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빛이신 예수
성 경: [요 1:9-13]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
10)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11)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13)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요 1:9]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
▶ 참 빛 - 6-8절에 걸친 침례 요한의 소개로 인해
(6-8절 하나님께로서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났으니 이름은 요한이라
7) 저가 증거하러 왔으니 곧 빛에 대하여 증거하고 모든 사람으로 자기를 인하여 믿게하려 함이라
8) 그는 이 빛이 아니요 이 빛에 대하여 증거하러 온 자라)
잠시 중단되었던 4, 5절의 주제가 본절에서부터 다시 이어지고 있다.
(4-5절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5)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여기서 '참'은 사도 요한이 즐겨 사용하는 용어로서 '거짓에 반대되는 참'(알레데스)이 아니라 '불완전을 완전케 하는 참'을 의미한다.
따라서 '참'(true)이란 용어는 말씀이신 그리스도께서 어둠의 세력에 대항하여 싸우는 빛의 세력인 성도들의 참된 주님이 되신다는 사실을 시사한다.
(롬 12:13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
엡 5:8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살전 5:5 너희는 다 빛의 아들이요 낮의 아들이라 우리가 밤이나 어두움에 속하지 아니하나니)
또한 ‘참 빛’이신 주님께서는 말세에 어두움의 권세를 종식(終熄)시키고 빛의 왕국인 하나님의 나라를 완성하실 것이다.
(계 21:9-27 일곱 대접을 가지고 마지막 일곱 재앙을 담은 일곱 천사 중 하나가 나아와서 내게 말하여 가로되 이리 오라 내가 신부 곧 어린 양의 아내를 네게 보이리라 하고
10) 성령으로 나를 데리고 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보이니
11) 하나님의 영광이 있으매 그 성의 빛이 지극히 귀한 보석 같고 벽옥과 수정 같이 맑더라
12) 크고 높은 성곽이 있고 열두 문이 있는데 문에 열두 천사가 있고 그 문들 위에 이름을 썼으니 이스라엘 자손 열두 지파의 이름들이라
13) 동편에 세 문, 북편에 세 문, 남편에 세 문, 서편에 세 문이니
14) 그 성에 성곽은 열두 기초석이 있고 그 위에 어린 양의 십이 사도의 열두 이름이 있더라
15) 내게 말하는 자가 그 성과 그 문들과 성곽을 척량하려고 금 갈대를 가졌더라
16) 그 성은 네모가 반듯하여 장광이 같은지라 그 갈대로 그 성을 척량하니 일만 이천 스다디온이요 장과 광과 고가 같더라
17) 그 성곽을 척량하매 일백사십사 규빗이니 사람의 척량 곧 천사의 척량이라
18) 그 성곽은 벽옥으로 쌓였고 그 성은 정금인데 맑은 유리 같더라
19) 그 성의 성곽의 기초석은 각색 보석으로 꾸몄는데 첫째 기초석은 벽옥이요 둘째는 남보석이요 셋째는 옥수요 넷째는 녹보석이요
20) 다섯째는 홍마노요 여섯째는 홍보석이요 일곱째는 황옥이요 여덟째는 녹옥이요 아홉째는 담황옥이요 열째는 비취옥이요 열한째는 청옥이요 열두째는 자정이라
21) 그 열두 문은 열두 진주니 문마다 한 진주요 성의 길은 맑은 유리 같은 정금이더라
22) 성 안에 성전을 내가 보지 못하였으니 이는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및 어린 양이 그 성전이심이라
23) 그 성은 해나 달의 비췸이 쓸 데 없으니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비취고 어린 양이 그 등이 되심이라
24) 만국이 그 빛 가운데로 다니고 땅의 왕들이 자기 영광을 가지고 그리로 들어오리라
25) 성문들을 낮에 도무지 닫지 아니하리니 거기는 밤이 없음이라
26) 사람들이 만국의 영광과 존귀를 가지고 그리로 들어오겠고
27) 무엇이든지 속된 것이나 가증한 일 또는 거짓말하는 자는 결코 그리로 들어오지 못하되 오직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뿐이라).
▶ 세상에 와서 - '세상'의 헬라어 '코스모스'는 원래 질서와 연관된 의미를 지닌 용어로서, '각 부분들이 모여서 잘 구성되어 있는 것'을 의미하였다.
따라서 이 용어는 개인이나 단체 또는 국가 등이 질서있는 상태에 있을 때 사용될 수 있었다.
