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리새인과 세리의 비유
성 경: [눅 18:9-14] 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10)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11)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12)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13)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14)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눅 18:9] 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 직접적으로는 예수 당시 도처에서 볼 수 있었던 바리새인들의 완악한 모습을 묘사한 말이다.
즉 당시 대다수 바리새인들은 위선과 교만으로 부장한 채 종교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소외받았던 약자들을 무시하고 정죄하기를 서슴지 않았다.
또 한편으로 이 구절은 바리새인들과 같이 독선적 아집에 사로잡힌 일반 사람들을 지칭하기도 한다.
사람들 중에는 양심이니 진리니 하는 것들을 아예 무시하고 육신의 정욕이 명하는 대로 아무렇게나 살아가는 이들도 있지만,
나름대로 선악간 행위의 기준을 세워놓고 구도자적 삶을 지향하는 소위 종교성이 많은 이들도 있는 것이다.
(행 17:22 바울이 아레오바고 가운데 서서 말하되 아덴 사람들아 너희를 보니 범사에 종교심이 많도다).
이러한 부류의 사람들이 빠지기 쉬운 폐단이 바로 종교적 독선(獨善)이다.
본 구절은 이들의 오류를 두 가지로 지적한다.
(1) 자기 의(義)를 내세움.
이들이 내세우는 자기의(自己義)는 하나님 보시기에 가증스럽다.
왜냐하면 이 세상의 그 누구도 스스로 의를 자랑할 수 없는 죄인들이다.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의로 덧입음으로써만 진정한 의에 이를 수 있기 때문이다.
(롬 3: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이 자명한 사실에도 불구하고 자기의 의를 고집하는 것은 진리에 대한 객관적 열의에서 라기보다는 종교적 인정 욕구에서 비롯된 것이라 하겠다.
(2) 다른 사람을 멸시함.
자기 스스로 의의 수준에 도달했다고 자만하는 자는
그러한 수준에 이르지 못한 사람들을 공공연하게 든 무의식적으로든 경멸하기 쉽다.
그러나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의롭게 된 사람은 겸손하며 타인의 저급한 상황을 멸시하기 보다는 긍휼히 여긴다.
[눅 18:10]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 유대인들은 하루 세 번 곧 오전 9시, 12시, 오후 3시에 기도하는 습관이 있었다.
(행 2:15 때가 제 삼 시니 너희 생각과 같이 이 사람들이 취한 것이 아니라;
3:1 제 구 시 기도 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갈새;
10:9 이튿날 그들이 길을 가다가 그 성에 가까이 갔을 그 때에 베드로가 기도하려고 지붕에 올라가니 그 시각은 제 육 시더라).
성전은 동, 서, 남쪽이 골짜기로 둘러싸인 언덕 위에 자리 잡고 있었는데,
유대인들은 이곳의 유대인의 뜰에서 기도를 하곤 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개인적인 기도를 위해서 편리한 시간을 택해 성전에 올라가기도 했다.
▶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 - 이 비유에 등장하는 두 사람의 뚜렷이 대조되는 신분은 극적(dramatic) 효과를 더해준다.
즉, 바리새인이 당시 유대교의 종교인들을 대표하는 반면,
세리는 당시 천시되던 소위 '죄인'을 대표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극적 대조를 통해 하나님의 판단이 인간적 판단과 얼마나 판이한가를 분명히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눅 18:11]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 서서 따로 기도하여 - 이 간단한 말 속에는 바리새인들의 위선과 교만이 뚜렷이 암시되고 있다.
첫째 그가 '서서' 기도했다는 것은 성전에서 서 있는 자세로 기도하는 하나의 '습관'을 암시한다.
그가 드린 기도는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간절한 영혼의 기도가 아니라,
세끼 밥을 먹듯이 습관에 매인 형식적 기도였으리라는 추측이 간다.
둘째 '따로'라는 말은 바리새주의의 발단은 이교적인 헬레니즘 문화의 침해에 반대하여 경건성을 유지하여 구별된 삶을 형성해 보자는 것이었기 때문에 구별 그 자체가 잘못된 사상은 아니다.
