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후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연고로 미련하되 너희는 그리스도 안에서 지혜롭고

거듭난 삶 2025. 10. 1. 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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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만함에 대한 책망 2

 

성 경: [고전 4:8-13] 너희가 이미 배부르며 이미 부요하며 우리 없이 왕 노릇 하였도다 우리가 너희와 함께 왕 노릇 하기 위하여 참으로 너희의 왕 노릇 하기를 원하노라

9) 내가 생각건대 하나님이 사도인 우리를 죽이기로 작정한 자 같이 미말에 두셨으매 우리는 세계 곧 천사와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노라

10) 우리는 그리스도의 연고로 미련하되 너희는 그리스도 안에서 지혜롭고 우리는 약하되 너희는 강하고 너희는 존귀하되 우리는 비천하여

11) 바로 이 시간까지 우리가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맞으며 정처가 없고

12) 또 수고하여 친히 손으로 일을 하며 후욕을 당한즉 축복하고 핍박을 당한즉 참고

13) 비방을 당한즉 권면하니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끼 같이 되었도다.

 

 

 

[고전 4:8] 너희가 이미 배부르며 이미 부요하며 우리 없이 왕 노릇 하였도다 우리가 너희와 함께 왕 노릇 하기 위하여 참으로 너희의 왕 노릇 하기를 원하노라

 

너희가 이미 배부르며 이미 부요하며 우리 없이 왕 노릇하였도다 - 본절은 고린도교인들의 오만 불손한 행동들에 대한 야유를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일 수도 있고, 실제적인 그들의 삶을 묘사한 내용일 수도 있다.

 

7절에서의 질문들은 '너희가 정말 그러하냐?'는 반어적인 표현임에 틀림없으나 본절을 역설적인 표현으로 취급하기에는 다소 어려움이 있다. 실제로 그들 삶은 모든 면에 있어서 풍요로움을 경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1:5 이는 너희가 그의 안에서 모든 일 곧 모든 구변과 모든 지식에 풍족하므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풍요는 감사와 찬양으로 돌려지지 아니하고 교만의 근거로 사용되었다는 것에 문제가 있다.

 

특별히 주목해야 될 것은 '배부르며', '부요하며', '왕 노릇하였다' 등의 부정 과거 동사가 종말론적인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이다.(Barrett).

 

그들은 완성될 그리스도의 왕국을 바라보면서 긴장을 가지고 죄악의 요소들과 싸워가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풍요(豊饒)와 배부름 속에서 즉 영적 교만 속에서 스스로 만족하는 상태에 빠졌고 현재도 계속 빠져 있음을 보여 준다.

 

그리고 '우리 없이 왕노릇 하였다'는 구절은 무슨 뜻인가?

 

이 말은 고린도 교인들이 지니게 된 영적 지식이 바울과 같은 사도들의 가르침에 기인한 것인데 이제는 그러한 사도들이 없이도 그들이 모든 영적인 일을 분별할 수 있는 것처럼 행세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Harris).

 

우리가 너희와 함께 왕 노릇 하기 위하여 참으로 너희의 왕 노릇 하기를 원하노라 -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이 자신들을 제외하고 허황된 종말론적 사고 속에서 왕 노릇하려 할 것이 아니라, 참된 그리스도의 왕국을 바라보는 미래 지향적인 시각 속에서 함께 왕 노릇하기를 간구한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그릇된 종말론적 시각을 수정하고, 장차 올 세상에서 왕 노릇할 것을 권고하고 있다. 그러므로 고린도 교인들은 자신들의 교만 속에서 만들어 놓은 스스로의 왕 노릇을 포기해야 한다. 그들이 스스로 만들어낸 종말은 아직 완성될 수 없는 것으로서 그리스도의 재림 때까지 유보되어 있다. 따라서 그들의 부요와 배부름은 자신의 곤고와 가련한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 어리석은 교만 속에서 만들어진 거짓 왕 노릇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3:17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

 

이제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믿음으로 행하는 것과,

 

(고후 5:7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하지 아니함이로라)

 

어떤 불의한 환경 속에서도 자만하지 않는 겸손을 찾는 일뿐이다.

 

 

[고전 4:9] 내가 생각건대 하나님이 사도인 우리를 죽이기로 작정한 자 같이 미말에 두셨으매 우리는 세계 곧 천사와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노라

 

하나님이 사도인 우리를 죽이기로 작정한 자 같이 미말(微末)에 두셨으매 우리는 세계 곧 천사와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노라 -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의 방종과 안일을 일깨우기 위해 자신을 포함한 사도들이 어떠한 고난 가운데서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였던가 하는 사실을 회상한다.

 

'미말'에 두었다는 말은 다스리는 자와 거리가 먼 인생에 있어서 가장 낮은 자리에 처해 있는 비천한 자들의 모습을 연상시켜 준다.

