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이르시되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하시더라

거듭난 삶 2025. 2. 20. 0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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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순회전도 2

3대 기적

 

누가복음 840-56예수께서 돌아오시매 무리가 환영하니 이는 다 기다렸음이러라

41) 이에 회당장인 야이로라 하는 사람이 와서 예수의 발 아래에 엎드려 자기 집에 오시기를 간구하니

42) 이는 자기에게 열두 살 된 외딸이 있어 죽어감이러라 예수께서 가실 때에 무리가 밀려들더라

43) 이에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는 중에 아무에게도 고침을 받지 못하던 여자가

44) 예수의 뒤로 와서 그의 옷 가에 손을 대니 혈루증이 즉시 그쳤더라

4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게 손을 댄 자가 누구냐 하시니 다 아니라 할 때에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무리가 밀려들어 미나이다

4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게 손을 댄 자가 있도다 이는 내게서 능력이 나간 줄 앎이로다 하신대

47) 여자가 스스로 숨기지 못할 줄 알고 떨며 나아와 엎드리어 그 손 댄 이유와 곧 나은 것을 모든 사람 앞에서 말하니

48) 예수께서 이르시되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하시더라

49) 아직 말씀하실 때에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이 와서 말하되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선생님을 더 괴롭게 하지 마소서 하거늘

50)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그리하면 딸이 구원을 얻으리라 하시고

51) 그 집에 이르러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와 아이의 부모 외에는 함께 들어가기를 허락하지 아니하시니라

52) 모든 사람이 아이를 위하여 울며 통곡하매 예수께서 이르시되 울지 말라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

53) 그들이 그 죽은 것을 아는 고로 비웃더라

54) 예수께서 아이의 손을 잡고 불러 이르시되 아이야 일어나라 하시니

55) 그 영이 돌아와 아이가 곧 일어나거늘 예수께서 먹을 것을 주라 명하시니

56) 그 부모가 놀라는지라 예수께서 경고하사 이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 하시니라.

 

 

() 기적(奇蹟)의 전에 하나의 흥미 있는 기사가 있다.

 

예수께서 제자에게 설교하신 때, 그의 어머니와 형제가, 그를 찾아왔지 만도, 군집 때문에 접근할 수 없어 밖에 서 있었다.

 

마가복음의 기사에 의하면, 그들이 온 것은, 예수가 돌았다고 하여 이를 붙잡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예수는 그들이 온 것을 듣고 대답하여 말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서 이를 행하는 자는, 곧 내 어머니 내 형제이다'(누가복음 8:21)라고.

 

이 말의 해석은 8장의 서두에서 구해야 할 것이다.

 

즉 예수를 따른 그 주위에 있던 12제자, 및 막달라의 마리아, 구사의 아내 요안나, 또 수산나 기타 다수의 부인들을 가리키며, 이를 문 밖에 서 있는 어머니 및 형제에 대비하여, 내 어머니 내 자매는 이들이라고 대답했던 것이리라.

 

신앙의 경험 없는 일본인이 성서를 읽고서 먼저 실족하는 것은 이 말이다.

그들은 말한다.

 

'이는 실로 기괴한 불효 불인정의 말이다'라고.

 

하지만,

일단 그리스도의 정신을 해득한 자는 이 기사를 보고 조금도 놀라지 않을 뿐 아니라,

그것이 깊은 진리임을 아는 것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있는 지심 한 관계는, 혈육의 연고가 아니라,

예수로 말미암아 맺어지는 영적 우리(friendship)이다.

 

누가 가장 잘 나를 이해할 수 있으랴!

그것은 골육 동포가 아니라 도리어 육적으로 아무런 인연 없는 외국인일 경우가 있다.

 

그런 사실은 신앙이 진보됨에 따라 누구나 더욱 더 많이 경험하는 바이다.

그리고 예수는 여기서 이 사실을 솔직하게 이야기하셨던 것이다.

 

천주교(3125역주)에 있어서는, 마리아가 예수의 어머니라는 것으로서 이를 아주 심하게 존숭하는 이가 있다.

예수에게 원하고자 하는 것은 먼저 이것을 마리아에 대하여 원할 것이라고 한다.

Ave Maria (아베 마리아)의 노래 같은 것, 즉 이 신앙에서 나온 것이다.

 

하지만, 같은 천주교에 있어서 성자로 꼽히는 아우구스티누스(4248역주)는 말했다.

 

'마리아는, 예수의 어머니이기 때문에 구원 된 것은 아니다.

마리아 만약 구원된다면, 자기의 아들인 예수를 믿음으로서이다'라고.

