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photo 유창우 조선영상미디어 기자
"11일간 잠 한숨 안 재우고 고문 오랜 독방생활 혀 굳어 말도 못해"
<이 기사는 주간조선 2089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기자가 배경옥(裵慶玉·72)씨를 처음 알게 된 것은 1989년 말이었다. 월간조선에서 막 기자생활을 시작하던 무렵이었다. 월간조선 1989년 3월호는 ‘이수근은 간첩이 아니었다’라는 제하의 기사를 실었다.
이수근은 1969년 7월 3일, ‘위장 귀순한 간첩’이라는 죄명으로 사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인물. 그후 20년간 우리 국민은 ‘이수근은 위장간첩’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나온 월간조선 기사는 충격적이었다. 배경옥씨는 이수근의 처조카다. 배씨는 베트남 사이공에서 이수근과 함께 체포되어 국가보안법 위반, 반공법 위반 등의 죄로 사형선고를 받았다. 1989년 12월, 21년간 복역하고 나온 처조카 배경옥씨가 월간조선 사무실을 찾았다.
그게 배씨와의 첫만남이었다. 이후 기자는 이따금씩 배씨를 만났다. 지난해 12월, 기자는 출근길에 명동에서 배씨를 우연히 만났다.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헤어진 며칠 뒤 배씨가 국가를 상대로 낸 민사소송에서 승소했다는 뉴스를 접했다. 기자는 처음으로 배경옥씨에게 연락했고, 지난해 12월 30일과 1월 4일 두 차례 만나 총 4시간에 걸쳐 인터뷰를 했다.
2008년의 무죄 판결에 이어 민사소송에서도 승소했으니 이제 큰 짐을 덜으셨네요. “그 세월을 돈으로 계산할 수 있나요? 이제는 이모부님을 편안히 모시는 게 마지막 할 일입니다. 서울구치소에 이모부님의 유해가 합장되어 있는 걸 확인했어요. 100호비(碑)에 다른 분들과 함께 계십니다.”
북한에 가족을 남겨두고 1967년 3월 귀순한 이수근은 서울에서 이모 교수와 결혼을 했다. 배씨는 북한에 남겨진 부인의 조카이다.
북에서 온 이모부와의 만남
어떻게 북한에 이모가 살게 되었나요. “어려서 서울 신당동에 살았는데, 그때 이모가 우리집에 함께 살았습니다. 이모님이 내 손을 잡고 여기 저기 많이 데리고 다니셨어요. 당시 서울대 사대를 나온 이모님은 지방에서 학생을 가르치고 싶다고 하셔서 경기도 개성으로 가셨어요. 거기서 당시 기자로 활동하던 이모부님을 만났지요. 얼마 뒤 6·25전쟁이 터지면서 이모님은 개성에 발이 묶이셨습니다.”
귀순한 이수근씨가 이모부라는 사실은 언제 알았나요. “나는 당시 베트남 주재 미
1사단 소속 파월 기술자로 근무하고 있었지요. 그때 라이프(LIFE) 잡지에 난 이수근의 사진을 보고 ‘이런 사람도 있구나’하고 생각했죠. 나중에 알고 보니 이수근씨가 정보부 관계자에게 처가가 서울이니 찾아달라고 부탁했다고 그래요. 그래서 그분이 나를 가장 예뻐해준 이모님의 남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 그때 이모님이 개성에만 가지 않았어도 우리 집안에 이런 비극은 일어나지 않았을 텐데….”
판결서를 보니 원고에 배경옥씨 외에도 14명이 있던데요. “간첩 집안이라는 누명을 한번 뒤집어쓰면 집안 전체가 비참해진다는 것을 말하는 겁니다. 아이들이 번듯한 직장에 취직하는 것은 고사하고, 신원조회에 걸려서 사회생활을 정상적으로 할 수가 없습니다. 그건 천형(天刑)보다 더한 겁니다. 원고로 이름이 올라간 사람은 그동안 이루 말할 수 없는 피해를 본 집사람과 딸아이, 저의 어머니와 형제들입니다.”