그러나 본래의 그 선한 정신이 스스로만 의롭게 여기는 배타적 독선주의로 탈바꿈한 것이 문제였던 것이다.
이러한 모습은 마 23장과 막 7장에서뿐만 아니라 유대 문학에서 두루 발견된다.
누가의 경우도 여러 곳에서 바리새인들의 터무니없는 적대심에 관해 언급하고 있다.
(5:17 하루는 가르치실 때에 갈릴리의 각 마을과 유대와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새인과 율법교사들이 앉았는데 병을 고치는 주의 능력이 예수와 함께 하더라;
6:2 어떤 바리새인들이 말하되 어찌하여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느냐,
7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고발할 증거를 찾으려 하여 안식일에 병을 고치시는가 엿보니;
7:39 예수를 청한 바리새인이 그것을 보고 마음에 이르되 이 사람이 만일 선지자라면 자기를 만지는 이 여자가 누구며 어떠한 자 곧 죄인인 줄을 알았으리라 하거늘;
11:37-54 예수께서 말씀하실 때에 한 바리새인이 자기와 함께 점심 잡수시기를 청하므로 들어가 앉으셨더니
38) 잡수시기 전에 손 씻지 아니하심을 그 바리새인이 보고 이상히 여기는지라
39) 주께서 이르시되 너희 바리새인은 지금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나 너희 속에는 탐욕과 악독이 가득하도다
40) 어리석은 자들아 겉을 만드신 이가 속도 만들지 아니하셨느냐
41) 그러나 그 안에 있는 것으로 구제하라 그리하면 모든 것이 너희에게 깨끗하리라
42) 화 있을진저 너희 바리새인이여 너희가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의 십일조는 드리되 공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버리는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43) 화 있을진저 너희 바리새인이여 너희가 회당의 높은 자리와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을 기뻐하는도다
44) 화 있을진저 너희여 너희는 평토장한 무덤 같아서 그 위를 밟는 사람이 알지 못하느니라
45) 한 율법교사가 예수께 대답하여 이르되 선생님 이렇게 말씀하시니 우리까지 모욕하심이니이다
46) 이르시되 화 있을진저 또 너희 율법교사여 지기 어려운 짐을 사람에게 지우고 너희는 한 손가락도 이 짐에 대지 않는도다
47) 화 있을진저 너희는 선지자들의 무덤을 만드는도다 그들을 죽인 자도 너희 조상들이로다
48) 이와 같이 그들은 죽이고 너희는 무덤을 만드니 너희가 너희 조상의 행한 일에 증인이 되어 옳게 여기는도다
49) 그러므로 하나님의 지혜가 일렀으되 내가 선지자와 사도들을 그들에게 보내리니 그 중에서 더러는 죽이며 또 박해하리라 하였느니라
50) 창세 이후로 흘린 모든 선지자의 피를 이 세대가 담당하되
51) 곧 아벨의 피로부터 제단과 성전 사이에서 죽임을 당한 사가랴의 피까지 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과연 이 세대가 담당하리라
52) 화 있을진저 너희 율법교사여 너희가 지식의 열쇠를 가져가서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또 들어가고자 하는 자도 막았느니라 하시니라
53) 거기서 나오실 때에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거세게 달려들어 여러 가지 일을 따져 묻고
54) 그 입에서 나오는 말을 책잡고자 하여 노리고 있더라;
15:2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수군거려 이르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
16:14 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하는 자들이라 이 모든 것을 듣고 비웃거늘).
그는 외형적 율법적 죄를 범하지 않는데 대해 감사하는 자랑의 기도를 드렸으며
더욱이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는 율법 준수의 자랑까지도 덧붙였다.
(민 18:21 내가 이스라엘의 십일조를 레위 자손에게 기업으로 다 주어서 그들이 하는 일 곧 회막에서 하는 일을 갚나니;
신 14:23 네 하나님 여호와 앞 곧 여호와께서 그의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에서 네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의 십일조를 먹으며 또 네 소와 양의 처음 난 것을 먹고 네 하나님 여호와 경외하기를 항상 배울 것이니라).
