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 2:9-18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10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11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12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 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13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14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 15 이는 너희가 흠이 없고 순전하여 어그러지고 거스리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며 16 생명의 말씀을 밝혀 나의 달음질도 헛되지 아니하고 수고도 헛되지 아니함으로 그리스도의 날에 나로 자랑할 것이 있게 하려 함이라. 17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봉사 위에 내가 나를 관제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 18 이와 같이 너희도 기뻐하고 나와 함께 기뻐하라)
그리스도인은 구원받은 사람들입니다. 이 큰 구원을 받은 그리스도인들의 할 일은 빛된 삶을 통하여 하나님의 구원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빛된 삶은 구원을 이루어가는 삶입니다. 구원을 이루어가는 삶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생활입니다. 구원의 하나님께 모든 것을 다 맡겨놓고 감사하면서 순종하는 생활입니다.
애굽에서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하실 때 하나님은 그들 중에 행하셨습니다. 그들이 가야할 곳을 아셨고, 그들에게 있어야 할 것을 아시고 공급해 주셨습니다(출15:17 주께서 백성을 인도하사 그들을 주의 기업의 산에 심으시리이다 여호와여 이는 주의 처소를 삼으시려고 예비하신 것이라 주여 이것이 주의 손으로 세우신 성소로소이다). 그러나 그들은 어려움이 닥쳐올 때마다 하나님을 원망했고 사람을 원망했습니다(고전10:10 저희 중에 어떤 이들이 원망하다가 멸망시키는 자에게 멸망하였나니 너희는 저희와 같이 원망하지 말라).
믿음과 소망과 감사와 순종으로 살아야 할 그들의 삶은 불평과 원망과 시비로 얼룩져 있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원망과 시비는 불신앙과 반역의 태도이며 배은의 행위입니다. 그들은 모세를 향하여 기회 있을 때마다 원망과 시비를 늘어놓았고 돌로 쳐 죽이려까지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구원의 에너지를 공급하시는 하나님께 철저하게 복종할 것을 권면합니다. 복종할 때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불평과 시비없이 복종할 것을 권면합니다.
"원망"이란 내적 불만이 외적으로 표출된 상태를 말합니다. "시비"는 내적인 불만상태를 인하여 잘못을 다른이에게 전가시키려는 논쟁적인 태도입니다. 화목과 조화보다는 불화와 분열을 조장하는 숙덕거리고 투덜대는 행위입니다(행6:1).
그러면 하나님의 구원받은 자녀의 빛된 생활은 어떻게 나타납니까?
1.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
(1) 원망과 시비는 하나님 구원의 사랑을 잊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망각했고 하나님의 무한한 지혜와 능력을 신뢰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으로 돌아가고 싶어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 구원의 은혜를 경험한 사람들이요,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의 손길을 보았으면서도 신뢰하지 않고 원망하고 시비하다가 광야에서 멸망 받게 되었으니 이것이 우리의 거울입니다(고전10:10). 원망은 전염됩니다. 원망은 위로 올라갑니다. 하나님께로 까지 올라가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원망한 것을 보면 먹을 것, 마실 것, 육신적 안전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소원은 하나님이 백성으로 빛이 되게 하려 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주권적으로 보호하시며 인도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백성들은 불신하여 원망과 시비로 점철되었으니 이스라엘 백성들의 실패 또한 오늘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2) 원망과 시비가 없이 사신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순종과 본을 겸손의 본을 보여 주셨습니다. 교만한 자가 원망하고 시비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오신 날부터 시작해서 육신적인 고통, 정신적인 고통이 늘 따라 다녔습니다. 배고프고, 편안히 잠잘 곳 조차 없으셨습니다. 천지의 주인이신 주님께서 누구보다도 힘든 고난의 길을 걸어가셔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불평과 시비를 보이시지 않으셨습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골3:23)했습니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위하여 우리의 포부와 행위가 이루어져야 한다"(빌2:13)했습니다.
인간의 성취는 동기에 의해 결정됩니다. 불 속에 들어가 아들을 건져내는 아버지는 혈육의 사랑이라는 강한 동기가 있습니다. 아프리카 原始林에 들어가 흑인의 病 治療에 평생을 바친 슈바이쳐는 아들을 향한 아버지의 동기 이상의 더 넓고 고귀한 동기가 그의 포부와 행위의 추진력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열심히 일하는 어머니를 보면서 자라는 子女는 IQ가 높고 학교 성적이 더 우수하다는 미국 心理學會의 報告가 있습니다. 열심히 일하는 어머니의 생활을 곁에서 보며 나도 열심히 공부해야겠다는 충동의 동기를 받게 되기 때문이라 했습니다.
