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의 기원-4 (김성일 장로의 창조사학 특강)
(1) 기독사관으로 본 한민족의 정체성 - ‘우리 것’이란 무엇인가
(2) 기독사관으로 본 한민족의 정체성 - 누가 ‘우리 것’을 말살했는가
(3) 기독사관으로 본 한민족의 정체성 -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4) 기독사관으로 본 한민족의 정체성 - 우리는 단일민족인가
(5) 우리에게 공자는 누구인가
(6) 동방의 로마 한(漢) 제국
(7) 해상 왕국 가야의 비밀
(8) 우리는 왜 불교를 들여왔는가
(9) 김유신의 꿈과 좌절
(10) 우리에게 그분은 말씀하신다
(11) 우리에게 거는 하나님의 기대
* 고대 동아시아지역의 여러 민족
동이(東夷) : 堯(요)임금 시대로부터 시작된 동방족의 칭호
맥(貊) : 단군조선 일부와 부여에 대한 호칭
읍루 : 漢(BC 200)에서 晋(BC 419)까지 만주 동북방에 살았던 어렵, 혈거족
동호 : 한나라 초(BC 209)에 조양 지방의 조선인들을 사마천이 지칭
선비, 오한 : 부여계 번조선(동호)의 후예이며, 前漢 중엽(BC 100)부터 시작된 지칭
몽고 : 부여계 번조선(동호)의 후예인 선비족으로, 4세기 중엽부터 형성된 종족을 지칭
거란 : 열하성 漢水 남쪽에서 화룡의 북쪽까지에 사는 부여계 선비족의 후손.
돌궐 : 선비족의 후예로 후위의 테무제(AD 423) 이후 알타이산(金山) 지방에서 일어났음.
흉노 : 先秦(BC 249)에서 漢代(AD 220)까지의 북방민족 일반을 史記와 漢書가 기록한 호칭
물길 : 남북조 시대(420-580)의 읍루인을 지칭
말갈 : 隨나라(618)와 唐나라 初期(670)까지의 원형의 퉁구스 만주족
여진 : 10세기 말엽 遼帝가 남북만주에 거주하는 고구려인과 말갈인을 지칭
퉁구스 : 18세기 이래 서양인들이 사용하는 만주족의 칭호
先 퉁구스 : 18세기 이래 서구인들이 지칭한 중국본토 내의 조선족
* 고대 중국의 삼황오제 비교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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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설로 추정되는 기록 |
민족구분 |
중국의 입장으로 바뀌어진 기록 |
三皇 |
태호 복희씨 |
東夷 |
태호 복희씨 |
염제 신농씨 |
東夷 |
여와씨(여호와에서 유래?) | |
黃帝 헌원씨 |
東夷 |
염제 신농씨 | |
五帝 |
소호 김천씨 |
東夷 |
黃帝 헌원씨 |
제곡 고신씨 |
華夏 |
제곡 고신씨 | |
전욱 고양씨 |
東夷 |
전욱 고양씨 | |
제요 도당씨(堯) |
華夏 |
제요 도당씨(堯) | |
제순 류우씨(舜) |
東夷 |
제순 류우씨(舜) | |
고대 |
夏 |
華夏 |
夏 |
殷 |
東夷 |
商 | |
周 |
華夏 |
周 |
(1) 기독사관으로 본 한민족의 정체성 - ‘우리 것’이란 무엇인가
요즘 각 방송에서 개량 한복을 입은 사람들의 특강이 대유행이다. EBS에서 김용옥씨의 노자 특강이 크게 히트하자 다시 KBS에서 그를 데려다가 공자 강의를 시켰고 그 물결을 타고 국악 강의에 한방 의학 특강까지 기세를 올리고 있다. 왜 갑자기 이런 현상들이 붐을 이루고 있는 것일까? 그러나 사실은 당연히 있어야 할 일들이 지금 일어나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우리 민족은 4천년이 넘는 오랜 역사와 전통을 가졌다고 자랑하지만 가난 속에서 그런 자존심을 다 잊고 살아왔다. 게다가 한일합방으로 오욕의 세월을 보냈고 해방 후에는 동족상잔의 전쟁으로 더 큰 수치와 모멸을 겪었다. 그러면서도 우리에게는 당장 하루를 사는 생계가 더 급했다. 그러다가 갑자기 경제 개발이 시작되었다. 정부의 예측을 앞질러가며 성장곡선이 급상승을 계속하자 우리의 생활도 몰라보게 달라지기 시작했다. 굶기를 밥먹듯하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주차 문제를 걱정하는 시대가 되었다. 생활에 여유가 생기면서 전쟁통에 족보를 잃은 집들은 그것을 찾아 복원하기 시작했다. 집안의 자존심을 되찾으려는 생각은 다시 사회적인 유행으로 발전했다.
재야에서도 이미 민족사학자 단재 신채호의 맥을 이어 문정창, 천관우 등의 ‘잃어버린 역사 찾기’를 위한 연구가 시작됐다. 또 대학에서도 신진 사학자들이 일제시대에 형성된 고대사를 재검토하는 작업에 들어갔다. 그와 함께 ‘규원사화’와 ‘환단고기’ 등 민간사서들도 출판되어 넓게 읽혀졌던 것이다.
이런 경향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려 했던 것이 80년대에 시도됐던 ‘국풍’운동이었다. 반독재 투쟁을 벌이고 있던 재야 세력이 호응해주지 않아 큰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으나 정부는 새로 설립한 정신문화연구소를 중심으로 민족사관 연구에 힘썼다. 문민정부 이후에는 다시 방송권이 ‘우리 것 찾기’를 주도했다. 그리고 이 때부터 외래문화로 분류된 기독교는 방송가에서 소외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우리 것 찾기’는 시청률 제고를 위해 동원된 폭력, 불륜, 섹스 등 상업주의 문화때문에 일시 주춤하는 듯 했으나 소위 IMF 사태로 상처입은 민족적 자존심은 다시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각급 학교에 단군상을 세우는 일에서 동양철학 특강에 이르기까지 일련의 현상들이 나타난 것이다.
또 서양을 휩쓴 포스트 모더니즘과 다원주의의 물결을 타고 소위 ‘퓨전 문화’라는 것도 등장했다.
클래식과 대중음악을 섞어 놓은 ‘열린 음악회’가 생기고 교향악단이 국악인들과 협연을 하는가 하면 각국의 음식을 뒤섞어 놓은 퓨전 요리에 이르기까지 여러 양상의 혼합주의 문화가 나타났다. 돈과 무력으로 동양을 지배해온 서양 문화를 우리 것의 바탕에서 다시 이해해 보자는 고민에서 나온 시도들이었다.
‘우리 것 찾기’의 물결은 이렇게 오랜 배경이 있었는데도 그동안 아무런 준비가 없었던 한국 교회는 당황하고 있다. 여기 저기서 터져 나오는 현상에 놀라서 단편적인 대응에만 급급하다 보면 교회는 오히려 우리 사회에서 문화적 천덕꾸러기로 따돌림 당할 위험성도 있다. 이런 현상에 대한 하나님의 관심은 무엇이며 또 어떻게 대응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가를 신중하게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이 땅에 사람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는 바벨탑 이후로 전세계에 흩어진 모든 민족이 어떻게 살기를 원하실까? 여러 자녀를 둔 부모의 마음이 그들 모두가 다양하게 살기를 바라듯이 하나님께서도 모든 민족의 다양성을 바라실 것이다. 하나님은 히틀러나 스탈린같은 독재자처럼 획일주의를 바라는 분이 아니시다. 모든 민족에게는 그분의 영광을 위해서 준비해주신 특별하고 다양한 문화가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우리 것 찾기’에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 사대주의나 국수주의가 아니라 균형잡힌 기독사관을 바탕으로 우리 민족의 정체성을 바로 인식하여 우리 민족에 대한 하나님의 관심이 무엇인가를 찾아야 한다. 예수전을 판소리로 부른 박동진 선생이나 예배 음악에 국악을 도입한 선구적인 분들의 자세를 본받아야 한다. 또 ‘우리 것 찾기’가 잘못 전개되지 않도록 바로 잡아줄 책임도 있다.
단군이란 본래 사람의 이름이 아니고 제사장이라는 직책 명인데도 그 상을 만들어 세우는 것은 분명히 잘못된 것이다. 또 유대인들은 2000년전의 땅을 찾아 들어가서 자기네 것이라고 주장하는데 고조선 때부터 섬겨온 하나님을 믿는 기독교를 외래 종교로 단정하고 들어온지 1700년도 안되는 불교는 전통 종교라고 내세우는 것도 어불성설이다. 진시황제가 BC 212년에 공자의 책을 다 불태웠고 그 제자 460명을 모두 땅에 묻어서 죽였는데 김용옥씨는 지금 ‘없는 공자’를 강의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를 더욱 슬프게 하는 것은 그렇게도 찾기 원하는 역사가 없는 것이다. 고려시대에 기록된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서 삼국이전의 역사는 아예 빠져 있거나 그 부스러기 몇 줄만 남아 있다. 우리는 역사를 상실했고 언어마저 상실했다. 방금 필자가 쓴 ‘역사’와 ‘상실’과 ‘언어’라는 단어도 우리 말이 아니다. 우리가 쓰고 있는 언어 중에서 순수한 우리 말은 거의 사라졌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지금 ‘우리 것 찾기’를 열망하고 있다. 그것을 어디서 찾을 것인가? 그러나 기대를 가지고 한번 나서보자. 하나님께서 우리가 잊었던 기억을 되살려 주실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여호와의 행사가 크시니 이를 즐거워하는 자가 다 연구하는도다. 그 행사가 존귀하고 엄위하며 그 의가 영원히 있도다. 그 기이한 일을 사람으로 기억케 하셨으니 여호와는 은혜로우시고 자비하시도다”(시 111:2-4)
(2) 기독사관으로 본 한민족의 정체성 - 누가 ‘우리 것’을 말살했는가
‘우리 것’을 찾는 일에 나서기 전에 우선 짚어 두어야 하는 것은 우리의 역사와 문화가 어떻게 해서 없어졌으며 누가 그것을 없앴느냐 하는 것을 따져 두는 일이다. 필자는 학생 시절부터 이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많은 나라들이 그 나라의 자랑스러운 고대사를 가지고 있는데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고 있는 우리나라의 고대사는 송두리째 없어져 버렸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에게 남아있는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 보면 우리 조상들은 그 이전에도 역사를 기록하여 남겨 놓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삼국유사는 고조선의 역사를 소개하면서 ‘고기’(古記)를 인용하였는데 이는 민간 사서들이 말하는 신지유기 또는 배달유기 같은 고조선의 역사서를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또 삼국사기에는 고구려에 유기(留記)가 있고 백제에도 서기(書記)라는 사서가 있었다고 되어 있으며 신라의 진흥왕은 대아찬 거칠부로 하여금 국사(國史)를 편찬하게 했다고 되어있다.
