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덴골

그리스도인의 삶

거듭난 삶 2010. 11. 27. 1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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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건강한 그리스도인의 삶

 

(빌 4:4)주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그리스도인들의 생활특징은 희락이요, 기쁨입니다. 기독교는 희락의 종교요, 성서는 희락의 복음입니다.

 

"주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빌4:4)는 이 말씀은 성경 가운데 가장 긍정적이요, 적극적인 하나님의 권면이라 할 수 있습니다. 빌립보서 전체에는 이 권면이 흐르고 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항상 기뻐할 수 있는 사람, 자기의 처한 환경과 처지의 여러 가지 어려움 중에도 불구하고 항상 기쁨의 샘이 마르지 않는 삶을 권면한 바울은 과연 어떤 비밀을 간직했을까? 를 上考해 보면서 은혜받는 시간을 갖고자 합니다.

 

빌립보서 전체의 내용을 간략하게 살펴보면

 

제1장 "생명되신 그리스도"입니다.

나에게 생명을 주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하나님의 뜻하신 바를 이루실 줄 확신하노라(빌1:6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고 했습니다.

 

제2장 "모본되신 그리스도"입니다.

주님께서 오시고 가신 발자취를 더듬어 주님 기뻐하시는 종의 도를 본받기 위해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으라"(빌2:5)고 했습니다.

 

제3장 “목표되신 그리스도”입니다.

푯대되신 그리스도를 향해 달려가는 삶입니다.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고"(히12:2) 좇아가는 것입니다.(빌3:12-14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13)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14)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

 

제4장 "생명되신 그리스도"입니다.

生命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배우고, 따르는 데는 많은 어려움과 고난 또한 없지 않으나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빌4:13)고 했습니다. 생명되신 그리스도께서 만왕의 왕, 만주의 주로서 나의 삶 가운데 언제나 어디서나 관여(關與)하시고 동행하십니다.

 

이런 감격과 환희에 찬 빌립보서는 단4장에 불과하지만 18차례나

"주안에서 항상 기뻐하라"는 말씀으로 일관하고 있습니다.

 

이제 빌립보서의 결론부분에서 빌립보서의 主題가 요약되고 반복됩니다. 세가지 명령이 있습니다. 기뻐하라, 관용하라, 기도하라.입니다.

 

"기뻐하라"함은 우리들 자신(개개인)에게 주는 말이요.

"관용하라"는 남에게 덕을 세우라 함이요,

"기도하라"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의 명령이요 권면입니다.

 

십자가가 기독교의 標識이라면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표식은 기쁨과 관용과 기도입니다.

 

 

1. 주안에서 기뻐하라.

 

(1) 이 권면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에게 주신 권면입니다.

그리스도를 믿고 거듭나서 하나님의 子女된 이들을 향하여 주시는 매우 강력한 권면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기뻐하라"는 명령을 받았을 때 그것이 기뻐할 수 있겠는가? 환경이 어떠하든 항상 기뻐하는 것이 가능한가? 고 反問할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역경중에서도 기뻐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사모하고 사랑하는 빌립보 교회에 내부분열, 외분문제, 외부로부터 유대주의적 율법주의의 도전, 그리고 형식적 신자들의 육욕주의적인 유혹이 있음을 보면서도 자신은 감옥에 갇힌 몸으로서 기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주님 안에서의 풍성한 생명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밖(주변환경)이 아무리 어려워도 속에서 항상 기뻐하는 자들입니다. 역경을 이기는 주안에서의 이 기쁨이 없이는 참된 평강을 누릴 수 없습니다.

 

(2) 주안에서 기뻐할 수 있는 근거가 무엇입니까?

비록 우리가 우리에게 나타난 처지와 환경을 이해하지 못한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그의 영광을 위해, 우리의 선을 위해 우리의 환경을 유익하게 사용하실 것임을 믿고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뢰하는 신앙이 필요합니다.

 

욥이 극심한 시련을 겪을 때 그의 친구들조차도 그에게 그럴만한 잘못이 너에게 있을 것이라고 비난했습니다. 그러나 욥은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욥23:10)고 그의 극심한 시련중에서도 불구하고 좌절하거나 낙망치 않았습니다. 이는 욥이 하나님을 의심없이 全的으로 신뢰했기에 가능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시편기자의 이같은 확신에 찬 고백을 보십시오.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감찰하시고 아셨나이다. 주께서 나의 앉고 일어섬을 아시며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통촉하시오며 나의 길과 눕는 것을 감찰하시며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 주께서 나의 전후를 두르시며 내게 안수하셨나이다. 이 지식이 내게 너무 기이하니 높아서 내가 능히 미치지 못하나이다"(시139:1-6)고 했습니다.

