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촌

바르샤바·아우슈비츠

거듭난 삶 2010. 3. 1. 06:47
728x90

123년의 지배도 전쟁의 상처도 그들의 의지를 꺾을 수 없었다

  • 바르샤바·아우슈비츠(폴란드)=오윤희 기자 oyounhee@chosun.com
  • 입력 : 2010.02.27 폴란드 바르샤바와 아우슈비츠
    전쟁 흔적 가득한 사스키 공원
    악명 높은 아우슈비츠 수용소 전시실
    생체 실험 등 유대인 잔혹사 볼 수 있어
'폴란드'를 상상하면서 황금빛 햇살 내리쬐는 미국 캘리포니아의 쾌활한 분위기나 사시사철 항구에 푸른 파도가 넘실대는 아담한 남부 이탈리아 마을의 낙천적이고 유쾌한 모습을 떠올릴 사람은 거의 없다.

123년간(1795~1918년)이나 러시아 지배를 받았고 2차대전 때는 독일에 철저하게 부서졌던 폴란드는 이 나라 출신 예술가 쇼팽의 음악처럼 어딘지 아련한 슬픔이 배어 있을 것만 같다.

실제로 폴란드의 수도 바르샤바 이곳저곳엔 아직도 전쟁이 할퀴고 간 상처가 미처 아물지 못하고 남아 있다. 전쟁과 잔인한 학살의 대명사처럼 되어버린 아우슈비츠는 더 말할 필요조차 없다.

이 두 지역이 일상에 지친 몸과 마음을 추스르기 위해 가벼운 마음으로 여행을 떠나려는 이들에겐 적합하지 않은 장소일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폴란드나 아우슈비츠를 '가 볼 가치가 없는 곳'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오히려 한때 이곳을 지배했던 처절한 비극, 그 아픔을 딛고 다시 일어난 국민의 의지는 그 어떤 절경 못지않게 깊은 인상을 남길 수 있다. 그게 일본에 35년간 지배당했던 우리들이라면.

①아우슈비츠의 간판,‘ 노동 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Arbeit macht frei).’/ 오윤희 기자

◆전쟁의 상처가 남은 도시, 바르샤바

벤치에서 신문을 읽거나 담소하는 노인들이 모여 있고 산책하는 시민들의 발걸음이 온종일 끊이지 않는 사스키 공원은 바르샤바 시민들의 휴식 공간이다. 공원 입구로 나오면 1925년에 만든 무명(無名) 용사의 묘가 보인다.

묘지에서 약 20m 떨어진 곳엔 대형 십자가가 서 있다. 폴란드가 배출한 유명인 가운데 한명인 고(故) 요한 바오로 2세가 이곳에서 평화의 기도를 드렸던 것을 기념해 세운 십자가다.

거리 곳곳에 알파벳 P와 W를 조합해 배의 닻처럼 만든 장식이 있다. 그 아래엔 불 밝힌 양초나 소박한 꽃다발이 있다. 이 장식은 2차대전 때 독일군에 대항해 싸운 폴란드군의 암호, '폴란드의 정신은 살아 있다'를 상징한다.

전쟁박물관으로 가는 길엔 2차대전을 형상화한 커다란 조형물도 서 있다. 땅 밑에 묻힌 지뢰가 폭발하는 순간, 긴박한 모습으로 달려가는 병사들의 모습이다. 자세히 보면 그들의 얼굴은 고통에 일그러져 있다.

땅 밑 지뢰를 피해 달리는 군인들의 모습을 동상으로 만들었다. / 오윤희 기자
소년병의 희생을 기리기 위해 만든 아이 동상에는 관광객이나 현장 학습을 나온 학생들이 꽃을 놓고 간다. 소련군이 바르샤바에서 철수한 날(9월 17일)이나 독일군의 침공일(9월 1일)에는 곳곳에 기념 사진전도 열린다.

'전쟁의 흔적'을 보는 데 지쳤다면 바르샤바의 소소한 구경거리에 눈을 돌리자. 붉은 벽돌 건물이 모여 있는 구도심에 가면 광장 정면에 한 손에 긴 칼을 들고 있는 지그문트 3세의 동상이 보인다.

그 칼이 떨어지는 날이 폴란드가 멸망하는 날이라는 전설이 전해지는데 숱한 침략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칼이 떨어진 적은 없다. 도시의 탄생과 연관이 있는 인어동상도 놓쳐선 안 된다.