그후 헬라인들은 각각의 통일된 구성체들(코스모이)이 질서와 조화로써 완전한 통일체를 형성한 우주를 '코스모스'라고 불렀다.
그리고 각각의 '코스모이'들이 '코스모스'로 되는 근본적인 규준(規準)이 바로 '로고스'라고 하였다.
그러나 신약성경은 이러한 개념을 도입하지 않았다.
즉 신약성경의 기자들은 당시 헬라적 문화권에서 통용되는 헬라어로 성경을 기록하고 복음을 전파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코스모스'의 개념을 구속사적 관점에서 사용하였다.
즉 신약성경에서 '코스모스'란
(1) 구약성경에서 사용한 '하늘과 땅'(출 20:11)과
(출 20:11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제칠일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
동의어인 하나님의 피조물로서의 '우주’.
(롬 1:20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
(2) 인간 역사의 현장인 '지구'.
(롬 1:8 첫째는 내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너희 모든 사람을 인하여 내 하나님께 감사함은 너희 믿음이 온 세상에 전파됨이로다)
(3) 타락한 '인류'등을 가리킨다.
(1:29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가로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따라서 성경적인 관점에서 본절의 '세상'이라는 개념을 요약한다면,
세상은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창조되었지만,
인간의 타락과 함께 부패된 곳,
다시 말해서 어두움의 세력인 사단의 권세가 지배하는 곳이다.
▶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 - 각 사람이란 인류라는 집단 또는 어느 단체와는 무관한 개념으로서, 실존하는 한 사람 한 사람이라는 개체적인 의미이다.
그리고 여기서 빛은 참빛이신 그리스도의 존재를 나타낼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구원 능력('비취는 빛')이라는 의미도 포함한다.
따라서 참빛이신 그리스도께서는 인간 각 개인에게 구원의 빛을 비추신다는 뜻이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사역이 구약 시대에서 처럼 한 민족, 한 국가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죄악된 세상에서 중생(born again)을 통하여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는 성도들 개개인을 통하여 끊임없이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몸이요 신부인 교회에서는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서로 차별이 있을 수 없으며, 성도 하나 하나가 모두 귀한 형제자매들임을 깨닫게 된다.
[요 1:10]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 1절에서는 영원전부터 그리스도가 계셨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면, 본문에서는 이 세상에 오셨던 그리스도의 지상생애 기간을 보여준다.
학자들은 본문에서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계셨다는 사실을 두 가지로 해석한다.
(1) 창조 이후 성육신하기 전까지 영(靈)으로서 세상에 계신 것을 가리킨다는 견해.
(2) 성육신부터 승천하시기까지의 예수의 생애를 가리킨다는 견해.
전자는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다'는 뒷 문장에 착안한 견해인 반면에 후자는 9절의 말씀과 연관시켜 해석하고 있다.
이에 대한 올바른 해석을 취할 수 있는 방편은 본절의 문장을 중심으로 하고 9절과 11절의 연관 관계를 살펴 보는데 있다.
주지하다시피 본절은 세 문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문제의 본 문장을 일단 차치하고 본절의 전체 의미를 보면 그리스도께서 세상을 창조하셨으나 세상은 그리스도를 알지 못했다는 내용이다.
그리고 11절은 그리스도께서 자기 땅에 왔지만 자기의 소유들로부터 따돌림 당했다는 내용이다.
따라서 10절과 11절은 문장의 전체 의미에 있어 일치한다.
그러므로 본절의 처음 문장은 이 세상에 참빛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묘사한 9절과 연관된다. 그러므로 앞의 두 학설 중 후자가 더 타당하다.
▶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 세상의 창조주이자 타락한 세상을 구원하실 그리스도에 대한 세상의 무지를 보여준다.
어둠에 잠긴 죄악된 인간의 관점에서 볼 때 예수는
(1) 목수의 아들
(마 13:55 이는 그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 그 모친은 마리아, 그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라 하지 않느냐)
(2) 귀신들린 자에 불과하였다.
(마 12:24 바리새인들은 듣고 가로되 이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지 않고는 귀신을 쫓아 내지 못하느니라 하거늘;
막 3:22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서기관들은 저가 바알세불을 지폈다 하며 또 귀신의 왕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 하니)
더구나 예수를 따르던 군중들도 예수를 기적 행위자 내지는 정치적 메시야로 판단했다는 사실을 연상한다면, 그리스도에 대한 세상의 무지함은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여기에서 '알지'(에그노)는 '알다'(기노스코)의 3인칭 단수로서
(1)감각적인 지각(아이스다네서다이)
(2) 사물들에 대한 지식(도케인),
(3) 선천적인 지식(에이도)등을 나타내는 용어들과는 그 의미가 다르다.
