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연

노무현정부, 나를 '가짜'로 몰아

거듭난 삶 2011. 8. 16. 1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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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AL機 폭파범 김현희 [上]

  • chosun.com
  • 입력 : 2011.08.16

지난 정권서 겪은 고초는 죄업에 대한 업보라 생각하나?
"나는 로봇이었다… 그러나 이제 나는 인간이다"

그때 바레인에서 죽었어야 - 미인이라 동정론?
北이라면 내게 돌 던졌을 것… 유족들 격려 덕분에 인간성 조금씩 회복

115명 숨진 테러를 정치적 이용 - 노무현정부, 나를 '가짜'로 몰아
방송출연 거부하자 거주지 노출, 국정원 보호도 못받아… 관련 직원들 처벌 대신 승진

"정말 배신이었다! 등에 칼을 꽂는 것과 같았다. 자기들 말 안 듣는다고 나를 노출했다. 자기들이 직접 나를 손댈 수는 없고 북한에서 와서 나를 살해하라는 것이었다."

'KAL기 폭파범' 김현희(49)씨는 우리 기억 속의 얼굴은 아니었다. 길 가다 만났다면 못 알아봤을 것이다. 24년의 세월이 흘렀다.

1987년 11월 29일 바그다드를 출발해 서울로 날아오던 KAL 858편이 공중폭발했다. 미얀마 근해 상공(上空)이었다. 탑승자 115명 전원이 숨졌다. 대부분 열사(熱砂)의 땅에서 일하다 3년 만에 귀국하는 중동 근로자였다. 이들의 시신도 찾지 못했다.

김현희씨는 “KAL기 폭파 때만 해도 나는 통일 임무를 수행한 것으로 믿었다”고 말했다. /이명원 기자 mwlee@chosun.com

그 미모의 폭파범은 이제 중년이 돼서, 지난 정권에서 겪은 일을 털어놓고 있었다. 목청을 높이다가 울먹이곤 했다. 흥분할수록 북한 억양이 살아났다.

"김대중 정부 때도 그런 일이 있었지만, 노무현 정부가 들어서자마자 나를 '가짜'로 만들고 온갖 의혹을 부풀렸다. KAL기 폭파 사건을 뒤집기 위해 정부 차원에서 나를 압박해왔다. 그때 나는 바깥 활동을 일절 안 하고 있었고, 딸이 막 걸음마를 하고 있었다."

―세상 사람들은 당신이 국가기관의 보호를 받으며 여유 있게 생활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좌파 정권이 만든 국정원(김대중 정부 이후)에서는 보호받은 적이 없다. 오히려 추위와 공포에 떨면서 도망쳐나온 내게 방송에 출연하라고 했다. 지휘부에서 이미 결정한 사항이라고."

―사람들이 당신에 대해선 궁금해했다. 방송에 출연할 수도 있지 않은가?

"내가 북한 공작원이 아니라 안기부 공작원임을 '고백'하라는 것이었다. 내가 '가짜'라고 말하라는 것이었다. 북의 김정일 정권이 저지른 KAL기 폭파 사건을 우리나라로 돌리려는 것이었다. 표적을 거꾸로 만들려는 것이었다. 이 비열한 공작의 나팔수처럼 된 방송 프로에 어떻게 나갈 수 있나. 국정원이 MBC 'PD수첩'에 출연하라고 강요했다."

―당시 여론 분위기에서 국정원의 고충도 있었을 것이다.

"내가 거부하니까, 국정원에서 내 남편을 불렀다. '정 그렇다면 방송 출연은 하지 말고 국정원 안에서 신부님들(KAL기 폭파 사건은 안기부 조작 사건이니 재수사하라고 서명운동을 하던 정의구현사제단을 지칭)을 모셔놓고 설명회를 갖는 걸로 하자'고 제안했다. 남편이 마지못해 받아들였다. 바로 그 시각에 MBC 'PD수첩'팀이 내 거주지로 들이닥쳤다. 나는 갓난아기를 업고 한밤중에 집을 나와 피신해야 했다."

―우리 사회에서 언론의 취재는 자유롭다. 당신은 뉴스 메이커였으니, 적극적인 취재를 나무랄 순 없는 것이 아닌가.

"나의 최고 보안(保安) 사항은 거주지 노출이다. 황장엽 선생에게도 북한이 테러하겠다고 암살단을 보냈고, 이한영(김정일 처조카)도 거주지 노출로 살해됐다(1997년). 이 때문에 오래전부터 경찰이 나를 보호하고 있었다. 그런데 자기들의 뜻대로 움직여주지 않는다고 내 거주지를 노출해 버린 것이다."

―언론 매체가 당신을 수소문해 취재했을 수도 있지 않은가?

"국정원에서 정보를 흘려준 사실을 나는 알고 있다. 이는 보호해야 할 사건의 '증인'을 말살하려는 것이다. 추운 겨울날 아이를 업고 나와 어디 가나. 허름한 단칸방에서 지금 9년째 그렇게 살고 있다."

―KAL기 유가족 중 일부도 당신을 '가짜'라고 주장하고 있다.

"서민과 노동자의 정부라면서 중동 근로자들의 희생을, 그 유가족들의 슬픔을 정치적 목적으로 악용했다. 사제단이 앞장서 그런 여론을 조성했다. 난 이해할 수 없다. 북한에서는 성경책이 발견돼도 대역죄고 가족이 멸절한다. 하느님을 부정하는 그런 정권을 옹호하고, 김정일 정권이 저지른 사건을 남한이 했다고 뒤집어씌우니, 과연 그들은 사제복을 입고서 정말 하느님을 믿는 것인지 모르겠다."

