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족케 함에 대하여
〔누가복음 17:1-10〕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실족하게 하는 것이 없을 수는 없으나 그렇게 하게 하는 자에게는 화로다
2) 그가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를 실족하게 할진대 차라리 연자맷돌이 그 목에 매여 바다에 던져지는 것이 나으리라
3)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만일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경고하고 회개하거든 용서하라
4) 만일 하루에 일곱 번이라도 네게 죄를 짓고 일곱 번 네게 돌아와 내가 회개하노라 하거든 너는 용서하라 하시더라
5) 사도들이 주께 여짜오되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 하니
6) 주께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라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어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
7) 너희 중 누구에게 밭을 갈거나 양을 치거나 하는 종이 있어 밭에서 돌아오면 그더러 곧 와 앉아서 먹으라 말할 자가 있느냐
8) 도리어 그더러 내 먹을 것을 준비하고 띠를 띠고 내가 먹고 마시는 동안에 수종들고 너는 그 후에 먹고 마시라 하지 않겠느냐
9) 명한 대로 하였다고 종에게 감사하겠느냐
10)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
우리는 여기서 다음과 같은 가르침을 받는다.
Ⅰ. "실족케 함"은 "큰 죄"이다.
그리고 우리는 한 사람, 한 사람 이것을 피하고 조심스럽게 주의해야 한다.
(1-2절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실족하게 하는 것이 없을 수는 없으나 그렇게 하게 하는 자에게는 화로다
2) 그가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를 실족하게 할진대 차라리 연자맷돌이 그 목에 매여 바다에 던져지는 것이 나으리라).
사람의 왜곡됨과 비꼬인 성미를 생각할 때 우리는 실족케 하는 것이 필연적임을 깨닫게 된다.
그러나 실족케 하는 일에서까지도 그의 선한 사업을 수행하시며,
악에서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현명하신 계획과 목적을 기대할 수는 있다.
"실족케 하는 일이 없다고 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그것을 적절하게 대비하는 일에 신경을 써야 한다.
"실족케 하는 자에게는 큰 화가 있으리라"(12절).
그의 운명은 어두워질 것이다.
그의 운명은 중죄를 지어 바다에 던지워 질 운명에 처한 죄인의 비참함보다 더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연자 맷돌보다 더 무거운 죄책의 짐 아래 멸망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저주는 다음과 같은 자들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1. 박해자에게,
그들은 그리스도의 "작은 자들 중"의 하나에게라도 말이나 행동으로라도 해를 끼치며,
그것 때문에 해(害)받은 이들은 그리스도를 섬기는 데에 낙심하고, 그 의무를 다함에 용기를 잃는다. 즉 그것 때문에 그리스도를 떠나 표류할 수도 있는 위험에 처한다.
2. 유혹자에게.
그들은 그리스도의 진리와 그 의식을 타락시키고 그래서 "제자들의 마음을 괴롭게 한다." 그들이야말로, "실족케 함을 가져오는" 자들이다.
3. 말로만 그리스도인이란 이름을 달고 추잡한 생활을 하며,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의 손을 약하게 하고, 마음을 슬프게 만드는 사람들에게, 그들을 통해 실족이 온다. 그것은 그들의 죄책과 벌을 조금도 감하거나 경하게 하지 않을 것이다.
Ⅱ. "남이 자기에게 저지른 죄를 용서하는 것"은 하나의 "큰 의무"이다.
그리고 우리 자신이 그러한 죄를 짓지나 않을까를 마음에 새기고 있어야 한다.
(3절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만일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경고하고 회개하거든 용서하라).
본문의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는 말은 두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는
"이 가장 작은 자 중에 하나를 실족케 하지 않도록 조심하라"는 것으로
앞의 구절에서 언급한 자들을 말씀하신 것으로 볼 수 있다.
확실히 교역자들은 교인들을 낙심하게 할 언행을 하지 않도록 주의해야만 한다.
그들은 주의를 게을리 해서는 안 되고 혹 교인들을 낙심시키게 되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운 마음으로 늘 깊이 생각한 후에 말하고 행동해야만 한다.
둘째는
후에 나오는 자신에게 잘못을 범한 형제에게 같이 잘못을 저지르지 말라고 경고로 볼 수 있다.
즉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곧 어떤 해를 입혔거나 재산의 손해를 입혔거든 격노하여 말을 함부로 내뱉거나 거칠게 복수를 선언하지 말라. 이런 때는 특히 혹 실언을 하지나 않을까 하여 조심하라"는 말씀으로 볼 수도 있는 것이다.