"내 안에서 행하시는 하나님"의 영적 충동이 하나님의 역사에 내가 순종하는 믿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내 안에서 역사하고 계신 바를 내가 행동하는 것이 곧 순종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이 이미 내속에서 시작하셨고, 나는 하나님의 목적에 순종하여 하나님과 함께 일한다는 태도 앞에 모든 일에 원망과 시비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3)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소원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초대 예루살렘 교회를 향하신 하나의 소원이 있었는데 그것은 복음을 천하에 있는 모든 족속들에게 전하는 것입니다(행1:8).
당시 사도들과 교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본 사람들이요, 오순절에 성령 강림을 체험 한 사람들이요, 온 세상에 전할 기쁜소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 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소원인 복음 전파를 그들의 소원으로 갖지 못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환난을 당하게 하심으로 스데반은 순교하고 예루살렘 교회는 흩어지게 되었습니다. 그와같이 흩어진 자들이 사마리아에 가서도 복음을 전하고 멀리 안디옥에 가서도 복음을 전하고 로마제국 전역에 흩어져서 복음을 전하게 되었습니다. 결과적으로 하나님은 그 소원을 이루셨습니다. 하나님의 소원을 이루기 위해서 거스리는 세대 가운데서 순전함 즉, 깨끗하고 완전한 심령을 지켜야 합니다.
세상은 끊임없이 여러 모양으로 변해가고 있습니다. 價値觀도, 經濟意識도, 道德도 변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우리의 신앙과 하나님의 말씀은 眞理이며 이는 결코 변할 수 없으니 우리의 순전함을 지켰는지 생각해야 합니다(롬12:2).
하나님의 기대에 부응하는 그리스도인으로 내 안에서 먼저 시작하신 하나님께 순종하여 모든 일에 원망없이 감사와 즐거움으로 충성 봉사하여 주님 앞에 부끄러움없이 설 수 있기를 바랍니다.
2.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
(1) 이 세상을 "거스리는 세대" 라고 말씀합니다.
"세대"란 어려운 신학 용어로서 "아이온"(aion)으로 표현하는 "영겁"(永劫)입니다. 두 영겁을 말하는데 하나는 이 世代요 또 하나는 오는 世代입니다.
이 세대란 이 세상에 속한 것 즉, 이 모든 것을 말하고 오는 세대는 이후에 오는 세대를 가리킴이 아니라 영원한 세대요, 그러면서도 현재 우리 세대 안에 들어와 있는 세대입니다. 이것을 영원이라고 말합니다. 이 영원이 현재 우리 세계 안에 들어와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 세대를 거스리는 세대라고 표현합니다. 어그러지고 거스리는 세대입니다. 어그러진다는 말은 비뚤어지고 구부러졌다, 갈퀴같다는 뜻입니다. 갈퀴는 낚시 바늘처럼 구부러져 아무데나 잘 걸립니다. 여기가도 걸리고 저기가도 걸리고 이 세상이 바로 그와 같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악하고 음란한 세대를 향해서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마17:17)라 책망했습니다. 베드로도 어그러지고 거스리는 세대를 향해서 "패역한 세대"(행2:40)라 했습니다. "거스린다"는 말은 역행한다는 뜻입니다. 유혹하고 곡해한다는 뜻이요, 순수하게 받아주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이 세상이 나를 순수하게 받아줍니까? 내 말을 진실하게 믿어줍니까? 이 세상은 내게 대하여 공평하지 않고 거스리는 세대입니다. 모든 것이 바르게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이 세상엔 거꾸로 되는 것이 많습니다. 마음들이 모두 구부러졌습니다.
아이들을 부르면 "예"하면 될 것을 "왜 그래요"합니다.
뒤틀리고 잘못된 세대 가운데서 그리스도인은 자신을 지켜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부끄럽지 않게 지켜야 합니다(계14:3-4 저희가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앞에서 새 노래를 부르니 땅에서 구속함을 얻은 십 사만 사천 인밖에는 능히 이 노래를 배울자가 없더라. 4 이 사람들은 여자로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하고 정절이 있는 자라 어린 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며 사람 가운데서 구속을 받아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속한 자들이니),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엡5:8) 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빛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마5:14)했습니다. 우리는 이미 세상의 빛입니다. 빛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거짓되고 불성실하여 눈가림만 하고 하나님 앞에 충성되지 못하고 게으르고 나태하여 책임을 다하지 못하면 빛의 자녀가 될 수 없습니다.