 

실로 그대로다. 그리고 이것은, 예수의 형제인 시몬, 야고보, 요셉 등도 역시 동양이다.

골육의 관계는 조금도 구원의 은혜에 균점됨의 이유로는 되지 못한다.

 

사람이 구원되는 것은 전연 그 자신의 신앙에 의하는 것이다.

가령 부모와 자녀(parent and child), 형제, 부처의 관계있다고 해도,

자신이 믿지 않고서 구원될 수는 없다.

 

숙덕(femine virtue)의 성모 마리아라 해도, 아직 예수를 믿지 않는 동안은,

회개한 추업부 마리아보다도 예수에게 먼 것이다.

 

그의 참된 형제는, 아직 믿지 않는 야고보, 시몬이 아니라, 오히려 12사도였던 것이다.

 

혈육의 관계는 영의 관계에 미치지 못한다.

하지만 예수는 이것 때문에 결코 그 어머니 형제를 버리지 않았다.

그의 생애에 있어서의 최후의 염려는 실로 어머니 마리아의 일이었던 것이다.

 

그는 십자가상에서 마리아를 제자 요한에게 부탁했던 것이다.

그렇게 하여 예수는 종생 그 가장으로서의 임무를 다했다.

그리고 마침내 어머니도 또한 그를 알고, 형제 야고보 같은 이는 후년 예루살렘 교회의

주석(a pillar and a foundation stone; mainstay)으로 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다음 기록은 예수의 3대 기적이다.

 

호상(湖上)에서 갑자기 구풍에 조우하여, 배가 막 전복하려는 때,

한마디로서 바람과 파도를 꾸짖어, 이를 평정하게 하신 것은 그 하나이다.

 

대안(對岸)에 상륙한 후, 악귀(기신)들린 극히 광포한 자를 고치시고,

악귀를 돼지에게 들어가게 하신 것은 그 두 번째 이다.

 

그리고 유명한 야이로의 딸을 다시 살리신 것은 그 삼이다.

 

이 셋은, 공관복음서(6rnujs 21역주)의 어디에나 병기되어 있는 것으로서,

이로서 그것이 중요한 3대 기적임을 찰지(thorough understanding)하기에 족하다.

 

, 그 제1은 천연의 제어이다.

그 제2는 영의 제어이다.

그 제3은 생명의 제어이다.

 

갈릴리 호는 해면보다도 더 낮은 움푹 팬 곳(a hollow)에 있어,

때로 돌풍이 물결 따라 내습해 오는 일은 있을 수 있는 일이다.

 

또 소위 악귀(귀신)들린 자란, 과연 어떠한 병인지를 분명히 알 수 없다 해도,

어쨌든 일종의 정신병인 것은 의심 없고, 그리고 그러한 정신병자가 극히 광포한 힘을 휘두르는 것은 또 실제에 있어서 견문하는 바이다.

 

다만 예수께서 그 바람과 파도를 잔잔케 하시고 또 저 악귀(귀신)를 돼지에게로 옮기셨다는데 이르러서는, 사람들은 이것을 믿는다고 공언하는 데는 적지 않게 용기를 필요로 하는 것이다. 그리고 실로 기적을 조소하는 자는 즐겨 이 기사를 지적하는 것이다.

 

하지만 주의해야 할 것은, 예수에게 천연을 제어함의 능력이 있다고 하면,

신약성서 전체의 기사에 모순되지 않는 사실이다.

 

신약성서는 예수께서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할 수 있는 능력이 있음을 인정하고 있다.

(빌립보서 3:21; 고린도전서 15:28; 골로새서 1:17-18; 기타 유사한 말, 여러 곳에 많다).

 

(빌립보서 3:21 그는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시리라;

 

고린도전서 15:28 만물을 그에게 복종하게 하실 때에는 아들 자신도 그 때에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신 이에게 복종하게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만유의 주로서 만유 안에 계시려 하심이라;

 

골로새서 1:17-18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18)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시라 그가 근본이시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이시니 이는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이요)

 

그리스도교의 입장에서 하면, 우주의 중심은 그리스도에게 있다.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창조되고, 그로 말미암아 유지되며, 그로 말미암아 개조된다.

이는 신약성서가 종종 되풀이하는 바이다.

 

예수께서 천연계의 혼란을 진정케 하신 것은, 성서 기자의 입장에서 하면 조금도 모순 하는 일이 없는 기사로서, 또 신약성서를 대체에 있어서 믿는 자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다음으로, 악귀(사귀), 사람에게서 나가 돼지에게 들어갔다고 하는 것은, 아주 기이한 감을 일으키게 한다 해도, 이 사실이 절대로 없었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이것을 발견할 수가 없다.

