)을 읽을 수 있다.
[눅 19:32] 보내심을 받은 자들이 가서 그 말씀하신 대로 만난지라
▶ 말씀하신 대로 만난지라 - 예수가 예견하신 대로 나귀가 묶여있음을 발견하게 되었다.
여기서도 나귀를 사전에 미리 준비해 둔 것인지 또 멀리서 나귀 새끼가 묶여 있는 것을 보고 지시했던 것인지, 아니면 예수의 초자연적 예지 능력으로 된 것인지 밝혀져 있지 않다.
이중 예수의 신비적 능력으로 이해하는 것이 가장 타당한 듯하다.
그러나 이같은 초자연적 능력에 대한 묘사는 예지 능력 자체에 강조점을 둔 것이라기 보다는 예루살렘 입성의 종교적 엄숙성 또는 예언 성취의 경이감을 표현하는데 관심을 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마 21:4 이는 선지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눅 19:33] 나귀 새끼를 풀 때에 그 임자들이 이르되 어찌하여 나귀 새끼를 푸느냐
▶ 그 임자들이 이르되 어찌하여 나귀 새끼를 푸느냐 - '임자들'이란 나귀 주인을 가리키는데 평행 본문 막 11:5에서는 '거기 섰던 사람 중 어떤 사람'이라고 다소 불명확하게 언급한다.
(막 11:5 거기 서 있는 사람 중 어떤 이들이 이르되 나귀 새끼를 풀어 무엇 하려느냐 하매)
또한 그들이 묻는 물음도 누가는 남의 것을 왜 푸느냐는 식의 물음인데 반해,
마가는 '나귀 새끼를 풀어 무엇하려는가'하고 물음으로써 소유권에 대한 전제 없이 나귀 새끼의 용도에 대해 묻고 있는 점이 서로 다르다.
어쨌든 이야기의 전개는 예수께서 예견하신대로 되어갔다.
그리고 본 구절의 물음은 무슨 권위로 남의 짐승을 가져가느냐는 의미일 수도 있으나, 아직 새끼에 불과한 나귀를 끌고 가서 무엇에 쓰려는가 하는 의미로도 이해된다.
[눅 19:34] 대답하되 주께서 쓰시겠다 하고
▶ 주께서 쓰시겠다고 하고 - 이 말에 대해 나귀의 주인들이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는 전혀 언급이 없다. 그러나 아무런 언급이 없다는 것은 곧 주인들이 제자들의 말을 인정했다는 암시를 준다.
따라서 주인들이 이미 예수에 대하여 알고 있었던 사람들이었으리라는 추측이 가능해진다. 어쨌든 이같은 묘사는 예수의 초능력적 예지(豫知) 능력 또는 철저한 예언 성취 등을 알게 하는 것이며 그럼으로써 예루살렘 입성이 하나님의 섭리(providence)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임을 시사한다.
[눅 19:35] 그것을 예수께로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나귀 새끼 위에 걸쳐 놓고 예수를 태우니
▶ 겉옷을 나귀 새끼 위에 걸쳐 놓고 - 나귀 등에다 겉옷을 걸친 것은 안장 대신 사용하기 위함이기도 했지만 왕이나 귀인에게 보이는 일반적인 존경의 표시로도 간주될 수 있다.
(왕하 9:13 무리가 각각 자기의 옷을 급히 가져다가 섬돌 위 곧 예후의 밑에 깔고 나팔을 불며 이르되 예후는 왕이라 하니라).
그리고 타 복음서와는 달리 여기서는 예수 스스로 나귀 위에 탄 것이 아니라, 제자들이 예수를 태웠다고 묘사한다.
이같은 누가의 독특한 묘사 또는 예수께 대한 제자들의 존경을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왕상 1:33 왕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너희 주의 신하들을 데리고 내 아들 솔로몬을 내 노새에 태우고 기혼으로 인도하여 내려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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