좀 더 상세히 고찰해 보자.
1. 사람이 너에게 잘못했을 때에는 그를 경계할 만한 처지라면 경계하라는 말씀이다.
분노는 억지로 참을 것이 아니라 지혜롭게 나타낼 것이다.
그에게 잘못된 점을 말해 주되 어떤 점에서 그가 잘못했으며 너에게 잘못한 일이 무엇임을 말해 줄 것이다.
아무도 네가 그를 오해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어(너는 할 수 있는 대로 이해하려고 힘 쓸 것이다), 네가 그를 오해했다거나 그가 고의로 한 짓이 아니고 단지 실수였다는 것을 깨닫고, 오히려 그를 오해했다는 사실에 대하여 용서를 빌게 될지도 모른다.
* 참조 (수 22:30-31 제사장 비느하스와 그와 함께 한 회중의 지도자들 곧 이스라엘 천천의 수령들이 르우벤 자손과 갓 자손과 므낫세 자손의 말을 듣고 좋게 여긴지라
(수 22:31) 제사장 엘르아살의 아들 비느하스가 르우벤 자손과 갓 자손과 므낫세 자손에게 이르되 우리가 오늘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신 줄을 아노니 이는 너희가 이 죄를 여호와께 범하지 아니하였음이니라 너희가 이제 이스라엘 자손을 여호와의 손에서 건져내었느니라 하고).
2. 그가 잘못을 뉘우쳤을 때는 그를 용서할 것이며,
그와 완전히 화해하라는 말이다. "회개하거든 용서하라."
손상 받은 것을 잊어버리고, 다시는 생각하지 말며, 그것으로 너무 책망하지 말지어다. 그가 뉘우치지 않더라도, 그에게 원한을 품지 말 것이며, 복수할 생각을 하지 말고,
적어도 내가 회개하노라 고도 말하지 않으면, 전과 마찬가지로 자유롭고 친숙하게 지내야만 된다고는 말할 수 없다.
만일 그가 큰 죄를 범했으면 그가 속해 있는 그리스도교 사회에 대한 범죄자로서 엄숙하면서도 온순하게 훈계하고,
그가 자기의 죄를 회개하면 다시 우정으로 친교를 맺을 것이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용서라고 말했다.
(고후 2:7 그런즉 너희는 차라리 그를 용서하고 위로할 것이니 그가 너무 많은 근심에 잠길까 두려워하노라).
3. 사람이 자기의 잘못을 회개하면 그 때마다 몇 번이라도 용서하라는 말이다.
(4절 만일 하루에 일곱 번이라도 네게 죄를 짓고 일곱 번 네게 돌아와 내가 회개하노라 하거든 너는 용서하라 하시더라).
사람이 너무도 조심성이 없거나 너무도 염치가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되더라도 하루에 일곱 번 네게 죄를 짓고, 일곱 번 와서 자기의 잘못을 회개하더라도 그러한 죄를 다시 안 짓겠노라는 약속을 받고, 다시 "너는 용서하라." 잘못을 범하는 것이 인간이다.
다음 사실을 기억하자.
그리스도인은 반드시 관용의 정신을 가져서 모든 사람을 가장 좋은 사람으로 만들기에 힘쓰며, 모든 사람을 안심하고 대하기에 힘쓰며, 사람들의 잘못을 가볍게 보며 사람들을 성나게 하지 말고, 그들로 하여금 자기들도 다른 사람들에게 용서하는 본을 보이기에 힘쓰도록 할 것이다.
Ⅲ. 우리 모두에게 요긴한 것은 믿음이 더 강해지는 것이다.
이 은혜가 자라면 다른 모든 은사도 더해지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교훈을 굳게 믿을수록, 또 그리스도의 은혜를 더 안심하고 의지할수록 모든 일을 믿음으로 더욱 잘해나갈 수 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1. 제자들이 그리스도께 말씀드린 것이 자기들의 믿음을 굳세게 해 줌을 시사한 것이다.
(5절 사도들이 주께 여짜오되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 하니).
제자들은 자기들이 그리스도의 왕국의 국무총리라도 된 듯 했지만 자기들의 믿음이 약하고 부족함을 깨닫고, 그 믿음을 보다 좋게 해 주실 그리스도의 은혜의 필요성을 느끼었다.
그래서 그들은 주님께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 하고 여쭈며, 믿음의 부족함을 완전케하여 줍시사고 간청했다.
