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메섹 도상의 사울
성 경: [행 9:1-9] 사울이 주의 제자들을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대제사장에게 가서
2) 다메섹 여러 회당에 갈 공문을 청하니 이는 만일 그 도를 좇는 사람을 만나면 무론 남녀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오려 함이라
3) 사울이 행하여 다메섹에 가까이 가더니 홀연히 하늘로서 빛이 저를 둘러 비추는지라
4)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 있어 가라사대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하시거늘
5) 대답하되 주여 뉘시오니이까 가라사대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6) 네가 일어나 성으로 들어가라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 하시니
7) 같이 가던 사람들은 소리만 듣고 아무도 보지 못하여 말을 못하고 섰더라
8) 사울이 땅에서 일어나 눈은 떴으나 아무 것도 보지 못하고 사람의 손에 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가서
9) 사흘 동안을 보지 못하고 식음을 전폐하니라.
[행 9:1] 사울이 주의 제자들을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대제사장에게 가서
▶ 주의 제자들을 - 사울이 핍박하고 있는 대상에 대한 명칭으로 언급된 '주의 제자들'은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누가의 다양한 표현 중의 하나이다.
누가는 ‘그리스도’인에 대한 표현을
'그 도를 좇는 사람들' (2절 다메섹 여러 회당에 갈 공문을 청하니 이는 만일 그 도를 좇는 사람을 만나면 무론 남녀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오려 함이라),
'제자' (10절 그 때에 다메섹에 아나니아라 하는 제자가 있더니 주께서 환상 중에 불러 가라사대 아나니아야 하시거늘 대답하되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
'성도들' (13절 아나니아가 대답하되 주여 이 사람에 대하여 내가 여러 사람에게 듣사온즉 그가 예루살렘에서 주의 성도에게 적지 않은 해를 끼쳤다 하더니),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 (14절 여기서도 주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를 결박할 권세를 대제사장들에게 받았나이다 하거늘),
'형제' (17절 아나니아가 떠나 그 집에 들어가서 그에게 안수하여 가로되 형제 사울아 주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시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 하니)
또는 '형제들' (30절 형제들이 알고 가이사랴로 데리고 내려가서 다소로 보내니라)
등으로 다양하게 언급하고 있다.
▶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 기독교인에 대한 사울의 잔혹한 행위를 심리적으로 묘사이다.
'위협'은 '경고'라는 말로도 해석되는데 여기서는 당장이라도 '살해'를 할 것 같은 위협적인 모습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이같은 바울의 심리 상태를 '등등하여'라는 표현을 사용하여 동적(動的)인 면을 강조하고 있는데 이 말은 본래 '숨을 쉰다'(breathe)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이 표현은 사울의 호흡이 살기와 위협의 숨소리로 들릴 만큼 박해가 잔인했음을 보여줌과 동시에 사울의 행위가 얼마나 능동적인 행위였는지를 짐작케 한다. 그리고 이런 점에서 사울 자신은 박해 행위에 대해 대단한 자부심과 우월감에 도취되어 있었던 것 같다.
▶ 대제사장에게 가서 - 사울이 대제사장에게 간 것은 기독교인에 대한 체포권을 부여받기 위함이다.
(2절 다메섹 여러 회당에 갈 공문을 청하니 이는 만일 그 도를 좇는 사람을 만나면 무론 남녀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오려 함이라).
유대인 중에서도 가장 엄격한 바리새파에 속한 사울이
(26:5 일찍부터 나를 알았으니 저희가 증거하려 하면 내가 우리 종교의 가장 엄한 파를 좇아 바리새인의 생활을 하였다고 할 것이라)
예수를 죽이기로 음모하고 이를 실행했던 대제사장, 바리새인들,
(눅19:47; 20:19; 22:52; 23:10)과 같은 노선에 있었음은 매우 당연한 일이다.
(눅19:47 예수께서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치시니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백성의 두목들이 그를 죽이려고 꾀하되;
20:19 서기관들과 대제사장들이 예수의 이 비유는 자기들을 가리켜 말씀하심인 줄 알고 즉시 잡고자 하되 백성을 두려워하더라;
22:52 예수께서 그 잡으러 온 대제사장들과 성전의 군관들과 장로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강도를 잡는 것 같이 검과 몽치를 가지고 나왔느냐;
23:10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서서 힘써 고소하더라)
당시 대제사장은 칠십 인으로 구성된 의회 '산헤드린'의 의장으로서 로마로부터 인정받은 권한 곧 사법권과 행정권을 팔레스틴 내.외에 거주하는 모든 유대인들에게 행사할 수 있었다.