그런데 이들 사서가 하나도 남김없이 다 사라져 버린 것이다. 도대체 누가 이 방대한 사서들을 다 없애 버렸을까, 필자도 처음에는 다른 학자들이 그랬던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고대사를 없애버린 것은 중국이나 일본의 소행으로 추측했다. 우리의 자랑스러운 역사를 부러워하고 못마땅하게 여겼던 그들이 공격해 왔을 때 역사서를 가져갔거나 다 태워서 없애버린 것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아마 고대의 사관들도 그것이 유실될 것을 염려하여 여러 사본을 만들어 분산 보관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고대사를 없앤 자들은 그것을 철저하게도 다 뒤져내어 깡그리 말살해 버렸다. 국내는 물론이고 중국이나 일본의 서고에도 남겨진 사본은 하나도 없다. 만일 우리 고대사를 없앤 자들이 외국인들이었다면 그들이 우리 국내에 분산 보관되어 있는 사서들을 그토록 철저하게 찾아낼 수 있었으리라고는 믿어지지 않는다. 누가 그들에게 모든 사본이 숨겨져 있는 곳을 다 가르쳐 주었을까, 그런 생각을 하다가 필자는 삼국사기에서 이상한 부분을 발견하고 그것을 자세히 읽어 보았다.
“진흥왕 6년(BC 545) 7월에 이찬 이사부는 왕에게 아뢰기를 국사라는 것은 군신의 선악을 기록하여 잘하고 못한 일을 만대에 보이는 것이온데 사기를 수찬해 놓지 아니하오면 후대에 무엇으로서 사실을 볼 수 있겠습니까, 하니 왕은 그렇다 하고 대아찬 거칠부 등에게 명하여 널리 문사들을 모아 국사를 수찬하였다”
여기서 이찬 이사부라는 사람은 당시에 병부령 즉 군부의 수장이었다. 그리고 왕이 국사 수찬의 책임을 맡긴 거칠부 역시 이사부 수하의 무장이었던 것이다. 왜 국사 편찬의 일을 군부의 수장이 건의했으며 또 무장인 거칠부가 그것을 주관하게 되었던 것일까.선대의 법흥왕에게는 아들이 없어서 그가 죽은 후 조카인 진흥왕이 7세에 즉위했는데 진흥왕 6년이라면 그가 13세 되던 해였다. 당시 왕의 나이가 적어 모후 즉 법흥왕의 딸인 식도부인이 섭정을 했다고 되어 있다. 이것은 당시의 상황에 뭔가 수상한 기미가 있었음을 시사해준다. 즉 신라 군부세력의 수장인 병부령 이사부는 13세의 진흥왕을 대신하여 섭정하고 있던 왕태후에게 압력을 가해 국사를 고쳐 쓰게 하고 그 일을 자기 부하인 거칠부에게 수행하게 했다는 혐의가 보이는 것이다.
그들 군부세력은 왜 사관들이 담당하는 국사에 손을 대려고 했을까.BC 545년이면 신라가 금관 가야를 쳐서 멸망시킨지 13년째 되는 해이다. 신라의 제5대 파사왕 때 기록에 의하면 신라는 가야의 수로왕을 매우 존경하여 그를 모셔다가 국정의 자문을 받았던 것으로 되어 있다. 신라가 그 가야를 공격하여 멸망시킨 이유에는 석연치 않은 점이 많이 있다. 삼국사기의 신라본기에는 당시 신라를 괴롭히던 고구려에 대한 비난보다도 가야에 대한 적대적인 표현이 자주 나온다. 신라의 군부는 가야에 대한 배신을 정당화하기 위해 국사에 손질을 가해야 할 필요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신라의 체제와 문화를 그대로 물려받았던 고려의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편찬할 때에는 신라의 ‘국사’를 근간으로 해서 기록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 기록을 잘 읽어보면 신라와 가야에 관계된 부분에 대한 가필과 조작은 누구라도 무장들의 거친 솜씨를 눈치챌 수 있을 정도로 매우 치졸하다. 필자는 본고에서 이 문제를 다시 한번 상세히 거론할 계획이다. 필자는 신라의 군부가 가야 문제 외에도 고구려나 백제와 왜국 등 다른 인접국과의 관계도 그들이 계획하는 일들을 합리화하기 위해서 미리 여러 군데를 날조했을 것으로 본다. 그리고 신라 조정은 삼국을 통일한 후에 자기네 ‘국사’와 다른 ‘고구려유기’와 ‘백제서기’의 상당 부분을 삭제하거나 없애버렸을 것이다.
고려 시대에 삼국사기를 기록한 김부식은 묘청의 난을 진압한 평장사(平章事) 즉 토벌사령관이었다. 당시 묘청은 고조선의 영광을 되찾기 위해 수도를 평양으로 옮기고 ‘칭제건원’을 하자고 주장했던 민족주의자였다.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편찬한 것은 묘청의 난을 평정한지 10년 후였으니 당시의 상황을 짐작할 만하다. 김부식은 아예 그 이념적 화근을 뽑아버리려고 삼국사기에서 고대사를 없애버렸던 것이다.
그러나 몽골의 침략을 받아 50년 이상 지배를 당하고 있던 시대에 삼국유사를 집필한 김견명은 피폐해가는 민족 정신을 아쉬워하며 그 앞 부분에 고대사의 일부를 언급해 놓았다. 어쨌든 필자가 추리해본 결과로는 우리의 고대사를 없애버린 장본인은 바로 우리 조상들이었다고 할 수밖에 없다.
그들 자신이 했기 때문에 그토록 철저하게 모든 사본을 찾아내어 모조리 없애버릴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지금 누구를 탓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내가 그들을 사막 바람에 불려가는 초개같이 흩으리로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이는 네 응득이요 내가 헤아려 정하여 네게 준 분깃이니 네가 나를 잊어버리고 거짓을 신뢰하는 연고라 그러므로 내가 네 치마를 네 얼굴에서 들춰서 네 수치를 드러내리라”(렘 13:24-26)
(3) 기독사관으로 본 한민족의 정체성 -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인본주의적인 사학자들은 민족이동설을 부인하고 병행발생설을 주장한다. 영장류의 고릴라, 침판지, 오랑우탄 등이 모두 다른 지역에 분포되어 있듯이 인류도 처음부터 여러 지역에 분포되어 있었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성경의 기록을 사실로 믿고 있는 기독교인은 인류의 조상이 아담과 하와이며 대홍수 이후에 살아남은 노아의 세 아들 셈과 함과 야벳으로부터 모든 민족이 태어났다고 믿는다. 홍수가 끝난 후에 그 셈과 함과 야벳 자손들은 바벨탑 건축의 실패와 함께 전세계로 흩어졌다.
“그러므로 그 이름을 바벨이라 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거기서 온 땅의 언어를 혼잡케 사셨음이라.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더라”(창 11:9)
필자는 우리 한민족도 인류가 바벨탑을 쌓았던 장소로부터 아라랏 산을 지나 북상하여 다시 동쪽으로 이동했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현지 지도를 펴놓고 우리 조상들이 어떤 경로를 따라 이동해 왔을까 하는 것을 추리하여 ‘홍수이후’라는 소설을 썼고, 다시 ‘성경으로 여는 세계사’를 썼던 것이다. 그 후 창조사학회를 결성한 기독교인 학자들이 필자의 그 가설을 검증하는 작업에 들어갔다. 학술조사단과 촬영팀이 국민일보 후원으로 54일간에 걸쳐 그 경로를 모두 답사하고 해당 지역의 대학을 방문하여 학자들과 만나 증거를 수집했으며 고대의 유물들을 찾아 확인했던 것이다.
그 결과는 필자의 추리가 대부분 정확했다는 것이다. 조사단은 그 모든 경로에서 민족 이동과 관련된 고리들을 찾아냈다. 그 첫째는 유물의 고리였다. 셈족 토기의 특징인 환저형 토기에서부터 고대인들이 사용하던 생활용구, 그리고 우리 말과 같은 SOV형 교착어 사용 지역이 그 경로에 모두 분포되어 있었고 놀랍게도 그 모든 지역에 대홍수와 방주, 그리고 홍수 때의 정보 전달자인 까마귀 이야기에 이르기까지 창세기와 연결되는 설화들이 유라시아 대륙 전역에 연결되어 있었다. 우리 조사단의 일원이었던 이벤허 박사(중국명 李賓漢)는 그 결과를 정리, 중국 북경대학에 논문을 제출하여 고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북경대학이 민족이동설을 인정한 것이다.
