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과 말씀

내가 너희를 사랑하듯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거듭난 삶 2016. 11. 20. 00:28
728x90

 

계명 2

 

요한복음 13 34-35

'내가 계명을 너희에게 준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라는 이것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하듯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만약 서로 사랑하면, 이에 의해, 사람들이, 너희가 나의 제자인 것이다'

여기서 그리스도는 제자들에게 새로운 계명을 주셨다고 있습니다.

그리고 계명이란,

 

너희가 서로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들이 없는 것은, 너희가 사랑하라는 계명은,

과연 새로운 계명인가, 그것입니다.

 

구약성서 레위기 19 18절을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너는, 원수를 갚지 말라. 동포에 대하여 원한을 품지 말라. 자기처럼 이웃을 사랑하라'.

 

그렇듯 이미 모세에 의해 주어진 계명이 결코 새로운 계명일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리스도도 역시 교법사에 대답하여, 모세의 율법 중에서

 

가장 것의 2,

 

자기처럼 이웃을 사랑하라는 이라고 말씀했습니다.

 

(마태 22:39 둘째는 그와 같으니 이웃을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그러므로 너희가 서로 사랑하는 계명으로서, 그리스도가 제자에게 주신 계명 이라고는, 아무리 보아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성서의 오해가 없어서는 됩니다.

혹은 오역이 없어서는 됩니다.

그리고 조금 원문에 비추어 본다면,

그것이 오역임을 있다고 생각합니다.

 

'준다' 아래 구분 지은 것이 애당초 오역의 시초라고 생각합니다.

계명이란, 34 전체에 걸쳐야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제 그리스문(헬라어) 따라서, 어구대로 이것을 직역한다면, 이렇게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너희도 서로 사랑하기 위해 내가 너희를 사랑한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이는 내가 너희에게 주는 새로운 계명이라'

 

보통의 일본역에 '내가 너희를 사랑하듯'이라고 있는 것은,

아무리 해도 '사랑한 같이' 아니어서는 됩니다.

그리고 이렇게 개역할 , 의미는 이것을 찾기에 어렵지가 않습니다.

 

그리스도가 여기서 주신,

너희는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의 새로운 이유는,

사랑의 성질에 있습니다.

 

단지 서로 사랑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같이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재세(在世) , 제자들의 모범이 되기 위해 그들을 사랑하신 같이,

그처럼, 또는 그것과 같은 성질의 사랑으로서,

그들 서로가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사랑이 일종 특별한,

세상이 아직 알지 못했던 사랑이었음은,

우리들 그리스도 신자에게는 해득 됩니다.

 

그리스도의 사랑 그것이 새로운 사랑이었으므로,

사랑으로써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은 새로운 계명이 아니어서는 됩니다.

그리스도는 계속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전절에 따라 나의 직역을 말씀드립니다.

 

'너희가 만약 사랑을 상호간에 가진다면,

이것으로써, 사람들이,

너희가 특히 제자임을 것이다'

 

보통역으로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이라고 있는데, 원문에 따라

 

'사랑을 상호간에 가진다면'으로 하는 편이 약간 의미가 깊다고 생각합니다.

 

단지 애써서 애정 행위로 나가는데 그칠 아니라,

심중에 사랑을 가득히 가지면,

그리고 마음의 충만한 데서 이것을 행위로 나타내기에 이른다면,

이라는 의미가 원문 중에 포함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영역의 if ye have love one to another 참고하십시오).

 

그리고 그러한 사랑을 서로 가지는 것이,

이러한 것이 그들이 특히 예수의 제자라는 것의,

세상에 대한 증명이라는 것입니다.

(내가 여기서 '특히' 글자를 넣은 것은, 원문 emoi 있는 어세를 나타내고자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훈계에 의하면,

사람이 그의 제자 증거는,

특종의 사랑을 마음에 품고 이것을 행위로 나타내는 가지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여기서 침례를 받은 자가 제자라고는 하지 않았습니다.