먼 옛날 가난한 어부 바르스(Wars)가 던진 그물에 아름다운 인어 사바(Zawa)가 잡혔다. 그들은 사랑에 빠져 부부가 됐고, 이 부부의 자손이 바르샤바의 조상이 되었다고 해서 바르샤바 도시 명칭은 부부의 이름을 따서 붙여졌다.

구도심에서 15분 걸어가면 쇼팽의 심장이 묻힌 성당, 바르샤바대학, 폴란드 과학아카데미 앞에 있는 코페르니쿠스 동상도 볼 수 있다. 동상 바닥에 그려진 두개의 원은 지구와 태양으로, 지동설을 주장한 그의 공적을 상징한다.

사스키 공원 앞 무명 용사 의 묘. / 오윤희 기자
◆참혹한 학살의 현장, 아우슈비츠

바르샤바에서 기차로 2시간 30분, 그곳에서 다시 버스로 1시간을 가야 하는 아우슈비츠는 설명이 필요 없다. 이곳에 도착하면 우선 악명 높은 간판 '노동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Arbeit macht frei)'가 방문객을 맞는다.

이 간판은 지난해 연말, 도둑맞았다가 3일 만에 되찾아 다시 한 번 유명세를 탔다. 안에는 수없이 많은 막사가 끝없이 늘어서 있다. 내부는 청소년 하나가 요가 자세를 취하듯 있는 대로 몸을 뒤틀어야 간신히 들어갈 만큼 좁다.

대체로 3층 침대가 많은데 천장에서 빗물이나 눈 녹은 물이 쉴 새 없이 떨어져 노약자와 어린아이를 제외한 몸이 건강한 이들이나 신참자가 꼭대기층에서 잤다. 막사 주변엔 철책이 겹겹이 쌓여 있다.

개중엔 전류가 흘렀던 곳도 있고 앞에 해골 모양을 그려 놓고 '멈추시오'라는 표지판이 붙어 있는 곳도 있다. 도망치다 사살된 사람들의 넋을 달래기 위해 철책 여기저기에 꽃다발이 놓여 있다.

아우슈비츠 견학을 제대로 하기 위해선 2시간짜리 영어 가이드 서비스를 받는 것도 좋다. 프로페셔널한 가이드는 아우슈비츠 수용자들이 언제 들어왔고 어떤 고난을 겪었고 어떤 최후를 맞았는지를 가까운 친척이나 친구 이야기 전하듯 세세하게 설명해 준다.

참혹한 역사를 그대로 보존해 전쟁의 기억을 이어나가는 것은 아우슈비츠의 소명처럼 보였다. / 오윤희 기자
전시관 내부는 사진 촬영 금지다. 사실 인간의 잔인함이 빚어낸 참혹함 앞에 사진기를 들이대기엔 죄송스러운 마음도 든다. 전시관엔 희생자들이 아우슈비츠에 들어올 때 반납했던 소지품들이 몇개의 전시실에 걸쳐 전시돼 있다.

때 묻은 슬리퍼, 주인의 이름이 적힌 가방, 빛바랜 편지 등이 3m는 됨 직한 천장에 겹겹이 쌓여 있다. 손바닥만한 아기 옷이나 배냇양말만 모아둔 곳, 노인이 사용했던 틀니, 장애인들의 의수와 의족을 모아 놓은 곳도 있다.

여성의 머리카락을 모아 놓은 전시실도 충격적이다. 여성 수용자들은 아우슈비츠에 들어오면 머리를 삭발하고 수건을 뒤집어써야 했다. 그 머리카락은 군용 담요나 옷을 만드는 데 유용하게 사용됐다.

한때 인간의 것이었다고 믿어지지 않는, 빛바랜 실타래에 가까운 머리칼과 그 머리칼로 만든 옷이 나란히 전시돼 눈길을 끈다. 말 그대로 뼈에 가죽만 간신히 붙어 있는 여성, 슬픔 어린 커다란 검은 눈동자가 안네 프랑크를 연상시키는 소년·소녀, '죽음의 천사'로 악명 높은 의사 멩겔레의 생체 실험 대상자가 된 수용자들의 사진은 생생하게 기억에 남는다.

