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후서

내가 비록 말에는 졸하나 지식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거듭난 삶 2026. 2. 5. 0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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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짓 사도들 2

 

성 경: [고후 11:4-15] 만일 누가 가서 우리의 전파하지 아니한 다른 예수를 전파하거나 혹 너희의 받지 아니한 다른 영을 받게 하거나 혹 너희의 받지 아니한 다른 복음을 받게할 때에는 너희가 잘 용납하는구나

5) 내가 지극히 큰 사도들보다 부족한 것이 조금도 없는 줄 생각하노라

6) 내가 비록 말에는 졸하나 지식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이것을 우리가 모든 사람 가운데서 모든 일로 너희에게 나타내었노라

7) 내가 너희를 높이려고 나를 낮추어 하나님의 복음을 값없이 너희에게 전함으로 죄를 지었느냐

8) 내가 너희를 섬기기 위하여 다른 여러 교회에서 요를 받은 것이 탈취한 것이라

9) 또 내가 너희에게 있어 용도가 부족하되 아무에게도 누를 끼치지 아니함은 마게도냐에서 온 형제들이 나의 부족한 것을 보충하였음이라 내가 모든 일에 너희에게 폐를 끼치지 않기 위하여 스스로 조심하였거니와 또 조심하리라

10) 그리스도의 진리가 내 속에 있으니 아가야 지방에서 나의 이 자랑이 막히지 아니하리라

11) 어떠한 연고뇨 내가 너희를 사랑하지 아니함이냐 하나님이 아시느니라

12) 내가 하는 것을 또 하리니 기회를 찾는 자들의 그 기회를 끊어 저희로 하여금 그 자랑하는 일에 대하여 우리와 같이 되게 하려 함이로라

13) 저런 사람들은 거짓 사도요 궤휼의 역군이니 자기를 그리스도의 사도로 가장하는 자들이니라

14) 이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라 사단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

15) 그러므로 사단의 일꾼들도 자기를 의의 일꾼으로 가장하는 것이 또한 큰 일이 아니라 저희의 결국은 그 행위대로 되리라.

 

 

[고후 11:4] 만일 누가 가서 우리의 전파하지 아니한 다른 예수를 전파하거나 혹 너희의 받지 아니한 다른 영을 받게 하거나 혹 너희의 받지 아니한 다른 복음을 받게할 때에는 너희가 잘 용납하는구나

 

누가 - 이들은 가상 인물이 아니라 실제로 고린도 교회에 들어온 거짓 사도들 즉 바울의 적대자임에 틀림없다. 본절만으로 이들이 정체를 밝혀내기는 어렵다. 적어도 이들이 팔레스틴에서 온 자들로서 유대주의를 고수하는 사이비 기독교인들이라 볼 수있다.

 

그 이유는,

 

(1) 이들이 유대인 이었다는 사실,

 

(11:22 그들이 히브리 사람이냐? 나도 그러하며 그들이 이스라엘 사람이냐? 나도 그러하며 그들이 아브라함의 씨냐? 나도 그러하며),

 

(2) 열두 사도를 알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권위를 인정했기 때문이다.

 

다른 예수 - 역사적으로 존재했으며 열 두 제자를 거느렸던 예수를 부인하고 또 다른 예수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본질에 관해 달리 해석하는 것을 가리킨다.

 

가령 예수의 인성(人性)을 인정하지 않는 영지주의적 기독론, 즉 예수는 순수한 인간이 아니라 영적 인간(pneumatiker)또는 신적 인간이라고 주장하는 것을 말한다(Goudge).

 

다른 영을 받게 하거나 혹 너희의 받지 아니한 다른 복음을 받게할 때에는 - 이것은 '다른 예수'에서 파생되어 나온 말이다. '다른'이란 말이 계속 반복적으로 사용된 것은 거짓 사도들의 가르침이 진리가 아님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다른 복음'에 대해서는 갈 1:6-9 에서 언급되고 있는데,

 

(1:6-9 그리스도의 은혜 안으로 너희를 부르신 분을 너희가 이렇게 속히 떠나 다른 복음으로 옮겨가는 것을 내가 이상히 여기노라.