(2) 그리스도인이 힘써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흠이 없다는 말은 비판은 받을 지라도 지탄받을 일은 없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세상 앞에서나 자신을 향해서나 그리스도를 향해서 부끄러울 것이 없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에서 "흠 없다"는 구약의 제물이 점이나 흠이 없다할 때 쓰이는 말입니다(히9:14, 벧전1:19).
즉,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 흠이 없는 것을 가리킵니다. 순전해야 한다는 말은 섞이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우유에 물을 타면 순수하지 못합니다. 포도주에 물을 타도 순수하지 못합니다. 순전하다는 말은 불순물이 섞이지 않은 것을 말합니다.
우리 신앙생활의 동기, 생활사상, 의도가 깨끗해야 합니다. 믿음의 마음이 순수하고 기도하는 마음이 순수해야 합니다.
바울은 빌립보 교회에 나무랄데 없고 불순한 것이 없고, 흠잡을 데 없는 하나님의 자녀들로 성숙할 것을 권면합니다.
바른 길에서 벗어나서 여러 방향으로 구부러지고 굽고 뒤틀린 이 세상(신32:5 그들이 여호와를 향하여 악을 행하니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요 흠이 있는 사곡한 종류로다, 행2:40 너희가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 하니)을 본받지 말라고 권면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영적으로 도덕적으로 뒤틀려 있는 자들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이런 세대를 본받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비록 세상에 살아도 자신과 세상 안에서 순수하고 그리스도 앞에서 흠없는 자녀가 되어야 하는 것이 바울의 가르침입니다.
3. 그리스도의 날에 자랑거리가 되라.
(1) 그리스도인은 말씀 중심으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진리를 떠나 영적으로 뒤틀리고 도덕적으로 비비꼬인 세대 가운데 그리스도인은 빛들과 같이 생명의 말씀을 밝혀야 합니다. 밝힌다는 말은 '붙잡다'의 뜻입니다. 생명의 말씀을 말로만 붙잡는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붙잡는 것을 말합니다.
말씀의 실천이 있을 때 말씀을 굳게 붙잡게 되는 것입니다(요6:68, 행5:20 주의 사자가 밤에 옥문을 열고 끌어내어 가로되 20 가서 성전에 서서 이 생명의 말씀을 다 백성에게 말하라 하매, 엡2:1, 요일1:1)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히4:12)했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느니라"(롬10:17)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內部에서 살아 역사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흠이 없고 순전한 자가 될 수도 없고 하나님의 일을 행할 수도 없습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딤후3:16)했습니다. 감동은 "하나님의 입김이 불어 넣어진" 말씀임을 의미합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자신으로부터 유래된 것이므로 그 말씀의 사용은 모든 일에 유익합니다. 또한 이 말씀은 모든 일에 하나님의 목적을 성취하는 데에도 그 효력을 발휘합니다. 가르치는 일에도 유익하고 잘못을 지적하고 바로잡는 일에도 유익하고 또한 영적 훈련에도 유익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함이니라"(딤후3:17)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견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딤후4:2)했습니다.
(2) 그리스도인은 말씀의 증인으로 살아야 합니다.
증인은 말없이도 증거합니다. 이것이 빛들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빛은 말없이도 길을 환하게 비춰줍니다.
희랍의 한 장님이 밤길에 자기와 부딪치지 말라고 등불을 들고 가다가 자기 등불이 꺼진 줄도 모르고 부딪친 사람에게 호통을 쳤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온전한 그리스도인이라면 빛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가정이, 직장이, 환하게 밝혀져야 합니다. 꺼진 등불을 들고 다니는 어리석은 신자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마5:14)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이상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생을 경주자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나의 달음질도 헛되지 아니하고"라 했습니다. 운동선수는 한 순간을 위하여 평생을 절제하고 또 법도를 지킵니다(고전9:24).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딤후4:7)라 했습니다.
세상 끝날 마지막 골인점에 설 때 주님께서 내게 면류관을 주실 것을 내다보고 있습니다. 그 날에 있을 자랑거리가 무엇입니까? 돈 많이 번 것? 자녀출세 시킨 것? 아닙니다.