재산상의 피해도 컸겠습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 명의의 부동산이 경기도 고양, 여주, 이천에 많았습니다. 하지만 ‘간첩 집안’이라는 누명을 쓴 뒤 재산이 다 다른 사람 명의로 넘어갔습니다. 우리가 재산권 행사를 하지 못하는 사이 당시 소작인 등이 땅을 가로챈 것이지요. 20년이 넘으면 소유권을 인정한다는 특별조치법으로 인해 사유 재산을 강탈당했습니다. 여주에 있는 것을 다시 찾으려고 소송해봤지만 법원은 시효(時效)가 지나서 안된답니다.”
1969년 1월, 베트남에서 사업일로 서울에 왔을 때 여권 분실만 안했어도 이런 비극은 없었겠지요. “그때 여권분실 신고를 동아일보에 냈습니다. 만일 여권이 제게 돌아왔다면 나는 그냥 베트남 미1사단으로 돌아갔을 겁니다. 그랬다면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 겁니다.”
이모부가 위조 여권을 만들어 달라고 했을 때 잘못되면 큰일난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나요. “그때 이모부께서는 내게 중립국에 가서 글을 쓰며 살겠다고 말했습니다. 당시 중앙정보부 감찰실장 방준모가 권총을 쏘아 위협하고 때리기도 했답니다. 인텔리에게 그런 모욕을 했으니. 이모부는 중립국에 가면 북한에 대해서는 가족을 보내달라고 요구하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되면 남한도 나에 대해 더 좋은 대우를 해주겠다고 나올 것이라고 하셨지요. 저는 북한의 가족을 데리고 와 함께 살고 싶다는 이모부님의 부탁을 도저히 거절할 수가 없었습니다.”
1969년 2월 1일 사이공에서 서울로 압송되어 중앙정보부 조사를 받았는데요. “중앙정보부 5국에서 조사를 받았습니다. 열하루 동안 한 시간도, 잠을 안재우며 자백하라고 고문했습니다. 잠을 못 자니까 책상의 나뭇결이 뱀처럼 꿈틀거리며 움직이데요. 정신이 혼미한 상태에서 수사관들이 하라는 대로 진술했습니다. 영장 없이 열하루 동안 조사한 것은 불법 감금입니다. 서대문구치소에 들어가서야 누워서 잠을 잘 수 있었습니다.”
10개월 만에 가족과 첫 면회
그의 나이 서른 살. 아내와 다섯 살난 아들, 그리고 아내의 뱃속에 둘째 아이가 자라고 있었다. 이후 배씨는 20년11개월 동안 교도소 생활을 한다. 서울 서대문구치소 1년, 대전교도소 3년, 광주교도소 16년, 그리고 안동교도소에서 1년. 전국의 교도소를 다 순례했다.
- ▲ 이수근(오른쪽)·배경옥씨(오른쪽에서 두 번째)가 사형선고를 받고있는 장면. 1969년 5월 11일자 조선일보.
가족과의 첫 면회는 언제 이뤄졌나요. “10개월 만에 처음 면회가 이뤄졌습니다. 서울구치소에 있을 때 어머니, 동생, 아내가 면회를 왔습니다. 그때 집사람이 갓 태어난 딸을 데리고 왔습니다. 그때 딸아이의 얼굴을 처음 봤지요.”
그때 심정이 어땠습니까. “딸아이 얼굴을 처음 본다는 기쁨보다는 저 아이의 장래를 생각해보니 내가 죄인이라는 생각만 들었습니다. 그 아이가 어떻게 커갈 것인가를 생각하니 너무 슬펐습니다. 집사람에게 미안하고 어머니께 죄송했습니다. 나로 인해 가족이 고통을 당해야 하니 죄스러울 뿐이었습니다.”
억울하게 간첩죄로 들어갔으니 그곳 생활이 더 힘들었겠습니다. “처음 들어가서는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습니다. 하루라도 빨리 죽고 싶다는 생각뿐이었죠. 중앙정보부에서 하도 당해서 솔직히 살려줄 것 같지도 않았어요. 살 수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습니다.”