어떤 특별한 교의를 굳게 유지하는 것이 그리스도 신자라고는 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제자 됨은,

그리스도가 제자를 사랑하신 사랑으로서

서로 사랑하는 일입니다.

 

그리스도의 계명은 아주 명백합니다. 누구도 이것을 곡해할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가 계명을 주신 전후의 관계를 조사해 보면, 의미가 보다 일층 명백하게 되어 온다고 생각합니다.

 

그리스도는 어찌하여 이때에 계명을 제자들에게 주신 것일지요?

그것은, 33절을 읽으면 있습니다.

 

'소자들아, 내가 잠시 너희와 함께 있다.

너희가, 나를 찾으리라.

내가 가는 곳에 너희가 없다'

 

이에 의해 보면, 새로운 계명이라는 것은 그리스도의 유별의 말씀임을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지금 제자들을 떠나려 함에 있어서, 그들의 장래를 생각해서 말씀을 남기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계시는 동안 제자들은 스승의 보호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안전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보호자를 잃으려는데 있어서 그들이 세상에서 의지할 것은 가지로 스승을 따르던 동지들 외에 없습니다.

 

그들은 이제 바야흐로 고아로 되려하고 있습니다.

물론 주는 새로이 '위로자(보혜사)' 보내어 그들을 인도하시려 대도,

그러나 주의 모습은 이제부터 이를 잃어버리지 않으면 됩니다.

 

지금부터 그들은 목자 없는 같은 자로 되어,

이리 중에 들어가지 않으면 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그들을 긍휼히 여기시는바 커서,

아버지가 아들에게 유언하는 마음으로서 말씀을 남기신 것입니다.

'약하고, 도울 없는 소자여,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는 잠시 동안뿐.

내가 너희를 세상에 남겨두고 아버지께로 가야할 때는 목전에 임박했다.

내가 후에 너희는 적막한 나머지 나를 찾으리라.

하지만 나를 없을 것이다.

너희는 지금 내가 가는 곳에 없다.

아직 죄의 세상에 남아서 사업을 해야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훈계로서 말을 너희에게 남긴다.

이는 특별한 훈계이다.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 내가 너희를 사랑한 같이 너희 서로가 서로 사랑하라.

그리고 내가 후는,

너희가 오늘까지 내게서 받은 사랑을 서로 사이에서 구하라.

이제부터 후에 너희가 서로에 대하여 아버지어라, 형이어라.

그리하여 너희가 요구하는 사랑의 결핍을 채우도록 하라.'

 

만약 그리스도의 말씀의 뜻을 부연(expatiation)하여 본다면 거의 같은 것으로 되리라 생각합니다.

 

마치 우리나라의 역사에 있는 모우리 모도나리(5 361역주) 죽음에 임박하여 아들을 경계함 같은 것으로서,

 

' 개의 화살은 쉽게 이것을 꺾을 있으나,

개의 화살을 묶음으로 하면 이것을 꺾을 수가 없다.

그같이, 형제가 개개별별로 서면 쉽게 적의 멸하는 바로 된다.

하지만 서로가 서로 단합하여 일체로 되어 서면,

어떠한 적도 이에 당해낼 수가 없다'

 

이것이 모우리 모도나리가 아들에 남긴 유언으로서, 그것이야말로, 이것을 동기에 이르러서는, 그리스도의 사랑의 유훈과 조금도 다를 없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제자들에게 관계된 이때의 우려는 결코 기우(baseles anxiety) 아니었다고 생각합니다.

 

세상에 그리스도의 제자만큼 도움 없는 자는 없습니다.

그들은 세상과는 전혀 관계를 끊은 자입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에게 수종한 까닭에

부모형제 친척에게 마저 미움 받기에 이른 자입니다.

 

세상에 의지할 없는 자라 해도 실로 그리스도의 제자 같은 자는 없습니다.

 

그들은 세상에 있어서는 외국에 체류하는 나그네 같은 자입니다.

고독, 적막, 궁핍상은 가장 심하게 그들에게 있어서 보는 것입니다.

 

'날은 저물고 길은 멀다.