―당시 국정원으로부터 외국에 이민 갈 것을 권유받았다고 들었다.

"국정원 직원이 와서 직접 그렇게 말했다. 2년쯤 나가 있다가 오라고. 나를 보호하던 관할 경찰서에서는 '다른 지역으로 이사 가라'고 협박했다. '우유를 마시지 마라 (우리가) 독약을 넣을 수 있다, 신문을 보지 마라 탄저균을 넣을 수 있다'는 식으로 말이다. 우리가 세놓은 가게에는 영업을 못하도록 법원의 빨간 딱지를 붙여놓았다. (눈물을 흘리며)내가 말을 다 못하겠다."

―'국정원 과거사위원회'에서 KAL기 폭파 사건에 대한 재조사에 들어갔다. 당신은 한 번도 조사에 응하지 않았다. 보통 뱃심이 아니다.

"숱한 협박과 회유가 있었지만 근본을 훼손하고 다른 목적을 가진 조사에는 응할 수 없었다. KAL기 폭파 사건의 모든 자료는 국정원에 보관돼 있다. 내가 더 이상 보탤 것이 없다. 초동수사 때 급하게 하느라 약간의 오차가 있었지만 나중에 정정 확인됐다. 이들은 지엽적인 오류 몇 개를 갖고 트집 잡고 정치적으로 이용했다. 그렇게 해도 사실은 달라질 수 없다. 과거사위원회에서도 북한 정권의 소행으로 결론 내렸다(2007년 10월). 그런 결론을 내리고도 북한 정권에 대한 비판이나, 사과하라는 권고 한마디 없었다."

―지난 정권이 왜 그렇게 했다고 보나?

"이 사건을 뒤집으면 이전의 군부와 우파 세력이 도덕적으로 타격받는다. 정치 구도를 자신에게 유리하게 만들기 위해서 그랬다고 본다. KAL기 폭파 사건 직후 미국은 북한을 '테러 국가'로 지정했다. 노무현 대통령이 그 명단을 풀어달라고 했다고 들었다(2008년 10월 해제)."

―지난 정권에서 겪은 고초는 당신이 저지른 죄업에 대한 업보(業報)라는 생각은 없나?

"그것은 내 개인의 고통 문제만이 아니다. 115명이 숨진 테러 사건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나라가 어디에 있나. 돌아가신 분의 영혼을 말살하고 유가족을 속이는 범죄 행위다."

―지난 정권 시절의 국정원이 그랬지, 지금의 국정원이 그렇게 한 것은 아니니….

"그때 공작에 가담했던 이들은 처벌받는 대신에 승진했다. 국가관도 안보관도 없다. 이게 제대로 된 사회인가. KAL기 폭파 사건은 이명박 대통령과도 관련 있다. 당시 희생된 근로자 중 현대건설 직원이 60명 이상이었다. 이 대통령은 현대건설 회장이었다. 그럼에도 사건의 진실을 뒤집으려는 범죄에 대해 팔짱 끼고 보고 있는 게 한심하지 않은가."

―당신은 자신을 살인범으로 받아들이나, 아니면 체제의 희생양으로 받아들이나?

"나는 북한 정권의 로봇, 도구가 된 것이다. 자동적으로 명령을 수행한 것이다. 그렇게 했지만 유족들의 슬픔과 고통을 봤다. 그전까지는 상상도 안 해본 상황이었다. 내가 왜 이 짓을 했을까. 정말 잘못됐다는 걸 느끼게 됐다. 나를 이렇게 도구로 만든 김일성·김정일이 한없이 원망스러웠다. 근로자들도 희생됐고, 나도 그렇고 내 가족도 희생이 됐다."

―서글픈 얘기지만 당시에도 사건의 본질보다 당신의 미모가 더 화제가 됐다. 세간에는 TV에 나온 당신 모습을 보는 순간 "살려줘야 한다"는 동정론이 일었다.

"그런 얘기를 한다는 게 놀라웠다. 북한이라면 사람들이 내게 돌을 던졌을 텐데…."

그녀는 대법원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보름 뒤 특별사면(1990년 4월 12일)됐다. 그녀를 살려둔 것은 KAL기 폭파 사건이 북한 김정일의 지시에 의한 테러임을 증명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녀가 역사적 사건의 '유일한 증인'이었기 때문이다. 그녀의 증언으로 미국은 북한을 '테러 국가'로 지정했고, 베일에 싸였던 일본인 실종 사건이 북한 납치극으로 드러나 일본 열도를 흔들었다.

―당신은 이 자리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다. 살아 있다는 것은 당신에게 축복인가 지옥인가?

"당시 바레인 공항에서 우리 정체가 탄로 났을 때 준비한 독약 앰풀을 깨물었다. 그때 죽었어야 했다. 죽지 못하고 살아났을 때 참 괴로웠다. 지난 정권에서도 죽고 싶었다. 내가 큰 죄인이지만 나를 살려준 것은 '증인'이기 때문이었다. 진실을 지켜야 하는…."

"안기부 수사관에 내가 청혼… 결혼 허가에 2년"

"집 전화·휴대전화도 없어… 엄마 과거 잘 모르는 두 아이, 평범하고 자유롭게 살았으면"

그녀는 특별사면 뒤로 '이제 여자가 되고 싶어요'(1991년)라는 베스트셀러를 썼다.

