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혜사 성령의 의무 2
성 경: [요 16:10-15]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라
12)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하지 못하리라
13)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14)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겠음이라
15) 무릇 아버지께 있는 것은 다 내 것이라 그러므로 내가 말하기를 그가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하였노라.
[요 16:11]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라
▶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니라 - 죄, 의, 그리고 심판에 대한 성령의 책망은 그리스도의 지상 사역과 깊은 연관이 있음을 이해해야 한다.
즉 죄와 의에 대한 성령의 책망이 그리스도의 '무죄'와, '완전한 의'를 세상으로 하여금 깨닫게 하는 것이라면
심판은 그가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세상의 임금이 심판을 받았다는 것을 증거한다.
세상 임금은 사단의 세력을 의미한다.
(12:31 이제 이 세상에 대한 심판이 이르렀으니 이 세상의 임금이 쫓겨나리라;
14:30 이 후에는 내가 너희와 말을 많이 하지 아니하리니 이 세상의 임금이 오겠음이라 그러나 그는 내게 관계할 것이 없으니)
이처럼 사단은 모든 죄인들 위에서 군림한다는 뜻에서
'공중 권세 잡은 자' - (엡 2:2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 - (엡 6:12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라고 불리기도 한다.
그런데 사단에 대한 예수의 심판은 예수가 이 세상에 오심으로 시작되었으며
(마 8:29 이에 그들이 소리 질러 이르되 하나님의 아들이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때가 이르기 전에 우리를 괴롭게 하려고 여기 오셨나이까 하더니;
막 1:24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3:11 더러운 귀신들도 어느 때든지 예수를 보면 그 앞에 엎드려 부르짖어 이르되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 하니;
눅 4:41 여러 사람에게서 귀신들이 나가며 소리 질러 이르되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 예수께서 꾸짖으사 그들이 말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니 이는 자기를 그리스도인 줄 앎이러라;
행 19:15 악귀가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알거니와 너희는 누구냐 하며)
십자가 위에서 죽으심으로 더 이상 사망이 왕 노릇하지 못하게 사망의 권세 잡은 자들을 심판하셨다.
(히 2:14 자녀들은 혈과 육에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함께 지니심은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
그리고 부활을 통하여 이 심판을 더욱 확증함으로써 사단에 대한 자신의 승리를 확인하셨다.
성령은 이 심판을 세상으로 하여금 깨닫게 하신다.
한편 '심판을 받았다'란 표현은 헬라어 본문에서 완료형으로 기록되었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 두 가지로 해석될 수 있다.
(1) 예수의 사역 가운데서 이미 심판이 시작되었다.
예수에 의해서 귀신들이 쫓겨나는 것은 그들에 대한 심판이 시작되었음을 입증한다.
왜냐하면 예수는 심판하는 권세를 가지고 계시기 때문이다.
(5:27 또 인자됨으로 말미암아 심판하는 권한을 주셨느니라)
다만 성령은 예수의 심판하시는 사역을 마지막 심판 때까지 지속시키실 것이다.
(2) 예수는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성취될 승리를 내다 보시고 완료형으로 사용하셨다.
예수를 믿는 자가 심판에 이르지 않고 생명으로 옮겨졌다는 표현과 같이
(5: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승리가 확정되어 있으므로 심판도 확정된 것으로 말씀하신 것이다.
[요 16:12]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하지 못하리라.
▶ 지금은 너희가 감당치 못하리라 - '감당하다'(바스타조)는 문자적으로 '훔치다'라는 의미로 사용되기도 했다.
(12:6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그는 도둑이라 돈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
그리고 어떤 때에는 '무엇을 옳긴다'는 의미로 사용되기도 했다.
(10:31 유대인들이 다시 돌을 들어 치려 하거늘)
또한 19:17에서는 예수가 십자가를 지시는 것에 적용되기도 했다.
(19:17 그들이 예수를 맡으매 예수께서 자기의 십자가를 지시고 해골(히브리 말로 골고다)이라 하는 곳에 나가시니)
이와 같이 신약성경의 다른 부분에서는 대부분 짐을 지는 것에 대한 은유적인 표현으로 사용되었다.