이 민족이동설을 우리 나라의 일부 국수주의적 재야 학자들이 거꾸로 주장하는 경우가 있다. 우리 민족이 메소포타미아에서 동방으로 이동해온 것이 아니라 우리 민족의 역사가 그 쪽보다 더 오래되었으므로 여기서 그 쪽으로 옮겨갔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답사 결과는 그것이 잘못되었음을 명백하게 증명했다. 그것은 각 지역에서 출토되는 석기에 사용된 돌들의 원산지 추적에서 나왔다. 많은 돌들의 원산지가 출토된 지역과 다르게 나왔는데 그 결과는 석기의 소지자가 성경대로 서에서 동으로 옮겨 온 것을 증거하고 있었던 것이다. 또 하나 명백한 증거는 전 유라시아 대륙에 걸쳐 분포되어 있고 베링 해협을 건너 아메리카 대륙까지 건너간 흑요석(黑曜石) 공구였다. 그 흑요석이 생산되는 지역은 유라시아 대륙에서 오직 아라랏산 부근밖에 없는 것이다.
삼국유사에는 3천명의 무리를 이끌고 내려온 하나님의 아들 환웅이 곰과 호랑이에게 쑥과 마늘을 주어 삼칠일을 먹고 견디면 사람이 되게 해 주겠다고 했는데 곰이 끝까지 견디어 여자가 되었고 환웅과 결혼하여 단군 왕검을 낳았다고 되어 있다. 중국 산동성 가상현의 무씨묘에 있는 화상석을 학자들은 환웅천강도라고 하는데 그 세 번째 단에 보면 서쪽에서 동쪽으로 이동하는 사람들이 있고 곰과 호랑이의 얼굴을 한 두 사람이 싸워서 호랑이 쪽이 지는 그림이 들어 있다. 이를 두고 학자들은 곰 토템 족이 호랑이 토템 족과의 경쟁에서 이긴 것이라고 해석하는데 필자의 생각은 다르다. BC 4천년 경 메소포타미아에는 이미 3,600명의 신들이 있었으나 우리나라에는 불교가 들어올 때까지 오직 하나님만 있었고 다른 신은 없었다. 수많은 신들을 섬기는 서쪽에서 오직 하나님만을 섬기기 위해서 옮겨온 그들이 곰이나 호랑이를 숭배했을 까닭이 없다. 곰과 호랑이는 오늘날 프로 야구팀의 심볼처럼 부족을 상징하는 로고였던 것이다.
우리 역사에 단군이 처음 등장하는 자료는 삼국유사다. 그런데 삼국유사에 나오는 단군의 단은 박달나무 단(檀)이 아니라 제터 단(壇)이다. 즉 단군(壇君)은 사람의 이름이 아니라 제단에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책임자인 제사장이라는 직책명이다. 그 첫번째 단군의 이름이 바로 왕검이었다. 그러므로 혹시 왕검상을 만든다면 또 몰라도 단군 즉 제사장의 상을 만든다면 이는 어이 없는 일이 된다. 후일에 이승휴라는 사람이 제왕운기를 쓰면서 그 단군을 신비화하여 민족 정신의 구심점으로 삼기 위해 박달나무 단자를 썼는데 그 뒤로 단군이 박달나무에서 내린 신으로 바뀐 것이다.
고조선의 시작을 우리 학계는 BC 2333년으로 계산한다. 성경에 기록된 연대를 계산하면 아담의 탄생은 BC 4114년이고 대홍수가 있었던 것은 BC 2458년이며 민족들이 흩어진 것은 벨렉이 태어난 해(창 10:25)로 계산하면 BC 2357년이다. 즉 우리 민족이 바벨탑에서 동방으로 오기까지 24년이 걸렸다는 뜻이다. 당시의 형편으로 미루어보아 꽤 빠른 속도이지만 우리 조사단은 볼가강 하류에 있는 아조프 박물관에서 바퀴가 달린 집의 모형을 발견하고 그 속도가 빨랐던 이유를 수긍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환단고기’가 말하는 단군 이전의 신시 환국(桓國)의 가설이나 단군상을 만든 사람들이 말하는 BC 7197년은 또 무엇인가? 메소포타미아의 수메르에도 연대를 황당하게 부풀려 놓은 초기 왕조의 역사라는 것이 있었다. 필자는 그것이 홍수 이전의 역사를 기록해 놓은 상징적인 것으로 생각한다. 환단고기에 나오는 우리 조상들이 동방으로 오기 전 즉 메소포타미아의 역사를 써 놓은 것일 수도 있다. 필자는 소설 ‘홍수이후’에서 그것을 니므롯과 아카드의 싸움으로 추리해서 쓴 적이 있다. 우리가 서쪽에서 왔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싶다면 강화도 마니산에 가볼 것을 권하고 싶다. 마니산은 본래 ‘마리산’ 즉 ‘머리산’이었는데 첫번째 단군인 왕검이 그 정상에 쌓은 천제단은 서쪽을 향하고 있다. 우리 조상들이 서쪽에서 섬겼던 그 하나님을 향해서 제사드렸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증언하고 있는 것이다.
(4) 기독사관으로 본 한민족의 정체성 - 우리는 단일민족인가?
우리 민족이 고려시대에 137년간이나 몽골의 지배를 받고 다시 조선 말기에 한일합방으로 36년간 수모를 당하면서 민족 정신을 하나로 모으기 위해 내세웠던 것은 소위 단일민족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우리의 민족성은 매우 복합적이다. 어떤 때에는 셈족의 특징대로 가부장적이고 보수적이고 남성 중심적인 것 같은데 뜻밖에도 한국 사람들은 매우 진취적이기도 하다. 실제로 강인한 여성들의 힘으로 한민족은 버티어 왔고 지금도 인터넷 인구나 휴대전화 소지율은 세계의 선두에 서 있다.
우리 민족은 정말 단일 민족일까? 물론 도중에 더러 타국에서 들어와 귀화한 인물들도 있기는 하나 우리가 대체로 단일 민족이라는 것은 맞는 말일까? 그러나 우리 고대 국가의 언어를 비교 연구한 강길운 박사의 대답은 다르다. 그는 우리 민족 중에 길약어와 같은 계통의 언어를 쓴 북방계 고(古)아시아족과 알타이어 계통의 언어를 썼던 고구려계의 지배층이 있었고 또 가야어에는 인도의 드라비다어가 혼재되어 있다고 했다. 같은 SOV형의 교착어를 썼어도 그 계통이 다르다는 것이다.
사실 고구려를 건국한 주몽의 설화는 그 계통이 고조선에서 부여로 내려오는 재래 질서와 다르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주몽은 하백의 딸이라고 자처하는 여인 유화(柳花)가 천제의 아들이라는 해모수와 사통하여 낳은 아들로 말을 잘 다루고 활을 잘 쏘아서 부여왕 금와의 아들들이 그를 시기했다.
그래서 주몽은 자신을 따르는 자들과 함께 부여를 떠나 졸본에 이르러 고구려라는 나라를 세웠던 것이다. 이 주몽의 설화는 말과 활에 능하고 진취적인 여성이 국면을 이끄는 고구려적 성품을 전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 고구려에서 백제가 나왔고 훗날 중국 대륙을 뒤흔든 선비도 같은 계통이며 발해와 몽골도 모두 고구려에서 나온 알타이계의 기마 민족이었던 것이다.
창조사학회의 학술 조사단은 알타이 지역과 몽골 지역을 모두 답사했다. 거기서는 여자가 대외적으로 집안을 대표하는 풍습을 가지고 있었다. 즉 손님을 맞고 대접하는 사람은 여주인이고 남자들은 나서지를 않는다. 또 그들에게는 우리의 ‘선녀와 나무꾼’같은 설화가 있었다. 이것은 고아시아족에서 보이는 곰의 설화와 대조적이다. 곰의 설화에서는 하나님의 아들이 내려오는데 알타이와 몽골의 설화에서는 하나님의 딸이 목욕하러 내려오는 것이다. 언어 계통이 같은 이 두 갈래의 셈족은 약 3백년의 간격을 두고 먼저 온 자와 나중 온 자가 되어 동방에 도착한 셈이다. 그렇다면 혹시 성경에도 셈의 자손들이 동방으로 갔다는 사례가 있었을까. 그런데 성경에 그 두 번의 사례가 있었다. 그 하나는 바벨탑 공사가 중단되었던 해로 추정되는 BC 2357년이었다.
“에벨은 두 아들을 낳고 하나의 이름을 벨렉이라 하였으니 그 때에 세상이 나뉘었음이요 벨렉의 아우의 이름은 욕단이며 욕단은 알모닷과 셀렙과 하살마웹과 예라와 하도람과 우살과 디글라와 오발과 아비마엘과 스바와 오빌과 하윌라와 요밥을 낳았으니 이들은 다 욕단의 아들이며 그들의 거하는 곳은 메사에서부터 스발로 가는 길의 동편 산이었더라 이들은 셈의 자손이라 그 족속과 방언과 지방과 나라대로였더라”(창 10:25-32)
그런데 이보다 약 3백년이 지난 후에 또 한번 동쪽으로 간 셈족의 이야기가 성경에 나오고 있다.
그것은 아브라함의 후처와 관계가 있다.
“아브라함이 후처를 취하였으니 그 이름은 그두라라. 그가 시므란과 욕산과 므단과 미디안과 이스박과 수아를 낳았고…”(창 25:1-2)
아브라함은 그 아들 이스마엘과 이삭이 후처의 아들들과 부딪히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후처 그두라의 아들들을 동쪽 나라로 보냈다고 한다.
“아브라함이 이삭에게 자기 모든 소유를 주었고 자기 서자들에게도 재물을 주어 자기 생전에 그들로 자기 아들 이삭을 떠나 동방 곧 동국(東國)으로 가게 하였더라”(창 25:5-6)
그의 서자 즉 그두라 소생의 여섯 아들 중에서 욕산과 미디안과 수아는 그 후에도 성경에 등장하고 있다. 그러나 시므란과 므단과 이스박은 사라지고 보이지 않는 것이다. 만일 그두라가 그 세 아들을 데리고 동방으로 옮겨갔다면 그녀는 아들들을 지휘할 정도로 말타기와 활쏘기에 능한 활동적인 여성이었을 것이다. 또 하백의 딸 즉 다른 신을 섬기던 지역 출신의 여성으로서 하나님을 섬기던 천손족 해모수와 사통했을 정도로 적극적이었던 유화부인처럼 매우 진취적인 여성이었을 것이다.