"귀순자에게는 국가보조금이 나오지만 나처럼 검거된 사람에게는 그게 없었다. 안기부에서 살아갈 방도를 위해 책을 쓰라고 권했다. 그렇게 잘 팔릴 줄은 생각 못했다."

―'이제 여자가 되고 싶다'는 것은 어떤 마음이었나?

"출판사와 상의해서 그 제목을 했지만 내 마음이 좀 들어가 있었다. 어릴 때 공작원으로 선발돼 혁명가로서 살아왔지만, 이제부터는 평범한 인간으로 살고 싶었다."

―이 땅에서 평범하게 살 수 있을 것으로 봤나?

"소원이었다."

1987년 12월 15일 국내로 압송되는 장면. /박창선 기자

―책 인세 8억5000만원을 KAL기 폭파 사건 유족회에 건네준(1997년 12월) 걸로 안다.

"당시 유족들을 만나 악수를 나누고 많이 울었다. 유족들은 '마음고생 많이 했다. 잘 살아라'고 격려해줬다. 그분들에 대한 죄스러운 마음은 내가 평생 지고 가야 할 짐이다."

―진심으로 그 사건에 대해 죄책감을 갖고 있는가?

"그때만 해도 나는 통일을 위한 혁명가였다. 폭파한 것은 죄가 아니었다. 혁명가로서 임무를 수행한 것이었다. 하지만 조사를 받으면서, 재판정에서 유족들을 만나면서, 나 자신의 인간성을 회복해 갔다. 내가 한 짓이 통일을 위한 것이 아닌 큰 범죄임을 깨닫게 된 것이다."

―바로 1997년 말 당신을 담당하던 전직 안기부 수사관과 결혼했다.

"내게는 안기부의 안가(安家)가 제2의 고향이었다. 친하게 지내던 사람들은 수사관들뿐이었다. 하지만 이들은 근무지가 바뀌면 떠나갔다. 언제까지 이렇게 보호받으며 살아야 하나. 홀로서기를 해야 하지 않나. 사회적응을 위해 먼 친척 집에서 잠깐 살아보기도 했다. 안기부에서는 나보고 수녀(修女)가 되라고 권하기도 했다. 결혼은 못 할 줄 알았다. 바깥의 누구를 대놓고 만날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그러다가 지금의 남편에게 결혼해 달라고 청했다."

그녀의 남편은 "그때 나로서는 고민이 많았다. 김현희씨와 결혼하면 안기부라는 직장을 떠나야 하기 때문이다. 안기부에서도 보안 문제로 고민이 많았다. 안기부의 결혼 허가가 나는 데 2년쯤 걸렸다"고 말했다.

―결혼 생활에서 무엇을 꿈꿨나?

"나를 이해해주는 사람과 시골에서 조용히 살기를 원했다. 바깥에 나서지 않고. 지난 정권 전까지 그렇게 살고 있었다."

―5학년 아들과 3학년 딸을 두고 있다고 들었다. 자녀는 엄마의 과거에 대해 알고 있나?

"…아직 잘 모른다. 다만 매스컴에 나고 하니까 좀 이상하게 여기는 것 같다."

―동네에서 학부모들끼리 어울리는 기회는 있나?

"그런 모임에 나간 적이 없다. 동네에서 혹 나를 알아보는 주민들이 있을지 모르나, 일부러 만나는 경우는 없다."

―아이들이 집으로 친구를 데려오나?

"놀러오기 어렵다. 경호원도 있고."

―당신 아이는 어떻게 성장하기를 원하나?

"평범하고 자유롭게." 사생활에 관해 그녀의 말은 짧았다. 그녀 부부는 집 전화도 휴대전화도 없다. 공중전화를 이용하거나 경호원을 통해서만 연락이 된다. 이번 인터뷰 때는 4명의 경호원이 따라왔다.  

 

KAL機 폭파범 김현희 [中]

  •  

입력 : 2011.08.17

 

"폭탄 들고 비행기 타니 '어서 오세요' 인사… 남한사람 그때 처음 봐"

25세 처녀 공작원의 임무 - "남조선 비행기를 제끼라" 74세 공작원과 일본인 父女 행세
기내서 우리말 들려 동요했지만 통일위해 희생한다고 생각

"내 실물을 처음 보는 사람마다 '처녀 땐 통통했는데'라고 말한다. TV 화면에서 실물보다 크게 보여진 탓도 있을 것이다. 세월이 많이 흐르긴 했지만…."

안기부에서 보호받고 있을 때 그녀에게 권총 사격을 시키면 백발백중이었다고 한다. 그녀는 "공작원 때는 남자 한둘은 상대할 수 있는 격술(擊術) 실력은 됐다"고 말했다. 그녀는 상체를 꼿꼿이 세우고 앉았다. 이제 24년 전
바그다드 공항으로 돌아갈 때가 됐다.

▲ 법정에 들어서는 김현희. /박창순 기자
―폭파 목적으로 KAL 858편에 탑승했다. 그때 당신의 감정 상태를 기억하나?

"
평양 동북리 초대소에서 '남조선 비행기를 제끼는 것'이라는 임무를 받았다. 88서울올림픽을 앞두고 남조선 괴뢰의 두 개 조선 책동을 막고 적들에게 큰 타격을 주라. 적후(敵後·적의 배후)에서 임무를 수행해내야 한다는 생각만 했다."

―하지만 그때 당신은 25세 처녀였다.

"공작원으로서도 첫 임무였다."

―그런데도?

