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과 말씀

요한복음의 교훈

거듭난 삶 2016. 8. 26. 0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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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의 교훈

 

반드시 사랑 일방적인 글이 아니다. 요한복음은 누구의 저작인지 알지 못한다. 하지만 그것이 무엇을 가르쳐 주는 글인지는 명백하다. 이는 학자의 설명을 기다리지 않고서도 누구에게도 이해(해득)되는 것이다. 저자와 시대와의 문제는 이것을 뒤로 돌려도 좋다.

 

우리가 먼저 제일로 구해야 것은, 그것이 분명히 전해주는 바의 교훈이다.

 

요한복음은 어떠한 진리를 우리에게 전하려 하는가, 우리들은 먼저 첫째로 일에 착수해야 것이다.

요한복음은 무엇을 교시해주는 가의 물음에 대하여, 보통 주어지는 대답은,

'하나님은 사랑이라고 가르쳐 주신다'는데 있다.

 

사도 바울은 엄숙한 사람으로서, 사람의 구원을 신앙에 있어서 구한데 반하여,

 

사도 요한은 인정 많은 사람으로서, 특히 하나님과 사람과의 사랑을 말했다는 것은, 우리들이 보통 청문되는 바이다.

 

그러나 사실은 결코 그렇지 않는 것이다.

사도 바울도 사랑을 말하고, 사도 요한도 신앙을 역설했던 것이다.

바울이 말한 하나님은 요한이 말한 하나님에 못하지 않은 자비하신 하나님이시다.

 

'찬송하리로다, 우리들의 하나님, 우리들의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자비의 아버지, 모든 위로를 주시는 하나님'(고린도후서1:3) 이라고 바울은 말하고 있다.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보다도 자비(인정) 많으신 하나님을 소개하는 말이다.

 

고린도전서 13장이 사랑의 찬미가이고, 누가복음 15장에 있어서의 방탕자식의 비유가 사랑의 하나님을 전하는 사실은 누구나가 아는 바이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말은 요한서신(요한복음 아니다)에서만 있는데,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실은, 신약성서 전체가 전하는 바이다.

 

뿐만 아니라,

바울이 신앙을 고조한데 대하여 요한은 사랑을 역설했다고 해도 또한 커다란 잘못이 아니다.

 

'()' 요한복음에 있어서의 가장 현저한 말이다.

 

'그를 받고(영접하고), 이름을 믿는 자에게는 능력(특권) 주어 이를 하나님의 아들로 삼으셨도다'(요한복음 1:12) 처음에 있다.

 

그리고 나중에 있어서 나타나신 목적을 진술하여 말하고 있다.

 

' () 것은, 너희로 하여금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로서 그리스도이신 것을 믿게 하고, 이를 믿고 이름으로 말미암아 생명을 얻게 하려함이라'(요한복음 20:31).

요한복음은 신으로서 시작하여 신으로서 끝나고 있다.

 

기록한 예수의 기적이라는 것은, 모두 사람에게 신을 일으키려 함에서였다.

 

만약 신이라는 문자의 사용된 도수에서 말한다면, 요한복음이야말로 특히 신앙의 서라고 말해야 것이다.

 

그리고 요한서에 있어서

 

'우리로 하여금 세상을 이기게 하는 것은 우리의 믿음()이다'(요한15:4)라고 하여,

 

저자가 결코 신앙을 경히 여긴 사람이 아닌 것을 있는 것이다.

 

바울은 신앙의 사도이고 요한은 사랑의 사도였다고 하는 것은,

바울, 요한 사람 모두를 오해하는데서 생기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요한복음이 결코 안가한 사랑을 말하는 () 아니라는 것은 이것을 일독하여 보아 분명하다.

 

요한복음이 전하는 예수의 전도가, 이른바 '성전의 청결'로서 시작한 것은 주의해야 사실이다.

 

'예수, 예루살렘에 올라가, 성전에서 , , 비둘기를 파는 사람들과 바꾸어주는(환전) 장수가 앉아 있는 것을 보고, 노끈으로 채찍을 만들어, 그들 , 소를 성전에서 쫒아내시고, 바꾸어주는 장수의 돈을 흩어버리고, 상을 쓰러뜨렸다. 비둘기파는 자에게 말씀하시기를, 이것을 가지고 가라,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말라' (요한복음 2:13-16)

 

이는 결코 상냥하기만 예수를 전하는 말은 아니다.

두려워해야 예수를 전하는 것이다.

 

실로 요한복음 전체에 걸쳐 전해지는 예수는 아주 위권 있는 엄격한 사람이시다.

 

'그가, 눈물을 흘리셨다' 문자는 있으나,

그가 유대인의 불신을 분히 여기셨다는 말씀은 거의 전편에 걸쳐 차고 넘쳐 있다고 수가 있다.

 

실로 요한복음은 구주로서의 예수를 전함과 동시에 심판 주로서의 그를 전하는 ()이다.

 

불과 연기와 가운데 빛나는 사랑의 자광을 전하는 ()이다.

요한복음은 혹은 셋의 귀중한 것을 가르쳐 준다.

 

1 하나님의 아들의 자현이시다.

2, 세상의 이에 대한 태도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의 자현에 대한 태도에 둘이 있다.

 

1 불신이다.

2 신앙이다.

 

그러므로 요한복음 전체는 가지 중요한 것을 가르쳐 준달 있다.

 

1, 하나님의 아들의 자현

2, 불신과 결과

3, 신앙과 결과

 

처음부터 나중에 이르기까지, 요한복음은, 가지의 중요한 일에 대하여 가르쳐 주고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이상 요한복음의 3대교지라고도 칭해야 ,

이것을 모두의 서문에 있어서 수가 있다.

 

1절부터 14절까지에 있어서 저자는 전편의 요략을 싣고 있는 것이다.

(1) 하나님의 아들은 처음에 우주의 원리(Logos)였다. 그는 하나님과 함께 계셔서, 본래부터 하나님이었다. 그는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된 빛이었다. 그는 유체를 취해 인류 사이에 거했다. 그에게 실로 성부께서 낳으신 독생자의 영광이 빛나고 있었다.

 

(2) 그런데 세상은 빛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는 자기 나라에 왔으나, 백성은 그를 받지 않았다.

 

(3) 그러나 세상의 모두가 그를 물리친 것은 아니다. 세상에는 소수, 그를 믿고 그를 받는(영접하는) 자가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자에게 하나님은 능력을 주셔서, 이것을 자기 아들로 삼으셨다고.

 

이상이 1 1절에서 14 이르기까지의 요한복음 서문의 대의이다.

 

서문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적요(적요; summary)이다. 전편의 축사이다.