가족들은 이수근씨와 배경옥씨가 억울한 누명을 뒤집어썼다는 것을 알고 있었나요. “가족들도 진짜 내가 간첩인 줄 믿었습니다. 언론에서 다 그렇게 나오는데 어떻게 진실을 알 수 있었겠습니까. 진실을 아는 사람은 이모부, 저, 조카 김세준, 이대용 공사, 홍필용 중정 수사국장이 전부였죠. 재판을 받으러 나갈 때마다 중앙정보부에 끌려가서 ‘입 다물라’는 위협을 받곤 했습니다.”
4년 지나니 원망도 사라져
교도소에서 독방생활을 하셨겠죠. “저는 ‘국제 간첩’이라는 딱지가 붙어서 독방에 가둬놓고 출역(出役)도 안 시켰습니다. 독방 생활을 오래 하다 보니 어느날 혀가 굳어버려 말이 안 나왔습니다. 너무나 충격이 컸죠. 그래서 혀가 굳어가는 걸 막으려고 화장실 창살 밖으로 혼자 말을 지껄이곤 했습니다. 출역은 대전교도소에서 광주교도소로 이송되기 한 달 전인 1974년에 처음 인쇄공장으로 나갔습니다.”
교도소에 계시면서 대한민국 정부를 원망했겠습니다. “4년차까지는 대한민국 정부를 원망했지요. 그런데 거기 있어보니까 나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이 나 혼자가 아니라는 걸 알았습니다. 분단이 안 됐으면 있을 수 없는 일이지요.”
언제부터 살아야겠다는 생의 욕망을 느꼈습니까. “4년이 지나고부터 ‘여기 인생도 내 인생’이라고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대로 있으면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데요. 나가게 되면 가족들에게 이곳에서 뭐라도 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그림을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그게 광주교도소 시절입니다. 붓을 잡으면 금방 몰두할 수 있으니 시간이 참 잘 갑니다.”
광주교도소는 전국교도소 중 최초로 창작, 서예, 회화를 배우는 문예반을 만들었다. 문예반 운영이 재소자들에게 호응이 좋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전국의 교도소로 확산되었다. 그는 광주직할시 승격 기념 광주시 미술대전에 산수화를 출품, 입선했다.
1989년 12월 22일, 자유의 몸이 되었을 때 심정이 어땠습니까. “나왔다는 기쁨 같은 건 없었어요. 그날 남동생이 안동교도소로 마중나왔습니다. 오늘처럼(1월 4일) 눈이 많이 내리던 날이었습니다. 어머니가 계신 집에 가기 전에 경기도 광주경찰서에 먼저 가서 신고를 했습니다. 이후 11년간 보호관찰 대상이 되었죠.”
아들과의 마지막 통화
21년간 갇혀 있다 나오니 어떤 변화가 있던가요. “사람에 대한 분별력이 없었습니다. 연령 구분이 전혀 안돼요. 만날 교도소 안에서 삭발한 사람만 대하다 보니.”
30살에 교도소에 들어간 그는 51살이 되어 나왔다. 갇혀 지낸 21년의 세월은 이미 주변까지도 다 변화시킬 만큼 길고긴 시간이었다. 배씨의 아들은 스물여섯, 딸은 스물두 살이 되어 있었다.
가족과는 언제 재회를 했습니까. “내가 출소한 것은 아이들에게 충격이었습니다. 집사람은 아이들이 커가면서 아버지에 대해 있는 그대로 알릴 수가 없었겠지요. 그래서 아버지가 돌아가신 것으로 했다고 합니다. 마침 스물여섯 살 아들은 취직을 해 결혼 얘기가 나오고 있었다고 합니다. 딸아이는 일본에 있었고요. 근데 제가 출소한 겁니다. 집사람과 먼저 전화 통화를 했죠. 그리고 나서 아들과 전화 통화를 했습니다. 그때 아들이 저한테 그래요. ‘아버지, 여태까지 그냥 사시던 대로 사시면 안되겠습니까?’ 제가 그랬죠. ‘니들이 원하는 대로 하겠다’고요. 그게 처음이자 마지막 대화였습니다.”
