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양상훈·워싱턴 지국장
신(神)은 한국도 만들었지만,한국인도 만들었다
우리는 위대한 국민인가?… 이제 '그분'의 명복을 빌며
우리의 정치도 한고비를분명히 넘어야만 한다
워싱턴에서 일을 끝내면서 들은 마지막 뉴스가 불행하게도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였고, 충격적인 북한 핵실험이었다. 경천동지할 두 뉴스가 이틀 사이에 터지는 게 지금 대한민국이 처한 상황이고 이 국민의 팔자다. 정말 외국인들의 시선까지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노 전 대통령이 자살을 했다는 소식을 듣는 순간 2005년 8월 그를 청와대에서 보았던 때가 떠올랐다. 당시 노 전 대통령은 한나라당과의 연정(聯政)을 제안해 정국에 일대 소용돌이를 만들고 있었다. 상황이 여의치 않자 그는 청와대로 언론사 정치부장들을 불러 연정 설명회를 열었다.
노 전 대통령 옆자리에 앉게 된 필자는 2시간 반 동안 열변을 토하는 그의 옆 모습에서 오히려 지치고 피곤해하는 기색을 보았다. "위기다" "힘들다"는 말을 거듭했고 "죽겠어, 정말"이라고 화를 내기도 했다. 그의 피로는 지난 수년간 그 스스로 만들어온 소용돌이의 한가운데에서 어쩔 수 없이 누적된 것이었다.
돌이켜 보면 노 전 대통령의 등장 자체가 소용돌이였다. 2005년 당시 여권 내 친노 직계 그룹이 만들었다고 알려진 한 보고서도 노 전 대통령이 소용돌이 정치로 성공했다고 분석한 적이 있다. 노트북에서 그 보고서 요약을 다시 찾아내 읽어 보았다. 그 보고서는 노 대통령이 소용돌이 정치로 성공했지만 임기 후반기엔 오히려 다른 소용돌이가 노 대통령을 삼킬 수 있다고 우려하고 있었다. 이 예측은 노 대통령 임기 후에 비극적으로 적중하고 말았다.
소용돌이의 정치란 해방 직후 혼란스러운 우리나라 정치를 보고 한 미국 외교관이 붙인 이름이라고 한다. 노 전 대통령의 서거를 보면서 해방 후 6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우리 사회가 소용돌이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다. 민주화는 됐지만 '법치(法治) 없는 민주주의' '내 맘대로 민주주의' '승자독식 민주주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지금의 우리 사회는 지역 간, 정당 간, 계층 간, 세대 간, 이해집단 간 충돌이 만들어 내는 커다란 소용돌이 그 자체가 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새로운 소용돌이가 그전의 소용돌이를 삼키고 더 큰 소용돌이가 작은 소용돌이를 삼키는 악순환이 끝도 없이 이어지고 있다.
이 소용돌이의 중심에는 지도자들의 좁아터진 도량과 "너 죽고 나 살자"식의 대결주의가 자리잡고 있다. 지금 지도자들 중 몇 명이라도 이 소용돌이 속에서 몸을 빼내면 사회의 기풍은 어느 한순간에도 바뀔 수 있지만 그렇게 할 만한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이명박 대통령, 박근혜 전 대표, 정세균 대표, 이회창 총재… 모두가 소용돌이 속에서 서로 물고 뜯고만 있다. 이런 상태로 우리 앞으로 한발 한발 다가오는 거대한 남북 소용돌이를 어떻게 넘어갈지 아득할 뿐이다.
청와대에서 노 전 대통령 설명회를 듣고 나서 얼마 안 돼 한 권의 책을 선물 받아 읽었었다. 각 분야 학자들이 모여 펴낸 그 책의 제목은 '대한민국 희망 프로젝트―우리는 실패에서 희망을 본다'였다.
책의 결론은 '위대한 나라의 조건은 좋은 리더와 위대한 국민'이라는 것이었다. 자세히 읽어보니 위대한 나라가 되려면 리더는 그저 좋은 정도면 되지만, 국민은 반드시 위대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책에는 "신(神)은 아르헨티나도 만들었지만 아르헨티나 사람도 만들었다"는 구절이 있었다. 아르헨티나처럼 넓고 비옥한 국토를 갖고도 아르헨티나 국민이 못나서 나라가 질곡에 빠져 있다는 것이다. 국민이 위대하면 나쁜 지도자는 설 자리가 없고, 좋은 지도자는 위대한 지도자로 발돋움한다. 국민이 어리석으면 나쁜 지도자는 활개를 치고, 좋은 지도자는 자라나지 않는다.
지금 이 글을 쓰며 "우리는 위대한 국민인가?"라고 혼자서 묻는다. 그 책에 이 내용을 쓴 학자는 "신(神)은 한국도 만들었지만, 한국인도 만들었다"고 했다. 우리는 아르헨티나와는 정반대로 국토는 좁고 척박해도 국민은 인류 역사에 남을 기적을 이룩한 국민이다. 바로 그런 우리 국민이 이 모든 소용돌이를 물리치고 잠재울 수밖에 없다.
2005년 8월 그날 노 대통령 설명회가 끝난 뒤 사진 촬영 장소로 이동하면서 그의 옆에서 걷게 됐다. 노 대통령이 혼잣말처럼 "우리 정치가 한고비를 넘어야 하는데…"라고 했던 그 모습이 어제 일처럼 떠오른다. 노 전 대통령 자신을 포함해 우리 모두가 아직 그 한고비를 넘지 못하고 있다.
노 전 대통령의 명복을 빌며 그의 비극이 대한민국 소용돌이 정치를 끝내는 한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그러지 않고서는 대한민국은 무엇보다 앞으로 남북 간에 일어날 소용돌이를 헤쳐나갈 방도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