 

뿐만 아니라, 천연계의 혼란을 진정케 하실 수 있는 이가, 어찌하여 정신계의 파란을 제어할 수 없으랴?

 

근간 심리학의 연구는 여러 가지 놀라운 사실을 보여 준다.

시험 삼아 윌리엄 제임즈의 저서 '종교적 경험의 종류'를 뒤적이면,

거의 추측(사의; 생각)할 수 없는 현상이 심령계에 많음을 알게 되리라.

 

특히 최근 진보를 보이고 있는 동물심리학 같은 것은, 허다한 경우에 있어서 인간의 정신이 동물의 정신을 제어할 수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그렇듯, 사실 그것을 절대로 무근하다고 단정할 만한 이유 없을 뿐 아니라,

유사한 사례는 심령계에 있어서 결코 선소(근소 scanty)하지 않은 것이다.

 

다만 기적의 중요함은, 기적 그것보다도 오히려 그 가르쳐주는바 진리이다.

 

악귀(귀신), 돼지에 들어감의 기적이 가르쳐주는 진리는 무엇인가?

 

말하자면, 예수께서 임하시면 반드시 대 혼란이 야기되는 일 이것이다.

거라사 사람들은 악귀(귀신)들린 자를 무덤 사이에 쫓아 보내고 평안했다.

 

그런데 예수 일단 그 땅에 임하자, 곧 대 혼란 생겨, 사람은 아우성치며 괴로워하고, 수 천 마리의 돼지 곧 많은 재산은 소실되어 사람들은 불안해 견딜 수 없어 마침내 예수 그곳을 떠나기를 구하기에 이르렀다.

 

이는 모두 예수가 가는 곳마다 생겨날 현상의 전형이다.

 

예수 내 마음에 들어올 것인가?

심중의 대 혼란은 따라서 생기는 것이다.

 

예수 내 집에 들어올 것인가?

가정의 대요란(disturbance)은 곧 야기되는 것이다.

 

예수 내 나라에 들어올 것인가?

사회의 대 쟁투는 곧 발생하는 것이다.

 

그리고 불안해 견딜 수 없어져 예수께서 여기를 떠나시기를 구하고, 본래의 평안으로 돌아감과 함께 집이 망한 실례는 결코 적지 않다.

 

가다라(거라사)에 있어서의 하루 저녁의 소요는 이 진리를 가르쳐 주는 것으로 보면, 참으로 귀한 사실이다.

 

갈릴리 호상에 있어서의 풍파의 진정도 또한 우리들의 신앙에 아주 밀접한 관계를 가지는 사실이다.

 

그리스도의 구원은 단지 청결한 도덕과 높은 진리를 주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그가 우리들의 구주이심은, 도덕의 스승이기 때문이 아니라, 절대 한 힘의 부여자이기 때문이다.

 

그는 우리에게 새로운 영을 주심과 동시에 또 이에 알맞은 영체를 주시는 것이다.

 

주 그리스도의 재림, 신자의 부활 그리고 만물의 부흥, 이는 성서가 명시하는 바의 최후의 희망이다.

 

인류의 이상인 영원한 평화는 이에 이르러 비로소 실현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결코 인류의 진화에 의하는 것은 아니다.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능력을 가지신 그리스도께서, 몸소 내려오셔서 새로운 조화를 행하시는 것이다.

 

그에게 우주를 지배하심의 능력 없고서는 인류 전체의 희망은 헛되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면 갈릴리 호상의 풍파를 질타(scolding)하는 일 같은 소() 기적력(奇蹟歷)을 인정치 못하고서, 어떻게 하여 그로 말미암는 최대 희망을 가질 수 있는가?

 

이 한 가지 사실을 부정하는 것은, 드디어 성서 전체를 파괴케 하는 일이 된다.

 

적어도 성서에 기초한 그리스도교적 의식을 가지고서 하는 자는, 누구나 단순히 이것을 믿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우리의 나라는 하늘에 있다.

우리들은 구주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곳에서 오심을 대망 한다.

그는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시킬 수 있는 능력에 의해,

우리의 비천한 몸을 변화시켜,

그 영광의 몸과 같은 모양이 되게 하실 것이다'(빌립보서 3:20-21일역)라고 있음과 같다.

 

기적 없는 그리스도는 약한 그리스도이다.

우리들은 힘 있는 강한 구원자를 요구하는 것이다. (513, 등정무필기)

 

 

(19176'성서지연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