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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 70주기 맞아 추모의 물결 일어
서울에서 비행기로 한 시간이면 훌쩍 닿을 수 있는 일본의 후쿠오카(福岡). '행복의 언덕'으로 풀이되는 이름처럼 일본에서 가장 살기 좋은 도시로 소문나 있다. 그러한 후쿠오카에서 윤동주 시인에 대한 소식이 날라 왔다. 소식을 보낸 사람은 필자의 오랜 친구(?)이자 선배로 통하는 '오쓰보 시게다카(大坪重隆·75)'씨다.
윤동주 시인 전시회를 열심히 보고 있는 일본 여인(사진: 오쓰보 시게다카(大坪重隆))
그의 말에 의하면, 윤동주 70주기를 맞아 그의 시와 생애를 소개하는 전시회(2월 5일-9일)가 열리고 있고, '시비(詩碑) 건립 추진위원회가 결성된다'는 것이었다. 그것도 일본인들에 의해서다. 이는 평소 필자가 일본의 지인들과 사석(私席)에서 수시로 나누던 이야기다. 참으로 고마운 일이다. 해방 70주년이니 그의 사거(死去)가 그만큼 되었으리라.
그렇다면 윤동주 시인과 후쿠오카는 어떤 인연이 있을까. 비록 비통하고 가슴이 저린 일이지만, 해방 70주년과 한일 수교 50년을 맞아 '다시는 이러한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교훈적인 측면에서 시대를 거슬러 가본다.
윤동주 전시회가 열리고 있는 규슈대학 전시홀에 운집한 일본인들
후쿠오카 형무소(福岡刑務所)를 찾아서
"어렸을 적부터 제가 후쿠오카 형무소 근처에서 살았습니다. 아직도 형무소의 높은 담벼락에 대한 기억이 생생합니다. 그런데, 그 곳에는 무슨 일로 가시나요?"
"1945년 2월 16일 새벽의 일입니다. 28세의 나이로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유명(幽明)을 달리한 윤동주 시인(詩人)이 있었습니다. 민족 시인으로 유명한 분입니다. 그의 흔적을 찾아 보려고 합니다."
"그러한 아픔이 있었군요. 처음 듣는 이야기입니다. 그 형무소는 쇼와(昭和) 40년. 그러니까 1965년에 교외로 이전을 했고, 그 자리에 아파트와 빌딩들이 많이 들어섰습니다. 단지, 새로 지어진 구치소가 있을 따름입니다."
필자가 지난해 후쿠오카의 토박이 '와타나베 아키라(渡邊 章·67)'씨와 나눈 대화다.
후쿠오카 시 '니시진(西新) 사와라구(早良區) 모모치(百道)'
"이 일대가 형무소가 있었던 곳입니다."
형무소 터는 너무나 넓었다. 버스 터미널은 물론 아파트, 오피스 빌딩 등 신도시 하나가 생겨난 것이다.
'이토록 넓은 공간에 얼마나 많은 죄수들이 갇혀 있었을까.'
구치소(拘置所) 입구 골목에 차를 세우고 정문으로 갔다. 후쿠오카 구치소 간판 앞에서 셔터를 누르자 무서운(?) 일본 순사가 나왔다.
아파트 촌으로 변한 후쿠오카 형무소(좌), 후쿠오카 형무소가 있었던 자리-지금은 구치소만 남아있다(우)
"여기는 사진 촬영 금지 구역입니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네- 서울에서 취재차 왔습니다."
"아무튼, 사진 촬영은 안 됩니다."
