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덴 전도
성 경: [행 17:16-31] 바울이 아덴에서 저희를 기다리다가 온 성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 마음에 분하여
17) 회당에서는 유대인과 경건한 사람들과 또 저자에서는 날마다 만나는 사람들과 변론하니
18) 어떤 에비구레오와 스도이고 철학자들도 바울과 쟁론할새 혹은 이르되 이 말장이가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느뇨 하고 혹은 이르되 이방신들을 전하는 사람인가보다 하니 이는 바울이 예수와 또 몸의 부활 전함을 인함이러라
19) 붙들어 가지고 아레오바고로 가며 말하기를 우리가 너의 말하는 이 새 교가 무엇인지 알 수 있겠느냐
20) 네가 무슨 이상한 것을 우리 귀에 들려주니 그 무슨 뜻인지 알고자 하노라 하니
21) 모든 아덴 사람과 거기서 나그네 된 외국인들이 가장 새로 되는 것을 말하고 듣는 이외에 달리는 시간을 쓰지 않음이더라
22) 바울이 아레오바고 가운데 서서 말하되 아덴 사람들아 너희를 보니 범사에 종교성이 많도다
23) 내가 두루 다니며 너희의 위하는 것들을 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긴 단도 보았으니 그런즉 너희가 알지 못하고 위하는 그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
24)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유를 지으신 신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25)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자이심이라
26)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거하게 하시고 저희의 연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하셨으니
27) 이는 사람으로 하나님을 혹 더듬어 찾아 발견케 하려 하심이로되 그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떠나 계시지 아니하도다
28)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있느니라 너희 시인 중에도 어떤 사람들의 말과 같이 우리가 그의 소생이라 하니
29) 이와 같이 신의 소생이 되었은즉 신을 금이나 은이나 돌에다 사람의 기술과 고안으로 새긴 것들과 같이 여길 것이 아니니라
30)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허물치 아니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을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
31)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저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하니라.
[행 17:16] 바울이 아덴에서 저희를 기다리다가 온 성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 마음에 분하여
▶ 아덴 - 아덴(Athens)은 에게해의 지류 샤론만에 위치하였으며 피라에우스(Piraeus)항구에서 약 8km 떨어진 내륙도시이다.
북쪽으로는 파르네스 산, 동쪽으로는 펜텔리쿠스 산, 남동쪽으로는 히멧투 산이 둘러싸고 있는 좁은 평지에 자리잡은 이 도시는 아티카의 영웅 데세우스에 의해 건설되었으며 아테네(Athene) 여신을 기념하기 위해 '아덴'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페리클레스(B.C.495-239)에 의해 이 도시는 전성기를 맞아 파르테논(Parthenon) 신전을 비롯한 수많은 사원과 건축물들이 건축되었다. 아울러 문학, 철학, 과학, 수사학 등이 꽃을 피웠으며 민주주의의 기초가 내려지기도 하였다. 그러나 펠로폰네수스 전쟁(B.C.431-404)으로 인하여 아덴은 빛을 잃었다. 그렇지만 그 문학적, 역사적 명성은 그대로 남아 수세기 동안 지속되었다.
바울이 이 도시를 방문하였을 때는 찬란했던 옛 영광이 사그라든 뒤였다. 그러나 그 화려한 명성만은 계속 지속되고 있던 터라 그 도시민들의 자부심은 대단하였다.
[행 17:17] 회당에서는 유대인과 경건한 사람들과 또 저자에서는 날마다 만나는 사람들과 변론하니
헬라어 원문에는 '멘 운'이란 단어로 '따라서'라는 뜻으로 새로운 장면을 이끌어 내며 본 단락의 도입부분(16절)과 본론부분을 연결시켜 준다(17절 이하).
▶ 회당에서는 - 바울은 그의 규례대로 먼저 회당을 찾았다.
▶ 저자에서 - 아덴에는 다른 그리이스 도시들처럼 오직 하나의 시장이 있었다고 한다. 이 시장은 상업과 웅변과 철학적 담론의 중심지였음은 물론 한가한 사람들이 소일(消日)을 위해 북적대는 곳이기도 하였다(Meyer).