7 그것은 또 다른 참 복음이 아니며 다만 너희를 어지럽히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왜곡하려 하는 자들이 더러 있도다.

8 그러나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선포한 복음 외에 어떤 다른 복음을 너희에게 선포하면 그는 저주를 받을지어다.

9 우리가 전에 말한 것 같이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어떤 사람이 너희가 받아들인 것 외에 어떤 다른 복음을 너희에게 선포하면 그는 저주를 받을지어다)

 

그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을 말하는지는 분명치 않지만, 십자가의 죽음을 통한 대속의 도를 부정하는 것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1:4 그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에 따라 이 악한 현 세상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의 죄들로 인하여 자신을 주셨으니).

 

그리고 '다른 영'이 평강과 자유의 영(3:17;14:17)

 

(3:17 이제 []께서는 그 []이시니 [][]이 계신 곳에는, 거기에는 자유가 있느니라;

 

14:17 [하나님]의 왕국은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님] 안에서 의와 화평과 기쁨이니라)

 

반대되는 두려움과 종의 영(8:15;딤후 1:7)과 같은

 

(8:15 너희는 다시 두려움에 이르는 속박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 삼으시는 []을 받았느니라. 그분을 힘입어 우리가, 아바, [아버지], 하고 부르짖느니라;

 

딤후 1:7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두려움의 영을 주지 아니하시고 권능과 사랑과 건전한 생각의 영을 주셨느니라)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는지는 확실치 않다(Harris).

 

잘 용납하는구나 - 이것은 고린도 교인들의 실망스러운 행위에 대한 풍자적 비난일 수도 있고(Robertson), 고린도 교인들이 '다른 예수', '다른 영', '다른 복음'을 전한 자들의 말에 대해 잘 들어주는 관용을 보였던 만큼 바울 자신에게도 마찬가지의 관용을 보여달라는 요청일 수도 있다(Barrett, Harris).

 

 

[고후 11:5] 내가 지극히 큰 사도들보다 부족한 것이 조금도 없는 줄 생각하노라

 

지극히 큰 사도들보다 부족한 것이 조금도 없는 줄 생각하노라 - 여기서 바울은 자신을 다른 사도와 비교하려는 의도로 이 표현을 사용한 것이 아니다. 다만 굳이 비교해서 말한다 하더라도 자신은 조금도 뒤지지 않기에 자신의 사도적 권위가 확실함을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이것은 고린도 교인들이 바울의 어리석음을 용납해야 할 이유이기도 하다(Harris).

 

한편 본문의 '지극히 큰 사도들'이 누구를 가리키는가에 대해서는 대체로 학자들 간에 두 가지 견해로 나뉘어진다.

 

(1) 그것은 고린도 교회에 들어온 거짓 사도들이 예루살렘의 사도들을 지칭한 것을 인용한 것이라고 보는 견해가 있다(Bruce, Hering, Harris)

 

(2) 13, 15절에 나오는 거짓 사도들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보는 견해가 있다. (Lowery, Robertson, Farrar).

 

'지극히 큰 사도'가 거짓 사도를 가리키는 것이라면 바울은 그들과 자신을 비교하는 것이 된다. 이 문제에 대해 볼트만(Bultmann)은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로 하여금 눈을 뜨게 하기 위하여 거짓 사도들과 자신을 비교하는 것은 이해할 수 있는 일이라고 보며, 그 근거로 6절의 '말과 지식'에 관한 바울의 진술을 인용했다.

 

그러나 캐제만(Kasemann)은 바울이 거짓 사도들과 자신을 서로 비교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바울은 그리스도의 종 인데 반해, 거짓 사도들은 사단의 종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울이 이미 첫 번째 서신에서 자신과 예루살렘의 사도들을 비교한 적이 있으며,

 

(고전 9:1 내가 사도가 아니냐? 내가 자유로운 자가 아니냐? 내가 예수 그리스도 우리 []를 보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는 [] 안에서 행한 나의 일이 아니냐?;

 

15:5-8 게바에게 보이시고 다음에 열두 제자에게 보이셨다는 것이라.