 

신약 야고보서는 말합니다.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것에 옳다 인정하심을 받은 후에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임이니라."(약1:12)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바른 태도로 시련을 받아들일 때 생명의 면류관이 기다리고 있음을 보증받게 됩니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전10:13)하셨으니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희락은 성령의 열매입니다.(갈5:22) 그렇기 때문에 사람의 노력이나 수고로 나타나는 것과는 다릅니다. 이 기쁨은 內住하시는 성령에 대한 올바른 태도와 올바른 관계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인의 마음속에서 生産되어지는 것입니다.

 

이 기쁨은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에 근거합니다. 또한 이 기쁨은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 근거합니다.

 

우리는 육신의 몸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환경의 변화에 굴복하고 요동하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러한 변화와 요동을 초월하십니다.

 

"나 여호와는 변역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야곱의 자손들아 너희가 소멸되지 아니하느니라"(말3:6)고 말씀 하셨고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니 식언치 않으시고 인자가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치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치 않으시랴"(민23:19),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서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약1:17)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 사도는 우리의 환경과는 상관없이 주안에서 항상 기뻐하라고 요구하는 것입니다.

 

(3)기뻐해야 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기뻐해야 할 일이 있어야지 기쁜 것이 아닙니까! 그 기쁨은 주안에서의 기쁨, 즉 주님 때문에 기뻐하는 것입니다. 주안에서의 기쁨은 어떤 기쁨입니까?

 

죄사함 받은 기쁨입니다. 하나님 앞에 죄를 청산하지 않은 것처럼 무서운 것은 없습니다. 犯罪한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낯을 피해 숨었습니다. 얼마나 불안 했겠습니까?

 

"내가 주의 낯을 피하여 어디로 가오리까"했습니다.(창4:14)

 

그 누구도 내 죄를 사할 수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내게 사죄권을 행사하십니다. 죄 문제는 내가 감추려 해서 감추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드러나고 심판을 받고야 맙니다. 오직 예수로 말미암은 죄 사함의 기쁨으로 충만할 때 어떤 슬픔도, 어려움도 극복할 수 있습니다.

 

죄 사함 받은 자는 죽어도 한이 없습니다. 하늘나라가 약속되었기 때문입니다. 고난도 상관없습니다. 이는 모두 나를 단련시키기 위한 과정일 뿐, 저주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고통도 염려 없습니다. 이를 통해 더 큰 은사를 주시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병에 걸려도, 실패해도, 망해도, 무엇이 잘못되었을 때 죄 때문이라고 믿기 때문에 고통이 있습니다. 그러나 죄 사함을 받은 성도에게는 걱정이 없습니다. 더 큰 축복을 주시는 예비된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내 죄사함 받고서 예수를 안 뒤 나의 모든 것 다 변했네

지금 나의 가는 길 천국 길이요 주의 피로 내 죄를 씻었네

나의 모든 것 변하고 그 피로 구속받았네

하나님은 나의 구원되시오니 내게 정죄함 없겠네"(찬220장)

 

영생의 기쁨입니다. 영원한 즐거움의 생명입니다.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나를 믿는 자는 살리라.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고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뻐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주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영생복락의 생명을 얻고 지옥에 안가는 것만으로도 벅찬 영광이요 기쁨입니다. 그러나 그뿐 아니라 더 나아가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天國에 가게 되고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고 천국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王노릇하게 될 것이니 그 자체가 기쁨인 것입니다(계20:6).

 

"영접하는 자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요1:12)고 했습니다.

 

하나님 자녀의 권세를 돈을 주고 살 수 있다면 이 세상 금은보화를 몽땅 다 주고라도 살만한 그 이상의 가치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는 조물주와 피조물, 상전과 종, 왕과 신하의 관계를 벗어나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가 된 것입니다. 주님의 영생을 얻은 하나님의 자녀요, 백성이요,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음을 생각해 보세요. 어찌 기쁨이 솟아나지 않을 수 있습니까?