21년간 억울한 옥살이를 견뎌낸 배경옥씨였지만 자식 얘기가 나오자 목소리가 떨리기 시작했다.
“어려서부터 자기 엄마가 경찰서와 중앙정보부 끌려다니며 사는 걸 봐 왔으니 애들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아들은 말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묻는 말에만 대답하는 성격이 되었다고 합니다. 아들의 큰 모습은 본 일이 없어요.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8월에 아들이 무주구천동에서 물에 빠져 목숨을 끊었습니다.”
배씨는 말을 제대로 잇지 못했다. 금방이라도 쏟아질 것처럼 눈물이 그렁그렁해졌다. 소매로 눈물을 훔쳤다.
“아들이 그렇게 된 게 가장 억울합니다. ‘아버지, 여태까지 그냥 사시던 대로 사시면 안되겠습니까’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아들의 마음을 내가 아니까. 평생 살면서 제 엄마 고통받는 걸 보면서 자랐으니까. 억울하고 분해요.”
끝까지 진실 밝혀준 사람들에 감사
따님과는 언제 만났습니까. “아들이 죽고 나서 10년쯤 지난 뒤였죠. 제 엄마는 아들이 그렇게 되자 한동안 정신나간 것처럼 살았다고 합니다.”
따님을 알아볼 수 있겠던가요. “갓난아기 때 보고 처음인데…. 딸이라고 하니까 딸인가 생각했지요. 그런데 가만히 얼굴을 뜯어보니 제 할머니를 많이 닮았더군요. 생각해보세요, 아빠를 한번도 아빠라고 불러보지 못하고 자란 딸아이를. 친구들이 제 아빠와 노는 걸 보면서 딸아이가 얼마나 가슴에 맺혔겠어요. 딸은 현재 결혼 안하고 일본에서 직장 잡고 살고 있습니다.”
배씨는 출소한 지 20년이 넘었지만 부인과 합치지 못하고 있다. 현재는 노모를 모시며 혼자 살고 있다.
박정희 정권에 대한 미움이 크겠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미움은 없습니다. 나는 한국 경제가 본격적으로 커나가기 시작할 때 베트남에 기술자로 파견된 사람입니다. 미1사단에서만 월급으로 1200달러를 받았습니다. 서울에 덤프 트럭을 두 대나 갖고 있었고요. 큰돈을 벌고 있었습니다. 권력의 하수인들 때문에 나와 우리 가족이 이렇게 되었습니다.”
늦긴 했지만 국가를 상대로 민사소송에서 이겼으니 조금은 응어리가 풀리지 않았나요. “그런 응어리가 풀릴 수 있다고 보십니까? (말을 잇지 못하다가) 어쨌거나 진실은 일시적으로 가릴 수는 있으나 영원히 가릴 수 없다는 진리가 확인되었습니다. 그간의 고생은 말할 수 없었지만 비로소 원위치에 돌아온 겁니다. 원위치로 돌아오는 데 이렇게 희생이 크고 힘들었으니. 좋고 나쁜 것이 아니라 너무 허망할 뿐이죠.”
누가 제일 고맙습니까. “조갑제 기자가 제일 고맙죠. 그 다음이 이대용 공사입니다. 그분이 아니었으면 영원히 묻힐 수 있는 사건이었습니다. 내가 눈 감을 때까지 영원히 잊을 수 없습니다. 두 분은 재판에 증인으로 출두해주셨습니다. 판사가 ‘이념과 진실 한쪽을 선택해야 할 때 어느 쪽을 택할 것이냐’고 물었습니다. 조갑제 기자가 ‘당연히 사실 쪽에 서겠다’고 말하더군요. 그분들한테 어떻게 고마움을 표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위장간첩’ 이수근 사건
북한 기자 출신 숙청위기 몰려 1967년 귀순
한국생활 환멸, 제3국 망명 시도했다 사형
- ▲ 이수근의 사형집행을 보도한 1969년 7월 4일자 조선일보.