한편 헨헨(Haenchen)은 이 시장이 아크로폴리스 북서쪽에 있는 옹기시장(케라메이코스)으로서 아덴의 생활중심지였다고 설명한다.
▶ 변론하니 - 2절의 '강론하며'와 같은 뜻으로 바울이 회당에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세세히 증거하고 시장과 길거리에서 매일매일 만나는 사람들에게 설파한 것을 나타낸다.
[행 17:18] 어떤 에비구레오와 스도이고 철학자들도 바울과 쟁론할새 혹은 이르되 이 말장이가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느뇨 하고 혹은 이르되 이방신들을 전하는 사람인가보다 하니 이는 바울이 예수와 또 몸의 부활 전함을 인함이러라
▶ 에비구레오와 스도이고 철학자 - '에비구레오'는 '에피큐로스 학파'를 뜻하며, '스도이고'는 '스토아 학파'를 뜻한다.
에피큐로스 학파 |
스토아 학파 |
|
주창자 |
에피큐로스(Epicurus, B.C.341-270) |
제논(Zenon, B.C.340-265) |
이름의 유래 |
주창자인 에피큐로스의 이름 땀. |
제논이 아덴의 아고라 관장에서 늘 가르치던 장소가 장식 회랑(Painted stoa)이었던 데서 유래. |
주 장 |
쾌락이 인생의 주된 목표라고 주장.이 쾌락은 육욕적인 것이 아니라 고통, 육정, 공포, 죽음 등에 대한 염려에서 벗어난 마음의 평정, 즉 아타락시아(ataraxia)를 뜻함. |
우주 속에 내재하며 인간 삶의 지침이 되는 원칙으로서의 이성의 중요성을 강조함. 엄격한 금욕주의와 만물을 통할한다는 로고스론, 최선을 다하는 자는 지위계급을 막론하고 칭송을 받을 것이라는 만민 동증주의, 만인형제 사상을 주장함. |
종교관 |
신들의 존재를 부인하지 않았으나 그 신들이 인간의 삶과는 전혀 관련성을 맺지 않고 있다고 하는 자연신교의 입장을 취함. |
범신론적인 입장을 취했으며 하나님을 세계정신이라고 생각함. |
▶ 쟁론할새 - 바울이 직업적인 철학자들과 함께 논쟁에 참여한 것을 나타낸다. 당시 아덴에는 직업적인 철학자들이 준비를 갖추고 논쟁에 참여할 목적으로 광장이나 거리에 나타나곤 하였다.
▶ 말장이 - 원래 곡식을 쪼아먹는 새를 뜻하였으나 후에 쓰레기를 주워모으는 사람을 가리켰으며, 점차 다른 사람들의 사상을 얻어 듣고 그것을 알지도 못하면서 자신의 것인 양 도용(盜用)하는 사람을 일컫게 되었다. 그리고는 이 말이 결국 변변치 못한 사람을 지칭하는 말로 사용하게 되었다.
결국 여기서 이 말은 극단적인 조롱과 멸시의 의미로서 그 철학자들이 바울을 사기꾼이나 떠벌이 같은 인물로 보았다는 뜻이다.
▶ 이방 신들을 전하는 사람 - 철학자들은 바울을 새로운 신들을 전하는 사람으로 생각했던 것같다. 당시 아덴에는 수많은 이방신들이 숭배되었고 또 그 신들을 전하는 사람들이 많았었다.
철학자들은 바울이 전하는 예수를 한 이방신으로 생각했으며 '부활'(아나타시스)이란 말을 예수란 신의 배우자인 여신으로 잘못 이해했던 것으로 보인다. (I.H.Marshall, Longenecker, Haenchen).
참고로 그리이스의 열 두 신을 도표로 나타내 보면 다음과 같다.