당시 대제사장이 '가야바'(A.D. 18-37)였는지 그 후임자 '데오빌로'(A.D. 37-38)였는지 알 수 없으나 사울의 회심(回心)을 A.D 35년경으로 본다면 '가야바'가 대제사장이었을 가능성이 높다(Lenski).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몇 학자는 '데오빌로'로 추정한다. (alford, Levin).
그러나 사울의 회심 연도를 정확히 알 수 없기 때문에 두 가지 견해 모두 가설에 불과하다.
[행 9:2] 다메섹 여러 회당에 갈 공문을 청하니 이는 만일 그 도를 좇는 사람을 만나면 무론 남녀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오려 함이라
▶ 다메섹 여러 회당 - 사울의 행선지로 언급된 다메섹은 예루살렘 동북쪽 약 230km정도 거리에 위치한 고대 도시로서 삼 면이 산악으로 둘러싸인 해발 671m의 고원 지대이다.
이곳은 아브라함 때부터
(창 14:15 그 가신을 나누어 밤을 타서 그들을 쳐서 파하고 다메섹 좌편 호바까지 쫓아가서; 15:2 아브람이 가로되 주 여호와여 무엇을 내게 주시려나이까 나는 무자하오니 나의 상속자는 이 다메섹 엘리에셀이니이다)
다윗 시대와
(삼하 8:6 다메섹 아람에 수비대를 두매 아람 사람이 다윗의 종이 되어 조공을 바치니라 다윗이 어디를 가든지 여호와께서 이기게 하시니라)
솔로몬 시대에 걸쳐
(왕상 11:24 다윗이 소바 사람을 죽일 때에 르손이 사람들을 모으고 그 떼의 괴수가 되며 다메섹으로 가서 웅거하고 거기서 왕이 되었더라)
계속 언급된 가장 오래된 도시 중 하나로 B.C.732년에 앗수르에게 멸망하고 B.C. 64년부터 로마의 지배 아래 있게 되었다.
초대 교회 당시 다메섹에 거주했던 유대인의 수는 상당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A.D. 66년 네로 박해 때 약 10,500명의 유대인이 학살당했다는 요세푸스(Josephus)의 보고가 이를 뒷받침 한다.
따라서 당시 유대인들의 공동체에 있어서 중심 기구라고 할 수 있는 회당도 상당수에 이르렀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곳에 있는 기독교인들은 아마도 예루살렘 박해 때(8:1-3) 예루살렘으로부터 피신해 간 유대 기독교인들과 그들에 의해 개종된 유대인들로 추정된다.
(8:1-3 사울이 그의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기더라 그 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핍박이 나서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
2) 경건한 사람들이 스데반을 장사하고 위하여 크게 울더라
3) 사울이 교회를 잔멸할새 각 집에 들어가 남녀를 끌어다가 옥에 넘기니라)
▶ 그 도를 좇는 사람 - 여기서 언급된 '그 도'란 기독교를 묘사하는 다양한 표현중의 하나다.
누가는 단순하게
'도'(道)로만 언급하기도 하며
(19:9 어떤 사람들은 마음이 굳어 순종치 않고 무리 앞에서 이 도를 비방하거늘 바울이 그들을 떠나 제자들을 따로 세우고 두란노 서원에서 날마다 강론하여, 23 그 때쯤 되어 이 도로 인하여 적지 않은 소동이 있었으니;
22:4 내가 이 도를 핍박하여 사람을 죽이기까지 하고 남녀를 결박하여 옥에 넘겼노니;
24:14 그러나 이것을 당신께 고백하리이다 나는 저희가 이단이라 하는 도를 좇아 조상의 하나님을 섬기고 율법과 및 선지자들의 글에 기록된 것을 다 믿으며, 22 벨릭스가 이 도에 관한 것을 더 자세히 아는고로 연기하여 가로되 천부장 루시아가 내려오거든 너희 일을 처결하리라 하고)
'주의 도'등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18:25 그가 일찍 주의 도를 배워 열심으로 예수에 관한 것을 자세히 말하며 가르치나 요한의 침례만 알 따름이라)
기독교를 대표하는 용어로 '도'란 말을 언제부터 사용하게 되었는지 분명하지 않다. 아마 예수를 '생명의 길'로 교회가 인식하고 있었던 데서 비롯된 것 같다.
