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말씀

첫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거듭난 삶 2017. 12. 9. 0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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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기예수의 탄생

 

: [ 2:1-7] 때에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로 호적하라 하였으니

2) 호적은 구레뇨가 수리아 총독이 되었을 때에 처음 것이라

3) 모든 사람이 호적하러 각각 고향으로 돌아가매

4) 요셉도 다윗의 족속이므로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서 유대를 향하여 베들레헴이라 하는 다윗의 동네로

5) 약혼한 마리아와 함께 호적하러 올라가니 마리아가 이미 잉태하였더라

6) 거기 있을 때에 해산할 날이 차서

7) 첫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

 

 

[ 2:1] 때에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로 호적하라 하였으니

 

때에 - 2장을 시작하는 말은 1:80 언급을 염두에 것으로서 새로운 사건의 시작을 알림과 아울러 상황의 변화로 인한 긴장감을 고조시키고 있다.

 

(1:80 아이가 자라며 심령이 강하여지며 이스라엘에게 나타나는 날까지 들에 있으니라)

 

가이사 아구스도(K* A , 카이사로스 아우구스투) - '카이사로스' 하나의 인명일 수도 있고 후대적 용법에서 처럼 칭호일 수도 있다.

 

아구스도는 원래 라틴어인데 헬라어로는 보통 '황제'(세바스토스) 번역되며 여기서는 인명으로 사용되었다.

 

( 25:21 바울은 황제의 판결을 받도록 자기를 지켜 주기를 호소하므로 내가 그를 가이사에게 보내기까지 지켜 두라 명하였노라 하니,

25 내가 살피건대 죽일 죄를 범한 일이 없더이다 그러나 그가 황제에게 상소한 고로 보내기로 결정하였나이다)

 

아구스도 황제의 본명은 가이우스 옥타비우스(Gaius Octavius)이다.

그는 B.C.27-A.D.14까지 로마의 황제로 있었고

외증조부 율리우스 시이저의 이름을 따라

가이우스 율리우스 시이저(Gaius Julius Caesar) 이름을 바꾸게 된다.

 

옥타비아누스는 B.C.27년에 로마 원로원으로부터 '아우구스투스'('위대하고 고귀하며 지극히 숭배받는' 이란 )라는 칭호를 부여받으며 그는 시이저 아우구스투스로 명명되고 최고의 권위자로 활동하게 되었다.

그는 탁월한 통치 능력과 현명하고 훌륭한 정치 행정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점령지에 대한 정책의 일환(一環)으로 점령지의 지방 자치를 부분적으로 허용하기도 하며 점령지의 문화와 종교, 생활 풍습 등을 인정해 주기도 하고 심지어는 나라의 법률까지도 로마법에 비추어 무리가 크게 없는 인정해 주기도 하였다.

 

뿐만 아니라 예술. 문화. 건축 등을 장려하기도 했으며 자신이 또한 위대한 건축가이기도 하였다.

따라서 이러한 그의 정책과 통치로 인해 전에 없이 오랜 세월동안 평화가 지속되었고 그는 '자비로운 정치가', '로마의 대부'(代父)로까지 불려지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최고 승원장(Pontifex Maximus) 또는 대제사장(Highest Priest)이란 칭호를 받아들여 모든 종교의 최고의 위치를 차지했다.

게다가 그는 피살(被殺) 자신의 외증조부 율리우스 시이저를 신격화하여 그를 기념하는 사원을 건립하여 그를 신으로 받들도록 명령하기도 하였다.

 

이렇듯 그는 많은 업적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앞에 많은 죄를 범하기도 하였다.

한편 탁월한 정치 지도자이며 행정가인 그가 자기에게 속한 나라들이 무질서하다는 것을 알고는 로마에 속한 모든 나라들로 하여금 인구 조사를 실시하도록 명령했다.

 

따라서 그는 인구조사의 실시로 말미암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5:2 예언을 성취하는데 일익을 담당하게 되었다(Hendriksen).

 

( 5:2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에 있느니라)

 

(도그마) - 단어의 기본적 의미는 '옳다고 여겨지는 것이며 '원리', '법령' 등의 뜻이다. 동사로는 '법령을 제정하다', '칙령을 공포하다' 등의 의미를 갖고 있다.

여기서는 황제의 포고령을 가리킨다.

 

천하 - 이는 원어상 '거주지' 뜻이다.