차례 |
헬라 이름 |
로마 이름 |
맡은 일 |
관련 성구 |
1 |
제 우 스 |
쥬 피 터 |
천지창조, 통치 |
행 14:12 |
2 |
헤 라 |
쥬 노 |
생산, 결혼 |
|
3 |
포 세 이 돈 |
넵 츈 |
바 다 |
|
4 |
하 데 스 |
플 루 토 |
음 부 |
|
5 |
아 레 스 |
마 즈 |
전 쟁 |
|
6 |
헤르메 즈 |
머 큐 리 |
상 업 |
행 14:12 |
7 |
헤파이스투스 |
볼 칸 |
대장간 |
|
8 |
아프로디테 |
비 너 스 |
연 애 |
|
9 |
아 폴 로 |
졸 |
음악, 문예 |
|
10 |
아 데 미 스 |
피 아 나 |
사 냥 |
행 19:27 |
11 |
세 레 스 |
농 업 |
||
12 |
미네르바 |
지 식 |
[행 17:19] 붙들어 가지고 아레오바고로 가며 말하기를 우리가 너의 말하는 이 새 교가 무엇인지 알 수 있겠느냐
▶ 아레오바고 - 이는 문자적으로 '법정' 또는 '아레스의 평의회'라는 뜻으로 주로 종교와 교육, 도덕적인 문제에 대한 재판권을 행사하던 일종의 권력 기구였다. 바울 당시 시의 모든 행정관들은 이 평의회의 구성원이었으며 면책(勉責) 특권을 누렸다.
한편 바울이 끌려간 아레오바고에 대해, 어떤 학자들은 아덴인들의 비공식적 집회를 가리킨다고 본다(Barnes). 이 견해는 바울의 연설투가 법정상의 변호와 거리가 멀고 또 재판 진행에 관한 어떤 암시도 없다는 점에 의해 뒷받침된다.
반면에 이를, 바울의 가르침 내용을 심문하기 위해 열린 공식 법정으로 보는 학자들도 있다(Hemer). 이 견해는 디오누시오라는 아레오바고 관원에 대한 언급 사실에 의해 뒷받침된다.
(34절 몇 사람이 그를 친하여 믿으니 그 중 아레오바고 관원 디오누시오와 다마리라 하는 여자와 또 다른 사람들도 있었더라).
결론적으로 이것이 반드시 법적 재판의 형식을 띤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공적 집회의 성격임에는 분명하다고 봄이 무난할 듯하다.
[행 17:20] 네가 무슨 이상한 것을 우리 귀에 들려주니 그 무슨 뜻인지 알고자 하노라 하니
▶ 무슨 이상한 것을 우리 귀에 들려주니 그 무슨 뜻인지 알고자 하노라 - 표면적으로는 정중하고 예의를 갖춘 말로 보이지만 조롱 섞인 태도도 배제되지 않았다. 아울러 그들에게는 새로운 지식에 대한 호기심도 작용했을 것이다. 헬라의 종교적 배경과 철학적 사고 체계에서는 바울의 가르침이 새롭고도 이해하기 힘든 것이었다.
따라서 바울에게서 더욱 자세한 내용과 그 배경 등을 알아보고자 하였다. 그러나 헬레니즘의 철학적 사고로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이해하려고 한 철학자들의 노력 자체가 무모했다.
[행 17:21] 모든 아덴 사람과 거기서 나그네 된 외국인들이 가장 새로 되는 것을 말하고 듣는 이외에 달리는 시간을 쓰지 않음이더라
▶ 가장 새로 되는 것을 말하고 듣는 이외에 달리는 시간을 쓰지 않음이더라 - 이는 아덴 사람들의 호기심 많고도 경박한 생활 태도를 말해준다. 아덴 사람들은 끝없이 새로운 것들을 찾아다녔고, 새로운 것이라고 찾았을 때는 또 이내 식상(食傷)해 버렸다.
이에 대해 B.C.5세기의 장군이자 정치가인 클레온은 아덴 사람들을 소위 새로운 것이라고만 하면 가장 잘 속아 넘어가는 사람들이라고 비난했었다(Thucydides, History). 이러한 피상적인 기질로 미루어 볼 때, 이들은 새로운 면을 보고서 복음을 일시적으로 받아들인다고 해도 이내 낡은 것으로 여겨 내던져 버렸을 것이다.