그두라의 아들들이 동방으로 오지 않았을까 하는 가설을 뒷받침하는 증거가 또 하나 있다. 이 알타이계 숙신에 속하는 선비족이나 몽골족 등이 대륙의 중원까지 진출할 수 있었던 힘은 그들이 말과 활에 능할 뿐만 아니라 그들의 특수한 군대 조직 때문이었는데 그것이 바로 천부장, 백부장, 십부장 등의 제도였다. 이 제도는 대규모의 병력을 신속하게 움직이도록 할 수 있는 강력한 전투 체제였다. 그런데 성경에는 광야에서 2백만명 가까운 히브리 백성들을 지휘하느라고 애쓰는 모세에게 그의 장인 즉 미디안 족장인 이드로가 그에게 이 조직을 권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대는 또 온 백성 가운데서 재덕이 겸전한 자 곧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진실무망하며 불의한 이를 미워하는 자를 빼서 백성 위에 세워 천부장과 백부장과 오십부장과 십부장을 삼아 그들로 때를 따라 백성을 재판하게 하라”(출 18:21-22)
이것이 과연 인본주의적 사학자들이 말하는 병행발생설적 우연일까? 우리는 이제 우리 민족이 단일민족이라는 좁은 견해를 깨야 한다. 필자는 중국 섬서성 박물관의 입구에서 중국 동부에 동이족이 살았다고 표시된 ‘고대 중국의 인종분포도’를 보았다. 동이에 속하는 소호족이 난하를 건너 대륙의 동쪽에 들어가 살았고, 야벳계로 보이는 하화족은 황하의 상류 지역에 있었던 것이다. 이제 우리는 동이족이 흩어져 살았던 중국 동부와 만주 지역 그리고 한반도와 일본까지를 모두 포함한 '동방’에서 우리 민족의 정체성을 찾아야 한다. 강화도 마리산은 바로 그 모든 지역의 중심에 있었던 것이다.
(5) 우리에게 공자는 누구인가
필자가 중국의 유적과 유물들을 돌아보고 고고학과 역사학을 전공한 학자들과 만나 대담하면서 놀란 것은 중국 대륙의 역사가 동이족과 하화족의 경쟁과 협력으로 이루어져 왔다는 것이었다. 현재 중화 사상을 이끌고 있는 하화족을 중국인들은 화하(華夏)라고 부르는데 이들은 본래 황하의 상류 지역에 있는 임분(臨汾)에서 살았다. 동이족에 속하는 소호(少昊)족은 산동의 곡부를 중심으로 살았고 그 수가 하화보다 월등하게 많았으나 하화의 일에는 간섭하지 않으며 살았다. 동이족의 정신적 중심은 산동의 태산이었고 그 정상에 있는 천제단에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 살았다.
하화의 첫 지도자는 요(堯)였다. 그는 자신의 자리를 물려줄만한 인재를 얻지 못하여 동이족의 순(舜)에게 뒤를 부탁했다. 그러나 순은 다시 하화에서 우(禹)라는 인물을 찾아 자리를 넘겨 주었고 우는 동방 군장들의 협력을 얻어 황하의 치수에 성공하였으며 하화는 임분에서 화산(華山) 지역으로 진출했다. 그러나 우는 선임자들과는 달리 전자제를 시작하여 그 아들에게 자리를 물려 주었는데 14대에 이르러 걸(桀)이라는 폭군이 나타났으며, 동이족의 탕(湯)이 걸을 제거하고 은(殷)을 세웠다. 은나라는 정인이라는 기도집단을 두고 하나님의 뜻을 받아 국사를 결정하는 신정국가였다. 그러나 탕도 역시 전자제를 답습했다. 은의 30대 주(紂)는 우상을 섬기고 무도하므로 하화의 발(發)이 은을 멸망시키고 자기 나라를 세웠는데 그가 주(周)의 무왕이었다.
주의 무왕은 신정국가였던 은을 멸망시켰으므로 그 명분을 찾기 위해 신앙의 자유를 선언했다.
즉 조상 귀신을 모시는 종묘와 땅과 농사의 신을 섬기는 사직을 모든 지방 관청에 만들게 하고 왕궁에도 그것을 세웠던 것이다. 은이 멸망할 때 두 명의 지사가 있었다. 그 중의 하나는 조선으로 가서 요동 지역의 땅을 얻어 살았던 기자였고 또 하나는 무왕에게서 은나라 도읍 근처의 땅을 봉지로 받아 은의 유민들과 함께 살았던 미자인데 그 땅을 송(宋)이라 했다. 공자의 증조부 공방숙은 바로 그 송나라 사람이었다. 그래서 공자는 죽기 7일전에 “나의 조상은 본래 은나라 사람이었다”고 고백했다. 그의 조상은 신정국가였던 은나라 사람이었으며 동이족이었던 것이다.
귀신의 나라였던 주가 멸망하고 천하가 어지러워졌을 때 공자가 태어났다. 그 사상의 기본은 하나님을 공경하고 사람을 사랑하는 ‘경천애인’이었다. 그는 요, 순과 하, 은, 주에 이르는 역사 ‘상서(尙書)’를 기록하고 신앙 부흥운동을 주도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어지러운 천하를 통일한 사람은 장사꾼 여불위의 아들 진시황제였다. 그는 동이족의 신임을 얻기 위해 태산에 제사를 드리려고 나섰다가 동이족 창해역사의 습격을 받아 구사일생으로 살아났다. 그는 동이족 포섭을 단념하고 장안으로 돌아와 3년 후인 BC 215년에 만리장성 공사를 시작한다. 처음 장성의 위치는 난하의 서쪽이었다. 이는 동쪽의 조선을 막아 놓고 산동의 동이족을 박해하려는 계략이었다. 그리고 그 3년후인 BC 212년에 동이족의 정신적 지주였던 공자의 사상을 박해하는 것이다. 그는 상서를 비롯한 공자의 책을 모두 거두어 불태웠고 그 제자 460명을 땅에 묻어 죽였다.
시황제의 아들 호해를 제거하고 진을 멸망시킨 사람은 역시 하화족 사람인 한(漢)의 유방(劉邦)이었다. 그는 동이족의 지지를 얻기 위해 멸실된 공자의 학문을 복원하겠다고 선언했으나 그것이 본심은 아니었다. 그는 살아남은 공자의 제자들을 모으게 하여 상서를 비롯한 공자의 책들을 기억나는대로 복원하게 했으나 하화의 나라였던 주나라의 통치이념을 그 책에 주입하고 종묘와 사직을 계속하게 한 것이다. 동이족이고 신앙인이었던 공자가 주나라의 통치이념을 사모하고 귀신 섬기기를 권하는 자로 전락해버린 것이다.
공자 시대에는 종이가 없어서 대나무를 깎아서 글을 썼고 올챙이 모양의 과두문자를 썼다. 그러나 한나라가 만든 공자의 책은 종이에 예서로 쓴 것이므로 그것을 금문상서(今文尙書)라 하고 그것을 만든 학자들을 ‘어용(御用)학자’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놀랍게도 이들 어용학자들 가운데 ‘양심선언’을 한 사람이 있었다. 그는 논어의 술이(述而)편을 기록하면서 목숨을 걸고 진실한 한마디를 써서 남겼던 것이다.
‘자불어 괴력난신(子不語 怪力亂神)…공자는 괴력난신을 말한 적이 없었다’
이 한마디로 공자가 귀신 섬기는 사람이 아니었음을 후세에 증명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이렇듯 동방의 로마와 같았던 대제국 한나라에서 가짜 공자가 만들어지고 그를 조작된 국가적 우상으로 만들고 있던 무제 때에 공자의 집벽에 숨겨 두었던 진짜 ‘고문상서’가 발견되었다. 그러나 무제는 어용학자들에 명하여 고문상서를 폐기시켜 버렸다. 후에 다시 양심적인 학자들이 고문상서를 복원해보려고 애를 썼는데 이들을 고문학파라고 한다. 그러나 결국 그들은 황제의 박해를 받아 소멸되었고 고문상서는 영원히 사라지게 되었으며 날조된 상서 즉 오늘날의 서전(書傳)만 남아 있게 된 것이다.
고문상서를 폐기한 무제는 동이족에 대한 노골적인 적대감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그는 장성을 넘어가 기자조선을 공격하여 그 땅을 차지하고 있던 위만조선을 점령하고 한4군을 설치했다.한4군이 있었던 자리는 한반도가 아니라 난이브 요하 사이의 땅 요서지방에 있었다고 윤내현 박사는 그의 저서 ‘고조선 연구’에서 고증하고 있다.
당시 조선은 오직 하나님을 섬기며 왕도 없고 단군(壇君)이라는 제사장만 있던 평화의 나라였다.
삼국유사의 고조선조에 보면 조선의 정부 조직에 곡(穀), 명(命), 병(病), 형(刑), 선악(善惡)을 주관하는 부서가 있었으나 병(兵)을 담당하는 국방부가 없다. 조선은 중국의 동부에서 일본에 이르기까지 72개의 거수국을 거느리는 방대한 영토에서 살았으나 왕과 군대가 없는 하나님의 나라였던 것이다. 그 조선이 한 무제의 공격을 받자 마침내 정신을 차리기 시작했다. BC 57년에는 신라, BC 37년에는 고구려, 그리고 BC 18년에는 백제 등 왕국을 세우기 시작했고 바다건너 일본 열도에도 왜국을 경영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6) 동방의 로마 한(漢) 제국
유방이 세운 한(漢)제국은 흔히 동방의 로마로 불리워진다. 패현 출신의 유방(劉邦)이 경쟁자 항우를 물리치고 한나라를 세웠던 BC 206년은 로마의 푸블리코스 스키피오가 한니발의 마지막 도전을 격파하고 대 제국의 터를 닦고 있을 때였다. 로마의 지배층은 수많은 신들을 섬기는 그리스의 인본주의 문화를 그대로 도입하여 ‘팍스 로마나’의 기반으로 삼았는데 한나라의 유방도 귀신을 섬기는 주나라의 인본주의적 통치이념을 그대로 물려받아 대 제국을 건설했다.