'기노스코'는 후천적, 객관적 관찰로써 온갖 대상(사물, 인간, 불변하는 영원한 실재)에 대해 파악하는 지식까지도 포괄하는 용어이다.
특히 마1:25에서는 남녀간의 성적 관계를 의미하는 구약성경의 뉘앙스를 살림으로써
(창 4:1 아담이 그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잉태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민 31:17 그러므로 아이들 중에 남자는 다 죽이고 남자와 동침하여 사내를 안 여자는 다 죽이고)
이 용어가 인간 간의 긴밀한 관계를 통한 '앎'까지도 표현함을 알 수 있다.
요한복음과 요한일서에서 이 용어는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확실히 아는 것이나 그리스도와의 친밀한 관계를 의미하는데 주로 사용되었다.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관계도 '앎'이며, 예수와 성도들의 관계도 역시 '앎'이다.
(10:14-15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15)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그리고 성부와 성자께서 생명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곧 영생을 얻는 길이다.
(4절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5:26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 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고;
17:3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이러한 '앎'은 사랑에 의해 평가되고, 사랑을 매개로하여 계속 유지된다.
(요일 4:7-12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8)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9)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10)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11)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12)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느니라).
결국 '알지못함'과 '앎'은 '미움, 다툼'과 '사랑', 그리고 '영원한 심판'과 '영생'으로 귀결된다.
[요 1:11]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 자기 땅에 - 이 용어는 '자기 소유의 거처'를 가리킨다.
세상은 말씀이신 그리스도의 소유이며, 거처이다.
아무리 세상이 타락되었고 사단의 세력이 흥왕(興旺)할지라도 세상의 궁극적 소유권은 그리스도에게 있다는 것이다.
▶ 자기 백성 - 구약 시대의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택함을 받고
(창 18:19 내가 그로 그 자식과 권속에게 명하여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고 그를 택하였나니 이는 나 여호와가 아브라함에게 대하여 말한 일을 이루려 함이니라;
신 32:9 여호와의 분깃은 자기 백성이라 야곱은 그 택하신 기업이로다)
이 세상의 죄악을 감당하고 사단의 권세와 싸울 제사장 나라가 되는 특권을 부여받았다.
(출 19:6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할지니라).
그러나 타락된 세상 속에 휘말려버린 이스라엘은 자신의 역할을 수행하는데 실패하였다.
따라서 이 세상의 구원을 위해서 성자 하나님의 성육신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본래 그리스도의 소유인 선민 이스라엘은 그리스도를 알지 못했고 배척하였을 뿐만 아니라 극랄하게도 십자가 처형을 자행하였다.
이로써 이스라엘은 결정적으로 '그리스도의 소유'라는 영광스런 특권을 상실하였다.
이와 같은 '소유'(타 이디아)라는 관점은 선민 이스라엘에서 예수의 제자들(13:1)로 넘어간 것이다.
(13:1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이 영광스런 특권은 영생과 아울러 영원한 것이다.
(계 20:6 이 첫째 부활에 참예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 년 동안 그리스도로 더불어 왕 노릇 하리라)
이렇듯 '그리스도의 소유'라는 신앙은 가혹하고도 잔인한 로마 제국의 박해에서도 더욱더 성도들을 강건케 하였음을 볼 때,
현대의 물신주의(物神主義)와 기타 세속적 이데올로기(ideology)가 판을 치는 세상 속에서 복음의 군사로서 살아가는 성도들에게는 '그리스도의 소유'라는 확신과 긍지를 소유함이 절실하게 요청된다.
▶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 '영접하다'의 헬라어 '람바노'가 주로 개인적인 영접을 의미하는 데 비해 본문의 '파랄람바노'는 집단적 공동체적 영접을 나타낸다.
따라서 예수께서 '선민 이스라엘' 공동체에서 환영받지 못했다는 본문의 내용은 예수의 공생애 기간,
특히 예수의 체포와 제자들의 도주(逃走),
유대 당국자들의 모의와 재판,
그리고 예수의 죽음을 요구하는 군중들의 함성,
예수의 십자가 처형과 군중들의 조롱이라는 역사적 상황을 연상케 한다.
