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후서

나는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 내가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였으므로

거듭난 삶 2025. 11. 27. 0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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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의 증거

바울의 부활론(1)

고린도전서 151-58

 

(2) 부활의 증거

 

성 경: [고전 15:6-11]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태반이나 살아 있고 어떤 이는 잠들었으며

7)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

8)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9) 나는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 내가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을 받기에 감당치 못할 자로라

10)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11) 그러므로 내나 저희나 이같이 전파하매 너희도 이같이 믿었느니라.(개역한글판)

 

이렇게 나타나 보이신 후 오백여 이상의 형제에게 동시에 나타나 보이셨다. 그 형제 중 거의는 지금도 세상에 있다. 그러나 이미 잠든 자도 있다.

7) 그 후 여고보에게 나타나 보이시고 또 모든 제자에게 나타나 보이셨다.

8) 최후에 달이 차지 못해 난 자와 같은 내게도 나타나 보이셨다.

9) 나는 실로 사도 중 지극히 작은 자로서 사도라고 불리기에 족하지 못한 자이다. 그것은 내가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했기 때문이다.

10)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나는 오늘 있을 수 있었다. 내게 주신 그의 은혜는 헛되지 않았다. 도리어 나는 모든 사도보다도 많이 수고했다. 하지만 이는 내가 아니다. 나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의 은혜이다.

11) 이러므로 나나, 또 그들이 나 우리가 같이 전파한다. 그리하여 너희는 그렇게 믿었다(6-11,일본어역).

 

 

부활은 철학적 제설이 아니다. 또 과학적 가설이 아니다.

부활은 역사적 사실이다.

 

즉 정직한 사람이 눈으로서 보고, 손으로서 만진 것이다.

 

말이 있다.

즉 세상에 사실 만큼 완고한 것 없다고 학설은 없어지고 논리는 사라지는 일 있대도, 사실은 영구히 변하는 일 없다. 세상에 사실을 파괴하기에 족한 의론 없다.

 

부활이 사실일 것인가?(그리고 우리들은 그것이 사실임을 안다)

지자(知者)의 박격(搏擊), 식자의 조소도, 그것으로서 이를 무너뜨리기는 족하지 못하다.

 

사도가 부활을 창도하는데 주저치 않음은 그들이 그것이 [교묘한 기담]이 아니라,

 

그들이 듣고 눈으로 보고 정중히 보고 손으로 만진 것(요한 제11:1)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나타나 보이신 후 오백여 이상의 형제에게 동시에 나타나 보이셨다. 그 형제 중 거의는 지금도 세상에 있다. 그러나 이미 잠든 자도 있다.

7) 그 후 여고보에게 나타나 보이시고 또 모든 제자에게 나타나 보이셨다(6-7).

 

그리스도는 죽으신 후 게바에게 나타나 보이시고, 12사도에게 나타나 보이시고, 500이상의 제자들에게 동시에 나타나 보이셨다.

 

그 형제 야고보에게 나타나 보이시고, 막달라 마리아, 요안나,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 또 달리 함께 있던 여자들에게 나타나 보이시고,

 

(누가복음 24:10 (이 여자들은 막달라 마리아와 요안나와 야고보의 모친 마리아라 또 저희와 함께한 다른 여자들도 이것을 사도들에게 고하니라))

 

최후에 바울에게 나타나 보이셨다고 한다.

 

그렇듯 다른 때에 다른 사람에 의해 목격된 그리스도의 부활은 이것을 역사적 사실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 학리적 설명 여하는 오인이 여기서 물으려하는 바가 아니다. 설명이 어렵다는 것은 그것으로서 사실의 진위를 정하기에 족하지 못하다.

 

우리는 먼저 사실을 믿으려 할 뿐, 그런 후에 설명을 시도할 뿐, 바울은 먼저 사실을 보여주고 그런 후에 설명에 미치었다. 이는 모든 경우에 있어서의 연구의 정당한 순서라고 할 것이다.

 

바울은 자기를 일컬어, 달이 차지 못해서 난자 같은이라고 했다.

 

그는 정당한 순서를 거치지 않고서 그리스도에게 온 자, 그러므로 그는 이렇게 불렀으리라.

 

사람에게서가 아니라 또 사람에 의해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죽음에서 다시 살리신 아버지 하나님에 의해 선 사도바울(갈라디아서1:1)

 

교회에 의해서가 아니라 다른 사도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곧 하나님에 의해 세워진 그는 때로는 달이 차지 못해서 난 기형어처럼 느낀 것으로 보인다.