그 로마는 처음에 기독교인들을 박해하다가 나중에 오히려 기독교를 발판으로 하여 동방 진출을 도모했다. 그러나 로마의 이 동방정책은 결국 제국의 몰락을 가져오게 했던 것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한 제국은 공자의 ‘경천애인’ 사상을 제국주의적 통치 이념에 맞도록 개작하여 제국의 문화적 바탕으로 만들고 산동 지역의 동이족을 제압한 후에 장성을 넘어 동방으로 진출하려 했다. 그러나 동방을 넘보던 한 제국의 정책은 오히려 자국의 몰락을 자초하고 말았다.
한 제국의 동방 진출에 강력하게 제동을 걸었던 것은 동이족의 최전방에 위치했던 훈육족이었다.
한에서는 이 훈육을 비하하여 흉노(匈奴)라고 불렀다. 유목민 출신의 기마민족이었던 훈육은 한 제국을 뿌리째 뒤흔들 정도로 강력하여 무제의 고손이 되는 원제는 후궁 왕소군을 훈육의 호한야 선우에게 바쳐야 했을 정도였다. 한 제국이 외척의 발호로 점점 몰락하고 있을 때에 그 외척 중에 왕망(王莽)이라는 야심가가 나타난다. 왕망의 부친 왕만은 원제의 외삼촌이었다. 능란한 처세와 자기관리로 28세에 대사마에 오른 왕망은 고구려 등 동방의 군장들에게 밀서를 돌려 자신이 황제의 자리에 오르는 것을 지원해주면 왕의 인수를 보내겠다고 약속했다고 한다.
이것은 한의 사가들이 밀서의 내용을 바꿔 말한 것이다. 당시 동방의 군장들은 이미 왕이었고 특별히 한나라에서 보내는 왕의 인수를 탐낼 까닭이 없었다. 왕망은 산동성 동이족의 지지를 얻게 위해 동방의 군장들이 마음에 들어할 조건 즉 자신이 황제가 되는 것을 지지해주면 공자의 진본 상서를 복원할 것이며 귀신 섬기는 일을 폐지하고 다시 하나님을 섬기겠다고 약속했을 것이다. 그러나 마침내 황제가 되어 AD 8년 신(新)이라는 제국을 세운 왕망은 약속을 어기고 동방의 군장들을 왕에서 제후로 강등시켰기 때문에 군장들이 분개했다고 한서는 쓰고 있다. 그러나 왕망은 더 중요한 약속을 지키지 않았던 것이다. 격분한 훈육이 먼저 신을 공격했고 왕망이 고구려에 지원을 요청했으나 고구려군은 오히려 서쪽 변경까지 출병하여 왕망군을 위협했다.
왕망이 동방 군장들과의 약속을 지키지 않자 산동성 일대의 동이족이 마침내 그를 징벌하기 위해 군사를 일으켰다. 군복이 비슷한 정부군과 구별하기 위해 눈썹을 진흙으로 칠하여 적미군(赤眉軍)이라 했는데 한서는 산동성 낭야현의 양조장 주인 여모(呂母)라는 여자가 자신의 아들이 억울하게 죽은 원수를 갚기 위해 도당을 모아 반란을 일으켰다고 한다. 그러나 그들의 군복이 정부군과 비슷했다는 것으로 보아 이는 번숭, 봉안, 서선, 사록 등 동이족의 지도자들이 관군을 포함한 30만의 대군을 정식으로 거병한 것이다. 그들의 진중에서 무당이 북을 치며 제사를 지냈다고 하는데 이는 동이족의 군대가 하나님께 기도드린 것을 그런 식으로 비하해서 기록했을 것이다.
동이족의 적미군 외에 또 한 무리의 반란군이 있었다. 한 황실의 후예임을 자처하는 유현(劉玄)과 유수(劉秀)가 녹림산의 도둑떼 왕광, 왕봉 등과 손을 잡고 결성한 녹림군(綠林軍)인데 그 수가 5만 정도 되었다. 이들 중 유수는 그 야망은 컸으나 매우 야비한 인물이었다. 녹림군 1만명과 함께 곤양성까지 진출했던 유수는 40만이 넘는 정부군의 포위를 뚫고 겨우 13기로 남문을 탈출하여 다시 3천명의 군사를 모아 정부군을 대파하였다고 후한서는 찬양하고 있다. 겨우 13기로 탈출한 유수가 어떻게 40만이 넘는 정부군을 대파할 수 있었을까? 이는 적미군의 지원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유수는 낙양으로 가는 적미군과 함께 가지 않고 대표로 내세운 유현을 낙양으로 먼저 가게 한 후 자신은 말머리를 돌려 한단으로 향했던 것이다.
AD 23년 유현이 먼저 장안에 도착했을 때에는 왕망은 이미 자객에게 살해당한 뒤였다. 토벌의 대상을 잃은 유현은 제위에 올라 주야로 대연을 베풀었고 본래가 도둑떼였던 녹림군은 닥치는대로 장안을 약탈했다. 그래서 나중에 장안에 들어선 동이족의 적미군이 장안에 들어섰을 때에는 30만 대군을 먹일 식량이 없었다. 적미군은 유현을 잡아서 죽였으나 AD 26년 정월,마침내 장안에는 식량이 떨어졌다. 더 이상 장안에서 가질 것도 없고 버틸 수도 없게 된 적미군은 마침내 다시 철수할 것을 결정했다. 굶주린 배를 움켜쥔 채 산동의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해서 철수하는 적미군을 공격한 사람이 바로 한단에 가 있던 유수였다. 은혜를 원수로 갚는 유수의 공격을 받아서 적미군은 궤멸되었고 그 지도자들은 모두 자결하거나 잡혀서 주살되었다. 이 유수가 다시 한(漢)을 계승하여 광무제(光武帝)라 하였고 사가들은 그 나라를 후한이라고 한다.
광무제는 제위에 오르자마자 즉시 동이족을 박해하기 시작했다. 그는 경지와 호적의 재조사를 명령하고 반역자 다섯 명이 그 동료 한명을 죽이면 동료를 죽인 다섯 명은 모두 무죄가 되게 하는 제도를 반포하여 동이족 내부에 분열을 획책했다. 그는 또 반역의 기미가 보이는 고관들을 모조리 체포하여 처형했다. 대사도 구양흡의 가문은 8대에 걸친 박사의 가문이고 오랫동안 상서(尙書)를 연구하고 가르쳐온 집안이었다. 광무제는 그가 여남군 태수였을 때 경지 측량을 잘못 보고하여 부당 이득을 착복했다는 혐의로 체포했다. 그를 위해 탄원하는 제자가 1천명이나 되었고 대신 죽겠다고 나서는 사람들까지 있었으나 광무제는 그를 옥사하게 했다. 이런 공포 정치 속에서 동이족의 일부는 마침내 동방으로 귀환할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들 중 하나가 AD 42년 동료들과 함께 가락국 김해에 상륙한 소호의 직계 자손 수로(首露)라는 사람이었다.
(7) 해상 왕국 가야의 비밀
삼국유사의 기록에 의하면 수로의 일행이 지금의 낙동강인 황산강 하구에 도착했을 때에 그 땅을 신답평이라고 했다. 변한의 족장들이 수로를 추대하여 나라를 세우고 그 이름을 가락국이라 했는데 수로의 직할지를 금관(金官)이라 한 것은 수로가 가락국의 제철산업을 크게 일으켰기 때문이었다.
철은 당시 국력을 상징하는 것으로 한나라에서는 철과 소금을 전매제도로 통제했을 정도였다. 그리고 수로가 가락에 들어와 제철 산업을 크게 일으켰음은 당시 한 제국의 제철산업을 주도한 것이 산동 지역의 동이족이었음을 말해 주고 있다. 환웅천강도가 발견된 가상현의 남쪽에는 지금도 김향(金鄕)이라는 지명이 남아있어 수로의 연고지일 가능성도 있다.
금관은 동방 3국은 물론이고 선비와 오환 그리고 후한과 왜국까지 철을 보급한 제철의 대국이었다. 수로의 때에 이미 가락국이 보유한 상선은 500척에 이르고 있었다. 후일 신라가 이 곳을 김해(金海)라고 부른 것은 가락국이 비록 그 영토는 작다하나 모든 바다에 쇠를 공급한 해상 왕국이었음을 나타내고 있다. 한 제국의 박해를 받아 한반도로 귀환한 수로는 그의 제철 기술을 바탕으로 바다의 왕국을 건설할 꿈을 가졌고 마침내 그 꿈을 실현했던 것이다. 수로의 그 꿈을 성취한 이면에 또 하나의 사건이 있었다. 멀리 인도의 아유타국에서 온 허황옥 공주의 출현이었다.
수로가 가락에 도착한지 6년 후인 AD 48년 남해 바다에는 붉은 돛을 단 배 한 척이 붉은 빛 깃발을 휘날리며 나타났다. 그 배에는 아유타국의 공주 허황옥과 그를 수행해온 두 신하의 내외 그리고 선원 20여명이 타고 있었다. 김견명은 삼국유사에서 허황옥이 마치 불교를 전하러 온 것처럼 하여 그녀가 배에 파사(婆娑, 페르샤)의 석탑을 배에 싣고 온 것으로 기록해 놓았다. 그러나 허황옥이 도착하여 자신의 신분을 밝히며 수로에게 그녀가 온 목적을 말하는 대목을 다시 들어보자.