[행 17:22] 바울이 아레오바고 가운데 서서 말하되 아덴 사람들아 너희를 보니 범사에 종교성이 많도다
▶ 아레오바고 가운데 서서 - 바울이 이곳에 선 것은 죄인으로서 자신을 변론하기 위해서나 혹은 철학자들 앞에서 철학을 강의하고자 함이 아니었다. 다만 바울은 주어진 모든 환경에서 최선을 다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기 위한 선포자로서 그곳에 선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한 순간도 복음 증거자로서의 사명을 잃어버린 적이 없는 증인의 모습을 볼 수가 있다.
▶ 범사에 종교성이 많도다 - 바울이 아덴 사람들에게 '종교성이 많다'고 한 것은 그들의 도시에 신전과 신상들이 많았던 때문인 듯하다. 따라서 바울의 이 말은 그들의 경건함이나 종교적인 성향에 대한 칭찬(Chrysostom)으로 이해되기 보다는 그들의 무분별한 미신적인 태도에 대한 비난으로 이해됨이 더 합당하다(Calvin, Luther).
[행 17:23] 내가 두루 다니며 너희의 위하는 것들을 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긴 단도 보았으니 그런즉 너희가 알지 못하고 위하는 그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
▶ 알지 못하는 신에게 - 이러한 유형의 비문을 증거하는 것들이 있는데, 2세기의 지리학자였던 파우사니아스(Pausanias)는 팔레룸에서 아덴으로 가는 길에 '이름은 있고 알지 못하는 신들의 제단'이 있었다고 전한다. 또한 버가모에 있는 한 비문에도 '알지 못하는 신'이 새겨져 있다(Bruce, Longenecker, Blaiklock, Marshall, Meyer).
그러나 이에 대한 충분한 자료가 없기 때문에 비문의 내용이나 비문이 얼마나 많이 있었는지는 분명치 않다(Longenecker, Haenchen). 이는 아덴 사람이 가진 신관의 한 유형을 보여 주는 것이다.
그들은 수많은 신들이 존재한다고 보았으며, 아직 그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신들이 존재하리라는 생각에서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는 글을 새긴 단을 만들어 놓았을 것이다. 그들은 이렇게 하여 그 도시를 '알지 못하는 신'들의 저주로부터 보호하고자 하는 종교심을 갖고 있었던 듯하다(Blaiklock).
바울은 이러한 헬라적 배경을 토대로 하여 설교하기 시작하였다. 즉 여느 때와 같이 유대의 역사를 언급하거나 구약성경을 인용함으로써 그의 설교를 시작하지 않고 아덴 사람들이 익히 알고 있는 내용을 기초로 하여 그와 아덴사람들과의 접촉점을 마련하였다.
▶ 알지 못하고 위하는 그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 - 복음을 전하기 위한 접촉점으로서, '알지 못하는 신'을 언급하는데, 아덴 사람들이 막연하게 생각하는 절대자를 표현하기 위한 것 같다.
바울은 이러한 '막연한 신관'을 가진 아덴 사람들에게 성경을 계시하고 있는
창조
(24절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유를 지으신 신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구속
(25-30절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자이심이라
26)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거하게 하시고 저희의 연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하셨으니
27) 이는 사람으로 하나님을 혹 더듬어 찾아 발견케 하려 하심이로되 그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떠나 계시지 아니하도다
28)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있느니라 너희 시인 중에도 어떤 사람들의 말과 같이 우리가 그의 소생이라 하니
29) 이와 같이 신의 소생이 되었은즉 신을 금이나 은이나 돌에다 사람의 기술과 고안으로 새긴 것들과 같이 여길 것이 아니니라
30)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허물치 아니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을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
부활
(31절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저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하니라)의 신관을 도입하여 제시하고 있다.