"…사실 김승일 할아버지(공작 파트너·당시 74세 추정)가 강심제를 줬다. 비행기에 올라타니 한국말로 '어서 오세요'라고 인사했다. 공작원 훈련을 7년8개월 받았지만, 그때 처음 남조선 사람을 봤다. 우리 정체가 탄로 날까 봐 조마조마했다."

―비행기 안에는 우리나라 중동 근로자들이 대부분이었다. 무고한 사람들을 죽인다는….

"
북한에서 연구할 때 외국인이 타지 않는 항공편을 노렸다. 국제 문제가 안 되도록."

―3년 만에 귀국하는 이들이 우리말로 얘기하는 걸 들었나?

"좌석 뒷줄에서 세 번째에 앉았다. 옆자리에는 서양인이 앉았다. 눈을 감고 있으니 우리말이 들렸다. 회사 얘기를 하는 것 같기도 했고. 저녁 식사를 마치자 다들 잠들었다. 약간의 동요가 있었지만, 중앙당에서 어련히 알아서 이 임무를 줬겠나 했다. 통일을 위해선 희생돼야 한다는 혁명가로서의 결의를 다졌다."

―그때까지 당신이 알고 있는 바깥세상 정보는?

"세상을 아는 것보다,
북한이 가르친 대로 따르는 로봇이었다. 물론 해외실습도 했다. 바깥세상이 북한보다 풍요롭고 자유로웠다. 하지만 남한이 늘 공격하려고 하기 때문에 우리는 이럴 수밖에 없다고 배웠다. 북한이 어렵고 못살아도 다른 마음을 가질 수 없었다. 용납되지 않았다."

―KAL기 폭파 지령을 받고 김정일을 만난 적 있나?

"없다. 임무를 받고서 노동당 대외정보조사부(납치·테러·해외첩보 임무) 이용혁 부장을 초대소에서 만난 적이 있다."

―왜
김정일의 직접 지시에 의한 것이라고 주장하나?

"북한은 김정일의 직접 지시 없이는 총 한 방도 쏠 수 없는 나라다. 한 달 동안 공작 코스를 정할 때, 할아버지(김승일)가 바그다드 노선이 부당하다고 했다. '전시국가를 지나기 때문에 검색이 까다로울 것'이라는 의견을 제시했다. 그때 대외정보조사부 과장이 '이미 비준이 난 거니까 이번에 그냥 하라'고 했다. 북에서는 김일성·김정일이 아니면 비준을 할 사람이 없다. 대남부서는 김정일이 책임지고 있었다."

▲ 김현희씨는 “공항 검색요원이 시한폭탄 배터리를 빼냈을 때 임무 수행이 틀렸구나 생각했다”고 말했다. /이명원기자 mwlee@chosun.com

1987년 11월 12일 오전 8시 30분, 그녀는 김승일과 함께 평양 순안 비행장을 출발했다. 출발 직전에 "우리는 적후(敵後)에서 생활하는 동안 3대 혁명규율을 잘 지키고… 생명의 마지막까지 친애하는 지도자 동지의 높은 권위와 위신을 백방으로 지켜 싸우겠다"고 선서했다.

그녀 일행은 그날 밤
모스크바에 도착한 뒤 곧바로 부다페스트(헝가리)로 날아갔다. 거기서 육로로 (오스트리아)에 들어갔다. 이때부터 일본인 부녀로 위장해 위조 일본 여권을 사용했다. 그녀는 코트, 스웨터, 구두, 손목시계, 손가방 등 일제상품 위주로 쇼핑했다. 두 공작원에게 주어진 공작비는 1만달러였다. 이들은 오스트리아에서 다시 항공편으로 베오그라드(유고슬라비아)로 갔다. 여기서 함께 따라온 공작지도원으로부터 폭약이 장착된 일제 파나소닉 트랜지스터 라디오와 액체 폭약을 건네받았다. 이라크 항공편으로 바그다드에 들어간 날은 11월 28일이었다.

―왜 이렇게 동선(動線)이 길었나?

"신분 위장을 위해서였다. KAL 858편을 타기 위해 할아버지가 연구를 많이 했다."

―파나소닉 트랜지스터 라디오는 한뼘 크기였던 것으로 아는데.

"그렇다. 스위치 작동 9시간 뒤 폭발한다. 전지약(배터리)이 특수제작된 것이었다. 절반은 폭약, 절반은 라디오를 틀 수 있게 되어 있었다. 다른 걸로 대체할 수 없는 배터리였다."

이들이
바그다드 공항 보안검색대를 통과할 때, 검색요원이 "배터리를 갖고 비행기를 탈 수 없다"며 라디오에서 배터리 4개를 빼내 쓰레기통에 던져버렸다. KAL기 폭파가 무산될 수 있는 순간이었다.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해외를 들락날락했지만 그런 적이 없었다. 소지품을 다 꺼내게 하는 등 검색이 심했다. 아랍 국가에 대한 정보가 없었던 탓이다. 어찌할 줄 몰라 할아버지 쪽을 쳐다봤다. 할아버지가 태연하게 배터리를 주워 끼운 뒤 라디오를 틀었다. '그냥 라디오인데 승객에게 이래도 되느냐'고 항의했다. 그렇게 통과했다."

―만약 거기서 실패했다면?

"계획 담당자들은 문책당하고…. 발각 난 것은 아니었으니 나는 다시 나왔을지 모른다."

이들은 좌석 위 선반에 트랜지스터 라디오와 액체 폭탄을 담은 쇼핑백을 둔 채 중간기착지
아부다비(아랍에미리트)에서 내렸다.