▶ 무론 남녀하고 결박하여 - 사울이 이방 지역에서 행할 수 있는 막강한 권한을 묘사하고 있는 본 구절은 당시 대제사장이 이방의 유대인들에 대해서 막강한 권력을 지니고 있었음을 알게 한다.
▶ 예루살렘으로 잡아오려 - 본 구절은 예루살렘이 교회 탄압의 중심이며 유대인들에 대한 행정의 중심지도 됨을 보여준다.
그런데 문제는 당시 대제사장이 이방 지역의 유대인에게까지 권한을 행사할 수 있었느냐 하는 점이다.
마카비1서 15:15-21에 따르면 루기오(Lucius)총독은 유대에서 도망한 자들을 대제사장이 유대법에 따라 처벌할 수있도록 프톨레미에게 요청한 적이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아마 글라우디오 황제와 매우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던 헤롯 아그립바 1세가 분봉왕(分封王)으로 유대를 다스렸으므로 대제사장에게 상당한 권한을 부여했을 것이다.
[행 9:3] 사울이 행하여 다메섹에 가까이 가더니 홀연히 하늘로서 빛이 저를 둘러 비추는지라
▶ 홀연히 하늘로서 빛이 - 본 구절은 사울이 다메섹에 가까이 갔을 때 초자연적 개입이 일어난 것에 대한 묘사이지만 그 지점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한편 '빛'이
22:6에서는 '큰 빛'이라고 언급되고
(22:6 가는데 다메섹에 가까웠을 때에 오정쯤 되어 홀연히 하늘로서 큰 빛이 나를 둘러 비취매)
26:13에서는 '해보다 더 밝았다'고 묘사되어 있다.
(26:13 왕이여 때가 정오나 되어 길에서 보니 하늘로서 해보다 더 밝은 빛이 나와 내 동행들을 둘러 비추는지라)
이에 대해 혹자는 하늘로부터 온 빛에 대해 강조하기 위한 의도와 함께 같은 이야기를 반복함으로써 나타나는 이야기의 단조로움을 없애기 위한 저자의 배려로 이해한다. (Haenchen).
그러나 오히려 바울이, 둘러 비친 그 빛에 대해 묘사하기에 어려움이 있었으므로 간증할 때 조금씩 달리 표현하였을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그에게 둘러 비친 '빛'의 성격은 그 빛에 대해 언급된 세 곳의 묘사를 종합해 봄으로써 파악할 수 있다.
▶ 저를 둘러 비추는지라 - 26:13에서는 같은 상황을 묘사함에 있어서 "나와 내 동행들을 둘러 비추는지라"고 하였다.
이 차이점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해결책을 모색할수 있다.
즉 본절에서는 오직 사울이 예수를 만난 사건에만 초점이 맞추어져 있으나,
26:13에서는 사울 자신의 회심 사건에 있어 현장 목격자들도 있었음을 나타내기 위해서 일행들에게도 동일한 빛이 비추었다는 진술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것이다.
(26:13 왕이여 때가 정오나 되어 길에서 보니 하늘로서 해보다 더 밝은 빛이 나와 내 동행들을 둘러 비추는지라)
그리고 22:9의 기록은 본절과 26:13의 중간 형태를 취하고 있다.
(22:9 나와 함께 있는 사람들이 빛은 보면서도 나더러 말하시는 이의 소리는 듣지 못하더라)
아무튼 사울과 함께 다메섹으로 가던 일행들도 사울이 경험한 그 빛을 목격했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행 9:4]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 있어 가라사대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하시거늘
▶ 땅에 엎드러져 - 본 구절은 갑자기 내려 비취는 빛에 의해 나타난 사울의 반사적 행동에 대한 묘사다.
여기서 '엎드러져'는 '떨어진다', '넘어진다'의 뜻으로 쓰러지듯 엎드린 사울의 행동이 갑작스럽게 나타난 초자연적 현상에 대한 반사적이면서 두려움에 휩싸인 즉각적 반응이었음을 나타내고 있다.
그들이 말을 타고 갔다면 말에서 떨어지다시피 하여 땅 위에 엎드렸을 것이다.
▶ 사울아 사울아 - 혹자는 구약 시대에 이름을 반복해서 부르는 것이 격식을 갖추는 습관에서 비롯되었다고 주장한다. (Longenecker).
그러나 사울에게 들려진 예수의 음성은 분명히 애정 어린 음성으로 이해된다.