“금년 5월 제가 본국에 있을 때 부왕이 왕비로 더불어 저에게 말씀하시기를 어제 밤 꿈에 함께 상제(上帝)를 뵈었는데 상제의 말씀이 가락국왕 수로를 내려보내 등극케 하였으니 그는 나의 택함을 받은 사람이다. 그가 새로 나라를 세웠으나 아직 배필을 정하지 못하였으니 그대들은 공주를 보내어 짝을 삼게 하라 하시고 말을 마치자 하늘로 올라 가셨다고 합니다. 부모님께서 잠을 깬 후에도 상제의 말이 아직 귀에 쟁쟁한지라 저에게 이르시기를 너는 곧 이곳을 떠나 그리로 가라 하시었습니다”
여기 나오는 상제(上帝)는 천(天)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뜻하는 말이며 불교와는 아무런 상관없는 것이다. 불승이었던 김견명도 수로의 가문에서 전해오는 사실을 무시할 수 없어서 하나님이라는 말을 그대로 사용했을 것이다. 허황옥이 가락국에 도착한 AD 46년은 예수의 사도 도마가 페르샤를 거쳐 인도에 들어가 선교하던 시기이다. 당시 페르샤는 도마를 비롯하여 시몬, 다대오 등 사도들의 선교 중심지였던 것이다. 외경 ‘도마행전’에는 사도 도마가 인도에 들어가 처음 전도하여 세례를 준 사람이 인도의 공주이며 뒤따라 왕과 왕비도 세례를 받았다고 돼있다. 허황옥의 배가 처음 도착했던 곳을 가락 사람들은 ‘주님의 포구’ 즉 주포(主浦)라고 했다.
김견명이 파사의 석탑이라고 써 놓은 그 돌이 지금도 김해의 허왕후릉에 남아 있는데 그것은 사람이 손댄 석탑이 아니라 자연석 여섯개를 쌓아 놓은 것일 뿐이다. 허황옥은 그녀가 타고 온 배에 큰 돌 여섯개를 싣고 온 것이다. 왜 그 돌들이 배에 돌을 실려 있었을까? 페르샤에서 온 사도 도마는 본래 갈릴리의 배 기술자였다. 그는 먼 바다를 건너가야 하는 공주의 배에 돌을 옮겨가며 중심을 잡도록 여섯개의 큰 돌을 실어주었을 것이다.그것을 김견명은 파사의 석탑이라고 한 것이다.
김해에 있는 수로왕릉의 납릉정문에는 석탑 모양의 그릇을 가운데 두고 두마리의 물고기가 마주보고 있는 그림이 있는데 가운데 있는 그릇 모양은 누가 보아도 나중에 덧칠하여 개작하였음이 완연하다. 어쨌든 이 그림은 갈릴리의 오병이어 교회에 있는 모자이크와 같은 형태인 것이다. 허황옥과 결혼한 수로왕은 국호를 가락국에서 ‘가야’로 바꾸었는데 그 가야는 드라비다어로 물고기를 의미한다. 이 물고기는 초대 교회에서 기독교인들 사이에 사용된 암호였다. 헬라어로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 아들이며 구세주’라는 말의 이니셜이 물고기 즉 ‘익두스’라는 말이 되기 때문이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보면 신라 제5대 왕인 파사(婆娑) 이사금은 수로왕을 매우 존경하여 어려운 일이 있을 때에 그를 모셔다가 자문을 받았다고 되어 있다. 왜 그는 자신의 왕호에 파사 즉 페르샤라는 말을 사용했던 것일까. 이는 그가 수로왕을 통해서 페르샤와 인도를 중심으로 활동했던 도마의 복음을 듣고 감동하여 기독교인이 되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1956년 불국사 경내에서 발견된 석제 십자가와 영남대학교 박물관 지하실에 보관돼 있는 양을 품에 안고 있는 석상들도 그런 사실들을 뒷받침하는 것들일 수 있다.
우리 조상들은 고조선 시대부터 무궁화를 사랑하며 살아왔다. 무궁화는 산해경 해외동경에 훈화초(薰華草)로 나와 있고 고조선에서는 이를 천지화(天指花)라 하였으며 신라에서는 화랑의 머리에 꽂아주던 꽃이었다. 이 무궁화는 영어로 ‘샤론의 장미’라고 하는데 이스라엘에서는 메시아를 상징하는 꽃이고 고대의 메소포타미아와 시리아 등 중동 지역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갖는 꽃이었다. 아라랏 산 넘어의 소치 항구에도 이 꽃이 있고 중국의 태산에도 무궁화가 피고 있다. 그 꽃잎은 순결한 백색이고 화심은 피처럼 붉으며 꽃대는 노란 황금빛이다.
이는 바로 그리스도의 순결과 고난 그리고 영광을 보여주고 있다. BC 4년 유대 땅 베들레헴에서 아기 예수가 태어났을 때 동방의 박사들이 찾아와 이를 상징하는 유향과 몰약과 황금을 아기에게 선물로 드렸다. 바로 그 해, 혁거세 54년에 신라의 첨성관은 큰 별이 나타난 것을 관측했다.
“2월에 패성(혜성)이 하고(河鼓,은하수)에 나타났다”(‘삼국사기’ 신라본기)
(8) 우리는 왜 불교를 들여왔는가
고대 인도의 인더스 문명을 건설한 사람들은 메소포타미아쪽에서 흘러 들어간 셈족의 한 줄기인 드라비다족이었다. 그들의 언어는 우리와 같은 SOV형태의 교착어이며 가야를 통해 들어온 드라비다어는 우리말에도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인더스강 일대에 정착한 드라비다족의 신앙은 수메르와 같은 자유분방한 다신교였다. 그때 야벳 계열의 언어를 사용하는 아리안족이 힌두쿠시 산맥을 넘어 남하했다. 그들은 창조주 브라흐마에게 소와 양으로 제사하는 유일신 종교를 신봉하고 있었다.
그들은 원주민인 드라비다족을 정복하고 인더스 문명을 말살하기 위해 엄격한 계급제도를 만들고 그들을 노예계급으로 묶었다. 그러나 마치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나안의 다신교에 혼합됐듯이 창조주를 섬기던 아리안의 신앙은 드라비다족의 다신교와 섞여서 힌두교가 됐고 창조주 브라흐마는 힌두교의 여러 신들 중의 하나가 됐던 것이다.
인도 가비라 성에서 고다마 싯달타(BC 560-480)가 성주의 아들로 태어났을 때 인도는 힌두교와 연합한 계급제도가 더욱 분화되어 그 폐해가 막심했다. 본래 고다마 싯달타의 사상은 계급제도와 결탁한 힌두교의 신들을 축출하기 위해 제기한 무신론적 구원론이었다. 그것을 종교로 육성하여 포교를 시작한 것은 마우리아국의 아소카 왕(BC 272-232)이었다.
그 때까지도 고다마 싯달타의 가르침인 비폭력, 불살생의 원칙이 지켜졌는데 대륙에 들어오면서 점차로 살생유택을 내세우는 호국 불교로 변모하게 되었다. 동이족과의 협력을 포기했던 후한 광무제의 아들 명제는 유학을 대체할 통치 이념을 모색하다가 AD 67년에 호국 불교를 들여오게 된 것이다.
그러나 후한에 들어온 그 불교가 고구려에 들어온 것은 소수림왕 2년 즉 AD 372년이었다. 아무리 교통이 불편한 시대였다고 하더라도 어떻게 불교의 전래가 300년도 넘게 걸렸던 것일까? 그것은 고구려에서 불교를 막아낸 강력한 종교 세력이 있기 때문이었다. 역사학자들은 우리 나라에 불교가 들어오기 전에 샤머니즘이 있었을 것이라고 추측하는데 무당이나 점쟁이의 세력이 불교를 300년 동안이나 못들어 오게 했다는 것은 이치에 닿지 않은 억지 논리다. 나는 고구려가 이미 기독교 국가였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고구려는 말타고 활을 쏘는 전투적인 혈통을 지닌 나라였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고구려 초기에 전쟁을 잘했던 왕들은 모두 대신들에 의해 제거되었다.
고구려 제5대 모본왕은 군대를 이끌고 한나라의 북평, 어양, 상곡을 지나 태원까지 쳐들어가서 요동태수의 항복을 받아냈던 영웅이었다. 그러나 삼국사기의 고구려본기는 그가 성품이 포악하여 측근에게 시해당했다고 기록해 놓았다. 제6대 태조대왕의 아우 수성은 한나라의 유주자사, 현토태수, 요동태수 등이 침입해 왔을 때 선비족과 연합하여 이를 대파하고 현토와 요동 땅을 수복한 맹장이었다. 왕이 죽고 수성이 즉위했는데 그도 역시 신하에게 살해당했다. 삼국사기는 역시 그가 포악했기 때문이라고 썼다. 이후로 고구려의 영토는 위축되고 시작하고 국력은 약해지기 시작한다. 왜 전투적인 민족의 고구려에서 전쟁 잘하는 영웅이 대접을 받지 못했을까. 오른편 뺨을 때리면 왼뺨도 돌려대라는 기독교 정신을 그들이 고지식하게 따랐던 때문은 아니었을까.
날로 연약해지던 고구려는 16대 고국원왕 때에 큰 수모를 당한다. 동족인 선비족의 모용황이 쳐들어와 환도성을 불태우고 왕의 모친과 왕비를 잡아갔으며 왕은 달아나 겨우 목숨을 건지는 치욕을 당했던 것이다. 이 때 형제국인 백제는 그것을 구경만 하고 있었다. 동이족 모두가 한나라와 대결하여 싸우는데 슬그머니 물러서있던 고구려는 선비와 백제로부터 따돌림을 받고 있었던 것이다.
고국원왕은 초토화된 고구려를 다시 일으켜보려고 호국불교를 생각하게 되었고 위나라 승려 굴마(堀摩) 등과 접촉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때 백제의 근초고왕이 쳐들어와 고국원왕을 죽이고 물러간 것이다. 살해당한 부친의 뒤를 이은 소수림왕은 즉위 이듬해에 더이상 대신들이 이의를 말할 수 없는 상황을 이용해 호국 불교를 도입하고 불승 아도에게 절을 건축하도록 승인했다. 아도는 위승 굴마와 고구려 여인 도녕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었다.