 

그리고 '구경거리''극장'과 같이 구경거리가 있는 장소를 뜻하는 말로서,

 

(19:29-31 온 성이 요란하여 바울과 같이 다니는 마게도냐 사람 가이오와 아리스다고를 잡아가지고 일제히 연극장으로 달려들어 가는지라

30) 바울이 백성 가운데로 들어가고자 하나 제자들이 말리고

31) 또 아시아 관원 중에 바울의 친구 된 어떤 이들이 그에게 통지하여 연극장에 들어가지 말라 권하더라)

 

당시 원형 경기장(Colosseum)에서 맹수들에게 찢겨 죽어간 고난의 삶을 암시한다.

 

(8:1 사울이 그의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기더라 그 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핍박이 나서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

 

그들은 죽기로 작정되어 십자가 위에서 구속을 완성하신 그리스도의 삶을 본받아 시대의 고난 앞에서 주의 나라를 위해 용감하게 순교의 삶을 살았다.

바울은 자신을 그 순교 대열에 내어 놓음으로써 고린도 교인들에게 항상 사랑과 열심을 나타내었음을 상기시키면서 그들의 허세를 경고하고 있다.

 

 

[고전 4:10] 우리는 그리스도의 연고로 미련하되 너희는 그리스도 안에서 지혜롭고 우리는 약하되 너희는 강하고 너희는 존귀하되 우리는 비천하여

 

우리는 그리스도의 연고로 미련하되 너희는 그리스도 안에서 지혜롭고 - 이런 식의 반어적인 대구는 본절에서 세 번이나 반복되고 있다.

 

바울은 자신의 '미련함', '약함', '비천함'을 나열함으로써 앞절에서 말한 구경거리가 구체적으로 자신들에게 어떻게 나타났는가를 설명하려 한다.

 

그들도 '그리스도의 연고로' 바보가 되었으나, 고린도 교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여전히 세상 지혜와 경험을 소유함으로 마치 자기들만 지혜로운 자들인 것처럼 되었다는 뜻이다.

 

여기서 '그리스도의 연고로'라는 말은 '그리스도 때문에', '그리스도를 위하여'라는 말이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교제함으로'라는 뜻이다.

 

사도들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스스로 세상 지혜에 대하여 무지(無知)한 자들이 되었으며,

 

(1:17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심은 침례를 주게 하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복음을 전케 하려 하심이니 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21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3:18 아무도 자기를 속이지 말라 너희 중에 누구든지 이 세상에서 지혜 있는 줄로 생각하거든 미련한 자가 되어라 그리하여야 지혜로운 자가 되리라)

 

이 세상에서 가장 약하고 비천한 자같이 매 맞으며 핍박을 당하는 자(11,12)가 되었다.

 

(11-12 바로 이 시간까지 우리가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맞으며 정처가 없고

12) 또 수고하여 친히 손으로 일을 하며 후욕을 당한즉 축복하고 핍박을 당한즉 참고)

 

그러나 이에 반해 고린도 교인들은, 그리스도를 믿는 까닭에 지혜롭고 강하며 존귀한 자가 되었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 말은 굉장한 역설(paradox)이다. 왜냐하면 고린도 교인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장성한 분량에까지 이르지 못하였으면서도,

 

(3:1-2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2)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치 못하였음이거니와 지금도 못하리라)

 

서로를 판단하며 사도들 없이 왕 노릇하기를 서슴지 않는 것을 신랄하게 책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도들이 '그리스도의 연고로' 미련해지고, 약하고, 비천해진 것은, 인간의 약함이 오히려 하나님의 능력이 된다는 사실을 알았으며,

 

(고후 12:9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또한 영광의 기준이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았기에 불의한 영광과 세속적 지혜를 비교함에 있어서 자신을 과감하게 낮출 수 있었음을 의미한다.

요컨대 바울은 하나님의 지혜를 멸시하는 인간의 지혜를 고발함으로써, 고린도 교인들의 교만이 정당화될 수 없다는 사실을 지적한 것이다.

 

 

[고전 4:11] 바로 이 시간까지 우리가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맞으며 정처가 없고 -

위에 나타난 사도들의 목마름과 헐벗음, 매 맞음은 고린도 교인들의 부요와 대조를 이루고 있다.

 

한쪽은 복음이라는 이름으로 이미 배부름과 부요속에서 왕노릇하고 있으며, 또 다른 한쪽은 복음을 인하여 고난과 굶주림에서 허덕이고 있다면 참으로 모순된 현상(결과)이 아닐 수 없다.

 

특별히 고린도 교인들을 복음으로 가르친 사도들의 형편이 이러하다면 그들의 부요와 배부름이란 비정상적인 것이 아닐 수 없다.

그러므로 바울은 복음의 현상에서 실제적으로 겪은 고난을 구체적으로 하나하나 서술함으로써 그 의미를 더 강조하려 한다.