오늘날에도 이 같은 바리새적 교인이나 지도자들은 권력과 사회적 지위, 교회의 권위, 재력에 의해 자신들의 행위를 정당화하며 의로운 체한다.
그러나 하나님과 자신들의 양심, 주위 사람들의 시선은 결코 그들의 불의(不義)를 놓치지 않을 것이다.
(렘 11:20 공의로 판단하시며 사람의 마음을 감찰하시는 만군의 여호와여 나의 원통함을 주께 아뢰었사오니 그들에게 대한 주의 보복을 내가 보리이다 하였더니;
23:24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사람이 내게 보이지 아니하려고 누가 자신을 은밀한 곳에 숨길 수 있겠느냐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는 천지에 충만하지 아니하냐;
암 9:3 갈멜 산 꼭대기에 숨을지라도 내가 거기에서 찾아낼 것이요 내 눈을 피하여 바다 밑에 숨을지라도 내가 거기에서 뱀을 명령하여 물게 할 것이요).
▶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 그는 토색(討索),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않으며 세리와도 같지 않음을 하나님께 감사했다.
즉 자신에게는 불의가 전혀 없으며 깨끗함 뿐임을 자랑했다.
유대 법에 의하면 금식은 1년에 한 번 속죄일에 행하게 되어 있었다.
그런데 특별한 은총을 원하는 자들은 매주 월요일과 목요일에도 금식을 행했으며,
예루살렘에 장이 서는 때 얼굴을 희게 하고 헝클어진 머리에, 구김살이 간 옷을 입고 큰 거리에 나와 자신들의 경건을 자랑하였다.
* 참조 (마 6:16-18 금식할 때에 너희는 외식하는 자들과 같이 슬픈 기색을 보이지 말라 그들은 금식하는 것을 사람에게 보이려고 얼굴을 흉하게 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17) 너는 금식할 때에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으라
18) 이는 금식하는 자로 사람에게 보이지 않고 오직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보이게 하려 함이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이처럼 자신들의 의(義)를 자랑하는 자들은 오히려 의롭지 못한 자들이며 예수와 무관한 자들이다.
왜냐하면 예수께서는 죄인을 부르러 오신 것이지 의인을 부르러 오시지 않았기 때문이다.
(5:32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
[눅 18:12]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 본 구절은 형식적으로는 독립된 문장이지만 내용적으로는 역시 앞 구절의 '당신에게 감사 하나이다'라는 문구에 종속되어 있다.
그의 모든 기도문에 나오는 동사는 '일인칭 단수형'으로, 그의 기도가 자기 의(義)를 내세우는 독선적 아집으로 가득 차 있음을 넌지시 시사한다.
한편 십일조에 관한 성경 최초의 언급은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에게 자기의 전리품 중 1/10을 준 데서 발견된다.
(창 14:20 너희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하매 아브람이 그 얻은 것에서 십분의 일을 멜기세덱에게 주었더라).
그 후 야곱도 소득의 1/10을 하나님께 바치겠다고 약속한 바 있다.
(창 28:22 내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집이 될 것이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의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 하였더라).
하나님은 이렇듯 유래가 깊은 십일조 제도를 출애굽 당시에 보다 체계적으로 설명해 주셨다.
모세의 율법 가운데 십일조에 관한 세부적인 기록은 레 27:30-33;신 12:5-18등에 나온다.
이곳에서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이 거두어 들이는 모든 산물 즉 곡물, 과일, 가축 등에서 1/10을 하나님의 것으로 구분하도록 명했다.