 

요한복음의 교시하는 바는 이것이다. 예수는 어떤 이시며, 그는 세상에서 무엇을 하시고, 세상은 어떻게 그를 받아들였는지, 불신의 세상에 소수의 신자가 있다는 , 이는 요한복음이 가르쳐주고자 하는 바이다.

 

저자는 나중에 다시 명백하게 () 목적을 교시하여 말하고 있다.

' () 기록한 것은, 너희로 하여금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여 이를 믿고 이름으로 말미암아 생명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20:31).

 

이와 같이, 요한복음이 가르쳐 주고자 하는 바는 간단하다. 하지만 간단함과 동시에 심대하다.

 

예수는 인자는 아니시다. 하나님의 아들이시라고 한다. 하나님께서 육체를 취하여 사람 사이에 거하신 분이란다. 우주는 그로 말미암아 창조되고, 만물은 그의 명하심에 따랐다고 한다.

 

사실인가, 기담인가, 역사인가, 설화인가?

만약 사실이고 역사라면 우주에 이것보다도 중대한 문제는 없는 것이다.

 

하나님은, 과연 사람이 되어 세상에 임하셨을까?

예수는, 과연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신가?

 

문제 중의 문제, 전우주의 최대문제는 이것이다.

 

그런데 요한복음은 문제를 포착(capture) 해다가 간단하게 명백하게 대담하게 확신으로서 말하는 것이다.

 

요한복음이 숭고한 글임은, 제목이 숭고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아들과 영광에 대하여 말한 글이, 끝에 있어서 다음 마디를 싣고 있는 것은, 조금도 이상할 없는 것이다.

 

'예수께서 행하신 일은 이들 외에도 허다하다. 만약 이것을 일일이 기록한다면, , 세상에 실을 없을 것으로 생각한다.'(21:25) .

 

이는 어떠한 사람에 대해서나 말할 있는 말은 아니다. 어떠한 영웅도, 어떠한 성인도,

 

' 세상에 실을 없다' 생각되는 사적을 남겨 놓은 자는 없다.

 

우주에 오직 , 하나님의 아들 , 요한복음 저자가 나중의 일언을 그대로 생애에 적용하였다 하여 과대한 말로 여겨지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인류의 태도, 이는 문제이다.

 

인류는 정의를 귀히 여긴다고 하나, 과연 그러한가?

인류는 정의의 실현자인 하나님의 아들의 출현에 처하여 이에 대하여 어떠한 태고로 나갔던가?

봉영(welcome)인가, 배척(rejection)인가?

 

문제는 단지 예수 당시의 유대인의 그것은 아니다.

 

() 인류의 그것이다.

 

인류전체에 관계되는 문제이다. 천연성에 관한 문제이다.

 

만약 셰익스피어(Shakespear) 극시(drama) 인정을 깊이 파고드는 까닭에 세계적 저작이라고 한다면,

요한복음은 인류의 연성을 파고드는 까닭에 우주적 저술이랄 수가 있다.

 

'정죄(심판)함을 받은 까닭은 이것이다. , 세상에 왔으나, 사람(인류) 빛을 사랑하지 않고, 도리어 어두움을 사랑했다. 이는 소행이 악함으로이다'(3:1 참조) 라고.

 

예수의 말씀에 의해 인류의 본연성은 천명(clarification)되고, 죄는 단정되었던 것이다.

 

사람은 때부터 하나님 편은 아니다. 적이다.

사람의 성은 악한데 그치지 않는다.

 

예언자 예레미야의 말로서 하면, 절망적으로 악이다.

 

( 17:9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한글개역).

 

요한복음은 하나님의 아들의 자현에 대해 말하여 하나님의 성을 천명함과 동시에,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인류의 태도에 대하여 말함으로서 사람의 성을 천명한다.

 

그러므로 () 고원(lofty)하기 그지없는 글임과 동시에 심연 측량할 없는 ()이다.

 

하나님을 사랑의 높으심(지고) 있어서 보여주고, 사람을 죄의 깊은데 있어서 나타내 글이다.

 

저자가 누구인가, 역사적 가치의 정도가 어떠한가 이건, 요한복음이 굉원 절대한 글임을, 경건으로서 이것을 연구하는 누구나가 의심하려 해도 없는 일이다.

요한복음의 이대 요목은, 하나님의 아들의 자현과 이에 대한 세상의 태도이다.

 

그리고 자현은 일시에 행해지지 않았다. 서서히 순서적으로 행해졌다.

 

이에 발전적 진보가 있었다. 예수는 순서적으로 능력과 은혜를 세상에 나타내셨다.

그리고 자현의 정도에 따라, 이에 대한 세상의 태도에도 또한 변화가 있었다.

 

예수께서 자기를 나타내시면 내실수록, 세상의 그의 대한 반대는 격렬해졌다.

 

소수의 그에 대한 흠모는 심후해졌다. 마치 태양이 온기를 발하면 발할수록 굳어져야 찰흙(점토 clay) 더욱 굳어지고, 부드러워져야 ( wax) 더욱 부드럽게 됨과 같은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의 자현은 단순히 자현으로서 그치지 않았다. 반드시 이에 대한 상당한 세상의 반응이 있었다.

 

어두움은 앞에서 흩어지지 않았다. 반대가 사실이었다.

빛이 증가되면 증가되는 만큼 어두움은 더욱 했다.

진리의 출현은 죄의 세상에 있어서는 반드시 결과를 낳은 것이다.

그리고 이것을 가장 명백하게 명시한 것이 요한복음이다.

 

예수는 자기를 세상에 나타내시기 전에, 먼저 사랑과 은혜와 능력을, 어머니와 그를 따른 소수의 제자에게 나타내 보이셨다.

 

그는 갈릴리의 가나에 있어서의 혼연(banquet) 자리에서 물로 포도주 되게 하여, 그가 어떠하신 분임과, 그의 사업이 무엇임을, 그의 근친들에게 보여주셨다.

 

그는 환희의 주시다. 그가 건설하려고 하는 하나님의 나라는 왕의 향연이라는 , 기적이 보여주는 대로이다.

 

(2:1) 사흘 되던 날에 갈릴리 가나에 혼인이 있어 예수의 어머니도 거기 계시고).

 

이는 그가 행하신 이적의 처음인 것으로, '그가 영광을 나타내셨도다'라고 있다.

 

이는 하나님의 아들의 자현의 서막이라고 칭해야 것이다.

물론 자현에 대하여 별로 반대는 일어나지 않았다.

 

그것은 예수의 어머니와 제자를 제외하고, 그밖에, 여기서 커다란 대기적이 행해진 것을 몰랐기 때문이다.