KAL기가 폭파할 경우 아부다비에서 내린 탑승자 15명이 추적 대상이 된다. 그녀 일행은 '흔적'을 지워야 했다.
로마행 비행기로 갈아타는 '도주용' 티켓을 따로 준비해뒀다. 그 티켓은 통과비자 문제에 걸렸다. 어쩔 수 없이 타고 온 항공권에 찍힌 대로 바레인행(行)을 타야 할 운명이었다.

다음 날 아침 바레인 비행기를 탈 때까지 통과여객 대합실에서 기다리는 동안,
미얀마 근해 상공에서 KAL기는 폭파됐다.

―대합실에서 KAL기가 언제 터질지 시간을 계산했나?

"제대로 폭파가 됐는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당시는 우리의 탈출로가 막혀버려 그게 피를 말렸다. 우리에게 수사를 좁혀올 텐데, 대합실에서 빠져나올 수 없고…."

―당신은 115명이 죽는 폭파 장면을 보지 못했다. 이 때문에 자신의 범죄에 대해 죄책감이 덜한 것 아닌가?

"당시에는 죄책감이란 게 없었다. 그런 생각을 했으면 혁명가가 아니고, 북한 공작원이 아니다. 뒷날 유족들과 대면하기 전까지는 몰랐다. 재판정에서 '네가 했을 리 없다. 왜 안 했다고 말하지 않느냐'는 유족의 절규에 정말 안타깝고 죄스러운 마음이었다. 빨리 죽여달라는 생각만 했다. 죽는 것이 쉽고 살아 있는 게 고통이었다. 내가 살아남을 줄은 생각을 못했다."

바레인 공항서 체포 - 입국카드에 신이치·마유미… 姓 대신 이름만 써 꼬투리 잡혀
김승일, 공항 가는 길에 '혹시 모르니' 하며 독약앰풀 건네


토요일 오후, 이들은 바레인에 내려 호텔에 투숙했다. 이슬람권에서는 일요일이 공휴일이 아니어서 여행사가 문을 연다는 사실을 몰랐다. 그래서 이틀 밤을 묵었다.

"아랍 국가에 대한 기본 정보가 전혀 없었다. 공작 자금 때문에 책상머리에서만 작전을 짰기 때문이다."

이들에 대한 추적이 시작됐다. 바레인 입국카드 명단에 '신이치' '마유미'라고 적힌 게 단서였다. 일본인이라면 '하치야 신이치'와 '하치야 마유미'로, 혹은 '하치야'란 성(姓)만 쓴다.

"할아버지가 그렇게 쓰라고 했다. 신원이 완전히 안 드러나도록 나름대로 계산한 것이었다. 그게 꼬투리가 될 줄 몰랐다. 할아버지 여권은 진짜 일본인을 도용해 문건상 위조가 아니었다. 내 여권 번호는 남자에게 쓰는 번호였다. 하지만 그때까지 유럽을 다녀도 적발된 적은 없었다."

―그날 밤 한국대사관 직원이 호텔로 당신을 찾아오지 않았나?

"포위망이 좁혀 들어오고 있음을 느꼈다. 나는 모른 척 누워 있었고, 할아버지와 필담을 나눈 뒤 돌아갔다."

―그 직원이 돌아간 뒤 어떤 말을 나눴나?

"할아버지가 '폭발한 것은 확실한 것 같다. 증거가 없으니 우리를 체포할 수 없다'고 했다. 다음 날 아침 공항으로 가면서 '태연하게 행동하라. 비행기를 타면 끝난다'고 했다. 그러면서 '혹시 모르니…'하며 말보로 담배(독약 앰풀)를 줬다."

"대학 2학년 때 공작원 뽑혀… 춘향이 역 맡는 줄 알아"

김현희씨는 어렸을 때는 영화배우, 좀 더 자라서는 외교관이 꿈이었다. 그런 그녀가 평양외국어대 일본어과 2학년 재학 중인 1980년(18세 때) 공작원으로 뽑혔다.

"문건을 검토하고 학교에 와서는 나에 대해 요해(了解·파악)한 뒤, 중앙당 간부가 세 차례 면담했다. 아버지는 외교관(당시 앙골라 주재 대사관 근무)이라 출신 성분이 좋았다. 나도 모범생이었고, 일본에 침투시키려는 목적이어서 일본어를 한 내가 합당했던 것 같다."

―그때 '공작원'을 뽑는 심사인 줄 알았나?

"뽑힐 때는 몰랐다. 당시 '춘향이 영화를 찍는다'는 말이 퍼져 있어, 춘향이 역을 맡는 줄 알았다. 김정일이 많이 관심을 가진 영화였다. 선발 심사가 끝난 뒤, 중앙당 간부가 승용차로 집까지 데려다 주며 '옷가지를 챙겨 트렁크에 담아라. 오늘 쉬고 내일 데리러 오겠다'고 했다. 내가 어떻게 될지 부모님도 정확히 몰랐다."

―하지만 뽑혔을 때 선택된 사람이라는 느낌이 있었나?

"중앙당은 힘 있는 데다, 신 같은 존재인 김일성을 가장 가까이 모시는 곳이다. 거기에 뽑혔으니 영광으로 생각했고 들떠 있었다. 부모님을 떠난다는 슬픔은 없었다. 아직 어렸으니까."

―자신이 무엇을 하게 될지를 언제 알았나?

