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덴골

탕자의 감사

거듭난 삶 2010. 10. 22. 15: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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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탕자의 감사

 

눅 15:11-24 또 가라사대 어떤 사람이 두 아들이 있는데 12그 둘째가 아비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아비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더니 13그 후 며칠이 못되어 둘째 아들이 재물을 다 모아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허비하더니 14다 없이한 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저가 비로소 궁핍한지라. 15가서 그 나라 백성 중 하나에게 붙여 사니 그가 저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 16저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 17이에 스스로 돌이켜 가로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군이 얼마나 많은고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18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19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군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20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상거가 먼데 아버지가 저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21아들이 가로되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하나 22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23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24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저희가 즐거워하더라.

 

예수님께서 말씀해 주신 탕자의 비유를 통해서 오늘 우리가 또한 무엇을 어떻게 감사해야 할지를 잠시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둘째 아들이 집에 있을 때에는 감사할 줄 몰랐습니다.

 

둘째 아들이 감사해야 될 시기는 그 아버지와 함께 있을 때였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그때는 모든 것이 풍족했고, 여유가 있었고, 그 앞날이 보장되어 있었고, 그가 원하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었던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아들에게는 만족함이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욕망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에 아버지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보다는 매사에 불만이 있었던 것입니다.

 

가장 감사해야 할 시기에 오히려 아버지 앞에 불만을 가지고 나갔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 아들은 아버지에게 재산을 요구했고, 아버지가 그 아들에게 재산을 나누어 주자 그걸 가지고 곧 멀리 떠나가 버렸던 것입니다.

 

사람들이 감사해야 할 적에도 감사할 줄 모르는 까닭은, 그들에게 어떤 물질이 없어서나 또 혹은 원하는 어떤 생활의 조건이 갖추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감사를 드리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본문의 탕자처럼 끝없는 욕망 때문에 감사를 드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보다 많은 자유와 향락과 권력을 갖겠다는 줄기찬 욕망 때문에 만족함이 없고 따라서 감사할 줄 모르는 것입니다.

 

인간 어느 누구에게든지 이런 욕망이 있는 한, 감사라는 말을 알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특히 인간이 욕망에 눈이 어두울 적에는 보이는 것이 없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도 잃어 버리고, 사랑하는 兄弟도, 따뜻한 가정도 보이지 아니하고 오직 그가 바라고 추구하는 재물이나 명예나 권력만을 따라 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둘째 아들이 그렇게 자기를 사랑해 주시는 가장 행복한 곳 아버지 집에 있는 데도 그 아버지를 버리고 兄도, 집도 다 버리고 먼 지방으로 떠나가 버리는 것처럼 현대인들은 욕망을 달성하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지 그 대가를 지불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심지어는 돈을 위해서 부모도 죽이고 남편도 아내도 죽이는 그런 사건들을 우리는 주변에서 보고 있읍니다. 정치가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의 욕망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으려고 합니다. 심지어는 수많은 사람들의 생명까지도 아낌없이 희생해서 자기가 원하는 그것을 움켜지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욕망에 대한 추구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우리는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감사할 줄 아는 마음이란 그런 의미에서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감사할 줄 아는 마음이 있다면 오늘날 정치도 경제도 이 사회도 모든 것이 다 잘 풀려 가리라고 봅니다.

 

오늘 우리들이 물질 문명을 발전시켜서 보다 더 살기 좋은 세계를 만들어 보려고 끝없이 노력을 해 오고 있지만 결과적으로 우리가 원하는 살기 좋은 세계로 되어지는 것 같으나 인간내면에서 작용하는 욕망이라는 전차를 멈추게 하지 않는 한, 인간의 문명은 결국 파멸의 위기로 직면하게 된다는 경고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생활은 끊임없이 욕망을 추구하는 생활이기에 그 결과는 언제나 비참한 것으로 결말을 내고 마는 것을 역사를 통해서 보고 있습니다.

 

탕자는 자유를 찾아서 아버지의 품을 떠났는데 결국에는 노예가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는 많은 재물을 얻으려고 하였지만 마지막 한 푼까지 다 써버린 거지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는 명예와 욕망을 얻기를 원했지만 그가 얻은 것은 수치와 욕됨 뿐이었습니다. 탕자는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자리에서 떨어져 이제는 돼지들과 함께 생활할 수밖에 없는 비천한 노예가 되었습니다.

 

그가 만약 돌이켜서 그 마지막 순간에 아버지를 생각하지 못했다면 그의 최후는 비극으로 끝을 맺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비극적인 생애를 끝낸 사람들을 우리는 역사 속에서 많이 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탕자는 용케도 절망의 정점에 아버지의 집을 생각해 낸 것입니다. 아니, 이러한 상황에서는 하나님 아버지를 향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들리는 것입니다.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일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이렇게 결단을 하고 그는 돼지우리에서 털고 일어나 아버지의 집을 향해 나갑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를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해 주십니다. 아무도 우리를 도울 수 없는 이 절망의 시련 속에서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오직 한 분, 우리의 아버지이신 여호와 하나님을 향하라는 것입니다.

 

감사할 줄 모르고 욕망만을 좇아온 과거를 솔직히 고백하고 영혼은 완전히 제껴 놓고 육체의 향락만을 집착했던 어리석음을 회개하고 절망의 자리에서 털고 일어나 아버지의 집을 향해 나가야만 할 것입니다.