본절 외에 성경에서 이름을 두 번씩 불렀던 경우는
아브라함 - (창 22:11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그를 불러 가라사대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시는지라 아브라함이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매),
모세 - (출 3:4 여호와께서 그가 보려고 돌이켜 오는 것을 보신지라 하나님이 떨기나무 가운데서 그를 불러 가라사대 모세야 모세야 하시매 그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사무엘 - (삼상 3:10 여호와께서 임하여 서서 전과 같이 사무엘아 사무엘아 부르시는지라 사무엘이 가로되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시몬 - (눅 22:31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단이 밀 까부르듯 하려고 너희를 청구하였으나)을 들 수 있다.
이는 부르는 대상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나타낸다.
[행 9:5] 대답하되 주여 뉘시오니이까 가라사대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 주여 뉘시오니이까 -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알지 못하는 음성에 대하여 사울은 '주여'(라고 부르고 있는데 이 호칭은 자기를 부르는 이가 하나님이심을 인식했음이 아니다. 이는 사울이 곧이어 '당신은 누구입니까?'라고 자신을 부른 자의 정체를 묻고 있다는 점에서 알 수 있다.
아마도 초자연적 어떤 힘 앞에서 나약한 인간의 의식으로부터 나온 호칭으로서 짐작된다.
▶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 이 표현은 하나님께서 자기를 선언하신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출 3:14)를 70인역(LXX)이 '에고 에이미'의 문장으로 표현한 데서 비롯되었다.
따라서 예수는 '에고 에이미'를 사용하심으로써 구약에서 모세가 만난 그 하나님과 자신을 동일시하면서 자기 선언을 하신 것이다.
구약 시대의 선지자들이 '여호와께서 가라사대'란 표현을 사용하여 자신의 선포 근원이 하나님이심을 밝힌 반면 예수는 스스로의 신적 권위를 나타내신 것이다.
본절에서도 역시 예수는 사울에게 하나님으로서 자기를 선언하심으로써 세상에서 사역하실 때와 동일한 언어습관을 나타내셨다.
[행 9:6] 네가 일어나 성으로 들어가라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 하시니
▶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 - 자신의 정체를 밝힌 예수께서 곧이어 사울에게 일방적으로 지시하셨던 것은 다음 두 가지의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1) 사울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이미 예수께서 그를 자신의 제자로 지명하여 선택하셨다는 사실을 암시해 주고 있다.
(2) 사울이 예수에 대한 어떠한 반응도 없이 일방적으로 명령을 받았다는 사실은 부활한 예수의 초자연적인 능력을 암시한다.
이 두 가지 의미를 종합해 보면 사울의 소명 의식이 부활한 예수의 강권적인 능력의 부름에 의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표현은 예수가 사울을 아시기 위해 이미 예정된 계획을 가지고 계셨음을 암시한다.
한편 본절을 '그는 떨면서 놀라움에 사로잡혀 주여 내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 라고 말했다'는 구절을 첨가시켰다(KJV, MLB).
이는 22:10과 조화시키기 위한 첨가로 짐작된다. 아마 바울은 자신이 핍박하는 자들이 섬기던 예수를 만나자 놀라서 자기가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에 대해 물었던 것이다.
(22:10 내가 가로되 주여 무엇을 하리이까 주께서 가라사대 일어나 다메섹으로 들어가라 정한 바 너희 모든 행할 것을 거기서 누가 이르리라 하시거늘)
[행 9:7] 같이 가던 사람들은 소리만 듣고 아무도 보지 못하여 말을 못하고 섰더라
▶ 소리만 듣고 아무도 보지 못하여 - 사울과 함께 동행 하였던 사람들의 반응을 묘사하면서 그들이 시각적으로 아무것도 감지하고 있지 못함을 언급하고 있으나 22:9과 26:14에서는 각각 조금씩 달리 설명했다.
22:9에서는 일행이 소리는 못 들었어도 빛은 보았다고 진술하여 본절과 정반대의 상황을 나타내었다.
(22:9 나와 함께 있는 사람들이 빛은 보면서도 나더러 말하시는 이의 소리는 듣지 못하더라)
반면 26:14에서는 사울과 그 일행 모두가 엎드려졌다고 한 점으로 보아 모두가 초자연적 경험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26:14 우리가 다 땅에 엎드러지매 내가 소리를 들으니 히브리 방언으로 이르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가시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
따라서 바울의 세 가지 진술이 모두 서로 일치되지 않고 있다. 그리고 여기서 언급된 '소리'는 음성을 뜻하는 것으로 볼 수 있는데 바울에게 명령한 음성이 예수의 음성인지 아니면 사울의 음성(5절)이었는지 분명히 알 수 없다.