(레 27:30-33 그리고 그 땅의 십분의 일 곧 그 땅의 곡식이나 나무의 열매는 그 십분의 일은 여호와의 것이니 여호와의 성물이라
31) 또 만일 어떤 사람이 그의 십일조를 무르려면 그것에 오분의 일을 더할 것이요
32) 모든 소나 양의 십일조는 목자의 지팡이 아래로 통과하는 것의 열 번째의 것마다 여호와의 성물이 되리라
33) 그 우열을 가리거나 바꾸거나 하지 말라 바꾸면 둘 다 거룩하리니 무르지 못하리라;
신 12:5-18 오직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자기의 이름을 두시려고 너희 모든 지파 중에서 택하신 곳인 그 계실 곳으로 찾아 나아가서
6) 너희의 번제와 너희의 제물과 너희의 십일조와 너희 손의 거제와 너희의 서원제와 낙헌 예물과 너희 소와 양의 처음 난 것들을 너희는 그리로 가져다가 드리고
7) 거기 곧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먹고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의 손으로 수고한 일에 복 주심으로 말미암아 너희와 너희의 가족이 즐거워할지니라
8) 우리가 오늘 여기에서는 각기 소견대로 하였거니와 너희가 거기에서는 그렇게 하지 말지니라
9) 너희가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주시는 안식과 기업에 아직은 이르지 못하였거니와
10) 너희가 요단을 건너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에 거주하게 될 때 또는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너희 주위의 모든 대적을 이기게 하시고 너희에게 안식을 주사 너희를 평안히 거주하게 하실 때에
11) 너희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자기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실 그 곳으로 내가 명령하는 것을 모두 가지고 갈지니 곧 너희의 번제와 너희의 희생과 너희의 십일조와 너희 손의 거제와 너희가 여호와께서 원하시는 모든 아름다운 서원물을 가져가고
12) 너희와 너희의 자녀와 노비와 함께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즐거워할 것이요 네 성중에 있는 레위인과도 그리할지니 레위인은 너희 중에 분깃이나 기업이 없음이니라
13) 너는 삼가서 네게 보이는 아무 곳에서나 번제를 드리지 말고
14) 오직 너희의 한 지파 중에 여호와께서 택하실 그 곳에서 번제를 드리고 또 내가 네게 명령하는 모든 것을 거기서 행할지니라
15) 그러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신 복을 따라 각 성에서 네 마음에 원하는 대로 가축을 잡아 그 고기를 먹을 수 있나니 곧 정한 자나 부정한 자를 막론하고 노루나 사슴을 먹는 것 같이 먹으려니와
16) 오직 그 피는 먹지 말고 물 같이 땅에 쏟을 것이며
17) 너는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의 십일조와 네 소와 양의 처음 난 것과 네 서원을 갚는 예물과 네 낙헌 예물과 네 손의 거제물은 네 각 성에서 먹지 말고
18) 오직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택하실 곳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너는 네 자녀와 노비와 성중에 거주하는 레위인과 함께 그것을 먹고 또 네 손으로 수고한 모든 일로 말미암아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즐거워하되)
그리고 후대에 이르러 유대교의 랍비들은 율법의 문자적 적용에 더욱 철저하기 위해 박하와 회향과 근채에 이르기까지 십일조를 바치는 규정을 만들었다.
(마 23:23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본 구절의 바리새인은 십일조를 철저히 지킨 것을 내세우며 하나님께 보답을 요구하는 듯한 자세를 드러내고 있다.
이는 십일조가 모든 소유의 주인이 하나님이요. 자기는 청지기에 불과함을 고백하는 행위임을 알지 못한 태도이다.