주는 가고 천국은 아직 오지 않았다.

불신자는 발호하고, 악인은 도량(rampancy)하고,

우리들의 귀히 여기는 이름은 조소되고,

우리들은 세상의 티끌, 또는 만물의 때처럼 취급된다.'

 

경우에 이어서 그리스도의 제자 자가 서로 사랑하지 않으면, 세상에 가련한 자치고서 실로 그들 같은 자는 없습니다.

 

바울은

 

'만약 그리스도를 의지하는 우리들의 소망이 다만 세상뿐이라면, 모든 사람 중에 우리는 가장 가련한 자이다'(고린도전서15:19)라고 말했습니다.

 

나는 그의 말을 조금 바꾸어 말하고 싶습니다.

 

만약 우리들 그리스도의 제자로 서로의 사랑 없으면,

모든 사람 중에 우리는 가장 가련한 자라고.

 

세상 사람은 이익 위해 결합합니다.

명예 위해 결합합니다.

 

그러나 이익과 명예를 방기한 그리스도의 제자는 이것으로서 일치 결합의 동기로 수는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그리스도의 사랑으로서 서로 사랑할 수가 없다면

 

세상의 약한 치고,

도움 없는 치고,

마음 쓸쓸한 치고,

사는 보람 없는 치고,

실로 그들 같은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어떠합니까?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과연 서로 사랑합니까?

그들은 당을 짓지 않습니까?

교회 위해 충실하면서 그리스도 위해 불충하지는 않습니까?

서로를 헐뜯지 않습니까?

교회, 신자의 쇠퇴타락을 듣고서 은근히 기뻐하지 않습니까?

교회의 재산 다툼을 하지 않습니까?

이른 신자 중에 있지만 가운데 있는 듯한 감을 갖지 않습니까?

이른 그리스도 신자라는 자는 서로 속이지 않습니까?

서로 모략하지 않습니까?

그리스도의 사랑으로서 서로가 서로 사랑하는 것은 오늘의 이른 그리스도 신자의 특질입니까?

 

이러한 물음에 대하여 나는 지금 여러분 앞에 대답 드릴 것은 없습니다.

나는 혼자 나의 마음속으로 대답해야 것입니다.

 

여러분도 각각 마음속으로 대답해야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세상을 떠나심에 있어서 특히 가지를 우려 하시어 특히 계명을 그의 제자들에게 주신 것은,

중에 깊은 이유가 있었기 때문에, 지금도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라고 있는 그리스도의 사랑은 어떠한 것이겠습니까?

 

이것을 알기 위해서는 신약성서 전체를 읽지 않으면 알지 못합니다.

'나는 선한 목자이다. 선한 목자는 위해 목숨을 버린다'(요한복음 10:11)

 

이는 그리스도께서 제자를 사랑하신 사랑의 일반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 나를 격려하셨다.

우리들이 생각하건대, 사람이,

모든 사람에 대신하여 죽었으니,

모든 사람, 이미 죽은 것이다'(고린도후서5:14)

 

이는 그리스도의 사랑의 실력을 보인 말씀입니다.

 

(겸하여 말씀 드립니다마는, 여기에 '격려한다' 있는 것은 오역이라고 생각합니다.

원어의 의미는 영어의 constraineth 한가지로, 한계 짓는다든가, 양측에서 협공 당한다 간의 의미라고 생각합니다.

그리스도의 사랑, 길을 한계 짓는다.

나는 이제 사랑 이외에 행동할 없다는 의미라고 생각합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에 대하여 모두 여기서 말하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일입니다.

하지만 같은 요한복음 13장에 구체적으로 그것이 어떠한 것인지가 보여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스도는 그의 사랑의 실례를 보인 후에 사랑의 계명을 주신 것으로 생각합니다. 지금 같은 장의 3 이하를 읽어보십시오.

 

'예수, 자기 손에 아버지께서 만물을 주신 것과,

하나님께로부터 왔다가 하나님께로 돌아가실 것을 알고,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취하여 허리에 두르시고,

그리고 대야에 물을 담아다가, 제자의 발을 씻고,

두르신 수건으로 닦아주기 시작하여, 드디어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렀다.