또 '아무도 보지 못한 것'이 하늘로부터 온 빛을 말하는 것인지는 분명치 않다. 이러한 의문들을 종합해 보면 다음 두 가지의 추측이 가능하게 된다.
(1) 일행들은 '주여 누시오니이까?'라는 사울의 외침만 들었을 것이다(Chrysostom, Bruce).
(2) 그들이 무슨 소리를 듣기는 들었으나 그 소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Bengel).
여기서 강조된 분명한 사실은 사울이 환상이라고 할 수 있는 초자연적 경험을 하였고 그 사건을 목격한 자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목격자들은 사울이 어떤 경험을 하였는지 구체적으로 증언할 수 없는 피상적이거나 부분적인 이해만을 갖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22:9과 26:14의 기록과 본절의 기록이 지닌 차이는 모순이라기 보다는 구체적으로 초자연적인 경험을 한 사람은 사울뿐임을 강조하는 기능을 갖는다.
▶ 말을 못하고 섰더라 - 본 구절은 사울의 일행들이 무엇인가를 경험하면서도 아무 말을 못하고 있음을 묘사하는 표현이다.
'말을 못하고'는 '공포로 인하여 말을 못하고 벙어리가 되었다'는 의미로 해석한다(A.C. Hervey).
이 단어가 신약성경에서는 한 번도 언급되지 않고 다만 70인역(LXX)의 사 56:10에서 짖지 못하는 개를 가리킬 때 사용되었을 뿐이다.
(사 56:10 그 파수꾼들은 소경이요 다 무지하며 벙어리 개라 능히 짖지 못하며 다 꿈꾸는 자요 누운 자요 잠자기를 좋아하는 자니)
그런데 사56:10에서는 이 단어가 공포와는 관계없이 어떤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는 무지(無知)와 연관되어 사용되었다.
(사 56:10 그 파수꾼들은 소경이요 다 무지하며 벙어리 개라 능히 짖지 못하며 다 꿈꾸는 자요 누운 자요 잠자기를 좋아하는 자니)
아마 누가는, 사울의 일행이 자신들과 사울에게 일어난 사건에 대해 전혀 깨닫지 못한 상태에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 이 단어를 사용한 것 같다.
[행 9:8] 사울이 땅에서 일어나 눈은 떴으나 아무 것도 보지 못하고 사람의 손에 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가서
▶ 일어나 눈은 떴으나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 사울이 예수의 음성을 듣고 있었던 모습은 땅에 엎드러진 상태였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보지 못했다'라는 말은 미완료 과거형으로서 사울이 보고자 했으나 볼 수 없었던 상태, 즉 빛을 경험한 순간부터 일어서는 시점까지 보이지 않고 있는 사태를 암시한다.
따라서 사울이 경험한 소명 사건은 가시적이고 객관적인 사실이 었다기 보다 주관적이고 내면적인 사건으로 이해될 수 있다. 그러나 바울이 예수의 음성을 들었던 사실은 내면적인 사건으로 돌릴 수 없다.
사울이 빛으로 인해 예수의 모습을 보지 못했을지라도 그의 음성은 그에게 실제로 들려왔다.
[행 9:9] 사흘 동안을 보지 못하고 식음을 전폐하니라.
▶ 사흘 동안을 보지도 못하고 심음을 전폐하니라 - 여기서는 강조점은 보지 못함에 대한 것이 아니라 사흘 동안 식음(食飮)을 전폐한 사실이다. 즉 사흘 동안에 걸쳐 사울에게 내면적인 어떤 큰 움직임이 있었다는 것을 암시한다.
아마도 사울 자신이 지금까지 배웠고 자랑스럽게 고수했던 사상체계와 자신이 다메섹 도상에서 경험한 예수의 음성을 연관지어 깊은 고뇌나 생각에 빠졌을 것이다.
특히 '사흘'이라는 숫자는 물고기 뱃속에서 사흘을 보낸 요나의 이야기나
(마 12:40 요나가 밤낮 사흘을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 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을 땅 속에 있으리라)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난 예수의 부활처럼 사건의 대전환을 예고한다. 이와 같이 사울의 회심은 자기 자신의 엄청난 내면적 고통을 통한 결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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