"처음 묘향산 지구에 있는 '금성정치군사대학'에 들어갔을 때다. 여기서 밀봉(密封) 교육을 받았다. 통일을 위해 일한다는 혁명가의 긍지를 배웠고, 통일 혁명을 하다가 실패한 사례 분석, 정보수집, 포섭, 행군, 격술, 사격 훈련, 비트에 은신하는 법 등을 배웠다. 그 뒤로 남한화 교육, 일본인화 교육, 중국인화 교육, 해외실습까지 7년8개월 공작원 교육을 받았다."

―왜 공작조를 2명으로 편성하나?

"혼자는 안 보낸다. 서로 보완하는 면도 있지만, 감시하는 역할도 한다."

―김승일과 일본인 부녀로 위장했다.

"할아버지는 6·25때부터 그 부서에서 일해왔다고 들었다. 병약한 노인과 막내딸이 함께 여행하면 의심받지 않았다. 실제 약을 챙겨주곤 했다. 힘에 겨워 '쉬어가자'는 말을 자주 했다. 1984년에도 같이 해외여행을 한 적이 있다. 그때 할아버지는 남한에 사업 연계를 위해 잠시 들어갔다 나왔다. 한조(組)가 된 것은 그의 경험을 내게 인계하는 면도 있었다."

―김승일과는 서로 대화를 많이 나누었나?

"공작원은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지 않는다. 서로 물어서도 안 된다. 자기 본명도 안 밝힌다. 나를 '마유미'로 불렀다. 서로 일본어로 대화했다. 물론 오래 같이 있다 보면 상대에 대해 조금은 알 수 있다. 수사받을 때 내놓은 자료가 그렇게 얻은 것이다."

―김승일은 어떤 사람이었나?

"온순하고, 책 읽기를 좋아하고 연구하는 스타일이었다."

―그런 양반이 공작원이 됐나?

"성격과는 상관없지 않은가."

김승일은 바레인 공항에서 정체가 탄로 나 독약 앰풀을 깨물고 숨졌다. 시신은 국내로 송환돼 부검처리됐다. 체중이 45kg도 채 안 됐다고 한다.

 

 

 

"사형 선고 순간 눈물이 핑 돌아… 北의 부모님 생각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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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1.08.18

 

KAL機 폭파범 김현희 <下>
안기부 조사 받을 때 - 수사관들 서울 말씨 상냥, 말 못알아듣는 것처럼 꾸미려 우스갯소리에도 안 웃으려 해… 한국말로 잠꼬대 할까봐 걱정
한국에서 가장 인상적인 점은? - 자유롭게 말하고 생기 있어… 북한 역사는 김일성만 가르쳐, 한글 누가 만들었는지 몰랐다… 한국역사 여기 와서 알아

"10분 뒤에 로마행(行) 비행기가 뜨는데 그것만 타고 날라버리면 되는데. 이젠 틀렸구나. 탈출하기 힘들겠구나."

김현희씨는 무대에서 독백하는 듯했다.

그녀 일행의 탈출은
바레인공항 검색대에 막혔다. 위조 일본 여권으로 밝혀졌기 때문이다. 바레인 주재 일본대사관 직원이 나와 있었다.

"우리는
일본으로 송환될 처지였다. 그때 할아버지(공작 파트너 김승일)가 '일본에 보내지면 비밀만 다 불고 고생하다 죽으니 일본 가는 비행기 안에서 자결하는 게 낫다. 나는 살 만큼 다 살아서 괜찮지만 마유미는 아직 젊은데 미안하다'고 속삭였다."

―자살을 권유받았을 때의 심경은?

"독약 앰풀을 갖고 있었지만 이렇게 깨물게 되는 상황이 닥칠지는 몰랐다. 마지막이구나. 그때 어머니 얼굴이 떠올랐다."

―주저하는 마음은 없었나?

"사실 앰풀을 깨무는 연습을 한 적은 없었다. 그래서 할아버지에게 '비행기를 타고 가면서 신호를 해달라. 내가 먼저 깨물고 이를 확인한 다음에 할아버지가 깨물라'고 했다."

일본행 비행기 안에서 하려던 자살 계획은 어긋났다. 이들은 대합실에 억류돼 있었다. 바레인 경찰이 그녀에게 "핸드백을 달라"고 했다. 그녀는 담뱃갑을 챙기고 가방을 건네주었다. 경찰은 담뱃갑도 요구했다. 그녀는 독약 앰풀이 든 담배를 꺼내고 담뱃갑만 건네줬다. 경찰은 "그 담배도 달라"고 했다.

경찰이 담배를 빼앗으려는 순간 그녀는 담배 필터를 깨물었다. 경찰이 덮쳤고, 앰풀이 깨지면서 기화된 청산 성분이 그녀의 몸속으로 들어갔다. 그 사이 김승일도 앰풀을 깨물고 들이마셨다.

―'음독(飮毒) 쇼'라는 주장도 있었다.

"당시 일본대사관 직원(스나카와 쇼준)이 현장을 보고 쓴 수기가 있다."

2003년 출판된 '극비지령'이란 책에는 이렇게 기록돼 있다.

'신이치(김승일)와 마유미(김현희)는 격렬한 발작 상태에서 전신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의자에 앉은 채였다. 몸의 모든 근육 말단까지 경련 상태였다. 마유미의 몸이 더 격렬하게 경련을 일으켰다. 심장에 전기 쇼크를 받은 것처럼 몸이 튀어 오르기도 했다. 눈을 감고 입은 조금 열려 있었다. 입 왼쪽에 찢어진 상처가 보이고 피가 묻어 있었다. 이번엔 신이치의 경련이 심해지고 마유미는 조용해졌다….'