고대 학자들은 이방인의 땅과 구별되는 의미로서의 헬라인의 거주지를

단어로써 나타냈으며 후에

'로마제국'이란 의미로 사용되었다.

 

( 11:28 중에 아가보라 하는 사람이 일어나 성령으로 말하되 천하에 흉년이 들리라 하더니 글라우디오 때에 그렇게 되니라;

 

17:6 발견하지 못하매 야손과 형제들을 끌고 읍장들 앞에 가서 소리 질러 이르되 천하를 어지럽게 하던 사람들이 여기도 이르매).

 

호적(戶籍) - 황제의 칙령은 세금 징수를 목적으로 실시하는 인구 조사에 관한 것이었다.

 

'호적' 해당하는 원어 '아포그라포' '등록하다', '기록하다' 말로

 

(2:3 모든 사람이 호적하러 각각 고향으로 돌아가매,

5 약혼한 마리아와 함께 호적하러 올라가니 마리아가 이미 잉태하였더라;

 

12:23 하늘에 기록된 장자들의 모임과 교회와 만민의 심판자이신 하나님과 온전하게 의인의 영들과)

 

세금 징수를 위한 파피루스로 공식기록부를 가리키며,

기록부에는 성명, 직업, 재산, 친척관계를 기록하도록 되어 있다.

 

그러나 어쨌든 인구 조사는 예수의 탄생을 세계 역사의 맥락 속에 넣어

하나님이 그의 섭리를 달성하기 위해서 지상의 통치자를 이용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 2:2] 호적은 구레뇨가 수리아 총독이 되었을 때에 처음 것이라

 

구레뇨 -B.C.12년에 마르마리대(Marmaridae) 군사적으로 장악하여 집정관이 구레뇨는 갈라디아의 남쪽 접경에 있던 산적떼의 후손인,

호모나덴세스(Homonadenses) 족을 정복하였다.

 

그후 그는 A.D. 3-4 가이우스 시이저(Gaius Caesar) 고문역을,

A.D. 6-9년에는 시리아의 황제 파견관을 역임한 A.D. 21년에 죽었다.

 

수리아 - 시리아(수리아, :27) B.C. 64 로마제국에 합병되었다.

A.D. 70까지 유대는 별도로 자체의 행정부를 구성하고 있었지만

시리아에 복속되어 로마의 통치를 받고 있었다.

따라서 당시까지만 해도 시리아는 유대 지역까지 포함된 로마제국의 통치령이었다.

 

것이라 - 1 인구 조사는 흔히 예수의 탄생보다 훨씬 이후인 A.D. 6년경 구레뇨가 통치하던 시기에 실시되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리고 5:37 요세푸스의 저서(Antiq. , 26.1)에도 1 인구조사에 대해서 언급되고 있다.

 

( 5:37 호적할 때에 갈릴리의 유다가 일어나 백성을 꾀어 따르게 하다가 그도 망한즉 따르던 모든 사람들이 흩어졌느니라)

 

따라서 많은 학자들은 누가가 A.D. 6년에 실시되었던 1 인구조사를 이전에 실시되었던 것으로 혼동했다고 추측한다.

 

문제와 관련하여 많은 견해들이 제시되었지만 다음 견해가 가장 설득력이 있다. 첫째, 어떤 사본에는 구레뇨가 ' 번째' '시리이의 총독'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사본의 내용이 애매한 점이 있기는 하지만 구레뇨는 예수가 태어날 당시와 후의 년이 지난 , 차례에 걸쳐 시리아의 총독 직위에 있었다는 단서를 제공해 준다(F.F. Bruce, Quirinius, NBD, p.1069).

 

둘째, ' ' 헬라어 '프로테' 거의 대부분의 경우에 ' 번째의'라고 번역되었지만 단어는 의미보다 '이전의' 또는 '앞의' 뜻할 있다.

 

만약 ' '이라는 단어가 '이전의'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면 본절은 '구레뇨가 시리아의 총독이 되기 이전에'라고 번역해야 것이다.

 

요컨대, 우리는 본문의 기록의 역사성이 대해 회의를 표할 필요가 없다고 본다.

만일 기록이 잘못된 것이라면 초대의 기독교 논박자들이 이를 지적하지 않았을 리가 없으며 또한 당대의 교양있는 사람들에게 보낸 누가의 기록 속에 터무니없는 내용이 수록 되었을 리도 없겠기 때문이다.

 

 

[ 2:3] 모든 사람이 호적하러 각각 고향으로 돌아가매 -

 

인구 조사는 사람의 고향에서 실시되는 것이 관례였다.

