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친 상간의 죄 2
[고린도 교회 내의 성적 부도덕]
성 경: [고전 5:5-8] 이런 자를 사단에게 내어주었으니 이는 육신은 멸하고 영은 주 예수의 날에 구원 얻게 하려 함이라
6) 너희의 자랑하는 것이 옳지 아니하도다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지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7)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어 버리라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이 되셨느니라
8) 이러므로 우리가 명절을 지키되 묵은 누룩도 말고 괴악하고 악독한 누룩도 말고 오직 순전함과 진실함의 누룩 없는 떡으로 하자.
[고전 5:5] 이런 자를 사단에게 내어주었으니 이는 육신은 멸하고 영은 주 예수의 날에 구원 얻게 하려 함이라
▶ 사단에게 내어 주었으니 - 본절은 3절의 '판단하였노라'와 연결된 것으로서 연결의 엄숙한 조치를 가리킨다.(Deissmann).
다이스만은 '내어주다'(παραδίδωμι 파라디도미)라는 단어를 이교도의 저주 의식에서 유래한 말이라고 주장하여 사단에게 내어주는 행위가 저주의 선언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내어주다'라는 말을 꼭 이방인의 저주 의식에서 유래된 단어라고 주장할 수만은 없다. 바울은 이 단어를 범죄자들에 대한 최종적인 선언으로서 선포하고 있는 것이다.(Lenski)
따라서 바울은 교회가 책임있는 거룩한 공동체로서 그러한 자들을 출교시킬 것을 권고하였다.
(13절 외인들은 하나님이 판단하시려니와 이 악한 사람은 너희 중에서 내어 쫓으라)
이러한 표현은 딤전 1:20에도 나타나는데,
(딤전 1:20 그 가운데 후메내오와 알렉산더가 있으니 내가 사단에게 내어준 것은 저희로 징계를 받아 훼방하지 말게 하려 함이니라)
그들의 출교는 일차적으로 그들의 죄악을 심판하는 것이지만, 그것은 또한 다른 성도들을 보호한다는 의미를 가진다.
고린도 교회의 순결한 영혼들을 훼방하지 못하도록, 교회로부터 분리하는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한편 우리는 본절에서 중요한 하나의 원리를 발견하는데, 그것은 초대교회 성도들이 교회는 그리스도의 다스림과 보호하심 아래 머물러 있는 반면, 교회 밖은 그리스도의 지배하심에서 떠난 사단의 영역이라고 생각하였다는 것이다.(Calvin).
따라서 출교는 사단에게 내어주는 멸망의 극단적인 조치로서, 그들에게 있어서는 제일 큰 벌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토록 극단적인 조치가 취해질 수밖에 없었던 것은, 세상과 구별된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는 그들 가운데 있는 음행이 얼마나 심각한 죄악이라는 것을 반영해 준다.
▶ 육신은 멸하고 영은 주 예수의 날에 구원 얻게 하려 함이라 - 이 구절은 해석상 어려운 문제를 안고 있다.
유대교에서는 육체의 죽음을, 속죄받지 못한 죄들을 속죄하는 수단으로 취급하기도 하였으나 본절에서 이와 같은 원리를 적용하는 것은 무리가 따른다.
다시 말해서 육신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영혼이 구원받는다는 견해는 성립될 수 없다는 뜻이다.
성경에는 영과 육이 따로 분리되어 구원받거나 멸망받는 일에 대하여 전혀 말하지 않는다. 그것들은 둘 다 구원받든가 둘 다 멸망하든가 해야한다.(Lenski).
특히 바울은 다른 모든 구절에서 속죄는 육신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본절의 육신의 멸망과 영의 구원은 어떻게 조화를 이룰 수 있는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칼빈(Calvin)은 전반부에 등장하는 '내어준다'라는 말의 법정적, 선언적 의미를 강조한다.
다시 말해서 사단에게 내어주는 행위는 일시적(一時的)인 것으로서 궁극적인 심판과 구원에 선행하는 임시 조치라는 뜻이다.