―독약 앰풀을 마시려고 했을 때와 그 직후의 상황을 기억하나?

"깨문 순간부터 정신을 잃었다. 기억이 전혀 없다."

―바레인 병원에서 깨어났을 때 무엇을 봤나?

"말소리가 들렸다. 내가 살아났다는 걸 알았을 때 정말 괴로웠다. 살면 안 되는데, 이 비밀을 어떻게 지킬 수 있나. 죽은 할아버지가 부러웠다. 어떻게 하면 죽을 수 있나를 생각했다."

▲ 김현희씨는“88서울올림픽 저지 공작이 한국에 와서 보니 선거와 연관돼 정치 사건이 됐다”고 말했다. /이명원 기자 mwlee@chosun.com
이들의 국적과 정체는 아직 불분명한 시점이었다. 하지만 안기부의 한 수사관은 독약 앰풀로 자살 시도를 했다는 소식을 듣는 순간 '북한 공작원'으로 찍었다. 2년 전(1985년) 재일교포 간첩 신광수를 검거할 때 그의 옷깃에서 똑같은 독약 앰풀이 발견됐던 것이다.

신광수는 1986년 사형 판결이 확정된 뒤 1988년 무기징역으로 감형됐다. 이듬해 일본 의원들은 '민주화 운동으로 체포된 재일한국인 석방을 요구하는' 탄원서에 서명한 적이 있다. 당시 간 나오토 일본 총리도 그 중 한 명이었다. 그렇게 해서 신광수는 김대중 정부 시절인 1999년 '밀레니엄 사면'으로 풀려났다. 이듬해 비전향 장기수 송환 당시 북한으로 건너갔다. 뒤늦게 일본 경찰은 신광수가 일본인 납북에 관여했다며 국제 수배했다.
간 나오토 일본 총리도 이 문제로 비판받았다.

―당신은 새벽 3시쯤 서울로 가는
대한항공 특별기에 실렸다. 그때의 심경은?

"한밤중에 옷을 갈아입으라고 했다. 그때까진 몰랐다. 지프에 태워 어디로 갔다. 비행장 안으로 들어가 멈췄는데, 대한항공 태극마크를 봤다. 한국말이 들렸다. 범의 소굴로 가는 심정이었다. 온갖 고문받고 갈기갈기 찢겨서 비밀만 털어놓고 죽게 되리라."

―기내에 있던 우리 수사관을 보니 어땠는가?

"처음부터 눈을 감아버렸다. 아무것도 보지 않았다. 누군가가 '네가 북한 사람이라는 걸 우린 다 알고 있다'고 말했다. 혹시 혀를 깨물까 봐 입마개가 씌워졌다. 장차 받게 될 고문을 떠올리니 무서웠다. 속으로 '굴하지 않고 싸우리라'는 혁명가요를 불렀다."

―국내에 압송된 날은 대통령 선거 전날(1987년 12월 15일)이었다.

"공작 임무를 받고
북한을 떠날 때도 대통령 선거가 있는 줄 몰랐다. 그런 걸 알려주지도 않았다. 오직 서울올림픽 저지가 목표였다. 88년 1월 17일까지 참가국 등록 신청을 받으니 그 전에 타격을 줘야 한다. 그러면 다른 국가들이 신청을 안 할 것이다. 그런데 한국에 와서 보니 선거와 연관돼 정치적 사건이 됐다. 이번 사건으로 노태우 후보가 당선됐다는 말을 들었다."

―선거에 이용될 것이라는 정세 판단을 못하고 공작한 것인가?

"북한에서도 전두환을 '테러 대장'이라고 욕을 많이 했다. 풍자극도 했다. 그런 군부를 도와주려고 했겠는가."

―당시
전두환·노태우 대통령을 만난 적 있나?

"없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만난 적이 있다."

―당신은 남산 안기부 지하실에서 조사받았다. 첫날을 기억하나?

"고문받고 험하게 다뤄질 줄 알았는데 수사관이 '오느라 고생했으니 이제 좀 편히 쉬어라'고 했다. 남자들의 서울 말씨가 왜 이리 상냥한가. 그리고 목욕을 했던 기억이 난다."

그날 밤 수사관들은 자해 방지용 입마개를 떼는 문제로 고심했다. 그걸 제거한 뒤 만약 그녀가 자해라도 하면 한국이 고문 조작의 누명을 뒤집어쓸 판이었다. 어쨌든 조사하려면 뗄 수밖에 없었다.

―그때는 자해할 용기가 사라졌는가?

"방 안에서 여러 명의 수사관들이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다른 짓을 할 수가 없었다. 어떻게 하면 비밀을 지켜낼 수 있을까만 생각했다."

―조사를 받으면서 첫 문화적 충격은?

"다음 날인가 잠결에 수사관들끼리 '누굴 찍었다'고 말하는 걸 들었다. 무슨 선거를 그렇게 하나 의아했다."

―조사받을 때 중국어와 일본어를 섞어 답변했다고 들었다.

"혹시 잘되면 중국으로 추방되지 않겠느냐는 희망을 갖고 있었다. '빠이취히(百翠惠)'라는 중국인이라고 주장했다. 수사관들은 '네가 북한에서 온 것을 안다' '네가 잘못되게 시킨 김정일이 나쁘지' 말했다. 말을 못 알아듣는 것처럼 꾸미는 건 못할 짓이었다. 자기네끼리 우스갯소리를 할 때 웃지 않으려고 표정 관리를 하는 것도 힘들었다. 무엇보다 자면서 한국말로 잠꼬대를 할까 봐 신경이 쓰였다."