[행 17:24]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유를 지으신 신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유를 지으신 신께서 - 하나님은 헬라의 많은 신들 중에 주신인 제우스처럼 여러 신 가운데 있는 신이 아니라 유일하신 분이시다. 아덴에는 약 30,000이 넘는 신들이 있었다.
바울은 아덴 사람들이 하나님을 그러한 신들 중에 하나로 포함하지 않도록 그분은 유일하신 분이시며 우주와 세상 만물을 창조하신 분이심을 명백히 했다.
이 세상에는 그 어느것도 스스로 존재하거나 다른 것들을 존재하게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또 이 세상 어떤 것도 하나님과 관계없이 생겨난 것도 없고 그와 무관하게 존재할 수 있는 것도 없다.
그분은 우주와 만유를 지으신 분으로서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에도 관여하시고 인류의 생사화복(生死禍福)을 주관하신다.
▶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 '손으로 지은 전'은 바울이 처해 있던 상황과 비교하여 본다면 쉽게 '파르테논 신전'이라고 떠올릴 수 있다.
파르테논 신전이 아무리 웅장하고 화려하다고 해도 그것은 인간이 지은 것이 틀림없다. 솔로몬이 성전을 완공한 후에 봉헌할 때도 이와 같은 고백을 한 바 있다.
(왕상 8:27 하나님이 참으로 땅에 거하시리이까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주를 용납지 못하겠거든 하물며 내가 건축한 이 전이오리이까).
천지의 주재이신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손으로 지은 신전에 국한될 수가 없으시다. 그분은 전지전능(全知全能) 무소부재(無所不在)하신 분이다.
아덴 사람들은 그들의 도시국가와 또 파르테논 신전을 비롯한 많은 신전과 사원 안에 수많은 신들을 소유하였지만 하나님은 그렇게 소유될 수 있는 분도 아니며 그러한 신들과 같은 부류와 혼동되어서도 안 된다.
[행 17:25]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자이심이라
▶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 아덴 사람들은 신들의 항구한 기쁨과 행복을 위해서는 인간들의 희생 제사가 필요하다고 생각을 갖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그들의 신상에 음식을 갖다놓고 옷을 입히고 또 좋은 장소에 그 신상들을 안치시킨다.
그러나 하나님은 무엇이 부족한 것이 없는 분이심으로 인간의 희생 제사를 원하시지 않는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께 많은 헌금과 헌물을 드린다 하여 더 많이 응답하거나 기뻐하시지도 않는다.
그분은 무엇이 필요하다 생각될 때 우리의 도움없이 스스로 모든 것을 얻으실 수 있는 분이다. 왜냐하면 그는 완전하고 충만하사 자신 안에서 모든 기쁨과 만족을 누릴 수 있을 만큼 충족하신, 이른바 유복적 속성(有福的 屬性)을 지닌 분이기 때문이다.
(딤전 1:11 이 교훈은 내게 맡기신 바 복되신 하나님의 영광의 복음을 좇음이니라;
6:15 기약이 이르면 하나님이 그의 나타나심을 보이시리니 하나님은 복되시고 홀로 한 분이신 능하신 자이며 만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시요).
이 세상의 그 누구도 생명을 만들어 낼 수 없으며, 이 세상의 그 누구도 인간의 호흡을 한 치도 연장할 수 없다. 오직 하나님만이 인간의 '생명과 호흡'의 주인이시다.
[행 17:26]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거하게 하시고 저희의 연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하셨으니
▶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 아덴 사람들은 그들이 아티카(Attic) 본토의 흙에서 생겨났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다는 것을 자랑하였다.
그러나 바울은 이에 반대하여 인류는 한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고 한 혈통과 한 조상을 가진 후손임을 언급하고 있다(Bruce, Longenecker).
'한 사람으로부터'(from on 또는 from one man)라고 번역할 수 있다. 여기서 '한 사람'은 아담을 염두에 두고 하는 말임이 분명한데, 아담으로부터 이어져 오는 인류의 하나 됨이라는 사상은 바울 신학의 바탕이 되고 있다.
