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덴골

이름을 각각 불러

거듭난 삶 2009. 4. 12. 0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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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고로

요한복음 10장 1절-6절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양의 우리에 문으로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며 강도요. 2 문으로 들어가는 이가 양의 목자라. 3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4 자기 양을 다 내어 놓은 후에 앞서 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고로 따라 오되 5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하느니라. 6 예수께서 이 비유로 저희에게 말씀하셨으나 저희는 그 하신 말씀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니라.

 

우리가 믿는 기독교는 獨特한 宗敎입니다. 구원에 관한 한 妥協이 없는 종교입니다. 여기에는 讓步가 있을 수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구원의 산에 오르는 길은 多樣하다고 말입니다. 마치 산꼭대기에 이르는 登頂의 길이 많이 있듯이 그렇다는 겁니다.

그러나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도덕적인 가르침은 비슷할지 모릅니다. 어떤 宗敎이든지 믿음의 訓練 過程과 方法은 유사할지 모릅니다. 그렇지만 구원, 영혼을 살려놓는 구원의 길은 우리가 믿는 기독교와 결코 같을 수가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얻는 것이 기독교가 아닌 다른 종교 중의 하나를 통해서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이 점에 있어서 만은 기독교는 엄청나게 獨善的입니다. 이 말은 그렇기 때문에 무조건 닥 치는 대로 싸우라는 말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길밖에 구원의 길이 없기 때문에 변질시키지 말고 끝까지 지켜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지금의 世代는 標準과 規則을 상실해 버린 시대입니다. 원칙을 포기해 버렸습니다. 이렇게 해도 무슨 말을 할 수가 없고 저렇게 해도 어쩔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목소리만 크면 오히려 승리합니다. 그것 때문에 누구나 목청을 높이는 것입니다. 아니 힘만 있으면 이긴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권력을 좇아갑니다. 권력과 힘을 얻을 수 있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합니다. 그 과정에서는 원칙을 어겨도 상관없고, 표준에서 어긋나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생각을 하는 世態인것을 부인하지 못할만한 시대입니다.

 

中國의 古代 神話 속의 三皇의 하나인 伏羲(복희)와 인류를 창조했다는 女蝸(여와)가 마주 선 그림을 보면 복희는 손에 곡척, 곧 자를 가졌고 여와는 손에 콤파스를 들고 있습니다. 재어 볼 수 있는 자(尺)와 콤파스가 天下를 다스리는 지휘봉이라는 의미일 것입니다. 자와 콤파스라는 규범과 표준이 없는 가치는 모두 흔들리고 맙니다. 標準의 잣대가 없으면 사회는 어지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정상적이고 올바른 것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0장에서 구원의 확실한 표준을 제시합니다. 구원의 길이 어디에 있는지 확실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1절 "양의 우리에 문으로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며 강도"라고 말합니다. 구원의 문으로 들어가는 길은 하나뿐입니다. 다른 곳이 있다고 말하는 것은 진짜가 아닙니다. 속이는 것입니다. 1절에 나타난 竊盜(kleptes: seducer, deceiver, crafty and dishonest man)라는 말이 바로 유혹하여 속이는 사람이라는 뜻을 가진 단어입니다. 구원의 길을 엉뚱하게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훨씬 더 설득력 있게 말하고, 우리의 이성에 합당하게 이렇게 말합니다.

 

"히말라야에 오르는 길은 여러 루트가 있다. 길은 달라도 다 정상으로 통하는 루트들이 다. 그런데 자기가 오르는 루트만이 가장 옳다고 고집하게 되면 결국 히말라야에 오르지 못하게 될 것이다"고 그럴 듯하게 말합니다. 정말 그런 것 같아 보이지요. 그런 獨斷的인 요소를 허물지 않고는 정말 普遍的인 종교일 수 없다고 설득하려 듭니다. 그러나 그것은 가짜입니다. 속이는 것입니다. 진리를 훔치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門 외에는 결코 다른 문이 있지 않습니다. 이 문으로 들어가지 않으면 양의 목자가 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오늘 예수님에 대해서 다시 한번 확인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의 영혼을 구원하는 예수님이 누구인지를 알아볼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도대체 누구라고 말하고 있는 것일까요?