―당신은 12월 23일 오후 5시쯤 자백한 걸로 되어 있다. 수사를 시작한 지 8일 만이다. 전날에 승용차 뒷좌석에 태워 서울 야경을 보여준 게 주효했다고 하는데.

"그런 구경도 하고, 수사관들이 얘기하는 걸 보면서 느껴졌다. 내가 생각하는 것과 전부 달랐으니까. 아무리 내가 거짓말해도 정확한 사실을 들이대니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양심의 가책도 들었고."

―수사관이 "이제 이름이라도 알자"고 했을 때 당신이 "쇠 금(金)자"라며 처음으로 우리말을 했다는데.

"공작원으로 뽑힌 뒤 '김옥화'라는 가명을 썼다. 8년 만에 내 본명을 대려니 쑥스러웠다. 한국말을 하면서 자백하게 됐다. 사실 입을 열고 싶어도 나 때문에 처벌받을 북한의 가족이 늘 걸렸다. 인간으로서 진실을 밝히고 죽자, 그게 죗값을 치르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그 뒤 부모 소식은?

"모른다. (눈시울을 붉히며)나 때문에…."

▲ 공작원 훈련 시절 일본어 교사였던 다구치 야예코씨 아들과의 만남(2009년).
―실제 겪어본 남한에서 가장 인상적인 점은?

"자유롭게 말하고 표현하고 생각하는 그런 자유다. 삶에 대한 생기가 느껴졌다. 역사에 대해서도 다시 알게 됐다. 한글을 누가 창제했는지도 몰랐으니. 북한에서는 김일성이 가장 위대하다는 것밖에 몰랐다."

―역사 지식 부족은 당신 개인의 문제가 아닌가?

"전반적으로 그렇다. 북한 사람들은 역사를 모른다. '삼국이 있었다. 고려가 통일했다'는 건 안다. 하지만 역사적 인물에 대해 가르치지 않는다. 김일성만 가르치고 그걸로 시험친다. 거짓 교육이었다."

―당신은 과거에 한 언론인을 만나 '남한에서는 히스토리(history)를 가르치고 북한에서는 히즈 스토리(his story)를 가르친다'고 말했다.

"…김일성만 가르쳤으니, 여기에 와서 한국 역사가 있다는 걸 새삼 알았다."

국내 압송 당시 '하치야 마유미'였던 그녀는 1988년 1월 15일 '김현희'라는 이름으로 첫 기자회견을 가졌다. 1990년 3월 27일
대법원은 사형을 확정했다.

"나는 당연히 죽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사형 선고를 받는 순간 맥이 탁 풀린다고 할까, 눈물이 핑 돌고 주저앉게 되더라. 부모님 생각이 났다. 그때는 나도 별수 없는 인간이었다."

보름 뒤 그녀는 특별사면됐다.

―세상 사람들의 눈에 당신은 어떻게 비칠까?

"나를 어떻게 인식하느냐에 따라 다를 것이다. 부정적일 수도 긍정적일 수도…."

 

"숨어 살고 싶었다, 하지만 조용히 살 팔자가 아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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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1.08.18

 

▲ 김현희. /조선일보DB
처음 만났을 때 "무슨 차편으로 왔느냐"고 인사를 건넸는데 그녀는 "그런 거 물으면 안 됩네다"고 사무적으로 답했다. 대화를 나눌수록 그녀는 단단한 느낌을 주었다.

그래서 이런 농담도 했다.

―같이 살면 남편이 꼼짝 못하겠군.

"남편이 경상도 사람이라 가끔 '꽥~'할 때는 있다. 나는 조용히 이야기하는 편이다."

그녀는 자신을 '가짜'로 몰고 가려던 지난 정권에서 겪은 일을 말할 때는 감정 조절을 잘 못했다. 언성도 높았고 눈물을 보이기도 했다.

―스트레스를 받으면 어떻게 푸나?

"…빨래하고."

―대외활동도 별로 없고, 집에서 주로 무얼 하나?

"신문을 처음부터 끝까지 꼼꼼하게 본다. 책도 읽고. 얼마 전에는 조지 오웰의 '1984'를 읽었다. 나는 북한을 알기에 이 책이 더욱 실감 났다."

그녀는 안기부 조사 과정에서 자신에게 일본어를 가르친 '리은혜'에 대해 자세히 진술했다. 일본 경찰은 이를 토대로 몽타주를 만들었고, 그녀에게 사진 확인을 받은 다음 리은혜가 1978년 두 아기를 두고 실종된 '다구치 야예코'라고 발표했다. 그녀는 2009년 다구치의 가족과 만났다. 작년에는
일본을 방문했다. 일본인화 공작교육을 받았지만 그때 처음 일본을 가봤다.

―생전에 황장엽씨를 만난 적은 있나?

"
노무현 정권 말인가 황장엽 선생이 나를 만나고 싶다고 해서 찾아갔다. 내가 '가짜'로 몰려 국정원과 싸울 때였다. 황 선생이 '거짓에 절대 굴하지 말고 투쟁하라'고 말했다."

―계속 숨어 살 건가?

"참회하면서 숨어 살고 싶었다. 그런데 조용히 살 팔자가 아닌 것 같다."

―남한에서 24년을 살았는데 말씨가….

"나이를 먹을수록 북한 말투가 심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