(롬 5:12-21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13) 죄가 율법 있기 전에도 세상에 있었으나 율법이 없을 때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하느니라
14)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 위에도 사망이 왕 노릇 하였나니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라
15) 그러나 이 은사는 그 범죄와 같지 아니하니 곧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은즉 더욱 하나님의 은혜와 또는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이 많은 사람에게 넘쳤으리라
16) 또 이 선물은 범죄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과 같지 아니하니 심판은 한 사람을 인하여 정죄에 이르렀으나 은사는 많은 범죄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에 이름이니라
17)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사망이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이 한 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18)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19)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20) 율법이 가입한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쳤나니
21)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 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니라;
갈 3:28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이러한 하나 됨은 죄로 인해 훼손되었지만, 구속으로 인해 회복되었다(Bruce). 사도 바울은 이러한 사상을 바탕으로 아덴 사람들에게 성경적인 인간관을 피력하고 있다.
▶ 연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하셨으니 - '연대를 정하셨다'는 구절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시간을 정해주셨음을 알 수 있는데 이는 또한 14:17에 근거하여 볼 때 계절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판단할 수 있다( D.E.Haenchen).
(14:17 그러나 자기를 증거하지 아니하신 것이 아니니 곧 너희에게 하늘로서 비를 내리시며 결실기를 주시는 선한 일을 하사 음식과 기쁨으로 너희 마음에 만족케 하셨느니라 하고)
본절은 24절에 대한 보다 구체적인 설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의 '알지 못하는 신'은 곧 하나님으로 창조주이시며, 그는 시간을 만드사, 사람을 시간의 흐름속에서 살게 하셨고 나아가 모든 민족들이 살 수 있는 공간적인 경계까지 정하신 것이다.
이러한 사상은 시편 기자와 모세의 글에서도 나타난다.
시편 기자는 '주께서 땅의 모든 경계를 정하셨으며 여름과 겨울을 이루셨나이다'라고 노래했다.
(시 74:17 땅의 경계를 정하시며 여름과 겨울을 이루셨나이다).
또한 모세도 모든 민족들의 경계가 이미 하나님에 의해서 정해졌음을 교훈하고 있다.
(신32:8 지극히 높으신 자가 열국의 기업을 주실 때, 인종을 분정하실 때에 이스라엘 자손의 수효대로 민족들의 경계를 정하셨도다).
따라서 사도 바울은 이러한 구약성경에서 유래하는 사상에 근거하여 아덴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재해석하고 있는 것이다.
[행 17:27] 이는 사람으로 하나님을 혹 더듬어 찾아 발견케 하려 하심이로되 그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떠나 계시지 아니하도다
▶ 사람으로 하나님을 혹 더듬어 찾아 - '만지다', '느끼다'는 뜻으로 '소경이 무엇인가 열심히 더듬어 찾는 것'을 나타낸다. 이는 영적으로 어두움의 상태에 놓여있는 이방인들이 하나님을 더듬어 찾아 방황하는 것을 묘사한다.
아덴 사람들은 수많은 신들을 쫓아 다녔지만 그들로부터 영혼의 갈급함이나 구원의 문제를 해결 받지 못했다. 이들이 믿고 따르던 신들은 오히려 그들을 더 깊은 절망 속으로 몰아 넣었으며 그들이 주장하는 범신론적 사상, 불가지론 또는 회의론 등은 오히려 하나님을 올바로 만나지 못하도록 방해했다.
[행 17:28]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있느니라 너희 시인 중에도 어떤 사람들의 말과 같이 우리가 그의 소생이라 하니
▶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 이 구절은 크레타(Creta)의 시인 에피메니데스(Epimeni- des, B.C.6세기)의 4행시 '크레티카'(Cretica)에도 나온다.
제우스의 아들 미노스 (Minos)가 그의 부친에게 경의를 표하면서 이야기하는 내용이다.
바울은 당시 아덴인들에게 익숙했던 이야기를 통해 살아계시고 역사하시는 참 하나님을 증거 하고자 한 것이다.
▶ 그의 소생 - 이런 표현은 길리기아 시인 아라투스(Aratus, B.C.315-240)의 시 '패노메나'(Phaenomena)에 나온다.