이렇게 많은 불편을 감수하며 자기의 고향까지 가서 호적을 하는 것은 유대의 호적제도를 따르는 것이었다.

 

로마의 호적제도는 자신이 현재 거주하고 있는 지역에서 인적 사항만을 기록하는 훨씬 간편하고 손쉬운 방법이었다.

 

그런데도 유대인들이 로마의 손쉬운 호적 제도를 따르지 않고 굳이 번거롭게 많은 어려움을 감수하면서 자신들의 호적제도를 따르는 것은

호적명령이 로마의 명령으로 행해지는 것이지만 자신들의 독자적(獨自的) 방법과 의사에 의해 행해지는 것임을 보여주는 것이며

최소한의 민족적 자존심을 보여주는 것이라 생각된다.

 

한편 모든 사실들을 자세히 미루어 살펴본 누가가 실제로 시행되지 않았던 인구 조사를 강조하여 기록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1:1-4 우리 중에 이루어진 사실에 대하여

2) 처음부터 목격자와 말씀의 일꾼 자들이 전하여 그대로 내력을 저술하려고 붓을 사람이 많은지라

3) 모든 일을 근원부터 자세히 미루어 살핀 나도 데오빌로 각하에게 차례대로 보내는 것이 좋은 알았노니

4) 이는 각하가 알고 있는 바를 확실하게 하려 함이로라)

 

 

[ 2:4] 요셉도 다윗의 족속이므로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서 유대를 향하여 베들레헴이라 하는 다윗의 동네로 -

 

'' 단순한 문자적 의미보다는 포괄적인 의미를 나타내어

'민족', '족속', '나라' 등의 의미를 내포하며,

'족속' 문자 그대로의 뜻을 나타내나

곳에서는 둘이 서로 동의어로 사용된 같다.

 

1:6, 16에서도 요셉이 다윗의 후손임을 분명히 명시하고 있거니와

 

( 1:6 이새는 다윗 왕을 낳으니라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

16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으니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

 

본절에서 다윗의 혹은 다윗의 동네라는 말이 거듭 언급되는 것은,

예수께서 육신상으로 다윗의 후손임을 강조함과 아울러

다윗 왕가의 후손이자 만왕의 왕으로 오실 예수께서 일개 초라한 시골민의 가정에서 태어남을 부각시키려는 의도를 내포한다.

 

삼상 20:6에서 베들레헴은 '다윗 '이라 불리운다.

 

(삼상 20:6 아버지께서 만일 나에 대하여 자세히 묻거든 때에 너는 말하기를 다윗이 자기 성읍 베들레헴으로 급히 가기를 내게 허락하라 간청하였사오니 이는 가족을 위하여 거기서 매년제를 드릴 때가 됨이니이다 하라)

 

다윗은 천년전 이곳에서 태어났고, 그가 양떼를 돌보던 곳도 마을 근처의 언덕이었다.

 

(삼상 17:15 다윗은 사울에게로 왕래하며 베들레헴에서 그의 아버지의 양을 때에)

 

베들레헴은 예루살렘으로부터 7.2Km 떨어졌고

나사렛에서는 144Km 떰어진 곳이며 그것의 이름은 에브라다이고

라헬이 장사된 곳이기도 하다.

 

( 35:19 라헬이 죽으매 에브랏 베들레헴 길에 장사되었고).

 

마을 이름의 뜻은 '떡집'이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곳이 다윗이 자라난 곳이고 5:2 나타난 대로 메시야가 출생한 곳이라는데 있다.

 

( 5:2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에 있느니라)

 

따라서 이야기를 읽은 사람들은 태어난 아기가 다윗성에서 다윗의 후손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말할 있다.

 

 

[ 2:5] 약혼한 마리아와 함께 호적하러 올라가니 마리아가 이미 잉태하였더라

 

약혼한 마리아와 함께 - 누가는 요셉이 어느 시기에 베들레헴을 향해서 출발했으며, 또한 그가 마리아를 동반하였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을 하지 않는다.

 

추측컨대 아마 마리아의 고향에서 마리아에 대한 그릇된

소문이 퍼지고 있었을지도 모르며 소문으로 인해서

마리아는 정신적으로 압박을 받았을 것이므로

요셉은 인구 조사를 기회로 마리아를 데리고 고향을 떠났을 가능성도 있다.

 

요셉은 이미 그녀를 아내로 맞이했다.