1967년 2월, 그는 북한군 창립기념행사에서 김일성을 수행 취재했다. 하지만 김일성 연설내용을 보도하지 않았다. 숙청 위기에 몰린 그는 1967년 3월 판문점을 통해 귀순을 결행했다. 1960년대는 냉전의 최전선에 놓여 있던 남북한이 치열한 체제경쟁을 벌이고 있던 시점. 박정희 정권은 북한 인텔리의 귀순을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우월함을 알리는 데 적극 활용했다. 이수근은 영웅 대접을 받았고 서울에서 결혼도 했다.
이수근은 중앙정보부 판단관으로 활동했다. 동시에 중앙정보부가 그의 신변을 관리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자신을 체제 선전에만 이용하려는 당국과 갈등을 빚기 시작했다. 이수근이 결정적으로 한국 생활에 환멸을 느낀 것은 중앙정보부 감찰실장 방준모의 괴롭힘과 모욕이었다.
1969년 1월, 베트남 미1사단 기술자로 일하던 처조카 배경옥씨가 가족을 만나러 한국을 방문했다. 배씨는 이수근이 북한에 남겨놓은 부인의 조카였다. 배씨는 여권을 잃어버려 신문에 분실신고를 낸 뒤 재발급을 받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었다. 우연히 배씨가 여권을 재발급받기 위해 수속하고 있다는 말을 들은 이수근은 배씨에게 호소했다. “나는 북한도 싫고 한국도 싫다. 제3국으로 망명해서 북한에 있는 가족들을 데리고 와서 함께 살고 싶다. 외국으로 나갈 수 있게 여권을 만들어달라.”
이모부의 간청을 거절하지 못한 배씨는 여권 브로커에게 부탁해 위조 여권을 만들었다. 1969년 1월 27일, 이수근은 배씨와 함께 김포공항에서 홍콩행 여객기에 탑승했다. 배씨는 마침 베트남으로 돌아가는 길에 이모부의 출국 수속을 돕기 위해 함께 출국했다. 홍콩에 도착한 뒤 이수근은 스위스로, 배씨는 베트남으로 가려했다. 하지만 당일 출발하는 스위스행 비행기표를 구하지 못해 두 사람은 홍콩에서 하룻밤을 자게 된다. 중앙정보부에서는 뒤늦게 이수근이 사라졌고, 홍콩행 비행기를 탔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비상이 걸렸다. 중정은 주홍콩 한국총사관에 이수근 체포령을 내렸다. 두 사람은 홍콩 경찰에 의해 잠시 억류되었다가 프놈펜행 비행기로 갈아탄다. 프놈펜행 비행기는 사이공을 경유하는 것이었다. 비행기가 사이공 공항에서 이륙하려는 순간, 이대용 주월공사는 티우 대통령에게 부탁해 이륙을 지연시키는 데 성공한다. 이렇게 되어 두 사람은 정보부 요원들에 의해 체포되었다. 이게 1월 31일 오전이었다. 이대용 공사는 군특별기가 올 때까지 두 사람을 면담한 사람이다. 두 사람은 2월 1일 한국으로 돌아왔고 중앙정보부에서 조사를 받게 된다.
1969년 5월 10일, 이수근과 배경옥은 국가보안법 반공법 위반 등의 혐의로 사형선고를 받는다. 이수근은 7월 3일 사형이 집행된다. 배경옥씨는 같은해 10월 고등법원에서 무기징역으로 감형됐다. 1989년 12월, 배씨는 21년 만에 자유의 몸이 됐다. 2008년 12월 배씨는 재심에서 “이수근은 간첩이 아니었다”는 판결을 이끌어냈다. 당시 김형욱 정보부장이 자신의 실수를 감추기 위해 이수근을 위장간첩으로 몰아 죽였다는 게 결론이었다. 이어 지난해 12월 말, 서울 민사지법은 배씨와 가족 등 15명이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국가는 배씨 등에게 위자료로 총 22억5000만원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