음행한 자들을 사단에게 내어주는 교회의 심판은 영원한 것이 아니라 일시적인 것이기 때문에, 궁극적이며 영원한 그리스도의 심판에 의하여 그의 운명은 변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참된 사랑의 원리인 징계를 나타냄으로써 하나님의 사랑이 다시 그들에게 미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야 하며, 또한 올바른 징계를 행함으로 죄인들이 회개하고 돌아올 수 있도록 그들을 도와야 한다.
한편 바울은 '주 예수의 날'이라는 구절을 첨가함으로써 그 징계받은 죄인들을 주의 백성들 가운데서 다시 볼 수 있기를 기대하고 있다.
따라서 본절에서 범죄자에 대한 징계의 목적을 살펴볼 수 있다.
즉 징계는 범죄한 영혼에 대한 최종적인 심판이나 유기가 아니라, 회개와 돌이킴을 위한 일시적 고난이며 구원을 전제로 하는 하나님의 사랑의 배려이다.
본절은 특히,
(1) 범죄자를 그대로 방치하는 행위는 사랑이 아니라 무관심의 소치로서 그 사람을 멸망에 빠뜨리며 다른 사람들까지 함께 타락케 만드는 범죄라는 사실과
(2) 참된 징계의 정신은 사랑이라는 점을 극명하게 교훈해 준다.
[고전 5:6] 너희의 자랑하는 것이 옳지 아니하도다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지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 너희의 자랑하는 것이 옳지 아니하도다 - '자랑하다'는 자랑하는 표면적 행위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자랑하는 내용을 의미한다.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향하여 '자랑할 것이 없다'라고 말한 것은 단순히 그들 교회가 분열과 음행으로 가득 찬 교회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는 그들이 하나님의 은사를 가졌으며 하나님의 사랑을 입었음에도, 그 사랑과 은사를 올바르게 사용하지 못하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그들이 은사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은사를 죄악을 묵인하는 곳에 사용하였으며, 또한 하나님의 사랑을 곡해하여 죄악을 용납하고 그들과 더불어 죄악에 빠지는 것에 사용하였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죄악의 행위를 묵인하는 것이 그들의 자랑이 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L. Morris).
▶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지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 누룩은
(1) 그리스도의 복음,
(마 13:33 또 비유로 말씀하시되 천국은 마치 여자가 가루 서 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
눅 13:21 마치 여자가 가루 서 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 하셨더라)
(2) 죄를 의미할 때도 사용되었다.
(출 12:15 너희는 칠 일 동안 무교병을 먹을지니 그 첫날에 누룩을 너희 집에서 제하라 무릇 첫날부터 칠일까지 유교병을 먹는 자는 이스라엘에서 끊쳐지리라;
갈 5:9 적은 누룩이 온 덩이에 퍼지느니라)
여기서는 죄악을 상징하는 말로 사용되었다.
본문의 상징적인 표현을 통해 바울은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은, 누룩, 즉 죄악으로부터 구속함을 받은 새로운 존재임과 죄악의 파급적인 영향력으로부터 교회를 보호하기 위해서는 그 모양이라도 버려야 할 것을 특별히 강조하고 있다.
(살전 5:22 악은 모든 모양이라도 버리라)
즉 바울은 그들의 자만이 결국 어떠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는가에 대하여 '누룩'이라는 하나의 실례를 들어 증명한다.
누룩은 아주 작은 미량의 효소로 그보다 몇 배나 더 큰 반죽 덩어리를 발효시키는 능력을 가지고 있으며, 시간이 지날수록 그 효력은 더욱 왕성해지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
교회 내의 범법자는 처음에는 그 이웃을 감염시키지만, 결과적으로는 교회 전체를 부패시키는 엄청난 결과를 초래하게 될 것이다.
(갈 5:9 하나님이 우리를 세우심은 노하심에 이르게 하심이 아니요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하신 것이라)
고린도 교인들은 자신들의 지혜와 은사에 비하여 악의 요소인 누룩이 작아 보였기에 자만할 수 있었는지 모르지만, 그들 앞에 닥친 위협은 결코 작은 것만은 아니었다.