후쿠오카 형무소가 하카타(博多: 현 후쿠오카)에 세워진 것은 메이지(明治) 4년(1871년)이다. 그 때의 명칭은 도형장(徒刑場). 이름만으로도 공포감이 든다. 이 도형장은 1881년 후쿠오카 감옥소(監獄所)로 명칭이 바뀌었고, 1903년 후쿠오카 감옥(監獄)이 됐다. 그리고, 1916년 이 감옥은 니시진(西新)으로 옮겨 왔다. 6년 후인 1922년(大正 11년) 감옥은 다시 이름을 바꿔 '후쿠오카 형무소(福岡刑務所)'가 됐다. 현재의 후쿠오카 구치소(福岡拘置所)는 1965년 후쿠오카 형무소가 옮겨간 후 그 자리에 들어섰던 것이다.
'六疊房은 남의 나라'
'후쿠오카 형무소(福岡刑務所)가 사라졌지만, 필자는 형무소 터를 직접 걸어 보기로 했다. 형무소의 겉모양은 달라졌지만, '땅 속에 스며있는 윤동주 선생의 체취(體臭)라도 남아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해보기도 했다. 불현듯, 1942년 윤동주 시인이 일본에서 지은 <쉽게 씌어진 詩>를 떠올려 봤다.
"窓밖에 밤비가 속살거려 六疊房은 남의 나라
詩人이란 슬픈 天命인줄 알면서도 한 줄 詩를 적어볼까
大學 노-트를 끼고 늙은 敎授의 講義를 들으려간다
(......)
窓밖에 밤비가 속살거려 六疊房은 남의 나라"
이 시(詩)는 윤동주 시인이 일본 '릿교(立敎)' 대학(1942년) 시절에 쓴 것으로 그의 마지막 5작품 중 하나이기도 하다. <쉽게 씌어진 詩>를 지은 다음 해(年)인 1943년. 윤동주는 일본 경찰에 의해 독립운동 혐의로 검거됐고, 1944년 후쿠오카형무소에 투옥됐다.
그의 마지막은 어떠했을까? 그의 부친과 아저씨 윤영춘의 증언을 송우혜의 <윤동주 평전>을 빌어 알아본다.
< 후쿠오카 형무소를 찾기는 동주(東柱)가 사망한 지 10일 후였다.....그 길로 시체실로 찾아가 동주를 찾았다. 관 뚜껑을 열자 '세상에 이런 일도 있어요?'라고 동주는 내게 호소하는 듯했다....일본 청년 간수(看守) 한 사람이 따라와서 우리에게 하는 말. "아하, 동주가 죽었어요. 참 얌전한 사람이....죽을 때 무슨 뜻인지 모르나 외마디(悲鳴) 소리를 높게 지르면서 운명했지요."하며 동정하는 표정을 보였다.>그는 1945년 2월 16일 새벽 3시 36분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이렇게 생을 마감했다. 무슨 뜻인지 모르는 외마디 소리는 무엇일까.
'시비(詩碑)라도 세우자'
윤동주 전시회 장 입구의 모습-순회 전시회를 알리고 있다.
윤동주의 자취(跡)는 어디에도 없었다. 참으로 아쉬운 부분이다. 필자가 "언젠가 이곳에 우리 같은 민간인들이 십시일반(十匙一飯) 정성을 모아 윤동주 시비(詩碑)라도 세우자"고 했더니, '오쓰보 시게다카(大坪重隆)'씨와 '와타나베 아키라(渡邊章)'씨 두 사람 모두 찬성했다.
“동(冬)섣달의 꽃, 얼음아래 다시 한 마리 잉어(鯉魚)”시인 정지용이 윤동주의 시를 읽고 한 말이다.
“별 하나에 추억과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쓸쓸함과
별 하나에 동경과
별 하나에 시와
별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나는 별 하나에 아름다운 말 한마디씩 불러봅니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단 한사람도 그의 시에 매료되지 않을 사람이 없다. 그래서 그에게 '민족시인'이라는 찬란한 월계관이 씌워진 것이 아닐까.
