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라디아서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거듭난 삶 2026. 5. 30. 0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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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디아인의 변신

 

갈라디아서 16-10: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따르는 것을 내가 이상하게 여기노라

7)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교란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려 함이라

8) 그러나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9)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가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10)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갈라디아인은 일단은 열심으로 바울이 말한(전한) 복음을 믿었다.

 

그런데 바울의 뒤에 와서 그와 신앙을 달리하는 전도사의 전도를 받고서

곧 전자를 버리고 후자를 따랐다.

 

그들의 경우에 있어서 그들은 본래의 우상교로 돌아간 것은 아니다.

하나의 그리스도교에서 다른 그리스도교로 옮긴 것이다.

 

바울 때에 이미 몇 개의 그리스도교가 있었다. 인간이 있을 동안 종파는 근절되지 않으리라.

그러나 종파는 있어야 할 것은 아니다.

그리고 열성 불타듯 하는 바울 같은 사람에게 있어서는 세상에 하나 이상의 복음 있다는 것은 견딜 수 없는 모순이었다.

 

그러므로 갈라디아인에게 변신 있다는 것을 들은 그는 그의 놀라움을 발표하여 말했다.

 

[나는 놀란다. 그렇게 속히 너희가 그리스도의 은총으로서

너희를 부르신 이를 떠나 다른 복음에 옮겼다는 것을

이것은 [다른]이라고 하여 복음이 아니다.

어떤 사람 다만 너희를 교란시키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바꾸게 하려는 것이다.

실로 가령 우리들이거나 또 하늘에서의 사자라 하자,

만약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바에 거슬리는 복음을

너희에게 전한다면 그 사람은 저주 받을 것이다.](1:6이하)라고.

 

바울의 놀라움은 이중이었다.

그들의 변신의 빠른 것이 그 하나였다.

그들이 은총의 복음을 떠난 것이 그 이유였다.

아무리 변하기 쉬운 것이 그들의 국민성이라 해도 그렇듯 속히 그들이 변했다는 것은 바울에 있어서 의외였다.

 

특히 어려운 교의라든가 복잡한 의례를 버린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의 은총을 말하는 단순하고도 명백한 복음을 버린 일 그것에 대해 바울은 놀란 것이다.

 

이에 대하여 갈라디아인은 말했다.

 

[우리들은 복음을 버린 것이 아니다. 하나의 복음을 떠나서 다른 더구나 보다 좋은 복음에 옮긴데 지나지 않는다].

 

바울은 이에 답하여 말했다.

 

[복음은 유일하다. 내가 전한 그리스도의 은혜의 복음이다.

이것을 제외하고서 달리 복음은 없다.

만약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복음 아닌 복음이다.

만약 나 자신이라 해도 내가 전한 복음 이외의

복음을 전한다면 나는 아나테마(11347참조)로서 하나님으로부터 끊길 것이다]라고.

 

만약 이러한 일이 지금 있었다고 한다면 비평가는 갈라디아인을 책하기 전에

먼저 바울을 책했으리라.

 

,

 

[갈라디아인은 과연 잘 바울의 복음을 해득했던 것일까?

그렇게도 속히 이를 버린 것을 보면 그들은 처음부터 그 심수에 들어서지 못했던 것이리라.

아직 해득하지도 못했는데 해득했다고 속단한 바울도 또한 얼마쯤

그들의 변신의 책임을 지지 않으면 안 된다.

특히 취하거나 버리거나 각자의 자유이다.

갈라디아인이 만약 보다 좋은 복음을 발견했다고 생각하면

이것을 버리고 저것을 취했대서 그들에게 아무 허물할 것은 없다.

특히 또 자기의 복음에 반대하는 복음을 복음이 아니라 하고

이것을 아나테마로 호칭하는 것은 편협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바울의 열심은 가상할만 하대도 그 협애는 찬상할 바 못된다.

근대인은 주의하여 그의 이 말을 읽어야 할 것이다]라고.

 

하지만 그들 비평가 자신이 바울의 복음을 해득하지 못한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그가 후에 이르러 이 글에 있어서 말한 대로 그의 복음은 간단명료한 것으로서 이에 오해의 여지는 없는 것이다.

 

받느냐 받지 않느냐?

복음에 대하여 우리가 취해야 할 길은 이것을 제외하고 달리 없는 것이다.

 

이 일에 대하여 바울은 뒤에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아, 누가 너희를 으쓱대게 했는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전부는 여기에 있다.

 

이것을 믿느냐, 믿지 않느냐?