2절 "문으로 들어가는 이가 양의 목자 라." 첫 번째로 예수님은 자신을 "문으로 들어가는 자"라고 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뒷문이 아니라, 정문으로 들어가서 영혼을 만나 주시고 구원하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구원은 영혼의 구원이 진짜입니다. 물질을 회복하는 것은 진짜 구원이 아닙니다. 사업을 잘 되게 해서 영혼을 대체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영혼을 만지셔서 고쳐 주시는 분은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만이 그 문이 어디에 있는지, 그리고 어떻게 들어가야 하는지를 알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영혼의 문으로만 들어가시는 분이십니다. 인생에게서 제일 중요한 영혼을 만지시는 분입니다. 다른 문들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영혼 아닌 물질의 문으로 인간을 만나시지 않습니다. 권력과 명예로 영혼의 문제를 그럴 듯하게 은폐하면서 우리를 속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탄은 우리의 영혼을 고치려고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영혼을 迷惑하려고 합니다. 돈으로 미끼를 삼아 영혼을 팔아 버리게 합니다. 권력을 안겨다 주면서 영혼을 구원할 수 있다고 속입니다. 그것이 다른 문 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의 영혼의 문으로만 들어오십니다. 그래서 어쩌면 주님을 만나는 경험이 가장 고통스러운 경험일는지 모릅니다. 얼핏 우리는 이렇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지금 나에게 필요한 것은 영혼이 아니라 물질이다, 아니면 나의 명예회복이다" 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것들은 이차적인 문제라고 말합니다. 일차적인 것을 해결하지 않고는 안 된다고 하시면서 끝까지 영혼을 만지려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를 피하려고 합니다. 지금 나에게 절박하지 않은 듯이 보이는 영혼의 일에 예수님께서 개입하시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영혼의 문이 아닌 다른 곳으로 들어오려고 하는 자가 있다면 그것은 가짜입니다. 속지 않게 되기를 바랍니다. 철학적 사고가, 물질이 정문이 아닙니다. 사업의 성공이 정문이 아닙니다. 주님은 그런 문으로 들어가려고 하시지 않습니다. 영혼의 문으로 주님은 들어가시는 분이십니다.

신앙은 바로 이 원칙을 지켜야 합니다. 영혼부터 챙겨야 합니다. 아무렇게나 믿고 사는 것 이 아닙니다. 신앙의 표준을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 아니면 어떠냐? 도덕적으로 올바르면 되지 보이지도 않는 영혼 이야기는 뭐냐? 라고 말하는 것은 신앙의 질서를 버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영혼의 문으로 들어오시는 분입니다. 여러분의 영혼을 그 분에게 먼저 내어 맡기게 되기를 바랍니다. 물질의 문으로 들어와 달라고 말하지 않게 되기를 바랍니다. 다른 조 건의 문으로 들어오기를 사모하지 않게 되기를 바랍니다. 주님은 영혼의 문으로만 들어가십니다. 영혼의 문제를 먼저 해결해야 합니다. 그래야 진짜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두 번째 주님의 모습은 3절에 나타납니다.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예수님은 양의 이름을 각각 부르시는 분입니다. 개인적으로 만나 주시는 분이라는 말입니다. 절대로 단체로 부르지 않습니다.

 

여러분과 나의 이름 하나 하나를 개인적으로 개별적으로 부르시는 것입니다. 신앙은 뭉뚱그려 떨이하는 것이 아닙니다. 덤으로 붙어오는 것도 아닙니다. 개인적인 것입니다. 개인적인 결단입니다. 왜요? 주님이 개인적으로 부르시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개인적으로 대답하여야 합니다. "교회 다니세요?"가 아닙니다. "어느 교회 다니십니까?"의 문제가 아닙니다.

"여러분은 개인적으로 예수님을 아십니까" 이 질문에 대답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여러분의 이름을 부르십니다. 마치 넓은 들판에 수많은 양들이 뒤섞여 있어도 목자가 자기의 양의 이름을 불러내어 구별시키는 것과 같습니다.

 

아무리 내가 이 땅에서 살고 있어도 나의 목자되시는 예수님이 내 이름을 부르면 나는 구별되어 나와야 합니다. 그 음성을 듣고 빠져 나와야 개인적으로 예수님을 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뒤섞여 있어서 예수님이 불러도 못 알아듣는다면 아직까지 나는 예수님을 개인적으로 만나보지 못한 것입니다. 어떠한 곳에 있어도 예수님께서 부르시면 빠져 나올 수 있어야 합니다.

더욱이 이 말은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개인적으로 정확하게 알고 계신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세밀하게 아시는 것이지요. 내 성격, 내 기질, 나의 장점과 나의 약한 부분을 정확하게 알고 계시는 겁니다. 그래서 불러내시는 것입니다. 만약 부르시면 모두 대답할 수 있는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세 번째 양의 목자이신 예수님은 어떤 분이실까요? 4절.

"자기 양을 다 내어놓은 후에 앞서 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 오되." 예수님은 앞서 가는 분입니다. 앞서 가면서 우리를 인도하시는 분이십니다. 여러분과 나의 인생의 인도자입니다. 뒤에서 아무 말 없이 따라 오시는 분이 아니라 나의 삶의 앞에서 나를 인도하시면서 가시기를 원하시는 분이십니다.

3절 마지막 부분은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주님은 우리를 부르셔서 引導하여 내시는 분입니다. 인도하여 낸다는 말은 lead them out입니다. 다시 말하면 어디에서 빠져 나오도록 해서 인도한다는 것입니다.

빠져 나오는 것이 첫 번째 목표라면 두 번째 목표는 어디를 향하여 가도록 인도하여 내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그냥 부르시지만 않습니다. 우리를 부르셔서 어떤 목표를 향하여 가도록 목표를 향해 부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목표가 또 다시 주님이 되는 것입니다. 왜요? 주님이 우리 앞서 가시기 때문이지요.