주리고 목마르고 헐벗은 것과는 달리, 매 맞는 것은 외부적인 힘에 의한 고난으로서 이러한 용어는 노예나 범죄자들에게 행하는 가혹한 행위를 뜻할 때 사용된 것이다.

 

(14:19 유대인들이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와서 무리를 초인하여 돌로 바울을 쳐서 죽은 줄로 알고 성 밖에 끌어 내치니라)

 

그들은 신체적 학대를 받았을 뿐만 아니라 정신적 고난도 동시에 받았다.

 

유대인의 신분을 포기하고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려 하다가 동족인 유대인으로부터 박해를 받게 될 때, 그가 가졌던 정신적 외로움은 컸을 것이며, 특별히 '바로 이 시간까지'라는 표현 속에 나타난 바와 같이 그리스도를 위하여 당하는 사도들의 고난은 그때까지도 계속되고 있었던 사실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바울은 이방인인 고린도 교인들로부터 까지 외면을 당하므로, 그의 고통이 더욱 심했음을 상기시킴과 동시에 그들의 자기도취와 어리석은 영적 교만을 책망하고 있다.

 

(고후 11:26 누가 약하면 내가 약하지 아니하며 누가 실족하게 되면 내가 애타하지 않더냐).

 

 

[고전 4:12] 또 수고하여 친히 손으로 일을 하며 후욕을 당한즉 축복하고 핍박을 당한즉 참고

 

수고하여 친히 손으로 일을 하며 - '수고하여'는 바울이 설교하거나 교회를 관리하는 일들을 시사할 때 자주 사용되었던 단어이며,

 

(15:10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16:16 이 같은 자들과 또 함께 일하며 수고하는 모든 자에게 복종하라;

 

4:11 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두려워하노라;

 

1:29 이를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

 

살전 5:12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에게 구하노니 너희 가운데서 수고하고 주 안에서 너희를 다스리며 권하는 자들을 너희가 알고)

 

'일을 하며'는 육체적 노동을 의미하는 단어이다.

 

이들은 서로 중복되어 있으므로 노동을 강조하는 뜻으로 해석할 수도 있겠으나 본절에서는 교회를 돌보는 일과 육체적 노동을 각기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다시 말해서 바울은 교회를 돌보는 일에도 열심을 다 했으며 자신의 생계를 위한 육체적 노동에도 열심을 다 했다는 뜻이다.

 

그는 자신에 의하여 개종한 사람들에게 생계를 의존하지 아니하고 스스로 직업을 가짐으로써 생활을 유지해 나갔다.

 

(18:3 업이 같으므로 함께 거하여 일을 하니 그 업은 장막을 만드는 것이더라;

 

살후 3:9 우리에게 권리가 없는 것이 아니요 오직 스스로 너희에게 본을 주어 우리를 본받게 하려 함이니라)

 

즉 성도들에게 누를 끼치지 않기 위하여 자신의 쓸 것을 벌어 가면서 전도를 하였다는 뜻으로,

 

(살전 2:9 형제들아 우리의 수고와 애쓴 것을 너희가 기억하리니 너희 아무에게도 누를 끼치지 아니하려고 밤과 낮으로 일하면서 너희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였노라)

 

손수 천막을 만드는 일을 하며 자신의 생활비와 전도 활동에 필요한 경비를 충당(充當)했음을 가리킨다.

 

 

[고전 4:13] 비방을 당한즉 권면하니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끼 같이 되었도다.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끼 - 본문은 앞에서 지금까지 서술해 온 고난의 역사를 결론적으로 정리한다. 그들은 가장 비천하고 초라한 사람이 됨으로써 십자가의 충실한 종이 될 수 있었다. 혹자들은 'περικάθαρμα 페리카다르마'('더러운 것')라는 단어 속에서 희생의 개념을 찾으려 한다.

 

다시 말해서 '페리카다르마타'는 청소를 깨끗이 한 후에 버리게 되는 오물을 의미하는데, 바울은 자신이 바로 이 오물이 됨으로써 다른 사람들이나 세상을 깨끗게 하는 희생물이 되었다는 것이다.

 

비록 이 단어는 종교적 정화를 나타내는 속죄양의 개념을 선명하게 나타내지는 않지만, 공동체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며 헌신 했다는 의미는 충분히 전달한다.

 

그리고 '만물의 찌끼'에서 '찌끼'는 물로 닦아내고 문지르면 없어지는 옷이나, 물건, 사람 몸의 때(dirt)를 가리킨다.

 

따라서 바울이 그리스도를 위하여 당한 사도들의 고난을 언급하면서 이런 말을 한 것은 세상 사람들이 바울과 그의 동역자들을 얼마나 하찮은 것으로 여기고 모욕하며 배척했는가 하는 것을 정확히 나타내 준다.

 

그들은 이 지상의 모든 것들로 부터 소외된 찌꺼기와 폐물이 되었지만, 오히려 그것은 그들의 소명을 더욱 선명하게 나타내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1:24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