(마 25:14-30 또 어떤 사람이 타국에 갈 때 그 종들을 불러 자기 소유를 맡김과 같으니
15) 각각 그 재능대로 한 사람에게는 금 다섯 달란트를, 한 사람에게는 두 달란트를, 한 사람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고 떠났더니
16) 다섯 달란트 받은 자는 바로 가서 그것으로 장사하여 또 다섯 달란트를 남기고
17) 두 달란트 받은 자도 그같이 하여 또 두 달란트를 남겼으되
18) 한 달란트 받은 자는 가서 땅을 파고 그 주인의 돈을 감추어 두었더니
19) 오랜 후에 그 종들의 주인이 돌아와 그들과 결산할새
20) 다섯 달란트 받았던 자는 다섯 달란트를 더 가지고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내게 다섯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다섯 달란트를 남겼나이다
21) 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하고
22) 두 달란트 받았던 자도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내게 두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두 달란트를 남겼나이다
23) 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하고
24) 한 달란트 받았던 자는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
25) 두려워하여 나가서 당신의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 두었었나이다 보소서 당신의 것을 가지셨나이다
26) 그 주인이 대답하여 이르되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로 네가 알았느냐
27) 그러면 네가 마땅히 내 돈을 취리하는 자들에게나 맡겼다가 내가 돌아와서 내 원금과 이자를 받게 하였을 것이니라 하고
28) 그에게서 그 한 달란트를 빼앗아 열 달란트 가진 자에게 주라
29)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30)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하니라)
요컨대, 십일조는 복을 얻기 위해 하나님께 드리는 조건부적 뇌물이 아니라 택함 받은 자가 마땅히 만물의 창조주이신 하나님께 자발적으로 드려야 하는 신앙의 표시이다.
(욥 1:21 이르되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
롬 11:36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
[눅 18:13]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 멀리 서서 - 바리새파 사람과는 대조적으로 세리는 멀리 아마도 성전 밖 이방인의 뜰에 서서 기도하였을 것이다.
▶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 유대인들이 기도할 때 하늘을 우러러 보는 것은 정상적인 여러 자세 중 하나였다.
(시 123:1 하늘에 계시는 주여 내가 눈을 들어 주께 향하나이다;
막 6:41 예수께서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어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게 하시고 또 물고기 두 마리도 모든 사람에게 나누시매;
7:34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에바다 하시니 이는 열리라는 뜻이라;
요 11:41 돌을 옮겨 놓으니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 보시고 이르시되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17:1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이르시되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
이 세리는 기도의 정상 자세조차도 취하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자신이 죄인 중에 죄인임을 자각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 가슴을 치며 - 이 표현은 정확히 말하자면 죄의 근원지로서의 마음을 치는 깊은 참회와 애통을 나타내는 말이다.
(23:48 이를 구경하러 모인 무리도 그 된 일을 보고 다 가슴을 치며 돌아가고;
마 11:19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말하기를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 지혜는 그 행한 일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
또한 헬라어 동사 '에튀프테'는 '때리다', '치다'의 뜻인 '튀프토'의 미완료형으로 계속해서 치는, 반복적인 행위를 의미한다.
이러한 표현은 그가 세리라는 자기 직업을 통하여 범해온 죄 많은 생활들을 청산할 뿐 아니라 그동안 그가 사람들로부터 착복한 금액에다 율법에 명시된 배상액까지 부가하여 갚고자 하는 굳은 결의가 이 표현 속에 암시되어 있다고 볼 수도 있겠다.