 

잔치를 맡은 자를 비롯하여, 내객 일동, 다만 포도주의 좋은 맛을 맛본데 그치고, 어떻게 해서 되었는지, 어떠한 의미가 중에 담겨져 있는지 조금도 알아차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설교와 훈계가 따르지 않는 기적에 대하여 세상의 사람들은 아무런 반대도 시도하지 않는다.

 

예수께서 만약 이것 이상으로 자기를 나타내지 않으셨더라면, 그는 사회의 총아로서 계시면서, 십자가의 고배를 맛보는 없이 그의 일생을 마쳤을 것이리라.

예수는 1 예루살렘의 성도에서, 하나님의 성전을 청결하시어, 공공연하게 하나님의 아들의 권능을 나타내셨다.

 

(2:13 유대인의 유월절이 가까운지라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더니).

 

그리고 그의 방약무인의 행위에 대하여 몹시 놀람(great surprise) 불평의 소리는 오르지 않을 없었다.

 

'당신이 이런 일을 함에 있어서는, 우리에게 무슨 표징을 보여주랴?'(2:18) ,

 

유대인은 예수에 대항하여 말했다.

 

'당신이 무슨 권위로서 이것을 하는가'(마태복음 21:23)라는 것이었다.

 

여기서 예수와 유대인과의 사이에 최초의 충돌이 있었던 것이다.

충돌은 빈정대는 소리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천둥이 멀리서 울려와 폭우의 습내를 고해주듯, 여기서 비로소 예수에 대하여 오른 빈정대는 소리는 드디어 반대의 벽력이 되어 그의 두상에 임할 바였다.

 

예수는 끈으로서 채찍을 만들어, 하나님의 성전에서 매승(a sinful priest), 거짓 예언자의 무리를 쫓아내심으로서 이에 비로소 은밀한 적을 만드셨다.

 

유대교회의 교직들은 이래로 의심의 눈으로서 그를 보기에 이르렀다.

 

예수는 정략으로서는 일을 아니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로서 그는 일을 하지 않을 없었다. 그는 적을 만들지 않을 없었다. 그러므로 교직의 불흥을 무릅쓰고 대담하게 일을 행하셨다.

 

이로서 예수에 대하여 불평의 소리가 올랐다.

그에 대한 불신의 징조가 나타났다.

 

그러나 불신과 동시에 신앙이 나타났다.

유대의 관원으로 니고데모라는 이가, 밤에 은밀한 예수를 찾아와, 그에 대한 깊은 존경의 뜻을 표시했다.

 

니고데모에게 일어난 신앙은 결코 완전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끝까지 공공연하게 예수를 그의 구주로서 우러러 앙신하지 않았다.

 

(요한복음 19:39 일찍 예수께 밤에 나아왔던 니고데모도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근쯤 가지고 온지라).

 

그러나 약하다 해도 신앙은 신앙이었다. 그의 동료가 모두 예수를 배척한 때에, 그는 홀로 서서 위해 변호했다.

 

성전 곽청의 용행에 의해, 예수는 적으나마 일인의 신자를 만드셨다.

유대교 전체의 앙심을 구를 얻음, 실로 어려운 일이다.

백인천인의 적을 만들지 않고서는, 일인의 친구를 얻을 수는 없다.

 

예루살렘의 성도에서 하나님의 성전을 청결케 하심으로 말미암아, 예수는 유대교회의 불흥을 사고, 동시에 또한 사람의 경모자를 얻으셨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아들의 권능의 자현은 불신의 발단을 일으킴과 동시에 신앙의 맹아(sprout) 재촉했다.

 

요한복음 3 니고데모의 이야기는, 세상의 예수에 대한 관계에 있어서 해석해야 것이다.

 

예수는 예루살렘에 올라가, 성전을 깨끗이 하고, 부패를 제거하여, 심중 은근히 유대교회전체의 환영을 예기하셨다.

 

그러나 사실은 전혀 그의 예상에 어긋났다. 국민신앙의 부인 교회는, 그에 대하여, 은밀한, 더구나 깊은 반대를 표했다.

 

그리고 성도의 시민은 그에 대하여 반대를 표시하지 않으며 전연 냉담했다.

 

'그가 자기 나라에 왔으나, 백성은 이를 받아들이지(영접하지) 않았다'(1:11) 것이다.

 

그는 실망하셨다.

참된 신앙은 하나님의 선민 사이에서 발견되지 않았다.

 

다만 사람의 니고데모를 제외하고는, 예루살렘 전부는, (예수), 하나님의 아들에 대하여 반대 아니면 냉담했다. 상태를 그는

'아들을 믿는 자는 한없는 생명을 얻고, 아들에 따르지 않는 자는 생명을 없다. 하나님의 노하심이 위에 있을 것이다'(3:36) 라는 일언을 남기고,

 

일단 예루살렘을 떠나셨다.

 

그리고 가서 북방 갈릴리에 이르려 하시고, 전도의 실망과 여로의 피곤에 의해, 도중 야곱의 우물 곁에 앉으신 때에, 여기서 뜻밖에도, 생각하지도 않은 곳에서, 생각하지도 않은 사람 사이에 참된 신앙의 표현을 목격하시어, 매우 기뻐하시고 위로 받으셨던 것이다.

 

그가 만난 것은, 유대인이 언제나 비하하여 마지않았던 사마리아인이었다.

 

더구나 부인이었다. 부인도 부인, 5인의 남편을 가졌다는 음부였다.

소행은 혐오할만하고, 죄는 지적 또는 힐책할 만했다.

 

하지만 그녀의 영혼에 귀히 여길 신앙의 씨가 있었다.

그녀는 유대교회의 교직들과 달리, 구원될만한 영성을 갖추고 있었다.

 

그러므로 예수는 여기서 자신의 피로와 기갈을 잊으시고, 부인, 더구나 이방 사마리아의 부인, 그것도 간음의 여인에 향하여, 그가 일찍이 행한 바의 가장 고원한 설교를 하셨던 것이다.

 

장소는 사마리아의 수가의 마을, 야곱의 우물가,

교사는 하나님의 아들,

청중은 다만 사람, 이방의 부인, 그것도 음부,

제목은 하나님과 그에게 가까이 하는 ,

 

'대저 하나님은 영이시매, 예배하는 자도 영과 참으로서 이를 예배할 것이다'(4:24) 라고.

 

여기서 예수 자신에 의해 이방전도의 초막이 행해진 것이다.

그리고 초수는 부인, 그것도 타락한 부인이었던 것이다.

 

하나님의 선민에 실망한 예수는, 여기서 있는 부인에 있어서 하나님의 자녀로 되는 능력을 부여하기에 족함의 신앙을 발견했던 것이다.