6 그 뒤에 그분께서 오백여 형제에게 한 번에 보이셨는데 그중의 대다수는 지금 이때까지 남아 있고 어떤 사람들은 잠들었느니라.

7 그 뒤에 그분께서 야고보에게 보이시고 다음에 모든 사도에게 보이셨으며

8 맨 마지막에는 정한 때를 벗어나서 태어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나니,

 

10 [하나님]의 은혜로 내가 지금의 내가 되었으니 내게 베푸신 그분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그들 모두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다)

 

또한 갈 2:9에서 예루살렘의 기둥 같은 세 신도에 대해 언급한 적이 있으므로 첫 번째 견해가 더 타당하다.

 

 

[고후 11:6] 내가 비록 말에는 졸하나 지식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이것을 우리가 모든 사람 가운데서 모든 일로 너희에게 나타내었노라

 

말에는 졸하나 - '졸하나'에 해당하는 헬라어 'διώτης 이디오테스''평범한'의 뜻으로 특별한 재주를 갖지 못하고 특별히 훈련받지 않아서 다른 사람에 비해 보잘 것 없는 상태에 있는 것을 나타낸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말을 잘하는 것' 즉 수사학적 웅변술(雄辯術)이 있느냐 없느냐로 사람의 가치를 측정하는 것이 적대자들의 기준이냐 아니면 고린도 교인들의 기준이냐 하는 점이다.

 

혹자는 바울이 바로 앞절에서 자신의 '부족하지 않음'을 말해놓고 금방 하나의 예외를 인정하는 것은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보아, 고린도 교인들이 웅변술에 따라 사도들의 권위를 평가했던 것으로 본다(Harris, Barrett).

그런데 10:10을 참고할 때 자기가 지극히 큰 사도들에 비해 부족한 것이 없다고 말한 것은 외형적인 것을 두고 한 말이 아니었음이 분명하다. 따라서 바울은 본 구절을 통해 자신이 다른 사도들에 비해 부족하지 않다고 주장한 것이 외형적인 것에 있지 않음을 고린도 교인들에게 상기시켰다.

 

한편 본 구절은 지나친 겸손을 나타낸 것이라고 보며 사실과 관계없이 적대자들이 내린 결론을 단지 인정해주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그런데 고린도인들에게 보내는 서신에서 바울 자신이 말로 사람을 사로잡으려 하지 않음을 암시하는 것으로 미루어 볼 때,

 

(고전 1:17 그리스도께서 침례를 주라고 나를 보내지 아니하시고 복음을 선포하라고 보내셨거니와 이 일을 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무효가 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2:4 또 나의 말과 나의 복음 선포를 사람의 지혜의 유혹하는 말들로 하지 아니하고 성령과 권능을 실증함으로 하였으니)

 

사실상 달변(達辯)으로 청중을 사로 잡으려하는 거짓 사도들에 비해 뛰어난 언변을 소유하지 못했음을 인정하는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지식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 바울은 자신이 능숙한 말솜씨를 가지지 못했음을 인정한다. 그러나 그것이 바울의 사도 됨에 결격 사유가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말이란 외적인 것이고 본질적인 것이 아니며 사도됨에 있어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요소는 그가 참다운 지식을 소유했느냐의 여부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지식'은 박학다식(博學多識)과 관련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주신 '계시 지식'을 가리킨다. 거짓 사도들은 사람들을 현혹시키는 박학다식을 소유했으나 바울 자신은 그리스도로부터 계시받은 지식을 소유하고 있기에 그들의 지식과 비교할 수 없는 높은 차원의 지식을 소유한 것이다.