(행 15;10 그런데 지금 너희가 어찌하여 하나님을 시험하여 우리 조상과 우리도 능히 메지 못하던 멍에를 제자들의 목에 두려느냐;
갈 5:1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본절에서도 역시 이런 의미에서 '바스타조'가 사용되었다.
예수는 아버지의 뜻하시는 바 모든 것을 알고 계셨지만 그 모든 것을 제자들에게 말씀하지는 않는다.
그 이유를 다음 두 가지로 생각할 수 있다.
(1) 제자들이 실제적으로 모든 교훈을 이해하기에는 그들의 영적 이해력이 연약하다는 것이다.
그들의 연약함은 성경의 여러 곳에 묘사되어 있다.
(마 16:6-12 예수께서 이르시되 삼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시니
7) 제자들이 서로 논의하여 이르되 우리가 떡을 가져오지 아니하였도다 하거늘
8) 예수께서 아시고 이르시되 믿음이 작은 자들아 어찌 떡이 없으므로 서로 논의하느냐
9) 너희가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먹이고 주운 것이 몇 바구니며
10) 떡 일곱 개로 사천 명을 먹이고 주운 것이 몇 광주리였는지를 기억하지 못하느냐
11) 어찌 내 말한 것이 떡에 관함이 아닌 줄을 깨닫지 못하느냐 오직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시니
12) 그제서야 제자들이 떡의 누룩이 아니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교훈을 삼가라고 말씀하신 줄을 깨달으니라,
21-23 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나타내시니
22)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여 이르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23)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 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17:17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에게 참으리요 그를 이리로 데려오라 하시니라;
막 16:14 그 후에 열한 제자가 음식 먹을 때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나타나사 그들의 믿음 없는 것과 마음이 완악한 것을 꾸짖으시니 이는 자기가 살아난 것을 본 자들의 말을 믿지 아니함일러라).
그리고 이런 이해력의 부족으로 인해 그들은 부끄러운 일들을 행했던 것이다.
(18:15-27 시몬 베드로와 또 다른 제자 한 사람이 예수를 따르니 이 제자는 대제사장과 아는 사람이라 예수와 함께 대제사장의 집 뜰에 들어가고
16) 베드로는 문 밖에 서 있는지라 대제사장을 아는 그 다른 제자가 나가서 문 지키는 여자에게 말하여 베드로를 데리고 들어오니
17) 문 지키는 여종이 베드로에게 말하되 너도 이 사람의 제자 중 하나가 아니냐 하니 그가 말하되 나는 아니라 하고
18) 그 때가 추운 고로 종과 아랫사람들이 불을 피우고 서서 쬐니 베드로도 함께 서서 쬐더라
19) 대제사장이 예수에게 그의 제자들과 그의 교훈에 대하여 물으니
20)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드러내 놓고 세상에 말하였노라 모든 유대인들이 모이는 회당과 성전에서 항상 가르쳤고 은밀하게는 아무 것도 말하지 아니하였거늘
21) 어찌하여 내게 묻느냐 내가 무슨 말을 하였는지 들은 자들에게 물어 보라 그들이 내가 하던 말을 아느니라
22) 이 말씀을 하시매 곁에 섰던 아랫사람 하나가 손으로 예수를 쳐 이르되 네가 대제사장에게 이같이 대답하느냐 하니
23)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말을 잘못하였으면 그 잘못한 것을 증언하라 바른 말을 하였으면 네가 어찌하여 나를 치느냐 하시더라
24) 안나스가 예수를 결박한 그대로 대제사장 가야바에게 보내니라
25) 시몬 베드로가 서서 불을 쬐더니 사람들이 묻되 너도 그 제자 중 하나가 아니냐 베드로가 부인하여 이르되 나는 아니라 하니
26) 대제사장의 종 하나는 베드로에게 귀를 잘린 사람의 친척이라 이르되 네가 그 사람과 함께 동산에 있는 것을 내가 보지 아니하였느냐
27) 이에 베드로가 또 부인하니 곧 닭이 울더라;
막 14:50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
(2) '지금'이라는 표현으로 미루어 보아 가까운 미래 어느 시점에서는 제자들이 예수의 교훈을 이해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이 암시되어 있다.