 

이 길만이 인류가 살 수 있는 길리라는 것을 예수님은 탕자의 비유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오늘 우리를 도와주실 분은 풍성하신 하나님밖에 없습니다. 이제라도 우리의 하나님을 향해 나아간다면 그가 우리를 치료해 주실 것이며, 우리를 새롭게 하시며, 우리에게 희망을 주실 것입니다. 우리 모두에게 탕자의 회개와 결단이 필요한 것입니다.

 

둘째 아들 탕자가 돼지우리에서 털고 일어나 아버지께로 향해 나왔을 때 아버지가 그를 영접해 주었습니다. 전에는 한 번도 깨닫지 못했던 아버지의 따뜻함과 사랑을 비로소 깨닫게 되었고, 그래서 그는 감사의 생활을 시작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감사해야 하는 조건들을 생각해 보면 첫째는, 모든 것을 다 잃어 버린 순간에도 돌아가야 할 아버지의 집이 있다는 사실 때문에 감사해야 될 것입니다.

 

모두가 문전박대해서 이제는 돼지만이 그의 친구일 수 밖에 없는 마지막 순간에 떠오르는 아버지의 집, 그것은 꺼져 가는 그의 삶에 완전히 새로운 희망의 불을 붙여 주었읍니다.

 

탕자의 생명이 아버지로부터 낳고 또 아버지의 품에서 자라난 아버지의 그 넉넉하신 사랑, 그것은 돈으로 맺어진 얄팍한 우정을 가진 친구들과는 도저히 비교할 수 없고, 또한 이해 관계로 맺어진 이웃들과도 전혀 다른 진정 마지막 순간에 자기를 맞아 줄 수 있는 따뜻한 고향, 그것이 바로 아버지의 집인 것입니다.

 

탕자가 두 번째로 감사한 일은

아버지가 자기를 기다리고 계셨고 또한 기쁨으로 영접해 주신 일인 것입니다. 갈기갈기 처참하게 찢긴 모습으로 돌아온 아들을 그 아버지는 무조건 안아주시는 것입니다.

 

어쩌다가 네가 이 모양이 되었느냐? 그 많은 재산을 어떻게 했느냐? 이러고도 네가 무슨 낮으로 내게 돌아 왔느냐?” 이렇게 따져 묻지 않으셨습니다.

 

무조건 다 받아주셨습니다. 여기에 아버지의 놀라운 사랑이 있습니다. 여기에 구원의 은총이 있습니다. 그에게 돌아 오는 자들을 그가 무슨 죄를 지었든지 상관하지 아니하고 무조건 용서해 주시는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은총이 바로 이러한 것입니다. 누구든지 상한 심령으로 주님 앞에 나오는 자는 주님께서 물리치지 아니하시고 영접해 주신다고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잘잘못을 따지지 아니하십니다.

 

오늘 우리의 감사는 언제나 우리를 영접해 주시고 용서해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감사인 것입니다.

 

탕자가 세번째로 드린 감사는 아버지가 그의 기도를 들어 주실 때 그가 원하는 것보다 더 넘치게 들어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아들은 아버지 앞에 와서 나를 아들로 받아 달라고 차마 그렇게 말할 수는 없어서, 단지 품꾼의 하나로라도 받아 줄 것을 企待했던 것이었는데 아버지는 그를 아들로 영접해 주셨던 것입니다.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 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여기에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원하고 바라고 기도하는 것보다 더 크고 더 넘치게 許諾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發見할 수 있습니다.

 

탕자는 전에는 아버지의 이러한 사랑을 전혀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기 속에 욕망이 자리를 잡았기 때문에 전혀 아버지의 깊으신 사랑에 대해서는 조금도 느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그 모든 욕망들이 산산조각이 나버린 지금에 와서야 아버지의 놀라운 사랑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기도가 응답될 때는 바로 이와 같이 이 세상에 대해서 완전히 절망하면서 오직 하나님 이외는 도움을 요청할 수밖에 없는 바로 그때인 것입니다.

 

이때의 기도는 응답될 뿐만 아니라 우리가 원하는 것보다 더 크게 더 넘치게 응답이 되는 것입니다. 품꾼조차 자격이 없는 우리를 그의 子女로 영접해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오늘 우리는 감사해야 될 것입니다.

 

욥의 위대한 믿음과 탕자의 하나님께로 향하는 예수님의 가르치심을 기억 하십시다.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 22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向하여 어리석게 원망하지 아니하니라.”

 

 

                      『感謝의 詩』

 

시 100:1-5 ○ 온 땅이여 여호와께 즐거이 부를지어다

기쁨으로 여호와를 섬기며 노래하면서 그 앞에 나아갈지어다

여호와가 우리 하나님이신 줄 너희는 알지어다 그는 우리를 지으신 者시요 우리는 그의 것이니 그의 百姓이요 그의 기르시는 羊이로다

感謝함으로 그 門에 들어가며 讚頌함으로 그 宮庭에 들어가서 그에게 感謝하며 그 이름을 頌祝할지어다

大抵 여호와는 善하시니 그 仁慈하심이 永遠하고 그 誠實하심이 代代에 미치리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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