 

우리가 모든 사람 가운데서 모든 일로 너희에게 나타내었노라 - 바울이 참다운 자식을 소유했다는 사실은 단지 자기 혼자만의 주장이 아니라 이미 고린도 교인들 뿐만 아니라 다른 이방 교회들에게 이미 나타내 보인 바 되었음을 의미한다.

다만 문제는 고린도 교인들이 외적인 기준에 집착했기 때문에 바울이 지닌 지식의 본질 및 능력을 보지 못한 데 있었다.

 

(10:7 너희는 겉모습대로 사물을 보느냐? 만일 어떤 사람이 자기가 그리스도의 사람이라고 스스로 믿을진대 이것 즉 자기가 그리스도의 사람인 것 같이 우리도 그리스도의 사람인 것을 스스로 다시 생각할지니라).

 

 

[고후 11:7] 내가 너희를 높이려고 나를 낮추어 하나님의 복음을 값없이 너희에게 전함으로 죄를 지었느냐

 

나를 낮추어 - 이 표현은 포괄적인 의미로 고린도 교인들에 대한 바울의 일반적인 태도, 즉 헌신적이고 자기 희생적인 자세를(4:12) 나타내는 것일 수 있으나,

 

(4:12 그런즉 이처럼 사망은 우리 안에서 일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일하느니라)

 

여기서는 바울 자신이 복음 전파를 위해 사례비를 받지 않은 것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는 것 같다.

 

하나님의 복음을 값 없이 - 이것은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복음을 전하되 그 교회로부터 아무런 물질적 지원을 받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복음을 전하는 자가 듣는 자들로부터 물질적인 생활을 위한 보조(補助)를 받는 것은 당연한 것이며 어쩌면 권리일 수도 있다.

 

(25:4 너는 소가 곡식을 밟을 때에 소의 입에 마개를 씌우지 말라;

 

10:7 바로 그 집에 머물며 그들이 주는 것들을 먹고 마시라. 일꾼이 자기 품삯을 받는 것이 마땅하니라. 이 집에서 저 집으로 가지 말라).

 

고린도 교회의 거짓 사도들은 고린도 교인들로부터 물질적 지원을 받았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바울은 그들에게 물질적 도움을 받지않고 스스로 장막 만드는 일을 하여 생계를 유지했다.

 

(18:1-3 이 일들 뒤에 바울이 아테네를 떠나 고린도에 이르러

2 본도에서 태어난 아굴라라 하는 어떤 유대인을 만났는데 (클라우디우스가 모든 유대인에게 명령하여 로마를 떠나게 하였으므로) 그가 자기 아내 브리스길라와 함께 최근에 이탈리아에서 왔더라. 그가 그들에게로 가서

3 생업이 같으므로 그들과 함께 머물며 일하니라. 그들은 그들의 직업으로 보면 천막을 만드는 사람들이더라;

 

살전 2:9 형제들아, 우리의 수고와 해산의 고통을 너희가 기억하나니 우리가 너희 중의 아무에게도 폐를 끼치지 아니하려 하였으므로 밤낮으로 수고하며 너희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선포하였노라;

 

살후 3:8 누구의 빵이든 거저먹지 아니하였으며 너희 중의 아무에게도 폐를 끼치지 아니하려고 수고와 해산의 고통 속에서 밤낮으로 일하였나니).

 

바울은 첫 번째 서신에서 밝힌 바대로 자기가 복음을 전파하는 자로서 생활을 위한 보조를 받을 권리가 있음을 알고 있었지만 자신이 그 권리를 주장하지 않는다고 했다.

 

(고전 9:4-18 우리에게 먹고 마실 권리가 없느냐?

5 우리에게 다른 사도들이나 []의 형제들이나 게바와 같이 자매 곧 아내를 데리고 다닐 권리가 없느냐?

6 나와 바나바만은 일하지 아니할 권리가 없느냐?

7 어느 때고 누가 자기 비용을 들여 전쟁에 나가느냐? 누가 포도원을 만들고 그것의 열매를 먹지 아니하느냐? 누가 양 떼를 먹이고 그 양 떼의 젖을 먹지 아니하느냐?