이는 그에게 있어서는 겸손한 말이며 또 감사의 말이다.

 

혹은 말한다.

 

달이 차지 못한 아이란 당시외 교회 신자가 그를 조소하여 그에게 부여한 이름일 것이라고.

 

어쩌면 그러리라. 그리고 저 바울은 교회 신자의 악의에서 나온 그러나 의미 깊은 이 별명을 기꺼이 자기에게 받았으리라.

 

달차지 못한 자, 기형아, 문외한 . .

옳다. 대적의 말도 이것을 호의적으로 해석하면 또 하나님의 말씀이다.

바울은 특히 이 별명을 택하여 그의 별명으로 했을 것이다.

 

최후에 달이 차지 못해 난 자와 같은 내게도 나타나 보이셨다.(8)

 

그리스도는 나(바울)에게도 나타나 보이셨다.

 

옳다. 지극히 작은 자,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한 죄인의 괴수인 내게도 나타나 보이셨다.

나는 이 특권에 참여한 이 비천한 나에 대하여 일언치 않을 수 없다.

 

나는 사도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오늘 있을 수 있는 자이다.

나는 많이 하나님 위해 수고했다 하지만 이는 내가 애쓴 것이 아니다.

나와 함께 있는 하나님의 은혜가 그렇게 만든 바라고.

 

은혜와 특권은 사람을 오만으로 몰아넣기 쉽다.

바울은 언제나 그의 마음에 이 위험 있음을 느꼈다.

그러므로 그가 그리스도의 부활을 목격한 특권을 말함에 있어서, 그는 여기서 그가 참으로 무엇인가에 대하여 일언치 않을 수 없었다.

이것 물론 본론의 주제인 부활 문제와 아무런 관계없다.

 

하지만 잘 논자의 이에 대한 태도를 보여주고, 그의 변명으로 하여금 일층 근엄한 것 되게 했다.

 

나는 실로 사도 중 지극히 작은 자로서 사도라고 불리기에 족하지 못한 자이다. 그것은 내가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했기 때문이다.

10)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나는 오늘 있을 수 있었다. 내게 주신 그의 은혜는 헛되지 않았다. 도리어 나는 모든 사도보다도 많이 수고했다. 하지만 이는 내가 아니다. 나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의 은혜이다(9-10).

 

부활은 바울의 독특한 교의가 아니다.

사도라 칭하는 사도는 모두 한가지로 이것을 전파했다.

 

나나 그들이나, 우리(모두) 이같이 전파했다.

 

즉 그리스도는 우리의 죄 위해 죽으시고 장사되었다가 제3(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셨다고 전파했다고.

 

옳다. 요한도 베드로도, 야고보도, 바나바도, 아볼로도, 실라도, 이것을 전파함에 있어서는 아무 다를 바 없었다.

 

요한은 사랑을 말하고 부활을 언급치 않았다고 하는 자는 요한을 모르는 자이다.

아볼로는 구원의 철리를 말하고 부활에 무게를 두지 않았다고 말하는 자는 아볼로를 모르는 자이다.

 

초대의 그리스도교에 부활을 그 근본적 교의로 하지 않은 자는 없었다. 이것 역시 가릴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다.

 

이러므로 나나, 또 그들이 나 우리가 같이 전파한다. 그리하여 너희는 그렇게 믿었다(11)

 

너희는 그렇게 믿었다.

 

전도사는 그렇게 전했다. 신자도 그렇게 믿었다.

 

그 신앙 일어난 후에 사람은 비로소 그리스도 신자로서 인정되었다.

 

그때 아직 부활을 믿지 않는 그리스도 신자란 없었다.

그때 아직 윤리적 그리스도 신도라는 자는 없었다.

 

그때 사도는 주로서 그리스도 부활의 증명자였다.

 

(사도행전 1:22 항상 우리와 함께 다니던 사람 중에 하나를 세워 우리로 더불어 예수의 부활하심을 증거할 사람이 되게 하여야 하리라 하거늘)

 

그리고 신도란 이 증명의 긍낙(肯諾)()였다.

 

오인(吾人) 오늘에 이르러 이 한 가지를 잊지 말아야 한다.

 

*내촌감삼의 글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