문제는 간단하기 그지없다. 그리고 갈라디아인은 일단 이것을 믿고 은혜와 기쁨의 생애에 들어갔던 것이다.

 

그런데 이에 만족치 않아 그리스도의 십자가 이외에 무언가를 요구하여 신앙의 길을 헛딛고 벗어났던 것이다.

 

세상에 아버지의 사랑을 아는데 있어서 신 이외에 길이 있을 리가 없다.

부모를 믿음으로서 그들에 관하여 모두가 명료한 것이다. 그들을 믿지 않을 때 만사가 혼란이다.

 

사도 요한의 말로서 한다면,

 

[대저 하나님은 그 외아들을 주신 정도로 세상의 사람을 사랑하셨다.

이는 모두 그를 믿는 자에게 멸망하는 일 없이

한없는 생명을 받게 하시렴에서이다](요한복음3:16)라는 것으로서

 

복음은 이것으로서 전부인 것이다.

 

[그를 믿는 자에게]이다.

 

[그를 철학적으로 해득하는 자에게]가 아니다.

[자기 의로서 그를 기쁘시게 하려고 하는 자에게]는 아니다.

 

하나님께 가까이하는 것은 부모에게 가까이하는 것과 한가지이다.

다만 신앙으로서이다.

그리고 신앙의 길을 버림으로서 하나님께 가까이 하고 그 은혜에 참여하는 길은 끊어진 것이다.

 

이 같은 데서 바울이 갈라디아인의 변신을 듣고서 놀란 것은 이상치 않다.

또 그가 그의 전한 복음 이외에 복음 없다고 한 것도 무리가 아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응하는데 사람은 신앙으로서 한다]. 복음은 이것으로 전부이다.

 

그런데 갈라디아인은 이것으로서 만족치 않고서 신앙 이외에 하나님의 은혜에 참여하는 길의 필요를 느끼고 이것을 발견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바울의 놀라움, 탄식은 여기에 있었다. 좁고 넓은 것 문제가 아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으로서 만족할 수 없어. 실은 그 사랑의 깊이를 탐득치 못하고서. 이것을 채우는데 다른 길로서 하려 했던 것이다. 바울은 놀라고 어이없어지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기타의 다른 길이란 무엇이었던가 하면 낡은 모세의 율법이었다.

할례를 받는 일이었다. 달과 날과 절기와 해를 지키는 일이었다.

 

(4:10 너희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니).

 

즉 그리스도의 복음을 보충하는데 모세의 율법으로서 하려고 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는 신앙의 역행이다. 신앙만으로서 충분하다는 그것이 신앙의 길이다.

 

이것에 부족을 느끼고 이것을 보충하는데 실은 이에 대신하는데 의식, 또는 조령, 또는 고행으로서 하려 한다. 거기에 신앙의 타락이 있다.

 

바울은 이것을 갈라디아인에 있어서 보고 탄식하여 말했던 것이다.

 

[너희가 어찌하여 약하고 하찮은 소학으로 돌아가 다시 그 노예 되기를 바라는가](4:9).

 

그리고 이것은 갈라디아인에 한 하는 것 아니다.

세계 어느 민족에게도 있는 일이다.

죄의 사람에게 있어서 믿는 일 만큼 어려운 것은 없다.

그는 무엇을 할 수 있대도 믿는 일만은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는 하나님을 사색한다. 장엄한 의식을 마련한다.

하나님을 제사한다. 또는 난행 고행하여 하나님께 복(은혜) 받음의 자격을 만들고자 한다.

 

하지만 다만 단지 하나님의 사랑을 믿어 옳다.

믿는 것만으로 은혜 입으려하는 것은 그의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므로 자칫하면 그는 신앙의 길을 떠나 기타의 다른 길을 택하는 것이다.

 

대개의 경우는 의식에 달려간다.

침례를 받고 성찬식에 참여하면 그것으로 구원된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누구나가 할 수 있다는 것, 또 단순한 신앙과 달라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듯이 보이는 까닭에 많은 사람은 이 길로 달려가는 것이다.

 

말이 있다. , [사람이 태어나면서부터 로마 천주교도이다]라고.

즉 사람은 생래로 의식의 종교를 좋아한다는 것이다.

 

오늘 일본에 있어서도 로마 천주교회가 많은 귀의자를 얻기에 이른 그 이유의 하나는 확실히 여기에 있는 것이다.