곧 미음을 갈망함이 더 강하고, 믿음을 의지함이 더 견고하고 변치 않으며, 믿음의 헌신이 보다 온전하고 확고하며 믿음의 기쁨을 더 누릴 수 있게 해 주시기를 간청했다.
우리가 기억할 것은 우리가 간절히 원할 바는 우리의 믿음이 더해질 것이며 이을 위하여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해야 될 일이다.
어떤 사람은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과실을 용서하는 의무를 강조하셨을 때에 제자들이 주님께
"주여, 우리에게 믿음을 더 하소서.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이런 어려운 의무를 감당할 수 없겠나이다" 하고 기도를 드렸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나님의 용서하시는 자비심을 믿으면 우리가 형제를 용서하는 가장 큰 어려움을 감당할 수 있다.
또 다른 사람들이 이 기도를 드린 것은 다른 경우, 곧 제자들이 이적을 행하는 중에 어려움을 당했을 때로써, 그 간구함을 들으시고 제자들의 믿음이 약함을 꾸짖으셨다고 생각한다.
(마 17:16 내가 주의 제자들에게 데리고 왔으나 능히 고치지 못하더이다).
주님께서 그들을 책망하신 것은 그들이 다른 사람을 고치기보다는 먼저 그들 자신이 고침을 받는 은혜를 위하여 기도해야 할 일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부르짖기를
"주여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 하였다.
2.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에게 참 믿음의 놀라운 능력을 가르쳐 주셨다.
(6절 주께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라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어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다면, 겨자씨처럼 아주 작은 믿음이라도 가지고 있다면 좋았을 것이나 너희 믿음을 도저히 있다고 말할 수조차 없을 정도이다.
혹은 너희가 동물의 정신을 바짝 들게 만드는 겨자처럼 그렇게 다른 모든 은혜에 대해서도 예민하고 적극성을 띠어, 겨자씨와 같은 날카로움을 지니고 있었다면" (겨자씨는 그래서 중풍병에 약으로 쓰인다)
"너희는 지금 너희가 하고 있는 일 이상의 놀라운 일을 능히 할 수 있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너희가 전파하는 말씀을 위하여 하는 일이라면 못할 것이 아무 것도 없을 것이다.
설사 그것이 "나무를" 땅에서 뽑아 "바다에 옮기우는" 일이라 할지라도 그대로 될 것이다.
(마 17:20 이르시되 너희 믿음이 작은 까닭이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에게 믿음이 겨자씨 한 알 만큼만 있어도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겨지라 하면 옮겨질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
"하나님과 함께라면 불가능한 일이 없으며" 또한 "그것을 믿는 자에게도 모든 것이 가능하게 된다.“
Ⅳ. 그리스도의 사업에 있어서 무슨 일을 하든지 아주 겸손해야 한다.
그리스도의 총애를 받을 만하다든지 또는 주님께 빚을 지우고,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제자들은 어느 누구보다도 그리스도를 위하여 많은 일을 했지만 그것으로써 주님을 자기들의 빚장이로 생각하지 않았다.
1.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종이다(사도들과 성직자들은 특별한 종임).
그러므로 주님의 존귀를 위해서는 우리의 최선을 다할 의무가 있다. 우리의 모든 정력과 시간을 주님을 위하여 써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니고, 우리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주님의 뜻에 달려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2. 하나님의 종인 우리는 모든 시간이 맡겨 주신 의무를 감당하는 일로 채워져 있으며, 우리에게 맡겨 주신 일의 종류가 서로 다르므로 우리는 맡겨진 일을 끝을 내고, 다른 일을 맡겨 주시기를 기다릴 것이다.
들에서 밭을 갈거나 가축을 먹이던 종이 밤에 집에 오더라도 역시 할 일이 있다.
식탁에서 수종 들어야 한다.
(7-8절 너희 중 누구에게 밭을 갈거나 양을 치거나 하는 종이 있어 밭에서 돌아오면 그더러 곧 와 앉아서 먹으라 말할 자가 있느냐
8) 도리어 그더러 내 먹을 것을 준비하고 띠를 띠고 내가 먹고 마시는 동안에 수종들고 너는 그 후에 먹고 마시라 하지 않겠느냐).
우리가 종교적 대화의 임무를 띠고 있을 때에 헌신을 하는 일은 면제되는 것이 아니며, 하나님의 사업을 하고 있을 때에는 역시 하나님께서 맡겨 주실 일을 기다리며 계속해서 대기하고 있어야 한다.