 

베드로가 말하기를, 주여 당신이, 발을 씻으시렴니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말씀하시기를, 내가 행하는 일을 너는 지금, 모른다.

후에, 이것을 것이다

그들의 발을 씻어 주신 ,

겉옷을 취하시고 (자리에) 앉아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희에게 행한 일을 아는가?

 

너희가, 나를 스승이라 부르고 주라고 부른다.

너희가 말하는 바는 옳다, 나는 실로 그렇다.

나는 너희의 스승 또는 주인데도 너희의 발을 씻는다.

너희도 또한 서로 발을 씻도록 하라.

내가 너희에게 예를 보여 주었다.

이는 내가 너희에게 행한 대로, 너희에게도 행하게 하렴에서 이다'(13:3-7;12-15)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을 사랑한 사랑의 실례입니다.

그리고 그는 그들에게 이같이 서로가 서로 사랑할 것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서로의 발을 씻는다는 것은, 물론 물로서 서로의 발의 흙탕을 씻어 떨어뜨린다는 것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겸손으로서 서로에게 쓰이는 뜻입니다. 바울이 이른

 

'우리들 강한 자는,

강하지 못한 자의 약함을 지고서,

자기 마음에 기쁘지 않더라도 해야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도, 자기 자신을 기쁘게 하는 일은 않으셨다'(로마서15:1-3) 것입니다.

 

강한 자는 약한 자의 비복으로 됨의 각오로서 서로가 서로 씌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확실히 새로운 계명입니다.

이러한 훈계는, 모세에 의해서도,

소크라테스에 의해서도 공자에 의해서도 세상에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하신 것은 무어 공덕 위해서가 아닙니다.

자기의 결백을 표현하기 위해서도 아닙니다.

 

'사랑을 마음에 가진' 때문입니다.

 

사랑이 겸손을 띠기에 이르기까지는, 이것을 그리스도의 사랑이라고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이렇듯 서로를 사랑할 우리들은 비로소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세상에 인정되기에 이른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어느 특별한 의식을 지켜 우리들이 그리스도의 제자임을 세상에 향하여 표백해야 것은 아닙니다.

어떤 일정한 신앙개조를 선언하여 우리들의 지위를 명백히 해야 것은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제자의 특질은 서로에 대하여 가지는 특종의 사랑입니다.

신앙, 신앙이라고 하는데, 신앙은 결코 그리스도교의 특질은 아닙니다.

신앙이 강한 것은 그리스도의 제자에 한하지 않습니다.

 

회교의 신자 , 신앙에 있어서는 훨씬 그리스도 신자보다도 강한 자가 많이 있습니다. 그들은 종교 위해서라면, 생명을 홍모(feather)보다도 가볍게 생각합니다.

 

과년, 아프리카, 옴더만전역(Omdurman) 만이라는 회교도는 영국의 속사포 앞에 머리를 잇대어 쓰러졌습니다.

만약 신앙의 강약에 의해 종교의 우열이 정해지는 것이라면, 회교(이슬람교, 모하메트) 훨씬 그리스도교 이상의 종교입니다.

 

하지만 신앙이 많고 적음에는 의하지 않습니다.

신앙의 성질에 의합니다.

 

어떠한 신앙입니까?

이는 우리들이 첫째로 일으켜야 문제입니다.

사랑을 기초로 하는 신앙인지,

혹은 사랑을 떠난 신앙인지,

모든 것을 사랑의 희생으로 하는 신앙인지,

혹은 자기의 주장을 밀고 나가기 위해서는 반대자를 해치며,

이를 욕하며, 헐뜯으며, 넘어뜨리는 것도 감행하는 신앙인지,

이는 우리들이 첫째로 규명해야 문제입니다.

 

그리고 내가 보는 바에 의하면,

회교뿐 아니라 그리스도교에 있어서도,

이른 (소위) 신앙이라는 것은 2종의 신앙입니다.

