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부→日징병→중공군→인민군→국군
"나는 그저 살기위해서 총을 쏴야했지"
“이게 여기 와 있네. 6·25 때 이 전차가 북한에서 수십 대가 내려왔어.
끝이 안 보였지. 국군은 전차가 없었으니까, 이것 때문에 고생했을 거야.”
6·25 전쟁 59돌을 이틀 앞둔 23일 오후 서울 용산구 용산동 전쟁기념관. 앞마당에 전시된 구(舊)소련제 ‘T-34’ 전차를 발견한 박금석(84) 할아버지는 인민군으로 전쟁에 참가했던 59년 전을 떠올렸다.
일본군과 중공군, 국군까지 거친 박 할아버지에게 인민군은 세번째로 몸담은 군대였다. 일본군에 징병됐다 일본 패망 후 중국 마오쩌둥(毛澤東) 군대에서 복무한 뒤 북한 인민군 정규군으로 편입됐던 것이다. 전쟁 도중 포로로 잡혀 거제도 포로수용소를 거치고 석방 뒤 2년6개월간 국군에 복무했으니, 군 생활 기간만 14년에 달한다.
고향인 전남 보성군 벌교읍에서 낫과 괭이를 들고 농사를 짓던 박 할아버지의 손에 장총이 쥐어진 것은 19세 때인 지난 1943년. 일본군에 끌려가 만주에 배치되면서부터다. 일본 패망으로 귀향을 꿈꿨지만 헤이룽장(黑龍江)성 목단강 근처에서 중공군에 붙잡히면서 마오쩌둥 군대에 배속됐다.
박 할아버지가 세번째 군복을 입게 된 것은 1950년. 마오쩌둥 군대 1개 사단이 북한 인민군으로 편입되면서 할아버지도 인민군 7사단에 배속됐다.
박 할아버지는 6·25 전쟁이 터지는 줄도 모르고 남쪽으로 내려왔다고 했다. 그는 “그냥 ‘작업하러 간다’며 새벽에 이동했는데 그게 끔찍한 전쟁의 시작이었다”고 전했다.
강원 철원군 동부전선으로 내려왔다는 박 할아버지는 “그때 맞붙었던 국군 백골부대는 전혀 싸울 준비가 안 돼 있었다”며 “대구 팔공산까지 밀고 내려오는 데 보름이나 걸렸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고향인 남쪽 사람들과 싸우느라 내내 맘이 편치 않았다는 박 할아버지는 “내가 안 죽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국군을 향해 총을 쏴야 했다”며 아픈 기억을 곱씹었다.
이 때문에 박 할아버지는 인천상륙작전으로 인민군이 북한으로 철수하기 시작하자 망설임 없이 국군에 투항했다고 한다.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새겼던 ‘반공(反共)’이라는 문신은 아직도 할아버지의 왼쪽 팔에 남아 있었다. 할아버지는 1954년 포로수용소에서 석방됐다가 이듬해인 1955년 5월 국군 2사단에 다시 십대, 1957년 9월1일에야 길고 긴 군생활을 마감했다.
박 할아버지는 “그 많은 전투를 거쳤는데 이렇게 살아 있다는 게 신기할 뿐”이라며 “젊은 사람들이 그런 시절에 그런 아픔을 겪었던 사람이 있었다는 점은 알아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조성훈 군사편찬연구소 연구원은 “일본군과 중공군에 배속됐었다는 기록은 확인하기 어렵지만 박 할아버지의 진술이 상당히 구체적이어서 신빙성이 높다”며 “시대적 상황 때문에 여러 나라 군에 복무한 사람들이 간혹 있지만 4개국 군대를 거친 경우는 거의 없다”며 놀라워했다.
강버들기자 / 문화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