(출 22:1-15 사람이 소나 양을 도둑질하여 잡거나 팔면 그는 소 한 마리에 소 다섯 마리로 갚고 양 한 마리에 양 네 마리로 갚을지니라
2) 도둑이 뚫고 들어오는 것을 보고 그를 쳐죽이면 피 흘린 죄가 없으나
3) 해 돋은 후에는 피 흘린 죄가 있으리라 도둑은 반드시 배상할 것이나 배상할 것이 없으면 그 몸을 팔아 그 도둑질한 것을 배상할 것이요
4) 도둑질한 것이 살아 그의 손에 있으면 소나 나귀나 양을 막론하고 갑절을 배상할지니라
5) 사람이 밭에서나 포도원에서 짐승을 먹이다가 자기의 짐승을 놓아 남의 밭에서 먹게 하면 자기 밭의 가장 좋은 것과 자기 포도원의 가장 좋은 것으로 배상할지니라
6) 불이 나서 가시나무에 댕겨 낟가리나 거두지 못한 곡식이나 밭을 태우면 불 놓은 자가 반드시 배상할지니라
7) 사람이 돈이나 물품을 이웃에게 맡겨 지키게 하였다가 그 이웃 집에서 도둑을 맞았는데 그 도둑이 잡히면 갑절을 배상할 것이요
8) 도둑이 잡히지 아니하면 그 집 주인이 재판장 앞에 가서 자기가 그 이웃의 물품에 손 댄 여부의 조사를 받을 것이며
9) 어떤 잃은 물건 즉 소나 나귀나 양이나 의복이나 또는 다른 잃은 물건에 대하여 어떤 사람이 이르기를 이것이 그것이라 하면 양편이 재판장 앞에 나아갈 것이요 재판장이 죄 있다고 하는 자가 그 상대편에게 갑절을 배상할지니라
10) 사람이 나귀나 소나 양이나 다른 짐승을 이웃에게 맡겨 지키게 하였다가 죽거나 상하거나 끌려가도 본 사람이 없으면
11) 두 사람 사이에 맡은 자가 이웃의 것에 손을 대지 아니하였다고 여호와께 맹세할 것이요 그 임자는 그대로 믿을 것이며 그 사람은 배상하지 아니하려니와
12) 만일 자기에게서 도둑 맞았으면 그 임자에게 배상할 것이며
13) 만일 찢겼으면 그것을 가져다가 증언할 것이요 그 찢긴 것에 대하여 배상하지 아니할지니라
14) 만일 이웃에게 빌려온 것이 그 임자가 함께 있지 아니할 때에 상하거나 죽으면 반드시 배상하려니와
15) 그 임자가 그것과 함께 있었으면 배상하지 아니할지니라 만일 세 낸 것이면 세로 족하니라).
▶ 불쌍히 여기옵소서 - 이는 '진정하옵소서', '분노하지 마옵소서'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이 말 속에는 하나님께 용서를 비는 동시에 자신이 마땅히 받아야 할 형벌이 무엇인지를 잘 알고 있는 세리의 모습이 역력히 나타나 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자기를 가리켜 '많은 죄인들 중의 한 명'이라고 칭하지 않고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고백하였는데
여기에는 하나님의 관대한 처분만을 기다리는 그의 겸손한 태도가 여실히 드러나고 있다.
그러므로 예수께선 바리새인과 세리 중 세리가 더 의롭다는 절대적인 판결을 내리셨는데
(14절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이는 우리들에게 하나님께로부터 사죄의 은총을 받을 수 있는 신앙인의 참된 자세가 어떠한 것인지를 분명히 가르쳐 준다.
(요일 1:8-9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9)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한편 세리의 기도는 바로 시 51편의 서두의 인용이기도 하다.
세리의 기도의 호소의 근거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자비에 둔 것이고 이것 때문에 의롭다고 인정받게 된다.
[눅 18:14]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 의롭다 하심을 받고 - '의롭게 하다'는 뜻의 이 단어는 여기서 완료 수동태 형으로 사용되어 하나님께서 이 세리를 주권적으로 의롭다고 선포하고 확정하셨음을 암시한다.
▶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 인간의 높아지고 낮아짐은 인간 스스로의 능력 유무에 의한 것이 아니고 어디까지나 배후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다.
(롬 9:21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들 권한이 없느냐).
따라서 우리는 겸손히 하나님을 인정하며 그분께 우리의 모든 것을 맡기고 이웃을 존귀히 여기는 삶이야말로 진정으로 자신을 높이는 길임을 한시라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하나님께서 인간의 공로에 따라 역사하신다고 생각했다.
한편 본문의 세리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써만 구원에 이를 수 있음을 믿었으며 또한 하나님은 자기와 같은 죄인에게라도 은혜를 베풀어주시는 자비로운 분이라는 소망을 가졌다.
'오늘의 말씀'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0) | 2018.06.09 |
---|---|
스스로 옳다 생각하고 사람을 멸시하는 어떤 사람에게 (0) | 2018.06.08 |
불의한 재판관과 과부의 호소 (0) | 2018.06.06 |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는 한 재판장이 있는데 (0) | 2018.06.05 |
시체가 있는 곳에 독수리가 모여들리라 (0) | 2018.06.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