 

사랑과는 아무 관계도 없는 신앙입니다.

형제의 발을 씻지 않음은 물론이고,

경우에 따라서는 이를 상하게 하고,

심장을 옭아매고. 쾌재를 부르는 신앙입니다.

 

그러한 신앙은 우리나라의 그리스도교계에 있어서 있을 아니라,

미국, 영국 등의 오랜 그리스도교국에 있어서도 종종 목격되는 일입니다.

실로 통탄의 극이 아닙니까? 하지만 그래도 그리스도교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통언하여 나는 특히 여러분을 책하는 것은 아닙니다.

나는 사랑의 부족을 가지고 책해야 것은

 

첫째로 자신임을 알고 있습니다.

먼저, 언제나 신앙의 부족을 탄식하며 사랑의 부족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먼저, 그리스도교는 특별한 사랑의 종교로서 신앙의 종교가 아님을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는 커다란 부주의, 커다란 망실입니다.

사랑을 최상위에 두지 않는 것은 그리스도의 제자는 아닙니다.

그러면 우리들은 어떻게 하면 좋을 것입니까?

우리들의 마음에 확실히 사랑은 없습니다.

우리들은 그리스도의 제자임의 첫째 자격을 결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들은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하나님께로부터 사랑을 받기를 기도해야 것입니다.

우리들은 종종 사랑은 하나님의 최대의 은사임을 잊어버립니다.

우리들의 사랑은 이것을 스스로 발휘할 없으면 하나님의 은혜에 참여할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자기의 사랑 없음을 보고 실망하고, 도리어 하나님께서 멀리 떠나려고 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우리들은 즉시 하나님의 보좌로 가까이 나가 사랑으로 채워지도록 기도해야 것입니다.

 

바울이 고린도인 위한 기도는 이것이었습니다.

 

'원하옵기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제,

너희 모두와 함께 있기를'(고린도후서13:13-)이라고.

 

우리들도 또한,

자기 위해, 상호 위해,

특히 그러한 회합 위해,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들과 함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하지 않으면 됩니다.

 

이제 우리나라의 그리스도교는 구시기를 떠나 신시기에 들어가려 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구래의 서양전래의 그리스도교는 이미 만큼의 일을 하고 끝난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만약 위에 그리스도교 그것이 발전하지 않는다면 우리나라에 있어서의 이상의 발전은 확실치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교의 발전이란 무엇입니까?

진리의 발양입니다.

그리스도교는 아직 정력을 소진(consuming away)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일본인에게 명하여 발전을 기다리고 계시는 것으로 믿습니다.

이제 모든 방면에 있어서 일본인은 구미인을 능가하고 있지 않습니까?

 

시모세화약 같은 , 기무라식 무선전신 같은 , 모두 구미인 이상의 신발명이 아닙니까?

 

그리고 오로지 종교에 있어서만 우리들은 서양인의 찌끼(gas; residue) 언제까지 감수하지 않으면 되는 것이겠습니까?

 

나는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들 일본인은 종교에 있어서도,

옳습니다, 특히 종교에 있어서 구미인 이상으로 나가지 않으면 됩니다.

 

그리고 그들 이상으로 나가는 것은,

그들 이상의 언어학적 발견을 하고,

그들 이상의 교의적 명확에 달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도 하십시다.

 

그러나 이것보다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사랑에 있어서 상진하는 일입니다.

일본국에 있어서 종파적 편집을 전혀 끊어 버리는 일입니다.

 

냉혹한 이론과 법칙과 의식을 가지고서 유지하려는 구미류 그리스도교에 대신하는데,

따뜻하고 영과 생명과 사랑으로서 하는 새로운 그리스도교로서 해야 것입니다.

 

우리들은 부와 지식에 있어서는 그들에게 미치지 못하는 있대도,

성령의 힘이신 사랑에 있어서는 그들 이상으로 서려는 성망을 가져야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서만,

아사마야마 산록 치꾸마가 부근에서 세계를 움직이는 세력이 솟아나올 것으로 생각합니다.

 

* 내촌감삼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