 

아버지는 자녀의 면류관입니다. 아버지의 것이 모두 그 자녀의 것입니다. 모두를 다 주고 싶은 것입니다.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 자녀이면 곧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라"(롬8:16-17)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상속받을 상속자들입니다. 자녀는 아버지의 보호하심과, 돌보심과, 지켜 주심과, 진정한 사랑과 교제와 나아감을 얻습니다. 모든 사정을 아뢸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닭이 병아리를 날개로 보호하듯 돌보시고, 필요한 것을 공급해 주시고, 능력으로 보호하시고, 천사들로 우리를 섬기게 하시고 독생자도 아끼지 않으시고 우리 위해 주시듯 모든 좋은 것을 다 주시는 분이십니다.

바울은 비록 옥중에 갇혀 있으나 이를 생각하니 마음에서 기쁨이 솟아납니다.

 

다음엔 하나님의 일꾼된 기쁨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사역에 내가 참여해서 일한다는 것이 얼마나 보람되고 기쁜 일입니까? 이 부족하고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만민을 구원하는 그 거룩한 역사의 한 모퉁이를 담당했다는 기쁨입니다.

 

혹 그렇지 못하더라도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살아간다는 것 만으로도 사실 우리들에게는 벅찬 기쁨의 삶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주님의 사역에 동참할 수 있다는 기쁨, 거기에 나도 가담되었다는 기쁨이 로마 감옥에서의 쇠사슬에 묶여 있는 고통도 이길 수 있게 했던 것입니다.

 

(4) 어떤 환경 중에도 성도의 기쁨을 유지하는 비결이 무엇입니까?

 

"나의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의 진보가 될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빌1:12)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고난이요, 역경임을 믿는 것이 성도의 기쁨을 유지하는 첫째 비결입니다.

 

알렉산드리아의 섬의 난항의 어려움, 로마감옥, 배고픔에 허리를 졸라맨 창자의 쓰라림, 40대의 태장(笞杖)에서 1대를 감한 죽을 정도로 매 맞은 일, 아그립바왕과 로마 가이사의 배심원들 앞에서의 심문, 이 모든 열악한 조건들은 바울에게는 전도의 산실이었지 저주스러운 철창(鐵窓)만은 아니었습니다.

 

세계 선교를 위해 바울은 로마에 가기를 열망했습니다. 그러나 그 뜻을 이루는 데는 많은 어려움들이 앞을 가로 막았습니다. 그러나 교통비 한 푼들지 않고 죄수의 몸으로 로마에 와서 전도를 한다 해도 그저 막막할 뿐인데 아그립바왕과 그 배심원들, 로마 황제 가이사와 그의 원로들 앞에서 복음을 전할 기회가 마련되었고 하루에 두 세 번씩 교대되는 간수들의 감시 속에서도 시간마다 전도의 기회로 삼았습니다.

 

로마의 엘리트들이 예수를 믿게 되었고, 그 결과 로마는 기독교를 국교로 공인하는데 까지 이르게 됩니다.

 

위기인듯한 역경, 절망적인 환경, 그때마다 하나님의 기적이 일어났고 하나님의 뜻을 성취했습니다. 빌립보서를 쓰기 약 10년전 빌립보 감옥에 그의 동료 실라와 함께 바울이 실라와 함께 밤새 기도하고 찬송했습니다. 이때 옥문이 열리고 사슬이 풀리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간수가 구원받고 그 가족들이 다 구원을 받았습니다(행16:25-34).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8:28)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공중의 나는 새 한 마리도 떨어지지 않거늘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마10:29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라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아버지는 우리의 머리털까지 세실 정도로 자상하시고 인자하십니다. 성도의 기쁨을 잃지 맙시다.

 

바울은 인간관계의 갈등으로 기쁨을 상실하지 않고 오히려 그리스도의 아가페 사랑을 실천하고 훈련하는 기회로 삼았습니다.

 

바울 주변에 투기와 분쟁으로 바울보다 유명해지려는 자들이 있었고(빌4:15빌립보 사람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복음의 시초에 내가 마게도냐를 떠날 때에 주고받는 내일에 참예한 교회가 너희 외에 아무도 없었느니라),

 

자신의 매임에 괴로움을 더해 주는 이들도 있었습니다(빌4:17내가 선물을 구함이 아니요 오직 너희에게 유익하도록 과실이 번성하기를 구함이라).

 

감옥에 갇혀있는 바울에 대하여 오히려 후련해 하면서 사실무근한 소문을 퍼뜨려서 바울에게 괴로움을 주는 자들도 있었습니다. 뿐만아니라 바울이 전한 복음을 흐리게 합니다. 믿음 약한 신자들이 흔들립니다. 사슬에 매인 몸이니 찾아가 따질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이 바울의 기쁨을 빼앗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려 왔다"(마20:28)고 선언하셨고 그렇게 사셨습니다. 사탄은 우리를 충동합니다. 높아지기를 원하고, 섬김 받고 싶어 하게 합니다만, 예수님처럼 섬기려는 자는 쉽게 상처받지를 않습니다.