일본인들에 의해서 후쿠오카·교토·도쿄에서 그의 유고와 유품 전시회가 진행되고, 시비(詩碑) 건립위원회가 결성된다고 하니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다.(계속)
서울에서 비행기로 한 시간이면 훌쩍 닿을 수 있는 일본의 후쿠오카(福岡). '행복의 언덕'으로 풀이되는 이름처럼 일본에서 가장 살기 좋은 도시로 소문나 있다. 그러한 후쿠오카에서 윤동주 시인에 대한 소식이 날라 왔다. 소식을 보낸 사람은 필자의 오랜 친구(?)이자 선배로 통하는 '오쓰보 시게다카(大坪重隆·75)'씨다.
윤동주 시인 전시회를 열심히 보고 있는 일본 여인(사진: 오쓰보 시게다카(大坪重隆))
그의 말에 의하면, 윤동주 70주기를 맞아 그의 시와 생애를 소개하는 전시회(2월 5일-9일)가 열리고 있고, '시비(詩碑) 건립 추진위원회가 결성된다'는 것이었다. 그것도 일본인들에 의해서다. 이는 평소 필자가 일본의 지인들과 사석(私席)에서 수시로 나누던 이야기다. 참으로 고마운 일이다. 해방 70주년이니 그의 사거(死去)가 그만큼 되었으리라.
그렇다면 윤동주 시인과 후쿠오카는 어떤 인연이 있을까. 비록 비통하고 가슴이 저린 일이지만, 해방 70주년과 한일 수교 50년을 맞아 '다시는 이러한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교훈적인 측면에서 시대를 거슬러 가본다.
윤동주 전시회가 열리고 있는 규슈대학 전시홀에 운집한 일본인들
후쿠오카 형무소(福岡刑務所)를 찾아서
"어렸을 적부터 제가 후쿠오카 형무소 근처에서 살았습니다. 아직도 형무소의 높은 담벼락에 대한 기억이 생생합니다. 그런데, 그 곳에는 무슨 일로 가시나요?"
"1945년 2월 16일 새벽의 일입니다. 28세의 나이로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유명(幽明)을 달리한 윤동주 시인(詩人)이 있었습니다. 민족 시인으로 유명한 분입니다. 그의 흔적을 찾아 보려고 합니다."
"그러한 아픔이 있었군요. 처음 듣는 이야기입니다. 그 형무소는 쇼와(昭和) 40년. 그러니까 1965년에 교외로 이전을 했고, 그 자리에 아파트와 빌딩들이 많이 들어섰습니다. 단지, 새로 지어진 구치소가 있을 따름입니다."
필자가 지난해 후쿠오카의 토박이 '와타나베 아키라(渡邊 章·67)'씨와 나눈 대화다.
후쿠오카 시 '니시진(西新) 사와라구(早良區) 모모치(百道)'
"이 일대가 형무소가 있었던 곳입니다."
형무소 터는 너무나 넓었다. 버스 터미널은 물론 아파트, 오피스 빌딩 등 신도시 하나가 생겨난 것이다.
'이토록 넓은 공간에 얼마나 많은 죄수들이 갇혀 있었을까.'
구치소(拘置所) 입구 골목에 차를 세우고 정문으로 갔다. 후쿠오카 구치소 간판 앞에서 셔터를 누르자 무서운(?) 일본 순사가 나왔다.
아파트 촌으로 변한 후쿠오카 형무소(좌), 후쿠오카 형무소가 있었던 자리-지금은 구치소만 남아있다(우)
"여기는 사진 촬영 금지 구역입니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네- 서울에서 취재차 왔습니다."
"아무튼, 사진 촬영은 안 됩니다."