한편 저자 요한은
'깨닫지 못하더라'(5절),
'알지 못하였고'(10절),
'영접지 아니하였더라'(본절)라는 세 구절을 통하여,
창조주이신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고 배척한 이 세상의 죄악과 부조리(不條理)를 폭로하고 있다.
이는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사 1:3)라는 과거 이스라엘의 실상과 대동소이한 현상이다.
따라서 예수는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알탉이 그 새끼를 날개아래 모음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마 23:37)라고 탄식했으며,
스스로 선민이라 자부하던 자들을 '마귀의 자식'이라 선언하셨다.
(8:44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장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
[요 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 영접하는 자 - 주지하다시피 11절의 '영접지 아니하였으나'가 집단적 공동체적 거부를 의미한다면, 본문은 개인적인 영접을 시사한다.
즉 구원이 하나님과 개인과의 단독적 관계에 의해 결정된다는 사실을 저자 요한은 보여준다.
그리고 '영접한다'는 것은 단순히 '신뢰하다'(trust)라는 의미보다 더 강력한 표현으로서, 한 개인이 그리스도를 전인격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한다.
▶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 이 문장은 자체 내에 파격(破格)구문을 가지고 있다.
'그 이름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적 생애와 그의 구원의 능력 그리고 그의 영원성, 인격성, 신성을 믿는다는 단순한 사실을 뛰어넘어 그리스도를 '개인마다' 자신의 구주로 영접한다는 보다 구체적이고 직접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한편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이란 표현은 말씀이신 그리스도를 전인격적으로 영접한 자의 신분 규정이다.
즉 '어두움의 자녀'에서 '하나님의 자녀'로의 놀라운 변화가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있음을 본문은 명시한다.
또한 여기서 '되는'에는 '과거에는 존재하지 않던 것이 생겨나서 영원히 계속된다'는 뜻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은 역사적 시점에서의 신분의 변화가 초역사적 지평에까지 열려져 있음을 의미한다.
또한 '자녀'는 '상속자'라는 뜻을 내포한다.
(갈 4:5-6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6) 너희가 아들인 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이는 죄악 세상에서 구원받을 성도가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의미를 나타낸다.
이러한 본질적인 변화를 통해 자녀가 되는 길은 오직 중생으로만 가능하다.
(3:3-9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4) 니고데모가 가로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삽나이까 두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삽나이까
5)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6)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7)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
8)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
9) 니고데모가 대답하여 가로되 어찌 이러한 일이 있을 수 있나이까;
벧전 1:3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23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한편 그리스도를 믿고 중생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은 곧 '권세'를 부여 받음이다.
여기에서 '권세'란 헬라어로 '여수시아'이다.
'여수시아'는 성경에서 주로
(1) 하나님의 절대적인 권능
(눅 12:5 마땅히 두려워할 자를 내가 너희에게 보이리니 곧 죽인 후에 또한 지옥에 던져 넣는 권세 있는 그를 두려워하라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를 두려워하라;
골 1:13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2)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에게 부여해주신 절대적인 권한과 힘을 나타낸다.
(17:2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자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
마 28:18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막 2:10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3:15 귀신을 내어쫓는 권세도 있게 하려 하심이러라;
눅 4:36 다 놀라 서로 말하여 가로되 이 어떠한 말씀인고 권세와 능력으로 더러운 귀신을 명하매 나가는도다 하더라)
성도는 이와 같은 권세를 그리스도로부터 부여받는다.
(고후 10:8 주께서 주신 권세는 너희를 파하려고 하신 것이 아니요 세우려고 하신 것이니 내가 이에 대하여 지나치게 자랑하여도 부끄럽지 아니하리라;
계 22:14 그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으니 이는 저희가 생명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얻으려 함이로다)
따라서 이와 같은 권세를 부여받았다는 것은 죄와 어둠의 세상에서부터 자유롭게 됨을 의미하며, 이 자유로운 권능은 하나님 나라의 확장 사역에 사용되어야만 한다.
(고전 9:12 다른 이들도 너희에게 이런 권을 가졌거든 하물며 우리일까보냐 그러나 우리가 이 권을 쓰지 아니하고 범사에 참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아무 장애가 없게 하려 함이로다,
18 그런즉 내 상이 무엇이냐 내가 복음을 전할 때에 값없이 전하고 복음으로 인하여 내게 있는 권을 다 쓰지 아니하는 이것이로라).
[요 1:13]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 앞절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과정이 묘사되었다면,
본절에서는 하나님의 자녀의 출생(중생)의 근원이 나타나있다.