 

( 1:24 요셉이 잠에서 깨어 일어나 주의 사자의 분부대로 행하여 그의 아내를 데려왔으나).

 

그러나 그들이 성령으로 잉태한 아이를 낳을 까지는 분명히 약혼 관계에만 머물러 있었다.

 

우리는 여기서 '약혼(정혼)'이라는 말을 유대적 배경에서 이해해야만 한다.

유대적 개념에서

'정혼' 결혼을 의미하고 절차상으로 신부를 신랑 집으로 데려오는 일만 남은 것이다. 혼인서약은 대체로 정혼에 행해졌으며 정혼은 항상 공식적이었다.

 

그리고 이런 일이 있은 후에는 신랑이 그의 신부를 데려가는 일에 있어서

어느 누구의 제지도 받지 않았다.

 

한편 요셉이 나사렛에서 베들레헴까지 여행하는 것은 결코 힘든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해산이 임박한 마리아가 장거리( 144Km, 요단을 우회하여 돌아가는 ) 여행한다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었을 것이다.

이것은 산모와 태아에 치명적인 위험을 있는 일이기도 하다.

 

그리고 당시 로마법에 의하면 여자도 호적해야할 의무가 있었지만 자신이 직접 고향에 가서 호적할 필요는 없었다.

물론 함께 동행하는 것은 세인(世人) 비난을 피하고자 요셉의 배려일 수도 있지만 그보다도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 되어진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우주를 자신의 뜻대로 운행하는 주관자이시기 때문이다.

 

( 136:8-26 해로 낮을 주관하게 하신 이에게 감사하라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9) 달과 별들로 밤을 주관하게 하신 이에게 감사하라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10) 애굽의 장자를 치신 이에게 감사하라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11) 이스라엘을 그들 중에서 인도하여 내신 이에게 감사하라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12) 강한 손과 펴신 팔로 인도하여 내신 이에게 감사하라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13) 홍해를 가르신 이에게 감사하라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14) 이스라엘을 가운데로 통과하게 하신 이에게 감사하라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15) 바로와 그의 군대를 홍해에 엎드러뜨리신 이에게 감사하라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16) 그의 백성을 인도하여 광야를 통과하게 하신 이에게 감사하라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17) 왕들을 치신 이에게 감사하라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18) 유명한 왕들을 죽이신 이에게 감사하라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19) 아모리인의 시혼을 죽이신 이에게 감사하라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20) 바산 옥을 죽이신 이에게 감사하라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21) 그들의 땅을 기업으로 주신 이에게 감사하라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22) 이스라엘에게 기업으로 주신 이에게 감사하라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23) 우리를 비천한 가운데에서도 기억해 주신 이에게 감사하라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24) 우리를 우리의 대적에게서 건지신 이에게 감사하라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25) 모든 육체에게 먹을 것을 주신 이에게 감사하라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26) 하늘의 하나님께 감사하라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 2:6] 거기 있을 때에 해산할 날이 차서 - 표현은 단순히 임신과 출산 사이에 일정한 기간이 지나야만 아이가 태어난다는 의미로 이해되어도 무방하다.

 

임신 자체는 비록 기적적인 방법으로 이루어졌지만 태중(胎中)에서 아기가 자라나는 것은 일반적인 과정에 의했던 것이다.

이는 예수께서 우리와 똑같은 성정(性情) 가지고 똑같은 성장 과정을 거치며 모든 인류를 대속하실 것을 암시하는 것이다.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예수는 우리와 똑같은 출생과 성장과정을 거쳤기에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으셨지만 죄는 없으신 분이다.

 

( 4:15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한편 구절에서 '해산할 ' 현재대로 12 25일인지는 밝히고 있지 않다.

그러나 기독교회에서는 성탄절을 전승에 따라 보통 겨울로 잡는다.

이것이 3세기부터 문제시되어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는 5 20일을 제안했다.

1225일을 성탄일로 지킨 것은 336년부터였다.

 

서방에서 이날을 택한 것은 로마신인 '정의의 태양'(Sol Invictus) 탄생일에 대치한 것이나 동방 교회에서는 주현제 동방의 현자들이 도착했다고 하는 (Epiphania manifestation, 1 6) 예수의 수세를 기념하다가 4세기부터는 예수의 탄생도 연결시켰다.

 

그리고 5세기 중엽부터는 동방 교회도 거의 12 25일을 성탄일로 지켰으나 예루살렘 교회는 549년까지도 1 6일을 크리스마스 날로 지킨다.

