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오래 참고 4
성 경 [고전 13:8-13] 사랑은 언제까지나 떨어지지 아니하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9) 우리는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10)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
11)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12)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13)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
[고전 13:8] 사랑은 언제까지나 떨어지지 아니하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
여기 이 말씀은,
(1) 사랑이 내세에까지 들어가서도 폐지되지 않는다는 것과,
(2) 예언, 방언, 지식등(知識等)은 내세에 이르러서는 폐지된다는 사실을 말해 준다.
바울은 이렇게 말함으로, 사랑과 내세와의 관련성을 가르친다.
바울이 여기서 "사랑은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아니한다"고 할 때에, 사랑이 이 세상에서도 존속(存續)함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런 캄캄한 세상에도 내세의 요소(要素)가 있음을, 우리는 알 수 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고,
(요일 4:8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그의 사랑은 독생자를 보내시어 화목 제물로 삼으신 사건으로 나타내셨다.
(요일 4:10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이 속죄의 사랑은 이 세상 어디서 움직이고 있는가?
그것은 물론 기독자의 심령에 움직이고 그 생활에 나타나도록 되어 있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셨지만, 우리는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우리의 육체에 채움으로 이 사랑을 체현(體現)한다.
(골 1:24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사랑은 수고이다.
(살전 1:3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끊임없이 기억함이니).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란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그리스도의 대속적(代贖的) 고난은 아니다.
대속적 고난은 하나님 아들께서만이 감당하실 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란 것은 우리가 믿는 주님을 위하여 사람들이 당해야만 되는 고난을 의미한다.
기독자는 벌써 천국(天國)을 그 심령 속에 가지고 있다.
그가 사랑의 생활을 힘쓸수록 그는 더욱 천국 맛을 보게 된다.
고난에 참예함이 사랑의 생활인데, 그것으로 말미암아 내세와 부활에 대한 확신을 가지게 되어진다.
그러므로 바울이 빌 3:10-11에 말하기를,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 받아 어찌하든지 죽은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라고 하였다.
또 요일 4:16-18엔 말하기를,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 안에 거하시느니라 이로써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룬 것은 우리로 심판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함이니 주의 어떠하심과 같이 우리도 세상에서 그러하니라"고 하였다.
[고전 13:9-10] 우리는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10)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 -
여기서부터 12절까지는, 이 세상에서 신자들이 받는 하늘나라의 지식이 부분적(部分的)의 것인 사실을 밝힌다.
"온전한 것이 올 때"는 내세가 완전히 나타나는 때를 이름이다.
그런데 이 세상에서는 내세가 부분적으로만 알려진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은 이렇다. 곧,
(1) 이 세상은 죄악 세상이니, 죄 많은 인생이 내세의 형편에 대하여 모르는 것이 없을 수 없다.
죄는 곧, 어두움이다. 죄 있는 인간으로서는 별수 없이 내세에 대하여 전적이해(全的理解)를 가질 수 없다. 그는 이와 같이 어두움의 벌을 받아야 합당하다.
이 어두움은 그의 성결(聖潔)이 진보(進步)함에 따라서 조금씩 벗어진다.
그는 하늘나라에 대하여 좀 더 알기 위하여 더욱 착한 일을 힘쓰며 성결을 힘쓴다.
(2) 죄 있는 인생으로서는 완전한 계시(啓示)의 빛을 감당하지 못한다.
예수님께서 게네사렛 호수에서 베드로를 지도하시어 고기를 많이 잡도록 하셨을 때에, 베드로는 말하기를,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하였다(눅 5:8).
불완전하고 죄 많은 인생은 완전한 지식을 감당하지 못한다.
그는 그런 지식으로 인하여 유해무익(有害無益)한 반응을 가지게 된 것이다.
가령 우리가 별세할 날자를 알고 살기가 좋을까?
차라리 그 날자를 모르고 사는 것이 좋다.
하나님에게 속한 높은 지식은 도리어 이 세상에 사는 우리에게는 너무 밝은 때문에 가리워져 있다.
"하나님은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신다"고 하였으니(딤전 6:16), 어찌 불완전하고 죄 많은 인생이 내세의 전체적 나타남을 감당할 수 있을까?