3. 여기에서 우리의 주요한 관심사는 우리에게 관련된 의무를 이행하는 일이며, 그것을 우리 주님께 맡겨서 주님께서 언제 또한 어떻게 적당하다고 생각하실 때에 우리에게 위로를 주시도록 할 것이다.
종은 주인이 "와 앉아서 먹으라"고 말할 때를 기다리지 않는다. 그 날에 할 일을 다 끝내면 그 시간이 바로 먹을 때이다.
우리는 우리의 일을 완수하는데 정신을 쓰자. 그리고 그 일을 잘하도록 하자. 그러면 적당한 시간이 되면 상급을 받게 될 것이다.
4. 우리보다 그리스도께서 먼저 섬김을 받으심이 마땅하다.
"내 먹을 것을 예비하고, 그 후에 너는 먹고 마시라."
그리스도인들은 의심해서 말하기를 자기들이 마땅히 드려야 할 그리스도의 사랑의 영광을 주님께 드릴 수 없다고 한다. 왜냐하면 아직도 그 즐거움을 얻지 못했기 때문이라 한다.
그러나 잘못된 생각이다.
그리스도께서 그 영광을 가지시도록 하고, 주님께 찬양을 돌릴 것이다. 그 다음에 사랑의 위로 중에 먹고 마신다. 이러는 중에 잔치가 벌어진다.
5. 그리스도의 종은 주님의 분부를 기다리고 있을 때에 "띠를 띠고,“
헝클어지고 거치장스러운 일을 떠나서 오직 자기의 할 일에만 계속하여 밀고 나가야 한다.
곧 마음의 띠를 띠어야 한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잔치를 준비할 때 곧 주님께서 잡수실 것을 예비할 때에는 주님을 섬기기 위하여 띠를 띠어야 한다.
이것은 종이 할 일이며 그리스도께서도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바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강요하시지는 않는다. 주님은 섬기는 자로서 제자들과 함께 계셨다.
다른 주인들처럼 나라를 취하러 오시지 않았고, 섬김을 받으러 오신 것이 아니라 섬기러 오셨고, 당신의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심을 보여 주려고 오셨다.
6. 그리스도의 종들이 주님을 위하여 한 봉사를 주님의 사례를 받을 만한 일이라고 생각할 수 없다.
"종에게 사례하겠느냐?
주님께서 그 일로 인하여 신세를 지셨다고 생각하실까?
아니다. 결코 아니다."
아무리 선한 일을 우리가 하더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공을 세운 것이 못 된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총을 바라는 것은 우리가 봉사함으로써 하나님이 우리의 빚진 자 되게 한 까닭이 아니라 당신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 친히 빚진 자가 되시겠다고 언약하셨기 때문이다.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께 간구할 일이지 우리의 공로를 내세워서 청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7. 어떤 일을 우리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하든지, 혹 그것이 다른 사람들이 한 일보다 더 많다 하더라도 우리가 의무를 이행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주님께서 명하신 일을 다 했다고 하더라도 여러 가지 일에 있어서 부족한 것뿐이며
의무 이상으로 한 것이 없고,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첫째 되는 큰 계명을 지키는 것뿐이다. 이 계명에 가장 중요한 것이 다 들어 있다.
8. 그리스도의 가장 충성된 종은 가장 훌륭한 봉사를 하고 있을 때라도 자기는 무익한 종이라는 것을 겸손하게 인정해야 한다.
물론 자기에게 주어진 재능을 묻어버리고 아주 흑암 속으로 빠져버리는 그런 무익한 종은 아니지만 그리스도께 대해서는 그의 봉사가 별로 이익을 드리는 것이 못됨을 생각할 때는 무익한 종이라 할 수밖에 없다.
우리의 선함이 하나님께 미칠 수는 없는 것이며, 우리의 의로움이 하나님께 도움이 될 수 없다.
(시 16:2 내가 여호와께 아뢰되 주는 나의 주님이시오니 주 밖에는 나의 복이 없다 하였나이다;
욥 22:2 사람이 어찌 하나님께 유익하게 하겠느냐 지혜로운 자도 자기에게 유익할 따름이니라;
35:7 그대가 의로운들 하나님께 무엇을 드리겠으며 그가 그대의 손에서 무엇을 받으시겠느냐).
그러므로 우리의 봉사가 빚진 자를 만들 수 없다.
하나님은 우리를 필요로 하지 않으시며, 우리의 봉사가 하나님의 완전하심에 보탬을 드릴 수가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을 무익한 종이라 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유익한 일이라 함은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없이도 즐거워하시지만 우리는 하나님이 없이는 즐거울 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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