영으로서 임하시는 성령은 하나님의 듯을 다 아심과 동시에 예수가 선포하신 말씀의 목적을 아시며 또한 제자들의 생각도 아신다.
그는 영이시기에 무지에 싸여 잠자는 제자들의 영을 깨워 영적 비밀을 깨닫도록 하신다.
이때 제자들은 그동안 깨닫지 못했던 예수의 말씀을 올바로 이해하게 되며 그뿐 아니라 그 말씀이 그들 속에 살아 움직이며 그들의 삶이(히 4:12) 변화되는 체험을 하게 된다.
(히 4:12 그러므로 우리가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쓸지니 이는 누구든지 저 순종하지 아니하는 본에 빠지지 않게 하려 함이라)
이러한 그들의 삶은 사도행전에서 명확하게 부각되고 있다. 이처럼 예수가 가르치신 모든 것을 성령을 통해서 완전히 이해하고 난 다음에야 비로서 제자들은 증거자가 될 것이다.
(행 1:8 그러므로 우리가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쓸지니 이는 누구든지 저 순종하지 아니하는 본에 빠지지 않게 하려 함이라)
[요 16:13]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 진리의 성령 - 혹자는 이 표현에 대해 성령이 진리를 가져와서 세상 사람들의 양심에 그 진리를 심어 주시는 것으로 설명한다(Bernard).
이와 비슷하게 바렛(Barrett)도 이 말이 '진리를 전달하시는 성령'을 의미한다고 단언한다.
▶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 '진리 가운데로'란 표현이 중요한 것은 성령이 진리와 관련해서 성도들을 인도하신다는 사실이다.
예수는 이 세상에 오심으로 스스로 진리를 계시하셨으며 보혜사 성령은 이 진리를 드러내 보이시며 성도들을 위해 그 진리 안으로 들어가는 입구를 만드셨다.
이런 의미에서 진리의 성령이 오신 목적은 그리스도를 세상에 증거하는 일이다.
(15:26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언하실 것이요)
성령은 세상을 책망하시는 반면
(16:8-11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9) 죄에 대하여라 함은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10)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요
11)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라)
제자들과 성도들은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신다.
한편 '인도하다'(호데게오)는 70인역(LXX)에서 시편에 자주 등장한다.
시편에서 이 용어는 현재의 문제에 대한 해결뿐만 아니라 궁극적인 구원을 갈구하는데 사용되었다.
(시 5:8 여호와여 나의 원수들로 말미암아 주의 의로 나를 인도하시고 주의 길을 내 목전에 곧게 하소서;
27:11 여호와여 주의 도를 내게 가르치시고 내 원수를 생각하셔서 평탄한 길로 나를 인도하소서;
107:14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그들의 얽어 맨 줄을 끊으셨도다;
143:10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니 나를 가르쳐 주의 뜻을 행하게 하소서 주의 영은 선하시니 나를 공평한 땅에 인도하소서).
다른 곳에서 이 용어는 인도하고 가르치시는 하나님을 표현할 때 사용되기도 했다.
(출 13:17 바로가 백성을 보낸 후에 블레셋 사람의 땅의 길은 가까울지라도 하나님이 그들을 그 길로 인도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이 백성이 전쟁을 하게 되면 마음을 돌이켜 애굽으로 돌아갈까 하셨음이라;
수 24:3 내가 너희의 조상 아브라함을 강 저쪽에서 이끌어 내어 가나안 온 땅에 두루 행하게 하고 그의 씨를 번성하게 하려고 그에게 이삭을 주었으며).
▶ 자의로 말하지 않고 - 예수는 자기의 의도대로 말씀하지 않았다.
(8:26 내가 너희에게 대하여 말하고 판단할 것이 많으나 나를 보내신 이가 참되시매 내가 그에게 들은 그것을 세상에 말하노라 하시되;
12:49 내가 내 자의로 말한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내가 말할 것과 이를 것을 친히 명령하여 주셨으니;
14:10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이와 같이 성령도 자기 임의로 말슴하시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씀한다.