 

이것을 보고 기뻐하여 마지않아, 그는 일신의 기갈을 잊고서 그의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게 너희가 알지 못하는 음식물이 있다.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따라, 일을 이루는 , 이는 음식물이다'(4:32-34) 라고.

 

그의 만족 가히 알만하다.

여기 이스라엘의 스승인 니고데모보다 나은 신앙이 있었다.

그는 (니고데모), 아리마대의 요셉과 한가지로 유대인을 두려워하여 은밀히 예수를 믿는데 그쳤지만도,

 

그녀는 숨김없이 그를 믿고, 가서 그녀의 마을에 이르러, 촌민을 불러 그에게로 데리고 와서, 그의 교도에 참여케 했다.

 

'그녀의 증거한 말로 인하여, 마을의 사마리아 사람 다수가 예수를 믿었다'(4:39) 있다.

여기에 유대인과 사마리아인,

선민과 이방인,

의인과 죄인과의 좋은 대조가 있다.

 

예수의 성전곽청에 처하여 다만 사람 니고데모를 제외한 외에는,

선민 그를 그로서 영접한 없음에 대하여,

 

이방의 사마리아는 기꺼이 그를 영접하고,

그에게 청종하여,

그의 구원에 참여하려 했다.

 

예수는 아브라함의 자손으로서 자임하는 유대인에게 영접되지 못하고,

이방의 사마리아인에게 영접되었다.

 

그는 예루살렘에 머물 없었지만, 수가 백성의 간청 따라 2일간, 그들 사이에 유하셨다.

 

예수의 자현의 결과는 그렇듯이 하여 나타났다.

 

선민의 냉우,

이방인의 환영,

교사의 반신,

죄인의 독신.

 

'그가 자기 나라에 왔으나, 백성이 이를 영접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를 영접하여 이름을 믿는 자에게는 능력을 주어, 이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셨다'

 

사마리아인의 무학도 부인의 과거의 오예도,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자녀)됨의 능력을 받기 위한 장애(obstacle) 되지 않았다.

 

그들은 신앙으로써 선민이 참여하지 못하는 능력의 부여에 참여할 있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아들의 자현에 처하여 세상은 진정으로 심판되었다.

 

선민은 도리어 버려지고, 이방인은 도리어 선택되었다. 이에 있어서인가

 

'내가 나를 위하여 저를 땅에 심고 긍휼히 여김을 받지 못하였던 자를 긍휼히 여기며 백성 아니었던 자에게 향하여 이르기를 너는 백성이라 하리니 저희는 이르기를 주는 하나님이시라 하리라'(호세아서 2:23 한글개역) 예언자의 말이 사실로 되어 나타난 것이다.

 

실로 하나님의 자현은 세상의 심판이다.

 

하나님께서 자기를 나타내시는 때에,

신자는 도리어 불신자로서 나타나고,

불신자는 도리어 신자로서 나타나는 것이다.

 

2 전의 유다와 사마리아에 있어서 그러했다.

오늘의 영국과 미국과 일본과, 기타 모든 이른바 그리스도교국 또는 군자국에 있어서 그러하다.

 

할렐루야, 아멘, 주여, 오시옵소서이다.

자현 1회는 그렇게 하여 끝났다.

 

예수는 다시 나아가 자기를 세상에 나타내 보이셨다.

그는 유대인의 어떤 축제 때에(아마도 부림절에서 구출된 기념제였으리라),

다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다.

 

그리고 양문 근처인 베데스다 못에서, 38년간 앓던 자를 고치셨다(5).

 

이는 전회보다 승한 그의 영광의 표현이었다.

채찍으로서 성전을 청결히 하신 것은 아니다.

은혜로서, 고치기 어려운 환자를 고치신 것이다.

 

그는 지금 권위로서 선민에게 임하지 않았다. 은혜로서 임하셨다.

그는 심중에 은근히 생각하신 것이리라. 이제야 말로 국민은 사명을 알아, 나를 믿고 나를 영접하리라고.

 

하지만 사실은 그의 예상과 달랐다.

 

언제나 의심의 눈으로서 그를 감시한 유대인들은, 그가 행하신 은혜를 찬양하지 않고, 그가 안식일에 고치신 것을 오히려, 율법위반 죄로서 그를 책했다.

'여기 유대인, 예수를 비난하여 그를 죽이려 꾀했다. 그것은 그가 일을 행한 안식일이었음으로라'(5:16) 있다.

 

치유의 은혜에는 주목치 않고, 교칙위반의 죄로 그를 따랐다.

그들의 불명(stupidity)이야말로 실로 놀랍기만 것이다.

더구나 이는 교직에 있는 신분으로 백성의 지도로서 자임하는 승려계급이 하나님 사람에 대하여 취하는 수단이다.

 

사람의 구원은 그들이 조금도 개의하는바 아니다.

교칙의 엄수, 교권의 유지, 그들의 종교라는 것은 주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바리새파의 교사들은 예수께서 병자를 고치신 것을 보고,

고통이 제거된 것을 기뻐하지 않고서, 그들이 만든 교칙이 깨뜨려진 것을 노했던 것이다.

 

세상에 무자비한 이로서 실은 교직같은 이는 없는 것이다.

사람은 그들의 목적이 아니다.

사원이다.

교회이다.

 

그들에게 있어서는,

사람은, 교회유지, 교세확장의 기계인데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사람을 구했다고 해서 그들의 성찬을 얻을 수는 없다.

아니, 교회 본위인 그들에게 있어서는, 교회를 떠나서, 사람을 구하는 것은 악사(惡事)이다.

 

그들은 그러한 행위에 대하여 부인의 소리를 올리지 않을 없다.

그런데 지금 그들의 목전에 있어서 그들의 면허를 얻는 없이, 은혜의 역사가 행해진 것이다.

 

사랑의 발의로 나온 예수의 기적은, 교직의 입장을 무너뜨리려는 커다란 타격처럼 느껴졌던 것이다.

 

바리새파들의 교사들이 예수를 죽이려고까지 노한 이유는, 그의 행위로서 교권침해로 알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은 그들의 감각에 있어서 틀리지 않았던 것이다. 여기에 그들 앞에 커다란 재판인이 섰던 것이다. 그의 행위 그것이 분명히 그들을 재판했던 것이다.

 

예수는 영광을 나타내사, 그를 믿는 병자는 치유되고, 그를 믿지 않는 유대인은 심판되었던 것이다.

 

예수 자신은 사람을 심판하지 않으신다. 그의 하신 말씀과 그의 행하신 일이, 사람을 심판하여 틀리지 않는 것이다.

 

그리하여 자현 2 심판으로 끝났다.