8 내가 사람으로서 이것들을 말하느냐? 율법도 같은 것을 말하지 아니하느냐?

9 모세의 율법에, 너는 곡식을 밟는 소의 입에 마개를 씌우지 말라, 하고 기록되었나니 [하나님]께서 소들을 위해 염려하시느냐?

10 아니면 전적으로 우리를 위해 그것을 말씀하시느냐? 틀림없이 이것은 우리를 위해 기록되었나니 밭을 가는 자는 소망 중에 갈며 소망 중에 타작하는 자는 자기의 소망에 참여하는 자가 되어야 마땅하니라.

11 우리가 너희에게 영적인 것들을 뿌렸은즉 너희의 육적인 것들을 거둔다 해도 그것이 큰일이냐?

12 다른 이들이 너희에 대한 이 권리에 참여하거든 하물며 우리는 더 그리하지 아니하겠느냐?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이 권리를 쓰지 아니하고 모든 것을 참는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가로막지 아니하려 함이라.

13 거룩한 것들에 관하여 섬기는 자들이 성전에 속한 것들로 사는 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제단에서 섬기는 자들이 제단과 함께 헌물에 참여하는 자들임을 알지 못하느냐?

14 이와 같이 []께서도 복음을 선포하는 자들이 복음으로 살 것을 정하셨느니라.

15 그러나 내가 이런 것들을 하나도 사용하지 아니하였고 또 내게 이같이 해 달라고 이것들을 쓰지 아니하였나니 내가 죽는 것이 누가 나의 자랑하는 것을 헛되게 만드는 것보다 나으리라.

16 내가 복음을 선포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나니 이는 필연적으로 내가 해야 하기 때문이라. 만일 내가 복음을 선포하지 아니하면 참으로 내게 화가 있으리로다

17 내가 자원하여 이 일을 하면 보상을 얻으려니와 내 뜻에 반하여 한다 할지라도 복음의 분배 사역을 내가 맡았노라.

18 그런즉 나의 보상이 무엇이냐? 진실로 내가 복음을 선포할 때에 그리스도의 복음을 값없이 선포하고 이로써 복음 안에 있는 나의 권리를 남용하지 아니하는 것, 그것이로다).

 

그것은 순전히 고린도 교인들의 유익을 위해 바울이 내린 목회자적 판단이었다.

그런데 거짓 사도들은 바울의 이런 자세를 공격의 소재로 삼았던 것 같다. 본절에는 자세히 언급되어 있지 않지만 그들이 바울을 공격한 논리는 다음과 같았을 것이다.

 

즉 사도라면 그가 복음을 전하는 자로서의 당연한 권리로 생활비를 받아야 한다. 자신들이 그 권리를 행사하고 있는데 비해 바울은 그렇게 하지 않고 있다. 그것은 곧 그가 참다운 귄리를 지닌 사도가 아니라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당시 헬라 세계에서 선생들은 돈을 받고 가르침을 베풀었고 그런 문화에 익숙해 있던 고린도 교인들은 이런 논리에 쉽게 현혹(眩惑)되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고린도 교인들은 복음의 본질, 즉 자기를 낮춰 인간을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도를 알아야 했다. 바울은 철저하게 이 복음을 따라 살았다. 그가 복음을 전하며 값을 받지 않은 것은 그리스도와 같이 자기를 낮추고 대신 고린도 교인들을 높이기 위한 것이었다. 바울 자신은 육신적으로 빈곤하게 살더라도 고린도 교인들은 영적으로 부유해지기를 바라는 것이 바울의 목회자적 관심이었다.

 

(4:12 그런즉 이처럼 사망은 우리 안에서 일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일하느니라).

 

고린도 교인들은 바울의 이러한 행위에서 드러나는 사도적 삶과 메세지의 본질을 정확하게 구별했어야 한다.

 

죄를 지었느냐 - 참과 거짓을 구별하지 못하고 있는 고린도 교인들에 대한 바울의 안타까운 심정이 잘 나타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