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산이잖아” 홀대하던 제품, 역수입되자 “사자”
동아일보
의료-과학기술 산업 ‘코미디 같은 사대주의’
국내대학-실험실 외면에 美英업체로 ‘항체’ 수출
똑같은 제품 상표만 바꿨는데 2배 가격에도 구입
“공짜로 드리겠습니다. 꼭 한번 써 주세요.” “정 그러시면 저쪽에 넣어두고 가세요.”
연구원은 실험실 한쪽에 있는 냉장고를 가리켰다. 그러면서도 영 내키지 않는 눈치였다. 생명과학벤처기업 영인프런티어 이종서 대표(46)는 2004년 말 영업사원과 함께 국내 한 대학 연구실을 찾아가 자사 제품 ‘AbFRONTIER’의 샘플을 냉장실에 넣고 실험실을 나왔다. 발걸음이 무거웠다. 일주일 뒤. 그 실험실에 다시 찾아갔다.
“어떠셨어요? 외국 제품과 크게 다르지 않죠?” 냉장고 문을 열었다. 이 대표가 넣고 간 샘플 제품이 포장도 뜯기지 않은 채 그대로였다. 그 옆에는 외국에서 수입한 제품이 보란 듯이 놓여 있었다. 억장이 무너졌다. 이렇게 퇴짜 맞은 게 몇 번째인지 모른다.
과학기술계가 ‘메이드 인 코리아’ 제품을 외면하고 있다. 외국 기기만 선호하는 분위기와 국산 제품의 품질을 보증하는 제도가 없는 것이 문제다.
○ “외국 제품 써야 논문 심사에 유리”
2002년 회사를 설립한 이 대표는 이듬해 국내 처음으로 ‘항체(抗體)’를 생산하기 시작했다. 항체는 새로운 질병 치료제로 주목받고 있다.
이 대표는 직접 만든 항체를 판매하려고 대학과 기업의 실험실 문을 두드렸다. 그러나 반응은 냉담했다. 외국에서 공부하고 온 연구자들은 대부분 이전에 쓰던 외국산 항체를 국내에 돌아와서도 그대로 사용했다.
그래서 국내에서 공부한 연구자를 찾아 설득했다. “실험에 사용해 보시면 좋은 제품이라는 걸 확인하실 수 있을 겁니다. 외국 제품에 비해 성능이 떨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실험으로 입증한 자료도 여기 있어요.” “좋은 제품인 것 같지만 저도 어쩔 수 없네요. 외국 제품을 써야 국제학술지에 논문이 실릴 가능성이 좀 더 높으니까요.”
○ 해외에서 활로를 찾았지만…
하는 수 없었다. 해외로 나갈 수밖에. 이 대표는 2006년부터 직접 만든 항체를 영국과 미국의 유명 항체회사에 주문자상표부착생산(OEM) 방식으로 수출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희한한 일이 벌어졌다. 최근 이 대표는 여느 때처럼 자사의 항체를 홍보하려고 한 대학의 실험실을 찾았다.
“저희는 이미 다른 외국 제품을 쓰고 있어요, 다음에 오시죠.”
연구원이 쓰고 있다는 외국 제품을 본 순간 이 대표는 어리둥절했다. 영국으로 수출한 바로 그 항체였다. 영국 ‘Abcam’ 상표로 달고 국내로 다시 수입되고 있었던 것. 연구원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이 항체 얼마에 구입하셨나요?” “50만 원 좀 넘는데요, 왜 그러시죠?”
영인프런티어의 항체는 국내에서 100μL(1μL는 100만분의 1L)당 29만9000원이다. 똑같은 제품을 외국 상표가 붙으니 국내 연구자들이 갑절에 가까운 값을 주고 사서 쓰고 있는 것이다. 이 실험실만이 아니다. 영국과 미국(Santa Cruz) 회사 상표를 단 영인프런티어의 항체는 현재 국내 연구자들에게 43만7000∼54만9000원에 팔리고 있다.
○ 실험기기-기계부품 시장서도 비슷
생명과학벤처기업 바이오니아는 3년 전 자체 기술로 ‘실시간 유전자증폭기(PCR)’를 개발해 지난해 대한민국기술대상을 받았다. PCR는 소량의 유전자를 대량 복제하는 기기. 이 회사가 만든 PCR는 지식경제부 기술표준원에서 외국 제품보다 우수하다는 평가를 받고 신제품인증(NEP) 마크를 획득했다.
바이오니아 박한오 대표는 “외국 제품의 절반 값인 3000만 원 선인데도 국내 시장에서 실적이 부진해 주로 해외에 판다”고 말했다.
자동차부품 시장에서도 이런 현상은 나타난다. BMW는 올해 초 본사 임원단을 한국으로 보내 부품업체를 방문하고 구매 협의를 했다. 폴크스바겐은 지난해부터 아예 부품구매 담당 팀을 한국에 상주시키고 있다.
하지만 정작 수입차를 사는 국내 소비자들은 국산 부품을 외면한다. 한 수입차 판매 담당자는 “일부 부품이 국산이라고 하면 불쾌해하는 고객이 적지 않다”고 전했다.
○ 과학기술 산업은 노벨상 배출의 원동력
정부가 지원하는 연구개발비의 상당 부분이 실험재료나 기기를 구입하느라 해외로 빠져나간다는 것은 국내 과학계에서 공공연한 사실이다. 바이오니아 박 대표는 “국내에서 만든 시약이나 기기, 부품 등을 갖고 연구해 세계적인 성과를 내야 과학기술의 주도권을 확보할 수 있다”며 “과학기술 산업이 활성화돼야 이공계 일자리도 생기고 노벨상도 나오는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단백질 분석기기를 개발해 2002년 노벨화학상을 받은 일본 과학자 다나카 고이치 씨는 기기회사 ‘시마즈제작소’의 연구원이었다. 유전자증폭기를 개발한 미국 기기회사 ‘시트로닉스’의 생화학자 캐리 멀리스 씨에게는 1993년 노벨화학상이 돌아갔다.
그러나 수요자들은 양질의 국산 제품을 선별할 수 있는 객관적인 근거가 부족하다고 말한다. 연세대 생명공학과 이상규 교수는 “특정 기준을 충족한 제품은 정부나 공공기관에서 품질을 공식 인증해주는 시스템이 있다면 국산 활용도가 좀 더 높아질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