막사에서 조금 떨어진 곳엔 수용자들을 끌고 온 작은 수레 열차가 있다. 아우슈비츠에 대규모 수용소가 설립된 이유는 터가 넓고 교통이 편리해서다. 수용소 근처엔 이곳을 관리·감독했던 사람들의 가족도 함께 살았다.

그들의 어린 자녀는 바로 곁에서 수없이 많은 이들이 죽어갔다는 사실을 전혀 모른 채 자연을 만끽하며 신나게 뛰놀았다. 그들 가운데 한명이 쓴 편지에 이런 구절이 적혀 있었다고 전해진다. "이곳이야말로 '지상 낙원'인가 봐."

 

 

유대인 학살의 주역 독일 “우리도 희생자다”

  • 임지현 한양대 사학과 교수

입력 : 2007.08.17 22:16

희생자로서의 독일인
(원제 Germans As Victims:
Remembering the Past in Contemporary Germany)
빌 니븐 엮음|팰그레이브 맥밀런|288쪽|29달러 95센트

‘요코 이야기’를 둘러 싼 논란이 한창이던 지난 겨울, 이 책을 읽었다. ‘희생자로서의 독일인’이라는 제목 자체가 ‘요코 이야기’와 관련하여 관심을 끌었기 때문이다. 홀로코스트라는 반인륜적 범죄의 가해자인 독일인들이 자신을 희생자로 기억한다는 것은 아무래도 이상하지 않은가? 독일에서 희생의 기억은 요코의 개인적 기억 혹은 일본 우파의 집단적 기억 방식과 어떻게 다르고 또 어떻게 같을까?

태평양 건너 미국 동부에서 발화되어 한국으로 불똥이 튄 ‘요코 이야기’에서 문제가 된 부분은 비교적 간단하다. 식민주의의 피해자인 한국인들을 가해자로 묘사하고, 가해자였던 일본인들은 오히려 피해자로 그리고 있다는 것이다. 이 지적은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하다. 식민지 경험을 놓고 볼 때 ‘한국인=희생자 대(對) 일본인=가해자’라는 등식은 대체로 맞지만, 현실을 대단히 단순화시킨다는 점에서는 틀리다.

▲ 노르망디 상륙작전 60주년인 2004년 6월, 프랑스 랑빌 마을에 있는 2차 대전 전사자 묘역을 찾은 게르하르트 슈뢰더 당시 독일 총리가 독일군 전사자 322명의 묘비 사이를 걷고 있다. /AP
민족의 차원을 떠나 개개인의 차원에서는 한국인 가해자도 일본인 희생자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종전 직후 만주와 한반도에서 일본 열도로 귀환하는 과정에서 약 3~9만명의 일본인들이 러시아 적군, 중국인, 한국인들에 의한 폭력이나 질병, 굶주림 등으로 사망했다는 추계는 일본인 희생자의 존재를 분명히 입증한다. 또 일본인 희생자의 대부분이 노인과 여성, 어린아이들이었다는 점도 의심의 여지는 없다. ‘요코 이야기’의 문제는 저자가 자신의 고통을 과장하거나 사실을 왜곡했다는 점이 아니다. 난징 대학살 등과 같은 일본 식민주의의 범죄행위나 잔학행위 등의 역사적 맥락이 생략된 채, 일본인 여자 아이의 개인적 고통으로만 전쟁이 기억되고 있다는 점이다. 요코의 개인적 기억의 구도는 히로시마를 종종 아우슈비츠와 비교하고 일본인과 유대인을 백인 인종주의의 대표적 희생자라고 간주하는 일본 사회의 집단 기억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귄터 그라스의 ‘게걸음으로 가다’가 돋보이는 것도 이 대목에서이다. 독일 민간인들의 고통과 희생을 직시하면서도 그것을 나치 독일의 잔학행위라는 역사적 맥락 속에 위치시킬 수 있는 그라스의 역사적 균형 감각이나 작가적 안목을 ‘요코 이야기’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것이다.

사람의 고통을 통계나 수치로 환원시킬 수는 없겠지만, 패전 직후 독일인들이 겪어야 했던 고통과 희생에 비하면 만주와 한반도 일본인들의 운명은 훨씬 나은 것이었다. 동프로이센에서의 독일인 피난민 혹은 강제 추방자들의 규모는 ‘유럽 역사상 최대 규모의 강제이주’라고 평가되며 그 수는 무려 1400만 명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 중 약 200만 명이 연합군의 공습이나 폭격, 굶주림과 전염병, 복수에 불타는 폴란드인이나 체코인 등 슬라브인들의 ‘개인적 사법적 정의’, 즉 테러와 린치 등으로 목숨을 잃었다. 희생자 대부분은 노인이나 여성, 어린이였다. 또 한 통계에 의하면 약 150만 명에 이르는 독일 여성들이 주로 러시아의 적군 병사들에게 강간당했다.