이와 유사한 표현은 클레안데스(Cleanthes, B.C.331- 233)의 시 '제우스에게 드리는 찬송'(Hymn to Zeus)에도 나타난다.
바울이 이곳 외에도 희랍의 시를 정확하게 몇 차례 인용한 사실로 미루어
(고전 15:33 속지 말라 악한 동무들은 선한 행실을 더럽히나니;
딛 1:12 그레데인 중에 어떤 선지자가 말하되 그레데인들은 항상 거짓말장이며 악한 짐승이며 배만 위하는 게으름장이라 하니)
그는 희랍의 학문이나 문학에도 능숙했으리라 짐작된다. 이렇듯 바울은 아덴 사람들에게 복음을 효과적으로 전할 수 있도록 제반 여건(與件)을 이미 갖춘 사람이었다. 그는 자신이 알고 있는 희랍적인 지식들을 복음을 증거하는 도구로 사용했으며, 희랍 세계의 시를 인용하여 복음을 증거했지만 그의 메시지는 철저히 복음적이며 성경적이었다.
한편 24-28절의 바울의 설교는 다음과 같이 희랍의 철학적 사고와 비교된다.
바울의 설교 |
헬라의 철학적 사고 |
하나님은 한 분이다. |
스토아 철학 : 범신론 |
하나님은 창조자이시다. |
에피큐로스 철학 : 세상 만물은 영원 전부터 존재해 온 원자들의 우연한 집합. |
인류는 한 하나님에서 창조되었고 같은 조상을 가진 후손이다. |
아덴 사람들은 아티카(Attica) 본토의 흙에서 생겨나 다른 사람들과 다르다고 자부함. |
하나님은 인류의 모든 삶을 섭리하신다. |
에피큐로스 자연신론(deism) : 신은 인간의 일에 절대 관여하지 않음. |
천지의 주재시다. |
인간이 드리는 희생제사를 통하여 신들은 완전한 행복을 누릴 수 있으며, 또 한사람의 손으로 신들을 새겨 만질 수 있다고 여김 |
[행 17:29] 이와 같이 신의 소생이 되었은즉 신을 금이나 은이나 돌에다 사람의 기술과 고안으로 새긴 것들과 같이 여길 것이 아니니라
▶ 신의 소생이 되었은즉 신을 금이나 은이나 돌에다 사람의 기술과 고안으로 새긴 것들과 같이 여길 것이 아니니라 - 바울의 이 말은 스토아 철학(Stoicism)의 범신론적인 의미에서 한 것이 아니다.
스토아 철학에 의하면, 인간은 자연에 의하여 존재할 수밖에 없고, 자기 존재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자연의 본성'을 부여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자연이 인간에게 부여한 자연 그대로의 운명을 아는 사람이 현자(賢者)이고, 현자는 또한 신과 같은 자라고 한다.
이는 자연 그 자체를 신으로 보는 것이고, 근본적으로 성경적 신관, 인간관과는 배치된다. 그런데 바울은 그들의 용어인 '신의 소생'이라는 구절을 사용하여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것이다.
성경적인 인간론의 의미에서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존재이다.
(창 1:26-27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27)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따라서 자연물(금, 은, 돌 따위)로 만들어 놓은 신들은 인간을 창조한 것도 아니고, 인간보다 뛰어난 신적인 존재도 아니라는 것이다. 여기서 사도 바울의 논증의 독특함을 알 수 있는데 사도 바울은 아덴 사람들이 사용하는 말을 사용하면서 그 말을 적절하게 인용하여 참 신이신 하나님을 증거하고 있다.
[행 17:30]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허물치 아니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을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
▶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허물치 아니하셨거니와 - 바울의 설교는 하나님의 구속의 점진적 계시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는 구속의 절정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따라서 그의 설교는 점차적으로 하나님의 명령 선포와 절단에의 촉구로 옮겨가고 있다.
'알지 못하던 시대'란 바울이 이미 루스드라에서 '지나간 세데'(14:16)라고 표현한 말로서 하나님의 계시가 그리스도를 통해 온전히 드러나기 이전에 가리킨다.