그러나 섬김 받으려는 자는 사사건건 상처받게 됩니다.

 

바울은 닥쳐오는 로약함으로도, 죽음의 위협에도 굴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기뻐했습니다. 바울의 몸은 늙고 허약해 갑니다. 육신의 가시는 늘 그를 괴롭힙니다(고후12:7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고하지 않게하려 하심이니라).

 

그런 몸으로 부자유한 감옥생활이 어떠했겠습니까? 그러나 바울은 삶과 죽음의 위협속에서도 그 안에 자리잡은 기쁨을 빼앗기지 않습니다.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 생사를 가리지 않았습니다.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빌1:20-21)고 했습니다.

죽는 그날까지 주님의 교회 유익만을 생각하며 살았습니다(빌1:24)

 

"너희는 내 안에 있으라 나도 너희안에 거하리라"(요15:4)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주안에 거한다는 것은 내 전체가 예수님께 점령되어 주와 하나 됨을 뜻합니다.

예수께서 아버지의 사랑안에 거함같이 너희도 내 사랑 안에 거하라 하셨는데 그 이유는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이 충만케 하려 한다(요15:10-11)고 했습니다.

 

※ 칼타고의 순교자 "페리스타"란 여자는 옥중에서 임신이 되어 고통할 때 간수가 물었습니다.

 

"네가 어찌하여 예수로 말미암아 이같은 고생을 당하느냐? 내일이면 교수대의 이슬로 사라질 터인데 그 고통은 어찌 감당하려느냐?" 했을 때

그녀는

 

"임산의 고통은 내가 홀로 받은 것이나 교수대의 괴로움은 주님과 함께 당할 것이므로 오히려 즐겁다"고 했습니다. 투우(鬪牛) 소의 뿔에 받혀 죽어가면서도 흐트러진 머리를 가다듬으면서

"내가 어찌 흐트러진 머리로 신랑 예수를 대할 수 있겠느냐"면서 기쁜 얼굴로 순교했다 합니다.

 

"기쁨"을 라틴어로 "힐라리타스"(hilaritas)라 합니다. 그 뜻은 "삼매"(三昧)입니다. 즉 마음을 하나의 대사에만 집중시키는 일심불란(一心不亂)의 경지를 뜻합니다.

독서삼매란 말이 있습니다. 하나의 대상에 마을을 쏟으니 그 속에서 환희가 샘솟아 나온다는 뜻입니다.

 

※ 뉴욕의 "라과다아"(Laguadia)市長이 있었읍니다.

 

그가 뉴욕시 즉결재판 부판사로 있을 때 하루는 가게에서 빵 도둑질하다 잡혀온 노인이 기소(起訴)되었습니다.

老人은

"배가 고파 빵에 손을 대었다"고 고백했습니다. 라과디아 판사는 10달라 벌금형을 내리고 자기 지갑에서 10달러를 꺼내들고

 

"이 벌금은 내가 내겠습니다. 이토록 배고픈 사람이 뉴욕거리에 있는데 내가 너무 좋은 음식을 배불리 먹은 벌금으로 냅니다."하고는 모자를 서기에게 주면서

여기 오신 분들 중에 나처럼 잘 먹은 것에 대한 벌금을 내고 싶은 분은 내십시오. 했습니다.

노인은 모두 47달러를 들고 눈물을 흘리며 재판정을 나갔다는 逸話가 있습니다.

 

죄인의 친구요, 치유자요 구주이신 예수님을 생각하게 합니다.

 

저명한 정신의학자 빅톨 플랭클(Bigtol Frankl)은 나치수용소에 있을 때 동료들과 집단 탈출을 시도하게 되었을 때 탈출직전에 위급한 환자를 돌보게 되었습니다.

 

"당신도 탈출합니까?" 고 환자는 그(Bigtol Frankl)의 얼굴을 쳐다봅니다. 박사의 탈출은 그 환자의 죽음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프랭클은 ##46153;료와의 약속을 취소하고 내일에의 희망조차 없는 수용소에서 죽어가는 생명을 구하기로 작정했습니다. 마음에 평화와 기쁨이 스며들었다고 했습니다.

 

이런 기쁨이 바로 주안에서의 기쁨입니다. 이 기쁨이 우리 모두에게 넘치기를 축원합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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