 

신앙의 의롭다함을 얻고, 불신은 심판되었다.

하지만 자현의 진보에 따라, 세상의 이에 대한 태도에도 발전이 있었다.

은밀한 불평은 공공연한 반대로 되어 나타났다.

예수를 죽이려는 마음은 이때 이미 그의 교적 중에 생겨났다.

 

하나님의 아들은 자기를 나타내심에 있어서 사람을 구원하고 있음과 동시에 적을 만들고 있었던 것이다.

 

예수는 이미 2, 예루살렘에 있어서 자기를 국인에게 나타내셨다.

그리고 2회는 2 모두, 자현은 효를 이루지 못했다.

 

유대인에게 신앙은 생겨나지 않았다. 반대로, 국민전체는 반대의 태도에 섰다.

이미 그를 죽이려 하는 징조마저 나타났다.

하나님의 아들은 선사(善事) 민간에게 행하여, 혐오하는 바로 되었다.

 

여기서 인가, 예수는 다시 성도를 떠나 갈릴리의 시골로 물러 가셨다.

그리고 민간 사이에서 일하여, 그들 사이에 참된 신앙을 일으키려 하셨다.

 

그도 역시 도시전도에 실망하여 농촌 전도로 옮기셨던 것이다.

그는 생각하셨던 것이다.

 

도시 인사는 받은 교화로 인하여 도리어 그를 받을 없고, 교법사의 감화에서 질박(simplicity) 시골 인사야말로 도리어 신앙을 일으킬 것이라고.

 

하나님의 아들도 사람으로 되신 이상, 우리들 인간과 가지로, 실패에 의해 지혜를 배우시는 것이다.

 

때는 유월절 가깝고, 곳은 디베랴(9 132역주) 호수의 대안이다.

헤르몬(헐몬) 산정이 호수면에 비취고, 청초하여 천연의 융단(carpet)으로서 들을 덮다시피 곳에, 허다한 갈릴리인은 예수에게로 모여왔다.

 

군중을 그는, 여기서 그들의 앞에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지 않을 없었다.

그는 여기서 유월절의 잔치를 베푸셨다.

 

보리떡 다섯과 물고기 마리로서, 거기에 모인 5, 000 군중을 환대하여, 그들로 하여금 배불리 먹게 하신 것은 커다란 기적이다.

 

하나님의 아들을 기다려 비로소 있는 기적이다.

오로지 그의 사랑에서 나온 기적인 것으로, 조금도 군중을 경악케 하렴에서는 아니었다.

 

예수는 여기서, 자기가 생명의 빵이심을 그들에게 보이시기 위해 기이한 일을 행하신 것이다(6).

 

그런데 결과는 어떠했던가?

 

질박한 갈릴리 호반의 백성은 예수의 기적의 가르치심을 받았던가?

그들은 그들 위해 마련된 썩지 않은 (양식), 썩지 않을 빵임을 깨달았던가?

 

아니, 그들도 역시 영감에 둔한 육의 어린아이였다. 그를 영혼의 구주로서 영접하지 않고서 빵의 공급자로서 모시려 했다.

 

(6:26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그들은 유대인처럼 그에 대하여 반대하여, 대자선가로서 그를 환영하려 했다.

이것을 보고 예수는 심히 탄식하셨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말씀하시기를,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나를 찾아온 것은, 기적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다만 빵을 먹고 배불렀기 때문이다. 너희는 썩을 양식 위해 일하지 말고, 영생에 이르는 양식, 인자가 주는 양식 위해 일하라'(6:26-27) 말씀하시어,

 

그의 실망의 뜻을 표시하셨다.

 

교회가 구하는 것은 교권,

사회가 구하는 것은 ,

종교가 아니면 정치가,

도시인사도 시골인사도

구하는 바는 거의 다름없는 것이다.

 

참된 복음을 구하지 않고 하나님의 사람을 영접하는 점에 있어서는 도시와 시골(도비 town and country), 모두 동일하다.

 

도시에 격렬한 반대 있고, 시골에 두드러진 반대 없음을 보고서,

시골은 도시보다 전도적으로 유망하다고 수는 없다.

다만 양자의 취미가 다를 뿐이다.

 

사람의 영예를 귀히 여기고 영의 양식을 경히 여기며 육의 양식을 중히 여기는 점에 있어서, 시골은 도시와 조금도 다름없는 것이다.

 

그리고 경외할 예수도 역시 그의 실험(체험) 의해 슬퍼할 사실을 발견하신 것이다.

 

그는 예루살렘의 시민에게 실망하심과 같이 갈릴리의 농부와 어부에 실망하셨던 것이다.

그는 갈릴리 호반에 있어서 빵과 물고기와의 증식의 기적을 행하심으로서, 더욱 사람들이 근본적으로 하나님에게서 떠난 자임을 깨달으셨던 것이다.

그리하여 예수의 3회의 자현에 의해,

세상의 그에 대한 태도는 더욱 분명해 졌던 것이다.

 

도시에 있어서는 냉우가 아니면 반대,

지방에 있어서는 육욕적 환영,

모두 그의 마음을 아프게 하신 뿐으로서 그에게 만족을 주지 않으셨다.

 

그는 이때 이미, 인자로 되셔서 하늘에서 내려오신 하나님의 아들에게 지상 베개 없음을 더욱 깊이 느끼셨으리라.

 

이제 갈릴리의 시골도 역시 신앙흥기의 곳으로서 소망을 두기에 족하지 못했다.

 

그러면 어떻게 하랴!

백성은 모두 여호와를 버리고,

영은 둔해져, 빛의 강림도 이것을 깨우치기에는 족하지 못하다면,

 

이제부터는 다시 , 혹은 ,

예루살렘에 올라가, 그곳에서 말할 만큼을 말씀하시고 나타내실 있을 만큼 나타내시어, 그리고 마침내 땅에서 들려,

만민을 이끌어 자기에게로 인도하신다는 것은

 

(12:32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 하시니),

 

필경 이때에 있어서의 예수의 각오였으리라.

 

예수는 이미 3, 자기를 세상에 나타내시었다.

 

성전을 청결케 하심으로서 그의 정의를 나타내시었다.

병자를 고치는 것에 의해 그의 은혜를 나타내시었다.

그리고 군중을 키우심에 의해, 그가 생명에 이르는 진정한 (양식)이심을 나타내셨다.

 

그리고 자현의 결과는 언제나 다수의 반대와 소수의 신앙이었다.

 

예수는 그의 선행에 의해 더욱 세상의 반대를 초래함과 동시에 소수의 신자의 신앙을 강하게 하셨다.

 

예수는 사람의 영혼을 키우시는 참된 빵이시다.