'허물치 아니하셨거니와'는 '보지않다', '간과하다'는 뜻이다. 하나님은 인생의 연약함을 긍휼히 여기시며 또 심판보다는 가급적 회개의 때를 기다리는 자비로우신 분이기 때문에,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우상 숭배 행위마저 참고 견디시며 자신을 자연을 통해 계속적으로 계시하셨다.
(14:16 하나님이 지나간 세대에는 모든 족속으로 자기의 길들을 다니게 묵인하셨으나;
롬 3:25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그렇지만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다.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셨고 그가 인류의 죄를 대속하셨고 그 복음의 메시지가 온 세상에 울려퍼지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더 이상 '알지 못하는 신'이 아니다. '알지 못하는 신'은 그 정체가 드러났고 아울러 '알지 못하던 시대'도 끝이 났다.
▶ 회개하라 - 이는 계속적인 명령의 뜻을 내포한다. 이 회개는 삶의 태도의 근본적 변화를 요구하는데 여기서는 아덴 사람들이 우상 숭배를 그치고 만유의 주재이신 하나님을 믿고 섬겨야 한다는 것을 나타낸다. 혹자는 이 구절이 하나님의 용서와 이신득의(以信得義)를 가르치는 바울 사상에 걸맞지 않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바울이 전한 복음에도 회개에 대한 강조점이 여전히 나타난다.
(살전 1:9-10 저희가 우리에 대하여 스스로 고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너희 가운데 들어간 것과 너희가 어떻게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사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며
10)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그의 아들이 하늘로부터 강림하심을 기다린다고 말하니 이는 장래 노하심에서 우리를 건지시는 예수시니라).
[행 17:31]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저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하니라.
▶ 정하신 사람 - 이는 의심의 여지없이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예수께서 자신을 '인자'로서 언급하신 것 같이
(막 14:41 세 번째 오사 저희에게 이르시되 이제는 자고 쉬라 그만이다 때가 왔도다 보라 인자가 죄인의 손에 팔리우느니라;
눅 17:24 번개가 하늘 아래 이 편에서 번뜻하여 하늘 아래 저 편까지 비췸 같이 인자도 자기 날에 그러하리라)
바울도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을 강조한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이시면서 아울러 온전한 인성(人性)을 지니고 세상에 오셨고 인류를 위해 죽고 부활하셨다.
본절에서 심판주를 '사람'이라고 굳이 표현한 것이 다소 어색해 보일 수도 있다. 왜냐하면 심판주란 의례히 초월적 위엄과 권세를 지닌 분으로 묘사되기 때문이다(계18:8). 그러나 이 표현은 후반절의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이란 구절과 연결되면 전혀 어색하지 않다.
즉 본절은 인자의(죽으심과) 부활이 엄연히 역사적 사실이며 이는 곧 예수께서 심판주이심을 뒷받침하는 확실한 증거가 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한편 바울의 설교는 여기서 끝을 맺는다. 이 설교를 두고 한낱 철학적 강변 또는 자신의 지식과 언변에 대한 자랑에 불과하다는 평을 내리거나 그의 아덴 사역이 실패했다는 식으로 이야기할지도 모른다. 사실 바울이 아덴에서 신자들에게 침례를 주었다거나 함께 예배를 드렸다고 하는 기록은 없다.
그러나 바울은 아덴에서 분명한 성과를 보았다.
(34절 몇 사람이 그를 친하여 믿으니 그 중 아레오바고 관원 디오누시오와 다마리라 하는 여자와 또 다른 사람들도 있었더라).
바울은 자신의 화려한 사역을 기대하지 않았다. 그는 항상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최고로 여기며
(빌 3:8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한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그의 모든 노력을 기울인다. 결국 바울의 아덴 사역은 결코 실패한 것이 아니다. 아울러 그의 이 설교는 결코 철학적 강변이 아니다. 이 설교 가운데는 그리스도의 구원의 메시지가 샛별같이 빛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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