 

지금 여러분 삶 앞에 예수님께서 앞서 가고 계십니까? 우리 삶의 목표는 과연 예수님입니까? 우리집 에덴골에는 너덧 마리의 개들이 있는데 그놈들 이름이 각각 있습니다. 바둑이, 누렁이 검둥이, 루루 등 그런데 그놈들이 제각기 자기이름을 알아 듣습니다. 양들도 자기의 이름과 목자의 음성을 안대요. 그래서 마치 자기 이름을 갖고 있어서 자기 이름을 들으면 자기 이름을 부른 목자 앞으로 가게 되지요. 그리고 사실은 자기 이름뿐만 아니라 양들은 목자의 음성을 알고 있어요. 그래서 자기 이름을 부르는 목자의 음성을 듣고 그를 따라 가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얼마나 주님의 음성을 구별해 낼 수 있습니까? 그래서 부르기만 하면 그 음성을 알고 따라가기 시작합니까? 우리가 아무리 좋은 곳에 머물러 있어도 주님이 부르시기만 하면 그대로 달려 나가 목자이신 주님을 따라가십니까? 음성을 구별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구별하실 뿐 만 아니라 듣고 따라 가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말씀의 마지막 부분은 참 印象的인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려주고 난 다음에 마지막으로 양은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가를 명쾌하게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5절을 보십시오.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 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하느니라." 양의 특징이 하나 지적되어 있습니다. 양은 他人의 음성을 모른다는 거예요. 다른 사람들의 음성은 알아차리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주인의 음성만 알아듣는 양, 타인의 음성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양이 진짜 양입니다.

 

주인의 음성을 모르는 것도 문제의 양이지만 타인의 음성을 잘 알아듣고 따라 가면 좀 이 상한 양입니다. 다른 음성은 잘 들어요. 엉뚱한 곳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기가 막히게 듣는 것은 좀 곤란한 것입니다. 남 욕하는 음성은 어떻게 그리 잘 알아듣는지 몰라요. 이상할 정도입니다. 예수님의 음성은 도대체 알아듣는지 못 알아듣는지 알 수가 없구요, 다른 음성은 기가 막히게 판별해 내는 것입니다. 그러고는 그 음성을 따라갑니다. 그런데 그것은 결국 주님의 양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양인 우리가 갖추어야 하는 것이 무엇이라고 오늘 본문은 말합니까?

 

첫 번째 "타인의 음성을 알아듣지 못하는 성품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 이야기 아닌 것은 좀 무디게 들을 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 이야기 아닌 것에 귀가 번쩍 열리는 사람이라면 무엇인가 주님의 양으로는 조금 모자라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예수님의 음성을 알아들어야지 타인의 음성을 알아듣는 일에 민첩하지 않게 되기를 바랍니다. 세상 것들에는 좀 둔하게 알아들으십시오. 세상이 가르쳐 주는 것들에는 좀 아둔해져도 괜찮습니다. 전혀 듣지 못한 것처럼 살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오히려 예수님의 음성을 빨리 알아듣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두 번째 양의 특징을 정확하게 보십시다. 다시 한 번 5절을 읽습니다.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 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하느니라." 타인의 음성을 못 알아들을 뿐만 아니라, 그래서 따르지 않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도리어 "逃亡"간다는 것입니다. 훨씬 더 적극적인 표현입니다. 뒤 따라 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정 반대로 도망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외에도 구원이 있다고 말하면 도망가십시오. 예수님 대신 물질만 있어도 구원 이 있다고 말하면 도망가 버리십시오. "아 정말 그런가?"라고 말하면서 따라가지 말고 과감하게 도망쳐 버리게 되기를 바랍니다. 머뭇거리지 않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도 괜찮겠지"라고 말하지 마십시오. 용기를 가지십시오. 거부하십시오. 그런 자리에는 있지 않고 도망쳐 버리는 것이 훨씬 멋진 계획입니다. 그럴 때 36계를 배우십시오. 들어가서 잘 하면, 들어가서 유혹 받지 않으면 되지 않느냐고 자신을 合理化시키지 않게 되기를 바랍니다. 연약한 우리는 도망가는 것이 더 좋습니다. 요셉처럼 옷을 버려두고 라도 빨리 도망쳐야 합니다. 머뭇거리면서 좋은 기회라고 착각하지 않게 되기를 바랍니다.

 

양은 목자를 알아야 합니다. 목자의 음성을 듣고 따라가는 양은 아름다운 꼴을 발견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목자가 푸른 초장으로 이끌어 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목자의 음성이 훨씬 매혹적이어도 속지 마십시오. 그들의 음성은 유혹하는 음성이고 속임의 음성입니다. 아무리 좋은 것을 보장해도 과감하게 포기하십시오. 도망쳐 버리십시오.

구원은 주님에게 밖에 없습니다. 영혼을 직접 만지는 분은 주님 밖에 없습니다.

우리 영혼 하나 하나를 부르시는 우리의 목자 그 분의 음성을 듣고 사십시오. 그 분을 우리 앞에 두고 따라가며 사십시오. 그 분을 目標로 삼으십시오. 그 분만이 생명을 일으키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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