이제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서로의 지혜를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악으로부터 교회의 순결성(純潔性)을 유지하는 일이다.
[고전 5:7]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어 버리라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이 되셨느니라
▶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 하나님의 백성은 이미 죄로부터 해방된 사람들이며,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나기 전의 타락한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새 생명을 소유한 사람들이다.
특별히 바울은 '누룩 없는 자이어야 한다'는 표현을 하지 않고 '누룩 없는 자'라고 선언하고 있다.
그의 표현은 그들이 더 이상 죄의 지배를 받지 아니할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존재 자체가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음을 강조한다.
(고후 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그러므로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해야만 하는 신분임을 상기시킨다.
(4:17 이를 인하여 내가 주 안에서 내 사랑하고 신실한 아들 디모데를 너희에게 보내었노니 저가 너희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행사 곧 내가 각처 교회에서 가르치는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만약 그들이 아직 거듭나지 못한 자들이었다면, 바울은 그들을 향하여 묵은 누룩을 제거하라고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누룩없는 상태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실제적인 상태로서 그들이 다시 묵은 누룩으로 돌아갈 수 없는 신분임을 강조한다.
▶ 그리스도께서 희생이 되셨느니라 - 하반절은 헬라어 원문에서 'γάρ 가르'로 시작하는데 '왜냐하면'의 뜻을 가진 '가르'는 왜 묵은 누룩을 버려야만 하는 것인가 하는 문제와 그들이 어떻게 누룩 없는 자가 되었는가 하는 이유를 암시한다.
한 마디로 요약하면 그리스도께서 희생양이 되셔서 그들의 백성의 죄를 다 도말하셨기 때문이라는 주장이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그들을 멸망으로부터 이끌어 내었으며, 또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세워 주셨다.
바울은 누룩으로 시작된 비유를 유월절의 무교병과 유월절 어린 양이라는 또 다른 비유의 의미에 연결시키면서,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성취된 무교병에 참여한 자들은 더 이상 누룩있는 떡을 먹지 않는다는 것을 설명하고 있다.(Lenski).
[고전 5:8] 이러므로 우리가 명절을 지키되 묵은 누룩도 말고 괴악하고 악독한 누룩도 말고 오직 순전함과 진실함의 누룩 없는 떡으로 하자. -
칼빈(Calvin)은 이 구절을 '영적(靈的)인 유월절을 지키자'라는 의미로 해석한다.
왜냐하면 당시의 그리스도인들은 이미 새로운 유월절의 개념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예수님의 잡히시기 전날 밤에 만찬에서 떡을 떼시고 포도주를 나누신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었다.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먹고 마시는 자는 다시 범죄 할 수 없는 것과 같이, 새로운 명절에 참여한 자들은 옛 습관의 죄악된 누룩을 가지고 새 덩어리에 참여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이제 새 명절을 지키고자 하는 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누룩이 아니라, 순전함과 진실함이라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특징적인 생활이다.
한편 '순전함'은 동기의 순수함을 나타내고, '진실함'은 행동의 순수함을 나타낸다.
새로운 명절은 더 이상 종교적 의식과 시간과 장소에 구애받지 않는다.
누룩없는 새 명절은 모든 삶의 영역에서 거룩한 삶으로 드려져야 할, 성도의 순결한 삶을 의미하는 것이다.
(롬 12: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그러므로 바울은 '묵은 누룩'과 '괴악하고 악독한 누룩'을 버려야 할 것을 권고한다.
여기서 '묵은 누룩'과 '괴악하고 악독한 누룩'이란 성도들이 그리스도께 속하기 이전에 지니고 있던 죄의 습성을 가리킨다.
그리스도 안에서 빚어진 성도들은 묵은 누룩이 뜻하는 음란과 정욕, 술 취함과 방탕, 연락과 무법한 우상숭배 등을 버리고 새 사람으로서 영향력을 발휘해야 한다.
(엡 4:22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벧전 4:3 너희가 음란과 정욕과 술취함과 방탕과 연락과 무법한 우상 숭배를 하여 이방인의 뜻을 좇아 행한 것이 지나간 때가 족하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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