그는 모든 사람을 비추시는 참된 빛이시다.

그는 이제는 사람의 빛으로서 자기를 나타내셔야 되셨다.

 

예수는 예루살렘에 올라가셨다.

 

때는 유대인의 초막절이었다.

그가 성내를 걸어가시는 , 소경 거지를 보셨다.

 

'예수 행하시는 , 나면서 소경 자를 보셨다'(9:1) 있다.

 

'보셨다', '보셨는데' 뜻이다.

그는 특별한 주의를 기울이셨다는 뜻이다.

그는 선민 중에 여기 그의 은혜를 받기에 족한 그릇을 발견하셨던 것이다.

 

그리고 사람은 제사장도 아니고, 유사도 아니라, 나면서부터의 맹인이었고, 거지였던 것이다.

 

실로 하나님은 사람을 편벽(eccentricity)되이 보시는 이가 아니시다.

일찍이는 이방 부인에게, 그것도 음부에게 자기를 나타내신 그는,

지금은 여기서 소경인 거지에게 크신 능력으로서 나타내셨다.

 

간단한 방법과 일언의 명령에 의해 맹인의 눈은 열리었다.

 

(9:6-7 말씀을 하시고 땅에 침을 뱉아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고

7) 이르시되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시니 (실로암은 번역하면 보냄을 받았다는 뜻이라) 이에 가서 씻고 밝은 눈으로 왔더라).

 

여기서 대기적이 행해져, 예수는 다시 영광을 나타내신 것이다.

그리고 결과는 전과 동연했다.

 

신앙은 더욱 전진하고, 반대는 더욱 격렬의 도를 했던 것이다.

 

눈을 거지는 처음에 예수를 예언자의 일인으로서 알았으나,

 

(9:17 이에 소경 되었던 자에게 다시 묻되 사람이 눈을 뜨게 하였으니 너는 그를 어떠한 사람이라 하느냐 대답하되 선지자니이다 한대)

 

유대인의 힐문과 박해에 의해 예수에 관한 그의 생각은 분명해져, 그가 신앙으로 인하여 유대교회의 추방하는 바로 되자, 그는 마침내

 

'주여, 내가 믿습니다고 하면서 그를 경배했다' 것으로서,

그는 예수를 경배해야 하나님의 아들로서 믿기에 이르렀다.

 

(9:38 가로되 주여 내가 믿나이다 하고 절하는지라).

 

그리고 믿은 거지의 신앙의 진보에 따라 유대인의 불신의 발전도 현재해 졌다.

 

유대 교회의 직분들은 이제는 예수를 '죄인'이라 부르기에 주저하지 않았다.

 

(9:24 이에 저희가 소경 되었던 사람을 두번째 불러 이르되 너는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라 우리는 사람이 죄인인 아노라).

 

예수는 여기서 이미 2, 안식일을 깨뜨려, 모세의 율법을 범했던 것이다.

 

전에는 안식일을 깨뜨려, 모세의 율법을 범했던 것이다.

전에는 안식일에, 38 앓은 자를 고치시고, 여기서는 가지로 안식일에 나면서부터의 소경의 눈을 뜨게 하셨다.

 

그의 죄야 말로, 사할 없는 것이다.

 

'그들이 예수를 잡으려 했으나, 그가 손을 피하여 떠나니라' 것이고 보면, 여기서 유대인의 반대는 공공연하게 그에게 손을 내리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예수는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는 이제는 그의 선행으로서 그의 국인을 제도(salvation) 없음을 깨달으셨다.

 

하지만 그는 그의 내부에 있는 전부를 세상에 나타내지 않고서는 마지않으셨다.

그는 최후에 그의 최선을 세상에 나타내셨다.

그리고 결과로서 그는 그의 생명을 버리기에 이르셨다.

그리고 그러한 기회는 그의 친구인 베다니의 나사로의 죽음에 의해 준비되었다(11).

 

그는(예수), 그의(나사로) 자매에게서

 

'주의 사랑하는 병들었나이다' 소식을 받은 때에,

여기서 최후의 현영의 기회가 그에게 주어진 것을 지각하셨다.

'예수 이것을 듣고서 말씀하시기를, 이는 죽는 병이 아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이다. 하나님의 아들로 하여금 이로 인하여 영광을 얻게 하시렴에서이다'(11:4) 라고 있다.

 

그리고 이는 그에게 있어서 커다란 위험이 따르는 기회였음은, 그도, 또한 그의 제자도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제자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굳이 베다니로 가시려 하자, 제자의 사람인 도마는 말했다.

 

'우리도 또한 가서, (예수) 함께 죽자'(11:16) .

 

예수는 여기서 죽음을 결하고서 베다니로 가셨던 것이다.

일찍이는 갈릴리의 가나 혼연석에서 물로 포도주가 되게 하여 그의 영광을 나타내신 예수는, 이제 여기 예루살렘 가까운 베다니에 있어서 친구를 죽음에서 소생하게 하시어,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의 최대의 증거를 주시었다.

 

가나의 기적으로서 시작하여 베다니의 기적으로서 끝마치셨다.

 

처음에 만물의 조물주로서 자기를 나타내시고,

나중에 생명의 주로서 대능을 보이셨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11:25) 라고.

 

나사로의 부활의 의미는 여기에 있었던 것이다.

 

만물의 창조주이신 (가나의 기적을 행하신 ),

하나님의 정의의 체득자인 (성전청결의 의미),

하나님의 자애의 실현자이신 (병자 치유의 의미),

생명의 ()이신 ,

세상의 빛이신 그는,

 

모든 생명의 근원(원천)으로서 영원히 사시는 까닭에,

영원히 삶의 능력을 사람에게 주시는 분이라는 것이,

여기 명시된 것이다.

 

베다니에 있어서의 사자(死者) 부활은 예수께서 행하신 최대의 기적이었다.

예수는 이상으로 자기를 세상에 나타낼 수가 없었다.

사람은 이상의 하나님의 나타내 보이심을 요구하지 않는다.

 

사자는 죽으나 죽지 않고,

예수를 믿음으로서 말미암아 죽음에서 부활하여 영원히 있음이 명시되어,

사람이 하나님께 대하여,

알고자 하는 모두가 그에게 보인 것이다.

 

나사로의 부활은 물론 친구의 죽음을 슬퍼하는 데서 비롯된 나사로 일인 위한 부활은 아니었다.

 

일시 죽음을 면하는 것은 커다란 은혜임에 틀림이 없으나, 그러나 최대의 은혜가 아님은 분명하다.

