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후서

속지 말라 악한 동무들은 선한 행실을 더럽히나니

거듭난 삶 2025. 11. 30. 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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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과 도덕

 

바울의 부활론(1)

고린도전서 151-58

 

 

부활과 도덕

 

성경 :고전 15:29-35만일 죽은 자들이 도무지 다시 살지 못하면 죽은 자들을 위하여 침례 받는 자들이 무엇을 하겠느냐 어찌하여 저희를 위하여 침례를 받느뇨

30) 또 어찌하여 우리가 때마다 위험을 무릅쓰리요

31)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게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32) 내가 범인처럼 에베소에서 맹수로 더불어 싸웠으면 내게 무슨 유익이 있느뇨 죽은 자가 다시 살지 못할 것이면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 하리라

33) 속지 말라 악한 동무들은 선한 행실을 더럽히나니

34)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가 있기로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기 위하여 말하노라

35) 누가 묻기를 죽은 자들이 어떻게 다시 살며 어떠한 몸으로 오느냐 하리니(개역한글)

 

만약 죽은 자가 전혀 다시 살리신 바 되지 못한다면 죽은 자 위해 침례를 받는 자는 무엇을 하려는 것인가? 그들 어찌하여 죽은 자 위해 침례를 받는가?

30) 또 무엇 때문에 우리가 언제나 위험에 있으랴?

31) 우리들의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에 대하여 내가 품은 자랑을 가리켜 맹세한다. 나는 날마다 죽는다고.

32) 만약 내가 사람들 같이(남 같이) 에베소에 있어서 짐승과 함께 싸운 것이라면 내게 무슨 유익 있으랴? 만약 죽은 자가 다시 살리신 바 되지 못하면 우리가 먹고 마시자. 그것은 우리가 내일 죽을 것이기 때문이다”.

33) 너희는 스스로 미혹되지 말라. “악한 교제는 좋은 관례를 해치는 것이다

34) 너희가 의로 인하여 깨라. 그리고 죄를 범하지 말라 너희 중 어떤 자는 하나님을 모른다. 나는 너희를 부끄럽게 하려고 이것을 말한다.(29-34 일본어성경)

 

죽은 자 위해 침례를 받음 이란 사도 재세시의 관례 따라 생자가 사자에 대신하여 침례를 받는 것이라고도 하고, 또는 사자의 유언 따라 혹은 그 신앙에 재촉되어 회개의 침례를 받는 것이라고도 한다.

 

이자 어느 것으로 해석한대도 죽어서 소멸된 자 위해 침례를 받음의 어리석음은 말하지 않더라도 분명하다. 사자가 죽지 않음을 알기에 이에 대하여 생자에 대하려는 것 같은 의무를 다하는 것이라고,

 

만약 죽은 자가 전혀 다시 살리신 바 되지 못한다면 죽은 자 위해 침례를 받는 자는 무엇을 하려는 것인가? 그들 어찌하여 죽은 자 위해 침례를 받는가?(29).

 

또 만약 죽은 자가 전혀 다시 살리신 바 되지 못하다면 무엇 때문에 우리가 언제나 위험에 있으랴?

 

그리스도 신자의 생애는 실로 위험하기 그지없는 생애이다.

그는 정부에 배척되고 사회에 멸시되고 종종 교회 자체에서 마저 괴롭힘을 당한다.

 

우리들이,

 

, 혹은 부모, 혹은 형제, 혹은 아내, 혹은 아녀를 버리고 (누가복음18:29) 그리스도에게 온 것은 무엇 때문인가?

영생을 받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가 아니랴?

 

그리스도 신자의 생애는 실로 위험한 생애이다.

이것을 안일한 생애라고 하는 것은 아직 그리스도교가 무엇인지 모르는 자이다.

 

안일 속에 있는 오늘의 많은 교회 신자를 보라. 그들은 위험한데 있지 않다.

그러므로 내세를 바라지 않는다. 또 부활을 믿지 않는 것이다.

 

또 무엇 때문에 우리가 언제나 위험에 있으랴?(30).

 

자랑을 가리켜 맹세한다란 자랑으로 삼는 바의 사물을 걸고서 맹세함의 뜻이다.

 

바울은 그의 신도로서 자랑했다.

 

우리의 희망, 또는 기쁨, 또는 자랑의 면류관은 무엇이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오실 때 그 앞에서 너희도 이것이 될 것 아니랴?(데살로니가전서2:19)

 

무엇(사물)을 가리켜 맹세한다는 것은 유대인의 어풍으로서 그 말의 확실, 무오임을 보이려는 때에 씌어졌다.

 

그리고 서언은 예수의 금지하신 것인데도 불구하고,

 

(마태복음 5:34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도무지 맹세하지 말찌니 하늘로도 말라 이는 하나님의 보좌임이요),

 

유대인의 국풍으로서 사도들 중에도 있었던 듯하다.

 

바울의 열성스러움 그는 때로 혹은 이 격렬한 말을 발하지 않으면 그의 진지를 통하기 어려움을 느낀 듯하다.

그는 말하고자 한다. 나는 내가 언제나 위험해 있다고 했다. 참으로 그렇다.

내 이 말은 과언이 아니다. 아니 나는 더 나아가 말하고자 한다.

만약 이 말을 오류라고 한다면, 나는 내가 이 세상에 있어서 가장 귀중하게 여기는 내 자랑의 면류관인 너희를 걸고서 맹세하련다.

 

그리고 너희를 버리는 것이 내게 있어서는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은 너희가 잘 이것을 안다. 옳다. 나는 말하려 한다.