 

특히 종교를 예술시 하려는 오늘의 일본인에게 있어서 로마 천주교회가 동경의 표적(중심)되는 것은 이상히 여길 것 못된다. 우리 가시와끼의 무리 중에서 마저 천주교회로 달려간 자가 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갈라디아인이 바울의 복음을 떠난 것 같이 우리 가시와끼의 신앙을 떠난 일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이다.

그것을 목격하는 내 마음이 괴로움(민망함)이란!

 

하지만 복음의 이반은 의식이 선택에 한하지 않는다.

 

어떤 자는 규칙을 사랑하고, 제도를 사랑하고, 조직된 교회를 사랑한다.

 

그는 단순한 신앙으로는 부족하게 여겨 어떤 정한 된 단체를 요구하고 이것을 만들려하며 이에 들어가려 한다.

 

이는 세상에 허다한 종교단체가 있는 소이이다.

인정의 약함 때문이라고 하면 하는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제도는 전연 무용 아니라 해도, 신앙은 제도 이상의 세력임은 분명하다.

 

그리고 신앙보다도 제도가 중요시 되는 데에 신앙의 타락이 있고 또 제도의 폐퇴가 있다.

 

신앙 치열한 때에 있어서는 사람은 제도의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신자가 제도의 필요를 느끼기 시작한 때는 그의 신앙 냉각이 시작한 때이다.

 

하지만 근대에 이르러 신앙 이반은 새로운 형태를 취했다. 그것은 사회사업의 선택이다.

오늘 사회사업이 신앙의 대용을 하게 되었다.

심한데 이르러서는 그리스도교 즉 사회사업이라고 까지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이 길을 취하는 자는 야고보서 214절 이하에 있어서의 사도 야고보의 말을 방패(무기)로 취하는 것이다.

 

이르기를,

 

[내 형제여 사람이 스스로 신앙이 있다고 하여 만약 행함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랴

그 신앙이 어찌 사람을 구할 수 있으랴,

만약 형제 혹은 자매, 헐벗고 일용할 양식에 부족한데 너희 중 어떤 사람 이에 말하여

평안히 가라. 원하기는 너희는 따뜻이 하고 배부르게 먹을 수 있기를이라고.

그리고 그 신체에 없어서는 안 될 것을 이에 주지 않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랴?

이같이 신앙 만약 행함 없는 때는 죽은 것이다]

 

실로 지당한 말로서 누구도 이에 반대할 수는 없다.

그리고 지금 허다한 사람은 거의 교회 전체가 사도 야고보의 이 소리를 듣고서

사도 바울의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의 복음은 두고서 돌보지 않기에 이르렀다.

 

오늘 사회사업은 교회 유일의 사업이다.

메도디스트교회, 또는 밥티스트교회 등, 특수한 복음교회도 그 전 주의를 사회사업에 기울이기에 이르렀다.

 

여기에 있어서랄지 바울의,

 

[내가 생각컨대 사람의 구원됨은 율법의 행위로서가 아니다. 신앙으로 이다]라는 언명 같은 것은

 

그리스도 교회 내에 있어서 무게 없는 것이 되기에 이르렀다.

사회사업을 하지 않는 교회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교회처럼 생각하게 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바울 과연 틀렸던가? 그렇지 않다고 나는 답한다.

 

사회사업은 결코 신앙의 대용을 못한다.

사회사업은 사람의 영혼에 평강을 주지 못한다.

사회사업에 의해 사람의 지각에 지나는 평강은 우리 마음에 임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신앙을 경시하는 사회사업은 곧 막다른 상태에 빠져버렸다.

 

신앙은 절로 사회사업을 낳는다.

하지만 사회사업은 신앙을 낳지 못한다.

오늘의 그리스도교회가 그 가장 좋은 증거이다.

 

교회는 십자가의 신앙을 버리고서 사회사업에 들어가 산 생수의 근원을 떠나 터진 물을 저축치 못하는 웅덩이를 판 것이다.

 

(예레미야서 2:13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으니 곧 그들이 생수의 샘인 나를 버렸고 또 스스로 물 저장고들 즉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저장고들을 팠느니라).

 

*내촌감삼의 주석에서

 

 

*주님, 사마리아 여인에게 다가가신 것처럼 우리도 사람들에게 인격적으로 다가가게 하소서.

우리의 대화가 단순한 말이 아니라 생수의 복음을 전하는 통로가 되게 하시고,

사람들이 진실을 직면할 때 은혜로 초대하는 마음을 주옵소서.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삶을 살게 하시며,

우리의 작은 증거가 공동체를 변화시키는 도구가 되게 하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