 

 

[ 2:7] 첫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

 

첫아들 - '외아들' 아닌 '맏아들'이라는 표현은 마리아가 예수를 낳은 계속해서 자녀들을 낳았음을 암시한다.

 

따라서 마리아가 예수를 낳은 후에 계속해서 동정을 지키며 자녀를 낳지 않았다는 주장은 근거없는 이야기며 이는 마리아에 대한 지나친 의미부여와 경외심에서 나온 이야기라 하겠다.

 

그리고 예수의 여러 형제와 여동생들에 대한 이야기는 신약성경 여러 곳에서 언급되고 있다.

 

(8:19-20 예수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왔으나 무리로 인하여 가까이 하지 못하니

20) 어떤 이가 알리되 당신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당신을 보려고 밖에 있나이다;

 

12:46-47 예수께서 무리에게 말씀하실 때에 그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예수께 말하려고 밖에 섰더니

47) 사람이 예수께 여짜오되 보소서 당신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당신께 말하려고 밖에 있나이다 하니;

 

13:55-56 이는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 어머니는 마리아,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라 하지 않느냐

56) 누이들은 우리와 함께 있지 아니하냐 그런즉 사람의 모든 것이 어디서 났느냐 하고;

 

2:12 후에 예수께서 어머니와 형제들과 제자들과 함께 가버나움으로 내려가셨으나 거기에 여러 계시지는 아니하시니라;

 

7:3 형제들이 예수께 이르되 당신이 행하는 일을 제자들도 보게 여기를 떠나 유대로 가소서,

5 이는 형제들까지도 예수를 믿지 아니함이러라,

10 형제들이 명절에 올라간 후에 자기도 올라가시되 나타내지 않고 은밀히 가시니라;

 

1:14 여자들과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과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쓰더라).

 

사관(舍館)(카탈뤼마) - 단어는 흔히 '여관'(inn)이라고 번역되었다.

 

단어는 최후의 만찬 때에 사용된

 

(22:11 주인에게 이르되 선생님이 네게 하는 말씀이 내가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을 먹을 객실이 어디 있느냐 하시더라 하라)

 

'객실'(guest room) 의미하기도 하는데 22:12에는 객실이 '다락방'으로 언급되었다.

 

(22:12 그리하면 그가 자리를 마련한 다락방을 보이리니 거기서 준비하라 하시니)

 

또한 단어는 군인들의 숙소나 여관을 포함하여 숙박소를 의미하기도 한다.

그러나 선한 사마리아 사람이 강도 만난 사람을 데려갔던 '판도케이온'('주막', 헬라어에서 대체로 여관을 언급할 사용되는 단어)과는 다르다.

 

(10:34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니라).

 

그런데 마리아가 해산할 날이 다가왔을 보잘것없는 가족에게 허락되었던 장소는 가축우리 였다고 누가는 담담하게 표현한다.

 

그곳은 우리에게 전해 내려오는 대로 곳간(cave)이었을 수도 있으며, 또는 집이나 사관의 일부분이었을 수도 있다.

 

구유(파트네) - 신약에서 '파트네' 누가복음에서만 4 나온다.

 

(7 첫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

12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하더니,

16 빨리 가서 마리아와 요셉과 구유에 누인 아기를 찾아서;

 

13:15 주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외식하는 자들아 너희가 각각 안식일에 자기의 소나 나귀를 외양간에서 풀어내어 이끌고 가서 물을 먹이지 아니하느냐).

 

주제는 매우 중요한 것으로,

메시야이신 예수께서 비천한 신분으로 보잘것없이 너무나도 초라하게 세상에 오셨음을 단적으로 말해준다.

 

구유는 세상 구속주의 비천한 탄생을 당시 세계의 주관자인 아구스도의 영광과 대조시키며,

 

(1 때에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로 호적하라 하였으니,

11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그리스도 주시니라,

14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

 

아무데도 머리둘 곳이 없는 하나님의 아들이자 인자이신 예수의 겸손과 고난을 상징한다.

 

(9:58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곳이 없도다 하시고).

 

어쨌든 당시에 사용되었던 구유는 갓난아이를 누이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그리고 마굿간 외에 내어 있는 공간이 없었던 여관 주인은 동정심이 전혀 없어서 그러했다고 보이지 않으며 누가 역시 그러한 각도에서 기술하고 있는 같다(H. Henge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