 

나는 날마다 죽는다 .

 

우리들의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에 대하여 내가 품은 자랑을 가리켜 맹세한다. 나는 날마다 죽는다고.(31).

 

바울은 실로 날마다 죽는 사념으로서 그의 전도에 종사했다.

 

그는 일찍이 말했다.

 

우리는 마음속으로 필사하여 태연할 수는 있다. 하지만 바울처럼 필사를 기하면서 환희에 차서 활동할 수는 없다. 부활의 희망 있을 때 죽음은 비로소 생명에 이르는 문으로 되는 것이다.

 

우리들의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에 대하여 내가 품은 자랑을 가리켜 맹세한다. 나는 날마다 죽는다고.(31).

 

바울은 에베소에서 짐승과 더불어 싸웠다고 한다.

이는 원투장에서 야수와 싸웠다는 뜻인지 혹은 야수 같은 야비한 사람과 투쟁했다는 뜻인지 자세치 않다. 초대의 그리스도 신자가 많이 원투장 속에서 야수의 먹이로 된 것은 사실이다.

 

바울도 역시 혹은 이 종류의 박해에 조우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어느 야수였는지는 물을 필요는 없다. 다만 그가 에베소에 있어서 종종 죽을 위험에 빠졌던 것은 사실이다.

 

그래 그는 말했다. 만약 이때 내게 갱생의 희망 없었더라면 이 고투는 내게 무슨 유익이 있었으랴고?

 

만약 내가 사람들 같이(남 같이) 에베소에 있어서 짐승과 함께 싸운 것이라면 내게 무슨 유익 있으랴? 만약 죽은 자가 다시 살리신 바 되지 못하면 우리가 먹고 마시자. 그것은 우리가 내일 죽을 것이기 때문이다”.(32).

 

만약 죽은 자가 다시 살린바 되지 못한다면 나는 절망한 고인 따라,

 

우리가 먹고 마시자. 고 하면서 육산(肉山) 주지 속에서 이 생명을 마치는 것만 같지 못하다.

 

(이사야서 22:13 너희가 기뻐하며 즐거워하여 소를 잡고 양을 죽여 고기를 먹고 포도주를 마시면서 내일 죽으리니 먹고 마시자 하도다).

 

어찌하여 일부러 택해가지고서 몸을 모든 위험에 들어 내 놓고 공망에 희망을 걸고서 그리하여 무익한 생애를 보내랴고,

확실한 생애를 보내고자 하면 확실한 희망 있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부랑의 생애를 확고하게 하는 것으로서 부활의 희망 같은 것은 없다.

 

만약 내가 사람들 같이(남 같이) 에베소에 있어서 짐승과 함께 싸운 것이라면 내게 무슨 유익 있으랴? 만약 죽은 자가 다시 살리신 바 되지 못하면 우리가 먹고 마시자. 그것은 우리가 내일 죽을 것이기 때문이다”.(32).

 

너희는 부활을 부정하는 것에 미혹되지 말라 고시에 말하고 있지 않는가?

 

나쁜 교제는 좋은 관례를 해친다.

 

(어떤 이는 말한다. 그리스 시인 메난드로스의 말이라고) 너희는 부활을 부정하는 자와 교제하여 해 받지 않으려 해도 받지 않을 수 없다.

부활의 신앙은 그들이 말하는 것 같이 신앙상의 세사가 아니다.

 

우리 사도들에 의해 전해진 복음은 실로 부활을 기초로 하여 존립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교의 도덕도 이에 의해서는 것이다.

부활 없이 그리스도교적 도덕 없다. 이는 참이다.

부활을 부정해도 그리스도의 도덕은 멸절되지 않는다는 자들은 아직 우리 사도들에 의해 전해진 복음의 진수에 들어서지 못한 자이다.

 

너희는 스스로 미혹되지 말라. “악한 교제는 좋은 관례를 해치는 것이다(33).

 

너희는 의에 의해 깨라.

 

자기의 냉담에 대하여 의분하는 바 있으라. 그것은 부활의 부정은 너희 미약한 도념에서 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높은 도덕은 높은 신앙을 낳는다.

너희의 도념이 소퇴 한 까닭에 이 신앙의 쇠약은 온 것이다.

 

죄를 범치 말라.

 

부활을 믿기에 이르는 거룩한 생애에 들어가라.

너희가 부활을 부인함은 너희의 미지근한 신앙을 가리우기 위해서이다.

 

너희가 의로 인하여 깨라. 그리고 죄를 범하지 말라 너희 중 어떤 자는 하나님을 모른다. 나는 너희를 부끄럽게 하려고 이것을 말한다.(34).

 

너희 중 어떤 자는 하나님을 모른다.

 

그러므로 부활은 없다고 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무엇인지를 아는 자로서 부활을 부정할 자는 있을 리 없다.

 

하나님께서 이미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신다고 해도 너희는 어찌 믿을 수 없다고 하느냐?(사도행전 26:8)

 

하나님을 아는 자로 부활을 의심할 자는 없다.

부활을 의심하는 자여 너희는 알지 못하는가?

 

너희는 하나님을 모르는 자라는 것을.

너희는 하나님을 안다고 하면서 부활은 없다고 한다.

 

너희는 그렇게 말하여 스스로 부끄럽지 않은가?

나는 이렇게 말하는 것은 너희를 부끄럽게 하여 너희로 하여금 바른 데로 돌아서게 하렴에서이다.

 

누가 묻기를 죽은 자들이 어떻게 다시 살며 어떠한 몸으로 오느냐 하리니(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