후쿠오카 형무소가 하카타(博多: 현 후쿠오카)에 세워진 것은 메이지(明治) 4년(1871년)이다. 그 때의 명칭은 도형장(徒刑場). 이름만으로도 공포감이 든다. 이 도형장은 1881년 후쿠오카 감옥소(監獄所)로 명칭이 바뀌었고, 1903년 후쿠오카 감옥(監獄)이 됐다. 그리고, 1916년 이 감옥은 니시진(西新)으로 옮겨 왔다. 6년 후인 1922년(大正 11년) 감옥은 다시 이름을 바꿔 '후쿠오카 형무소(福岡刑務所)'가 됐다. 현재의 후쿠오카 구치소(福岡拘置所)는 1965년 후쿠오카 형무소가 옮겨간 후 그 자리에 들어섰던 것이다.
'六疊房은 남의 나라'
'후쿠오카 형무소(福岡刑務所)가 사라졌지만, 필자는 형무소 터를 직접 걸어 보기로 했다. 형무소의 겉모양은 달라졌지만, '땅 속에 스며있는 윤동주 선생의 체취(體臭)라도 남아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해보기도 했다. 불현듯, 1942년 윤동주 시인이 일본에서 지은 <쉽게 씌어진 詩>를 떠올려 봤다.
"窓밖에 밤비가 속살거려 六疊房은 남의 나라
詩人이란 슬픈 天命인줄 알면서도 한 줄 詩를 적어볼까
大學 노-트를 끼고 늙은 敎授의 講義를 들으려간다
(......)
窓밖에 밤비가 속살거려 六疊房은 남의 나라"
이 시(詩)는 윤동주 시인이 일본 '릿교(立敎)' 대학(1942년) 시절에 쓴 것으로 그의 마지막 5작품 중 하나이기도 하다. <쉽게 씌어진 詩>를 지은 다음 해(年)인 1943년. 윤동주는 일본 경찰에 의해 독립운동 혐의로 검거됐고, 1944년 후쿠오카형무소에 투옥됐다.
그의 마지막은 어떠했을까? 그의 부친과 아저씨 윤영춘의 증언을 송우혜의 <윤동주 평전>을 빌어 알아본다.
< 후쿠오카 형무소를 찾기는 동주(東柱)가 사망한 지 10일 후였다.....그 길로 시체실로 찾아가 동주를 찾았다. 관 뚜껑을 열자 '세상에 이런 일도 있어요?'라고 동주는 내게 호소하는 듯했다....일본 청년 간수(看守) 한 사람이 따라와서 우리에게 하는 말. "아하, 동주가 죽었어요. 참 얌전한 사람이....죽을 때 무슨 뜻인지 모르나 외마디(悲鳴) 소리를 높게 지르면서 운명했지요."하며 동정하는 표정을 보였다.>그는 1945년 2월 16일 새벽 3시 36분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이렇게 생을 마감했다. 무슨 뜻인지 모르는 외마디 소리는 무엇일까.
'시비(詩碑)라도 세우자'
윤동주 전시회 장 입구의 모습-순회 전시회를 알리고 있다.
윤동주의 자취(跡)는 어디에도 없었다. 참으로 아쉬운 부분이다. 필자가 "언젠가 이곳에 우리 같은 민간인들이 십시일반(十匙一飯) 정성을 모아 윤동주 시비(詩碑)라도 세우자"고 했더니, '오쓰보 시게다카(大坪重隆)'씨와 '와타나베 아키라(渡邊章)'씨 두 사람 모두 찬성했다.
“동(冬)섣달의 꽃, 얼음아래 다시 한 마리 잉어(鯉魚)”시인 정지용이 윤동주의 시를 읽고 한 말이다.
“별 하나에 추억과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쓸쓸함과
별 하나에 동경과
별 하나에 시와
별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나는 별 하나에 아름다운 말 한마디씩 불러봅니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단 한사람도 그의 시에 매료되지 않을 사람이 없다. 그래서 그에게 '민족시인'이라는 찬란한 월계관이 씌워진 것이 아닐까.
일본인들에 의해서 후쿠오카·교토·도쿄에서 그의 유고와 유품 전시회가 진행되고, 시비(詩碑) 건립위원회가 결성된다고 하니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