 

예수는 나사로를 소생케 하시어,

, 나사로와,

그의 자매인 마르다와 마리아 그에게 수종 하는 그의 제자들과,

여기 모인 많은 유대인,

그리고 그들을 통하여서 세계의 사람들에게,

(그분), 예수에게 부활의 능력과 영원한 생명이 있음을 보이시기 위해,

기적을 행하신 것이다.

 

기적도 다른 기적과 한가지로,

단순히 기이한 이적이 아니라,

의미 있는 기적이다.

 

예수는 나사로를 소생케 하시어,

그가 (말일) 모두 그를 믿는 자를 부활케 하시는 능력과 사업을 나타내 보이신 것이다.

 

'무릇 나를 믿는 자는(모두) 언제까지나 죽는 일이 없다'(1:26) .

 

이것이 기적으로서 하신 대설교의 주제였다.

 

그리고 나타내 보이심에 접하여 유대인의 반대는 절정에 달했던 것이다.

 

'이에 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이 회의를 열어,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할까? 사람이 많은 기이한 일을 행했도다. 만약 그를 이대로 버려두면, 사람 모두 그를 믿기에 이르리라…… 날부터 그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함께 꾀하다'(11:47-53)

 

이렇게 하여 하나님의 아들의 자현이 극에 달한 때에, 세상의 그에 대한 증오도 역시 극에 달했던 것이다.

 

예수에게 있어서는, 나사로의 죽음은,

그의 최대최고의 힘을 나타내는 기회로 되었으나,

그의 적에게 있어서는 이것이 그를 죽이는 기회로 되었던 것이다.

 

베다니의 기적은 골고다의 비극과 서로 관련시켜 해석해야 것이다.

전자는 후자의 직접의 원인으로 것이다.

 

예수는 그의 친구를 소생케 하심으로 인하여, 제사장, 바리새인들의 포로(사로잡는바)되어, 마침내 그들의 죽이는 바로 되셨던 것이다.

 

이것을 기이하다면 기이하달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어떠하심과 세인의 어떠함을 , 이것은 결코 기이한 아닌 것이다.

 

정의는 최후의 승리자라고 하는데,

그러나 정의는 세론의 찬성을 얻는 까닭에 최후의 승리자라는 것은 아니다.

세인의 세론은 언제나 정의에 거슬리는 불의에 ()하는 것이다.

 

만약 예수와 바라바와 누구를 택할까를 묻는다면,

세론은 언제나 항상 사람이 아니라,

 

바라바를 사하소서(18:40)하고 외치는 것이다.

 

그런데 '바라바는 도둑이다'라고 있다.

 

하나님께 거역한 이세상의 사람은,

오히려 도둑은 용서해도,

하나님의 아들은 이것을 용서치 않는 것이다.

 

예수의 이름은 신자에게 있어서는 하나님과 한가지인(동일한) 이름이시다.

하지만 불신자에게 있어서는 국적, 불효자, 모든 악사를 종합한 명칭이다.

 

우리들은 일본국에 있어서도 일이 사실임을 알고 있다.

같이 하여, 예수는 전후 5회에 걸쳐 자기를 세상에 나타내 보이셨다.

그리고 결과는 세인전체의 반대와 소수의 신자의 경앙이 있었다.

 

그의 자현은 그에게 죽음을 가져왔다.

요한복음 기자는 이것을 쓰고 나서 자기의 관찰을 진술하여 말했다.

 

예수 그들(세인, 특히 유대교인의 직분과 신자들) 앞에 그렇듯 많은 기사(깊은 의미를 포함한 기적) 행하셨다.

 

하지만 그들은 그래도 그를 믿지 않았다. 이는 예언자 이사야가 말에

 

'내가 말하는 것을 믿는 자는 누구랴. 주의 손을 누구에게 나타났던가!' 적중한 것이다.

 

이사야는 다시 말했다.

 

'그들이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고침 받을 없게 하기 위해, 그가(하나님) 눈을 어둡게 하시고,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도다.' 라고.

 

이러므로 그들은 믿을 없었다.

 

이사야는 (예수) 영광을 (미리) 보았음으로, 그에 대하여 이렇게 말한 것이다.

하지만 유사(정치가, 종교가, 이른바 상류사회의 사람들) 중에 허다히 그를 믿는 있었지만도,

그들은 바리새인(교권을 가진 종교가) 두려워하여 분명하게 그를 믿는다고 하지 않았다.

회당에서 배척될 것을 두려워함에서였다.

 

이들은 하나님의 영광보다도 사람의 평판(명성) 기뻐함으로이다(12:37-43) 라고.

 

귀하신 예수의 33년의 세상의 생애는 요한복음 기자의 말로서 기록된 것이다.

 

대다수의 반대,

극히 소수의 신앙,

유사(공회원) 중에 신자는 생겨나지 않은 아니지만도

, 사람을 두려워하여 은밀히 그를 믿는데 지나지 않는다.

 

그를 믿고, 기탄없이 그를 세상에 소개한 것은 이방의 부인, 그것도 타락부인 아니면 소경 거지들 이였다.

 

세상의 정치가, 종교가들은 극히 소수를 제외하고서는 모두 그에게 반대하고, 죄인으로서 그를 정부에 고소하여, 그를 절멸시키지 않고서는 마지않았다.

 

요한복음이 명백하게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것은 이것이다.

 

글이 일종의 고적감을 띠고 있는 것은 누구나가 인정하는 일이다.

 

'빛은 어두움에 비치나, 어두움은 이를 깨닫지 못했다'(1:5참조).

 

'그가 자기 나라에 오셨으나, 백성은 이를 영접하지 않았다'(1:11참조),

 

'이에(유대 사람들이) 그를 치려고 돌을 취하니'(8:59참조),

 

' 날부터 그들이 예수를 죽이려 모의했다'(11:53참조),

 

'세상이 만약 너희를 미워하는 때는,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하는 것으로 알라'(15:18참조)…….

 

요한복음의 기록을 통한 예수의 생애는 결코 행복의 생애, 성공의 생애, 명예의 생애가 아니였음은 무엇보다도 분명하다.

 

예수 () 세상은 괴리(estrangement), 충돌, 결투로 끝났다.

그리고 이긴 것은 물론 세상이고, 것은 물론 예수였다.

예수의 일생의 현영과 전도에 의해 그가 얻은 것은 불과 12인이었다.

 

그밖에 소수의 신자는 있었대도, 이는 그의 복음을 맡기기에는 족하지 못했다.

그리고 12인은 모두 참된 신자는 아니었다.

중의 1인은 악마였다(6:70).

 

13 이하 17장에 이르기까지는, 예수께서 신자의 일군을 가르치고, 위로하신 기사이다.