하나님은 사랑이시나, 그 사랑의 어떤 방면은 지금 땅 위의 사람으로서 감당하기 어렵다.
병아리가 바깥세상의 공기에 견딜만치 털이 자라나기 전에는 달걀껍질 속에서 나오지 못한다. 그것이 바깥세상에 나온 때엔 물론 바깥세상이 그에게 유익하고 편리하다.
(3) 인생은 현세에서는 믿음을 연습하기 위하여 있다.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을 상대하고 움직인다. 롬 8:24에 말하기를,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라고 하였다.
하나님과 신자의 관계는 영원토록 믿음의 관계니,
(고전 13:13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
신자로서는 땅위에서 믿는 일을 전무(專務)하여야 된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 하는 것들의 증거"라고 하였다.
보이지 않는 것을 상대로 하고야, 믿음의 연습과 연단은 생긴다.
벧전 1:7에 말하기를,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고 하였다.
[고전 13:11]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
이 귀절은, 위에 관설된 "부분적"지식이 어떤 것임을 밝혀 준다.
그것은 비유컨대 "어린 아이"의 지식과 같다.
어린아이의 지식은 어떤 것인가? 어린 아이의 지식은, 비판적(批判的)이 못되며, 사색적(思索的)이 못된다. 그들은 감각적(感覺的)이다. 이것은 사람이 현세 생활에서 가지는 지식 방법을 표본으로 보여준다. 그들은 자기중심(自己中心)이며 주관적(主觀的)이고, 객관적(客觀的)인 하나님에게 대하여는 무관심(無關心)하다.
여기 우리 본문에 "장성한 사람"은 비교적 판단력이 많아서 주관적지각(主觀的知覺)보다 객관적 지식을 귀하게 여김이 아이들보다 많다. 이것은 내세에 사는 사람들의 지식 방법을 어느 정도 표본적으로 비유한다. 내세에 들어간 사람은 주관주의(主觀主義)를 전연 버리고, 하나님을 중심한 지식을 실체화(實體化)하여 거기서 움직인다.
그러나 이 세상 사람들이 안다고 하는 지식은 어떠한가?
(1) 그것은 참으로 어린 아이들의 놀음에 불과하다.
현대인들은 너무도 주관적이고 감각적(感覺的)이다.
과학적 지식(科學的知識)이란 것은, 감각주의에 속하는 것이다.
(2) 현대인들은 당면한 세계 문제 해결을 위하여 하나님의 보좌를 생각하지 않고 모스크바와 워싱톤을 바라보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보좌를 바라볼 뿐이다.
계시록 4-5장에만도 하나님의 "보좌"란 말이 16번이나 나타난다.
(3) 이 세상 사람들은 이 세상과 역사를 모두 상대적가치(相對的價値)의 것이라고 하면서, 실제에 있어서는 저렇게 역사적 원리로만 표준 삼아 모든 것의 시비(是非)를 논하고, 역사를 초월한 이적은 부인한다.
(4) 이 세상 사람의 과학이, 다른 것은 다 행할 수 있을는지 모르나 인간의 심령을 통솔하지는 못한다.
인간의 마음을 통솔하는 것만이 세계 평화의 해결책이다.
그것을 통솔한 자는 하나님의 말씀 밖에 없다.
그러나 현대인은 하나님 말씀을 가장 낮추며 업신여긴다. 이것이 유치한 지혜이다. 요컨데 어린아이는 그 현재(現在) 그 현재만 느낄 줄 아나 미래(未來)를 예비할 줄은 모른다.
그들은 그 현재의 고통을 느껴 울 뿐이고 장래의 고통을 면할 줄은 모른다.
그들은 미래를 내다보지 못한다. 그뿐 아니라 그들은 보이지 않는 실유(實有)에 대하여 생각할 줄 모른다.
그러므로 그들은 신령한 이치를 깊이 깨닫지 못한다.
그들은 보이지 않는 것을 두려워할 줄 모른다. 어른들도 이 세상에선 아이들과 같다. 그들도 신령한 것을 업신여기는 일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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