그 후 AD 384년에 백제를 방문한 ‘호승’ 마라난타를 필자는 불승으로 보지 않는다. 그 후로 백제가 불교를 받아들인 흔적이 없는 것이다. 마라난타라는 이름은 아람어로 ‘우리 주께서 오신다’라는 뜻의 ‘마라나타’와 유사하다. 호(胡)는 서역에서 왔다는 말이고 당시 기독교의 선교사도 승(僧)이라는 말로 불렀다. 어쨌든 불교는 고구려에서의 성공을 발판으로 신라 포교를 위해 전력을 다했다. AD 488년에는 불승이 왕궁에 잠입하여 소지왕의 왕비와 통정까지 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신라가 불교를 공인한 것은 고구려가 받아들이고 다시 155년이나 지난 뒤인 AD 527년 법흥왕 때였다. 이 때 불교 도입을 주도한 세력이 병부령 이사부와 어릴 때 고구려에 들어가 혜량이라는 중으로부터 수계를 받고 돌아온 무장 거칠부 등 군부세력이었다. 그들은 대신들을 위협하여 호국 불교를 들여오고 다시 5년 후인 AD 532년 기독교의 종주국이었던 금관 가야를 쳐서 멸망시키는 것이다. 종주국을 친 명분을 세우기 위해 거칠부는 신라 국사를 편찬하면서 가야의 수로왕을 난폭한 자로 만들고 가야가 신라를 여러 번 공격한 것으로 개작하여 기록해 놓은 것이다.
고구려에서는 호국불교를 받아들인 후에 광개토왕이라는 영웅이 나타나서 백제와 신라를 압박했고 또 장수왕이 그 뒤를 이었다. 장수왕은 불승 도림(道琳)을 첩자로 백제에 들여보내 개로왕을 미혹케하여 국력을 소모시킨 후 군사를 몰고 들어가 개로왕을 죽임으로서 고국원왕의 원수를 갚았다.
그 후에 신라까지 불교를 도입하고 가야를 멸망시키자 백제의 성왕은 마침내 백제에도 불교를 들여오기로 결심했다. AD 541년에 성왕은 양나라로부터 불경과 불상을 도입했으며 일본에도 이를 전하여 동방 3국과 일본이 다 불교국이 되었고 후한, 위, 진에 이어 대륙을 석권한 선비족의 나라 북위와 하화족의 나라인 양나라 등 동방의 모든 나라가 다 불교국으로 된 것이다.
(9) 김유신의 꿈과 좌절
‘화랑도’는 본래 관에 의하여 주도된 것이 아니고 순수한 민간의 전통이었다. 같은 풍습이 ‘선인’이라는 이름으로 백제와 고구려에도 있었던 것으로 보아 고대로부터 전승된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그렇다면 그들은 어떤 성격의 집단이었으며 낭도들 중에서 화랑을 선발할 때에는 어떤 기준으로 했을까.
작가 김동리씨는 이들이 ‘종교적 집단’이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자신보다 국가를 먼저 생각하고 15세 내외의 소년이 전쟁에 나가 기꺼이 목숨을 버리는 일은 생사를 초월한 종교적 신념이 아니고는 어렵다는 것이다. 그것을 뒷받침하는 자료가 삼국사기에 소개된 최치원의 ‘난랑비서문’이다.
“우리 나라에는 현묘한 도가 있는데 이를 풍류(風流)라고 한다. 이 교를 설치한 근원은 선사에 자세히 실려 있거니와 실로 이는 삼교를 포함한 것으로 모든 백성과 접촉하여 이를 교화하였다”
‘선사’라는 자료는 실전되었으나 최치원의 이 글은 ‘풍류’라는 말이 명산대천을 찾아 시와 가무를 즐기는 유흥의 문화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종교였음을 명백히 하고 있다. 당시 화랑도는 또 ‘풍류도’라고도 불리웠고 삼국유사는 화랑도의 명부를 ‘풍류황권’이라 기록하고 있다. 이 ‘풍류교’ 즉 ‘바람과 물의 교’는 무엇일까. 기독교인이면 즉시 요한복음의 기사를 떠올리게 된다. 유대인 관원 니고데모라는 자가 밤에 가만히 예수께 찾아와 ‘영생의 도’를 묻자 예수께서는 이렇게 대답해 준다.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요 3:5)
그 분은 또 성령에 대해서도 설명해 준다.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요 3:8)
필자는 최치원이 말한 이 ‘바람과 물의 교’가 기독교라고 생각한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면 방언, 신유, 예언 등의 은사와 증거가 나타나므로 성령받은 자를 화랑으로 선출할 수 있었을 것이다. 경주박물관에는 진흥왕 무렵의 것으로 보이는 금석문이 소장되어 있는데 거기에는 두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맹세한다’(天前誓)라는 말이 들어 있다.
진지왕 때의 불승 ‘진자’는 미륵에게 화랑이 돼 오시라고 발원하다가 꿈에 한 동자를 만났는데 그 이름을 미시(未尸)라고 했다. 이 미시는 바로 ‘메시아’일지도 모른다. 법흥왕이 불교를 도입한 후로 화랑도가 소멸되었으나 진흥왕은 화랑이 국방의 초석임을 인식하고 다시 정부 주도로 화랑의 제도를 시작했다. 이 제도의 부활때문에 혜택을 본 사람이 바로 15세에 화랑이 된 김유신이었다. 화랑이 된 그는 17세때에 또 중악(中嶽)의 석굴에 들어가서 기도하다가 삼국통일의 비전을 얻었다고 한다.
유신은 금관가야의 마지막 왕이었던 구형왕의 증손이었다. 유신의 조부 무력은 관산성 전투에서 백제 성왕을 전사하게 하고 1만여명을 섬멸한 대공을 세웠는데도 벼슬이 아찬에 머물렀다. 유신의 부친 서현은 신분 상승을 위해 왕족인 입종의 딸 만명을 연애하여 유신을 낳았다.
김대문이 쓴 ‘화랑세기’는 지금 실전되었으나 날조된 위서 ‘화랑세기’는 유신에 대한 한가지 험담을 적어 놓았다. 그가 어려서부터 여색을 좋아하여 창녀 천관의 집에 드나들므로 모친 만명이 나무랐다. 유신은 그곳에 가지 않기로 약속했는데 어느 날 마상에서 졸다보니 말이 또 그리로 갔으므로 그는 말의 목을 베고 돌아섰다. 그 후 창녀 천관은 중이 되어 그 자리에 천관사를 세웠다는 것이다.
15세에 성령으로 거듭나 화랑이 되고 17세에도 석굴에 들어가서 기도했다는 유신이 언제 또 창녀의 집에 드나들었을까. 천관사는 교회였고 천관(天官)이란 성직자였을 것이다. 경주에 교회가 아직 남아 있어 유신이 기도하러 다녔으나 모친 만명은 불교 국가인 신라에서 그런 행동이 눈에 띄면 장차 큰 뜻을 이루는 데 불리할 것이라고 충고했을 것이다.
또 단재 신채호 등 일부 사학자는 유신이 당과 협력하여 삼국을 통일하려다가 고구려 땅을 잃게 되었다고 비난하기도 한다. 그는 왜 당과 손을 잡으려고 했을까. 당을 건국한 이연의 가문은 본래 선비족 출신의 농서 이씨였고, 부친을 도와 당을 건국한 이세민은 형과 조카들을 죽이고 부친의 제위를 물려받은 사람이었다. 그 이세민이 죄를 회개하고 거듭나는 놀라운 일이 일어나는데 AD 635년 그는 파사의 선교사 알로펜의 설교를 듣고 재상 방현령 등과 함께 기독교인이 되었던 것이다.
그 때의 일은 지금 서안 비림(碑林)에 보존되어 있는 ‘경교유행중국비’에 상세히 기록돼 있다. 이세민은 경교의 교지가 진실로 인간을 구원하는 도리라 하며 즉시 장안에 대진사(大秦寺) 즉 교회를 세우게 했다. 또 그는 전국 각지에 경사(景寺)를 세우게 했으며 알로펜을 진국대법주 즉 대덕으로 삼고 그리스도를 경존, 선교사를 경승, 기독교인은 경사(景士)라 했다.
이것을 알게 된 유신은 기독교인이 된 이세민과 손을 잡고 불교의 천하가 되어버린 동방을 다시 하나님의 땅으로 회복시키려 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로부터 8년이 지난 AD 643년 이세민은 고구려가 계속하여 신라를 괴롭히자 보장왕에게 사신을 보낸다.
“당 태종이 도사 숙달(叔達) 등 8명에게 노자 도덕경을 주어 파견하므로 왕은 이들을 승사관에 맞아들였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알로펜 선교사의 설교를 듣고 경교의 신자가 된 이세민이 고구려에 노자의 도덕경을 보냈을 리가 없다. 그는 고구려 왕에게 메시야경(迷詩所經)을 보내며 예수를 믿고 신라를 괴롭히지 말라고 권했을 것이다. 그러나 고구려왕이 이를 듣지 않자 이세민은 친히 군사를 이끌고 고구려를 공격했다. 그는 안시성 싸움에서 부상을 입고 돌아가 AD 649년에 죽었다.
김유신은 계속해서 이세민의 아들 고종과 삼국 통일의 일을 추진하였으나 백제 공격을 예정한 AD 660년 여승 출신의 측천무후가 병약한 고종을 젖히고 정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백제와 고구려 공격은 계획대로 시행되었으나 측천무후는 이세민의 약속을 파기하고 백제와 고구려 땅을 점령하려 했다. 이에 놀란 유신이 당과의 전쟁을 선포하고 고토 수복에 나섰으나 청천강 이남만을 겨우 찾게 된 것이다.