동프로이센이나 슬라브 점령지역에 거주했던 이 독일인들의 희생에 대한 기억이 억압되었던 더 중요한 이유는 이들이 나치의 적극적 공범자 혹은 수동적 동조자였다는 점이다. 동유럽에서 추방된 독일인 피난민들의 희생은 요컨대 유대인 학살이나 슬라브족의 노예화 등 나치의 잔학행위라는 괄호 속에 묶인 희생이었다.

한 인종을 말살하려 했던 홀로코스트라는 전대미문의 국가적 테러행위의 공범자들이라는 이유 때문에, 독일인들의 희생은 공적 담론의 영역에서는 입에 담을 수 없는 금기였다. 전후 독일에서 독일인들의 희생을 이야기하는 것은 터부였다는 정설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희생에 대한 기억과 담론은 여러 가지 방식으로 살아남았다.

서독의 공식담론에서는 공산주의자들의 폭력과 무고한 독일인들의 희생이 강조되었다. 특히 독일인 피난민에 대한 소련 적군의 살인과 강간, 약탈이 강조되었다. 나치 독일의 잔학행위에 적극적으로 가담한 독일 여성들에 대한 기억은 공산주의자들이 저지른 폭력의 수동적 희생자로서의 여성에 대한 기억으로 대체되었다.

사회주의 형제국에 대한 비판이 불가능했던 동독에서는 드레스덴 등 동독 도시들에 대한 영·미 공군의 무차별 폭격이 강조되었다. 그것은 사회주의 독일의 재건을 저지하기 위한 영미 양국의 교묘한 음모였다는 것이다. 독일인들이 연합국 공군이 저지른 반인도적 범죄행위의 피해자였다는 담론이 동독에서는 자리 잡게 되었다.

냉전체제의 붕괴 이후 공론화되기 시작한 ‘독일인 희생자’론은 금기 타파에 그치지 않고, 그 자체가 다시 절대화되는 경향이 나타나기도 했다. 연합군 폭격기편대를 나치의 ‘특수부대’에 빗대고, 독일의 방공호를 강제 수용소의 유대인 ‘소각로’로, 연합군의 폭격 목표가 독일인의 ‘절멸’이었다고 보는 극단적 주장은 공중폭격의 독일인 희생자들을 홀로코스트의 희생자와 동일시하는 것이었다.

또 ‘독일피난민동맹’의 우산 아래 모인 동프로이센의 독일 피난민들은 ‘절멸수용소’, ‘제노사이드(인종학살)’ 등의 용어를 사용해 자신들의 희생을 묘사하기도 했다. 홀로코스트의 공범자였던 이들이 코소보와 구 유고슬라비아에서 자행된 인종청소를 거세게 비난하고, 패전 직후 슬라브인들의 폭력에 희생자가 된 자신들의 희생자 담론을 정당화하는 유비로 사용한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역사의 역설이다.

독일 민간인들의 희생을 나치의 잔학행위에서 떼어 놓고 탈역사화시키는 독일의 집단 기억은 원자폭탄 피해를 식민주의적 침략의 역사에서 탈맥락화시키는 일본의 집단 기억방식과 크게 다르지 않다. 홀로코스트와 난징학살의 가해 주체가 희생자로 둔갑하는 이 기억의 마술은 가해자와 희생자의 경계가 가변적임을 드러내준다. 희생자들이 가해자들보다 반드시 도덕적으로 우월한 것은 아니다. 판을 뒤집어 더 이상 희생자가 아니라 가해자가 되어야겠다는 욕망이 지배하는 한, 오늘의 희생자들은 내일의 잠재적 가해자일 뿐이다.

편저자 빌 니븐(Bill Niven)은 영국의 노팅햄 트렌드 대학에서 독일현대사를 가르치는 정교수이며 독일의 나치 기억 문제를 연구하는 중진 학자이다. 스테판 버거(Stefan Berger)를 비롯한 10여명의 필진 구성도 충분히 신뢰할 만한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