 

'유월절 전에, 예수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야 이른 것을 알고, 세상에 있어서 자기의 백성(제자를 가리켜 말한다) 사랑하셨으니, 끝까지 이를 사랑하시니라'(13:1) 있다.

 

12인은 소수이다(그것도 중의 1인은 악마이다).

하지만 소수야말로, 그의 일생의 노동에 의해 거두어 드린 ,

그러므로 그에게 있어서는 눈동자 같이 귀했다.

 

그러므로 그가 이제 그들과 서로 떠나려 하는 있어서 그들을 가르치고 위로하는 말은 은근(politeness: intimate) 극했다.

 

사람의 붓으로 기록된 중에, 요한복음 13 이하의, 예수께서 제자에 대해 하신 이별의 말씀보다도 아주 적절(appropriateness) 것은 없다.

 

여기서 사랑의 순수(genuineness) 있다.

 

예수는 그를 믿지 않은 유대인에게 향해서는, 에둘러서 말하시고, 비유로서 깨우치셨지만도, 그를 믿는 제자에게 향하여서는, 숨김없어 사실 그대로 말씀하셨다.

 

이것을 알아차린 제자의 사람은 그에게 말했다.

 

'주께서 지금 밝히 말씀하십니다. 비유로 말씀하지 않습니다'(16:29) .

 

우리들은 13 이전에 있어서, 예수께서 세상에 대하여 취하신 태도를 보고,

13 이하에 있어서, 그가 그의 사랑하는 제자에 대하여 취하신 태도를 본다.

 

세상에 대해서는 운무(clouds and mist)처럼 포착(catch)하기 어려운 바가 있다.

그러나 제자에 대해서는 일광이 명백함 같이 명백하다.

 

성실은 불신에 대하여 실체를 보일 수는 없다. 다만 신앙에 대해서만 나라의 진미를 보이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는 그의 진미를 나타내시기에 앞서서, 최후의 청세를 행하셨다.

악마인 유다는 제자들 가운데서 떠나야 것이었다.

그가 중에 있어가지고는, 예수는 자기의 진미를 나타낼 수는 없었다.

 

불신의 앞에 성실은 냉각하지 않을 없다.

불신은 신앙발전의 대방해이다.

유다가 떠나지 않은 예수는 제자들에게 향하여 그의 최선최미를 말할 없었다.

'유다는 조각의 (식물) 받고 나갔다. 때는 이미 밤이었다. (유다)그가 나간 후에,

예수는 말씀하시기를, 이제 인자는 영광을 받는다……'(13:30-31) .

 

세상은 예수를 버리고 예수 자신은 이제 세상의 최후의 분자를 그의 신변에서 물리치심으로서, 그는 나서 처음으로 여기서 하나님과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와 있게 것이다.

 

넓은 세계에 자기를 합쳐 겨우 12,

이것이 그때의 예수의 일단이다.

지상의 천국이다.

세상의 누룩을 섞지 않은 누룩 없는 ()이다.

 

하나님의 아들의 강세와 그의 33년의 가난한 생애는, 소근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귀하다, 하나님의 교회.

교회란 이러한 것이다.

이렇게 하여 만들고,

이렇게 하여 성립하는 것이다.

 

우리들이라 해도 그러한 의미의 있어서의 교회는 이것을 배척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소한 양군을 이끌고서 예수는 세상과 최후의 충돌을 하신 것이다.

 

요한복음 18 이하는 예수 () 이세상의 최후의 결전을 기록한 것이다.

 

암흑은 정권과 교권과 배신자의 향도(guidance) 얻어, 광명을 향해 쳐들어 왔다.

 

광명 군중에 대동요가 있었다. 병졸은 군주를 혼자 남겨 놓고서 모두 도망쳐 버렸다(가련한 약졸들이여).

 

그러나 구주는 혼자 서서 더욱 강하셨다.

그는 혼자 적의 강성(a fort) 침입하여, 의거한바 기초를 분쇄했다.

그러나 자신은 적봉에 희생되어 사라졌다.

 

세인의 눈으로 , 싸움은 전연 하나님의 아들의 패배로서 끝났다.

암흑군은 개가를 높여 기뻐했다.

그들은 그의 시체를 아리마대의 요셉의 무덤에 장사했다.

생각하기를,

 

'우리들은 이렇게 하여 나사렛 사람의 광적 복음을 봉쇄해 버렸다. 이제야 우리에게 영구의 평화는 왔다'.

 

하지만 보라.

 

부인,

예수의 부활을 고하는 자가 있었다.

도망쳤던 그의 제자들은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 왔다.

 

여기에 세상의 이론으로서는 도저히 없는 이상한 대운동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년도 되지 않았는데,

예수를 죽인 자는 모두 멸망되고,

죽임 당하신 예수의 복음은 전지에 선전되기에 이르렀다.

 

예수의 생애는 실패로 끝났다.

그러나 종국은 죽음이 아니라,

죽음의 반대인 생이었다.

 

예수는 세상에 버린바 되었다.

그러나 예수는 세상을 버리지 않고 서서히 이것을 자기에게로 거두어들이시고 있다.

 

현세에 있어서는 실패,

후세에 있어서는 대성공,

세상에 증오되고서 세상에 이기셨다는 ,

이것이 요한복음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예수의 생애의 귀한 교훈이다.

 

위대하도다, 요한복음!

 

하지만 지금의 그리스도 교회는 어떤가?

지금의 그리스도교 청년회는 어떤가?

예수처럼 세상에 증오되지 않고서 도리어 세상의 환영을 구하고,

이것을 기뻐하며,

이것을 자랑삼는다.

 

예수는 그의 일생 동안에 11인의 신자를 얻는데 지나지 못했는데,

지금의 교회와 청년회는 1회의 설교 회에 백인의 신자를 얻었다고 하여 기뻐한다.

 

예수는 유사 중에 일인의 공적 신자를 가지셨는데,

지금의 이른 그리스도 신자들은, 공작, 백작의 찬성 원조 있으면 천지의 찬동을 얻은 것처럼 기뻐한다.

 

귀하다, 요한복음이 전하는 예수.

비열하다, 현대의 교회의 감독과 목사와 전도사여.

 

그들은 성서를 배우고 요한복음을 송찬하면서 명백한 교훈에 거슬리고 있는 것이다.

 

오인은 여기서 새로이 요한복음을 그들에게 권하여 그들의 개전(repentence) 촉구하지 않을 없다.

오인은 이렇게 말한대서, 자신이 그들을 저주하는 것은 아니라고 믿는다.

어떤 다른 이가 오인의 뒤에 서서,

오인으로 하여금 이것을 그들에게 말하는 것이라 믿는다.

 

내촌감삼의 (1914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