비록 듣는 사람이 다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예수는 자신이 해야 할 모든 말씀은 다 드러내셨다.
(4:25 여자가 이르되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시리이다)
성령이 말하는 것은 예수가 선포하셨던 말씀에 대한 단순한 보충이 아니라 성부께서 계획하셨고 성자가 선포하고 실행하셨던 전 구속 사역에 관한 말씀의 의미를 풍부하게 드러내는 것이다.
▶ 듣는 것 - 여기서 '듣다'는 현재 시제로 언급되어 성령이 끊임없이 성부와 성자로부터 말씀을 듣고 사역하심을 의미한다. 이는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 하나님이 함께 사역하심을 암시하는 말이기도 하다.
▶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 '장래 일'(타 에르코메나)은 문자적으로 '다가오는 일들'을 뜻하는데, 혹자는 이것을 장래 일에 대한 예언으로 해석한다. (Bernard).
그러나 이 용어는 본서에서 유일하게 한 번 사용되었으므로 성령의 사역에만 이 용어를 적용시키는 데 어려움이 있다.
여기서 우리는 이 용어를 두 가지로 생각할 수 있다.
(1) 예수가 잡혀 가신 날 밤의 시점에서 본다면 '장래 일'은 곧 닥칠 예수의 십자가상에서의 죽음과 그의 부활을 의미한다.
(2) 세상을 책망하는 성령 사역의 관점에서(8절)보면 '장래 일'은 죄와 의와 심판을 선포하는 종말론적인 사건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사실 양자를 다 받아들인다 해도 무리는 없는 것 같다. 왜냐하면 하나님 나라에 관한 종말론적인 사건은 단지 미래의 역사에서만 기대되는 것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종말론적 사건은 이미 복음서 안에서 시작되었으며
(눅 7:19 요한이 그 제자 중 둘을 불러 주께 보내어 가로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하라 하매)
예수의 죽음과 부활 역시 종말론적 사건에 포함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버나드의 견해대로 성령은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모두 아시므로 제자들에게 장래 일을 깨닫게 하실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성령의 사역은 요한의 계시록에서 절정을 이루었다.
이 예언의 기능 역시 예수의 말씀과 별개가 아니라 철저히 그의 말씀과 결부되어 주어진 것이다.
따라서 '장래 일'은 전체 구속사 중 남은 부분에 대한 것으로 예수가 이 세상에 오신 이후 성취될 일들이다.
성령은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일들에 대하여 다 알고 계시므로 그의 사역을 단지 어떤 한 사건에 대한 예언으로 제한시킬 수 없다.
[요 16:14]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겠음이라
▶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 앞에서 성령의 역할은 세상을 책망하며,
(8절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제자들을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는 것이라 소개되었거니와
(13절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 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여기서는 예수의 영광(Glory, NIV)을 나타내는 것이라 덧붙여 소개된다.
넓게 보면 본절의 이 역할은 앞에 언급한 두 역할과 직접적으로 연결될 뿐만 아니라 거의 동일한 의미를 시사한다.
본 구절의 의미에 대해서는, 일차적으로 예수의 부활을 증거하시는 성령의 사역을 떠올릴 수 있다.
예수는 비천한 말구유에서 탄생하심 부터 시작하여 공생애 기간 동안 줄곧 머리 둘 곳도 없을 정도로 외관상 초라한 생활을 하셨다.
(눅 9:58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 하시고)
특히 영광과 위엄 가운데 지상의 메시야 왕국을 건설하리라는 제자들과 그들을 위시한 추종자들의 기대와는 정반대로 십자가에서 처절한 모습으로 죽음을 당하셨을 때,
모든 사람들의 눈에 그 십자가는 수치와 무기력과 절망으로 보였을 뿐이며,
예수의 영광은 어디서도 찾을 길 없어 보였다.