먼저 본문에서 저자는 부정사 '우크', '우데'(*)를 사용하여 중생에 이를 수 없는 부정적인(negative) 세 가지 요인 ((1)혈통, (2) 육정, (3) 사람의 뜻)을 나열한다.
첫째로, 혈통(하이마톤)은
'피'나 '혈연'을 의미하는 육체적인 혈연관계를 의미한다.
혈연관계가 구원과 무관하다는 사실은 침례요한과 예수께서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자부했던 유대인들을 규탄할 때 잘 드러난 바이다.
(8:39-44 대답하여 가로되 우리 아버지는 아브라함이라 하니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면 아브라함의 행사를 할 것이어늘
40) 지금 하나님께 들은 진리를 너희에게 말한 사람인 나를 죽이려 하는도다 아브라함은 이렇게 하지 아니하였느니라
41) 너희는 너희 아비의 행사를 하는도다 대답하되 우리가 음란한 데서 나지 아니하였고 아버지는 한 분뿐이시니 곧 하나님이시로다
42) 예수께서 가라사대 하나님이 너희 아버지였으면 너희가 나를 사랑하였으리니 이는 내가 하나님께로 나서 왔음이라 나는 스스로 온 것이 아니요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이니라
43) 어찌하여 내 말을 깨닫지 못하느냐 이는 내 말을 들을 줄 알지 못함이로다
44)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장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
마 3:7-9 요한이 많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침례 베푸는 데 오는 것을 보고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8)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9)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둘째로, 육정(델레마토스 사르코스)이란
'육체적인 욕망'(fleshly desire, NEB)이란 뜻으로 1차적으로는 성욕을 비롯한 인간의 육체적 쾌락을 추구하는 것을 가리킨다.
(엡 2:3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더 나아가 2차적으로는 성령의뜻에 거슬리는 모든 육체적 욕구나 세상적 정욕을 통칭한다.
(고후 11:18 여러 사람이 육체를 따라 자랑하니 나도 자랑하겠노라;
갈 5:16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저자 요한이 타락한 세상을 어두움으로 정의했듯이, 빛이 없는 어두움 속에 처한 인간의육체적 욕구와 이로 인한 가치 체계(사회적 명망, 권력, 부)로써는 구원이 불가능함을 보여준다.
셋째로, 사람의 뜻(델레마토스 안드로스)이란
절대자에게 도달하고자 하는 인간의 이성적(理性的) 노력이나 수양, 율법 준수 등을 통칭한다.
이러한 태도는 앞의 두 가지 요인보다 더 고상할지 모르지만 이도역시 구원에로 인도하지는 못한다.
(롬 3:19-20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
20)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고전 1:20-21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뇨 선비가 어디 있느뇨 이 세대에 변사가 어디 있느뇨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케 하신 것이 아니뇨
21)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따라서 위에 열거한 세 가지 조건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데 무관한 것이다.
(고전 1:22-25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23)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24)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25)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왜냐하면 이러한 것들은 타락한 세상에서 비롯된 인본주의적 구원의 욕구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세상에서 육체를 따라 의롭다 여김을 받을 자는 하나도 없다.
(롬 3:20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결국 저자는 이 세계의 절망(어두움)을 묘사하며, 인간 스스로의 구원의 길이 근본적으로 막혀 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죄악된 인간이 인간을 인도한다는 것은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는 부조리이며,
(마 15:14 그냥 두어라 저희는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는 자로다 만일 소경이 되어 소경을 인도하면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리라 하신대)
그 인도자는 도둑이며, 삯꾼 목자에 지나지 않는다.
(10:10-13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11)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12) 삯꾼은 목자도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늑탈하고 또 헤치느니라
13) 달아나는 것은 저가 삯꾼인 까닭에 양을 돌아보지 아니함이나).
▶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 원문에서 이 문장은 강한 반전(反轉)을 의미하는 접속사 '알라'가 먼저 나타난다.
이 접속사는 8절에서 침례 요한(증거자)과 그리스도(빛)에 대한 본질적인 차이를 묘사하는 데 쓰였으며,
(8절 그는 이 빛이 아니요 이 빛에 대하여 증거하러 온 자라)
본문에서는 인본주의적(人本主義的) 구원 수단과 신본주의적(神本主義的) 구원 간의 대립을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본문은 어둠 속에 빛이 비추듯이 하나님의 구원 사역의 초자연적, 초역사적 성격을 보여줌으로써, 구원받은 성도로 하여금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케 하고 겸손하게 주의 뜻을 따르는 성도의 자세를 견지(堅持)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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