내가 전도하여 그리스도인 된 이들 그들이 바로 나의 자랑이요 상급이요, 면류관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빌4:1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아 이와 같이 주 안에 서라,
살전2:19 우리의 소망이나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이 무엇이냐 그의 강림하실 때 우리 주 예수 앞에 너희가 아니냐).
모든 크리스챤은 그날의 상급을 위해 치루어야 할 댓가를 기쁨으로 치르며 말씀의 증인으로 살아가는 존재들 이어야 합니다(히11:26-27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27 믿음으로 애굽을 떠나 임금의 노함을 무서워 아니하고 곧 보이지 아니하는 자를 보는 것같이 하여 참았으며).
바울 사도는 이제 자기의 가장 큰 기쁨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했던 사람입니다.
"너희 믿음의 제물과 봉사 위에 내가 나를 관제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하고…"(빌2:17) "관제"는 "쏟아 붓는다"는 뜻입니다.
내가 너를 위하여 피를 쏟아 부어도 기뻐하리라. 이 얼마나 행복한 고백입니까? 지금 죽어도 좋다는 마음으로 일할 수 있는 사람은 피곤함이 없습니다. 바울은 행복의 극치를 고백합니다. 지금 바울은 로마 감옥에서 대단히 어려운 생활을 하고 있는 중입니다. 부조리와 모순된 처사에 의해서 억울하게 감옥에서 옥고를 치루고 있는 몸입니다.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 이와같이 너희도 기뻐하고 나와 함께 기뻐하라(빌2:16-17). 기쁨이 강조됩니다. 이 때문에 빌립보서는 행복의 복음이요 희락의 복음이라 합니다.
4척 단신의 키에 안질로 고생하고 주기적으로 오는 부끄러운 불치의 병도 가지고 있습니다. 가정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는 마음에 넘치는 기쁨이 있습니다.
이 기쁨은 구원받은 확신에서 온 기쁨이요(빌2:8, 롬3:20-25), 하나님 사랑의 기쁨이요(롬8:38-39), 하늘의 소망을 가진 기쁨이요(빌1:23, 3:8, 고후5:1-2) 그리스도 안에서 생사의 비결을 터득했기 때문에 오는 기쁨(빌1:21-24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 22 그러나 만일 육신으로 사는 이것이 내 일의 열매일진대 무엇을 가릴는지 나는 알지 못하노라. 23 내가 그 두 사이에 끼였으니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이것이 더욱 좋으나 24 그러나 내가 육신에 거하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 이었을 것입니다.
"내가 너희를 위해서라면 내 피를 쏟아 부어도 기뻐하리라"
여러분들도 이런 일, 이런 대상을 가져 보았습니까? 이 일을 위해서라면 여기서 이대로 피를 쏟고 죽어도 좋다 할 결정적 행복의 절정을 가질 수 있습니까?
나는(우리는) 과연 누구를 위해 살다가 누구를 위해 죽기를 원하십니까? 바울 사도는 자신을 위하여 사는 자도 없고 자신을 위하여 죽는 자도 없다고 했습니다(롬14:7). 누구를 위해 살다가 누구를 위해 죽어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위해, 하나님 나라를 위해, 교회를 위해, 한 영혼의 구원을 위해 살며 그를 위해 희생하는 그 희생 속에 보람을 느끼며 자랑거리가 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날에 나의 자랑할 것이 있게 하려 함이라(빌2:16 생명의 말씀을 밝혀 나의 달음질도 헛되지 아니하고 수고도 헛되지 아니함으로 그리스도의 날에 나로 자랑할 것이 있게 하려 함이라).
부끄러운 인생, 수치와 후회되는 인생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내게 기쁨이 넘칠 때 남을 위로할 수 있습니다. 내가 행복할 때 남에게 행복을 줄 수 있습니다. "나와 함께 기뻐하라" 말할 수 있습니다. 희생과 기쁨, 이것이 참된 사랑입니다. 희생없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요 희생하되 기쁨이 없으면 참 사랑이 아닙니다.
위대한 능력의 공급자이신 하나님께서 고난의 능력도 공급하심을 믿고 제물 되기를 기꺼히 고백합니다. 하나님과 동등 되기를 포기하시고 자신을 비워 인간이 되셔서 종이 되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희생의 제물 위에 마지막 관제가 되겠다는 바울의 祭物意識을 본받아 비교할 수 없는 기쁨과 감격을 체험하시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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