왜냐하면 제자들은 예수의 영광이 고난과 죽음의 관문(關門)을 거친 후 비로소 얻어지는 것임을 알지 못하고 단지 죽음 자체만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의 부활에 대한 생생한 목격과 강림하신 성령의 증거를 통해 예수의 위엄과 영광은 확연히 드러나게 된 것이다.
즉 이러한 부활에 대한 증거 사역을 포함하여 성령은 창조주와 구속주이신 예수의 신적 본성과 신분 및 장래 재림주로 임하실 사실 등을 증거함으로써 예수 당시에는 제자들이 이해하지 못했던 부분들을 명확히 밝혀 예수의 영원하신 영광을 충만히 드러내셨고 또 앞으로도 드러내실 것이다.
요컨대 성령이 증거하는 예수의 복음은 영광의 광채이다.
왜냐하면 예수의 존재 자체가 하나님의 영광을 충만하게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고후 4:4 그 중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6 어두운 데서 빛이 비취리라 하시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느니라)
또한 본문은 성령의 사역이 철저히 그리스도 중심적(Christocentric)임을 나타낸다.
즉 아들이 아버지와 하나임에도 불구하고 아버지께 철저히 순종함으로써 어버지의 영광을 드러내고 자신의 역할을 온전히 완수했듯이 성령의 사역 또한 예수의 사역 위에 기초하며 또 예수의 사역의 결실을 맺는 일에 초점을 맞춘다는 것이다.
[요 16:15] 무릇 아버지께 있는 것은 다 내 것이라 그러므로 내가 말하기를 그가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하였노라.
▶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리라 - 예수는 17:10에서 '내 것은 아버지의 것이요, 아버지의 것은 내 것'이라고 가르치신다.
따라서 본문에서 성령이 나타내시는 것은 성자에게 속한 것을 근거로 하지만 결국 그것은 성부의 것이다.
(3:35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만물을 다 그 손에 주셨으니;
5:20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자기의 행하시는 것을 다 아들에게 보이시고 또 그보다 더 큰 일을 보이사 너희로 기이히 여기게 하시리라)
삼위 하나님은 구속(救贖) 사역에 있어서 상호 협동적이다.
(1) 성부는 구속 사역을 계획하셨고
(엡 1:3-5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4)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벧전 1:2 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입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
(2) 성자는 성부의 뜻에 순종하여 구속을 완성하셨으며
(엡 1:7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
(3) 성령은 구속 사역의 의미를 드러내시며 동시에 예수가 완성하신 그 구속을 각 사람들에게 적용시키는 역할을 담당하신다.
(엡 1:8-9 이는 그가 모든 지혜와 총명으로 우리에게 넘치게 하사
9)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셨으니 곧 그 기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벧전 1:12 이 섬긴 바가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요 너희를 위한 것임이 계시로 알게 되었으니 이것은 하늘로부터 보내신 성령을 힘입어 복음을 전하는 자들로 이제 너희에게 고한 것이요 천사들도 살펴 보기를 원하는 것이니라)
그렇기 때문에 결국 성령의 역할을 본문에서 성자의 것을 가지고 사람들에게 알리는 것으로 나타난다.
한편 예수가 소유하신 '내 것'은 자신이 성취하신 전체 구속 사역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 구속사역을 바탕으로 한 '장래 일'(13절)도 여기에 포함될 수 있다.
왜냐하면 '장래 일'은 그리스도가 성취한 구속 사역을 근거로 전개될 것이며 또한 그 일은 성부가 계획하신 것이므로 역시 그리스도의 것이기 때문이다.
바울이 '그리스도의 풍성'(엡 3:8)이라고 표현한 것도 바로 이 말씀을 근거한데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엡 3:8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에게 이 은혜를 주신 것은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을 이방인에게 전하게 하시고)
'인생과 말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조금 있으면이라 하신 말씀이 무슨 말씀이냐 (0) | 2016.12.10 |
---|---|
죄에 대해서라 함은, 나를 믿지 않음으로이다 (0) | 2016.12.09 |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0) | 2016.12.07 |
너희로 실족하지 않게 하려 함이니 (0) | 2016.12.06 |
너희가 나를 떠나는 때는 무슨 일도 할 수 없다 (0) | 2016.12.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