(10) 우리에게 그분은 말씀하신다
하나님은 살아 계시고 우리 가운데서 일하시고 역사를 주관하시는 분이다. 책에 기록된 역사는 진실하지 않은 경우가 많다. 사람이 왜곡하고 날조하여 거짓의 옷을 입고 있는 것이다. 문자는 말보다 진실하지 못하다. 사람의 두뇌는 본래 진실한 것만을 기억할 수 있게 되어 있는데 거짓말을 하는 사람은 자신의 거짓말을 다 기억하지 못하여 꼬리를 잡히는 것이다. 반면에 문자라는 것은 예사로 진실을 날조하고 그것이 가장 확실한 증거인 것처럼 기세를 올린다. 중국의 사서 ‘회남자’(淮南子)에는 이런 말이 적혀 있다.
“처음에 창힐이 까마귀 발자욱을 보고 문자를 만들어 약속의 표적으로 하니 이로 인하여 장차 사(詐)와 위(僞)가 생겨날 것이요 그리 되면 사람이 그 근본을 버리고 지(枝)와 말(末)에 힘쓰게 될 것이며 경작의 업을 버리고 이득을 추구하는데만 힘쓰게 될 것이므로 하나님이 이를 근심하여 비를 내리셨다”
그러므로 성경은 문자보다 말씀이 중요하다고 선언한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요 1:1)
그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고 그 역사를 방관하시는 분이 아니다. 그러므로 한 때 동방의 모든 나라들이 불교의 나라가 되었던 것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셨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며 김유신이 이세민과 손을 잡고 그 동방을 다시 하나님의 나라로 회복하려 했으나 그의 간절한 소원을 들어주시지 않은 것도 역시 그분의 섭리였다. 하나님은 왜 유신의 소원을 들어주지 않았던 것일까?
교회의 지난날을 돌이켜볼 때 권력이나 무력의 도움으로 교회가 발전한 적은 한번도 없었다. 로마 황제가 교회의 후원자로 되면서 교회는 타락하기 시작했고 종교 개혁을 주도한 나라들이 산업혁명으로 강력해지면서 기독교는 후진국을 수탈하는 강대국들의 앞잡이로 전락했다. 교회는 가난과 핍박 속에서 성장했지 권력의 비호를 받아 잘된 적은 없었다. 칼과 창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회복하려 했던 김유신의 열정은 가상했으나 하나님은 그 방법에 찬성할 수 없었던 것이다.
고령 가야를 중심으로 재기를 시도하다가 이사부의 공격으로 실패한 가야의 유민들은 김유신에게 일말의 소망을 걸었다. 그러나 그가 실패하자 모두 민족의 시발점이었던 갑곶섬(江華)으로 옮겨가 그곳을 중심으로 무역 활동에 전념한 것 같다. 개성, 김포, 강화 지역에 살고 있는 김해 김씨와 허씨 그리고 인천 이씨 등은 모두 가야의 후손들이다. 후에 신라 조정은 유신의 세째 아들 원정(元貞)에게 당시의 정부 조직에도 없던 해간(海干)이라는 새로운 벼슬을 내렸는데 이는 당시 대외무역에 힘쓴 공로와 영향력 때문에 그에게 수여한 명예직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유신의 시도가 실패한 후 신라는 본격적인 불교의 나라가 되었다. 교회 또는 경사(景寺)가 있던 곳에는 사찰이 들어섰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민간 신앙을 아주 무시하지는 못하여 재래신앙과 어울리기 위한 노력을 많이 했다. 지금도 사찰에 남아 있는 삼성(三聖)의 개념은 본래 불교에 없던 것으로 경교의 삼묘(三妙) 즉 삼위일체를 본딴 것이며 칠성(七星)도 요한계시록에서 그리스도의 오른 손에 있는 일곱 별과 같은 것이다. 사찰의 이름들 가운데는 성경적 의미를 가진 것들도 많이 있어서 그것이 경사였을 때의 이름을 그대로 사용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통일 신라에서 고려로 불교 시대가 이어지면서 지나치게 가부장적이었던 우리 민족은 자유분방한 개방의 시대를 맞게 되었다. 유럽의 르네상스처럼 민족의 재능과 문화가 꽃피는 시대로 들어서게 된 것이다. 삼국시대의 유물과 학문 그리고 고려 시대의 노래와 자기들을 보면 당시의 사회가 얼마나 개방적이었는가를 알 수 있다. 그러나 환락이 길어지면 국력의 쇠퇴를 가져오게 마련이다. 고려에서는 승려가 너무 많아서 아들이 셋 있으면 하나는 승려가 되어도 좋다는 법을 만들어야 했을 정도였다. 그러다가 결국 고려는 몽골의 침입으로 오랫동안 지배를 당한다.
몽골은 대륙을 다 휩쓸고 중앙 아시아를 건너 유럽까지 쳐들어가면서도 고려를 그냥 놔두고 있었다. 몽골은 부계보다 모계의 족보가 중요한데 칭기즈칸의 12대조 할머니 ‘알란고아’는 고구려인의 후예였다고 하니 조상의 나라 고구려의 정신을 계승했다는 고려를 존중해서였을 수도 있다. 칭기즈칸의 아내 케라르트는 경교 신자로 영내에 교회를 설립했고 대륙 전역에도 십자사(十字寺)를 세웠다. 칭기즈칸의 부친 이름은 ‘예수카이’인데 그 이름도 기독교와 관계가 있을 수 있다. 그 칭기즈칸이 죽고 나서 부녀들이 대세를 주도했던 몽골은 갑자기 불교 국가인 고려를 공격한 것이다. 강화섬에 천도한 고려는 대장경판을 완성하는 등 호국 불교로 나라를 구하려고 애썼으나 137년이나 지배하던 몽골이 물러갔을 때 고려의 국력은 이미 바닥나 있었다.
쿠데타로 고려를 전복하고 새 나라를 세운 이성계의 세력은 구정권의 종교이며 국력 약화의 원인을 제공한 것으로 지목된 불교를 탄압하기 위해 숭유억불 정책을 썼다. 그들이 채택한 유학은 지난날 한나라가 만들어낸 제국의 통치 이념이었다. 그러나 제국의 통치 이념과 가부장적 권위를 결합시킨 유학의 도입은 자유분방으로 치닫던 우리 사회에서 다시 흐트러졌던 백성을 단속하고 셈족의 자손들에게 장자로서의 책임감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지난날 풍성했던 우리를 임진과 병자의 난으로 다시 가난하게 하시고 어렵고 힘든 세월을 보내게 하신 까닭을 그분은 밝혀 주신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눅 4:18-19)
(11) 우리에게 거는 하나님의 기대
하나님이 역사를 방관하지 않고 그것을 주관하시는 분이라면 고려와 이조의 지배층이 그 정치적 목적에 따라 혹은 불교를 도입하고 또는 유학을 채택했다 하더라도 그것은 모두 하나님의 허락과 섭리 안에서 이루어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동안 서민들은 어떻게 살아왔던가. 우리 조상들이 아이들을 기르며 들려주었던 민담과 설화를 살펴보면 지배자들의 역사에 담겨져 있지 않은 삶의 실체를 엿볼 수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 어느 지역이든 전해 내려오는 ‘햇님 달님’의 설화를 보자.
오누이를 남겨 놓고 떡장사를 나간 할머니의 떡을 호랑이가 다 빼앗아 먹고 결국 할머니의 몸까지 잡아먹었다. 호랑이가 할머니로 변장하고 오누이를 찾아오자 그들은 나무에 올라가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다. 우리를 살리시려면 새 동아줄을 내려주시고 죽이시려면 헌 동아줄을 내려주시라고 기도하자 하늘에서 새 동아줄이 내려와 오누이는 그것을 잡고 하늘로 올라간다. 성경은 그리스도가 떡으로 오셨으며(요 6:33) 그 몸을 대속물로 주기 위해 오셨다고 말한다.(마 20:28) 또 마지막에는 짐승이 그리스도로 변장하고 올 것이며(계 13:4) 성도는 들림받는다고 한다.(살전 4:17)
유명한 ‘춘향전’의 이야기를 보면 춘향을 데리러 온다고 약속한 이도령의 귀환이 늦어지고 있는 동안에 변학도가 수청을 요구하며 박해한다. 어사가 돼 돌아와 변학도를 다스리는 이도령은 사단을 심판하기위해 재림하는 메시아의 모습이다. 이도령이 잠시 변장하고 왔다가 다시 어사로 나타나는 것은 재림론의 공중강림과 지상재림을 생각나게 한다.
민담 ‘섬동지전’의 두꺼비는 지네 사당에 바쳐진 처녀를 위해 지네와 싸우다가 지네와 함께 죽는다. 그러나 두꺼비는 다시 살아나 준수한 신랑으로 변하여 처녀와 결혼식을 올린다.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죽었다가 부활한 예수가 신랑이 돼 그 신부인 교회와 혼인잔치를 하는 성경의 종말론 그대로다.(계 19:7)
심청전에서 심청은 아버지가 절에 드리고 싶어하는 공양미 삼백 석 때문에 팔려가서 인당수에 몸을 던진다. 그러나 심봉사는 공양미를 절에 바치고도 눈을 뜨지 못했고 나중에 살아서 돌아온 딸을 만나 눈을 뜨게 된다. 이 설화의 심청도 역시 부활한 그리스도를 상징하고 있다.
놀부와 흥부의 이야기는 성경에 나오는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를 그대로 옮겨 놓은 것이다. 우리 조상들이 아이들에게 들려준 이야기에는 이런 것들이 수없이 많다. 이 모든 설화들 가운데는 고대로부터 구원자를 기다려왔던 우리 민족의 메시아 사상이 들어 있고 성경적 교훈이 담겨져 있다.
우리 민족의 조상이 고아시아족이든 알타이계의 숙신족이든 우리는 이 땅에서 함께 섞여서 살아왔고 전래된 설화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내려왔든 또는 하나님의 딸이 내려왔든 모두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긍지로 여기며 살아온 천손민족(天孫民族)이다. 교만과 환락의 문화가 세상을 휩쓸고 있는 이 시대에 우리가 먼저 해야 할 일은 하나님의 자녀로 태어난 긍지와 품위를 회복하는 것이다. 동물적 본능이 사람을 희롱하고 화폐의 가치가 인간을 지배하는 이 야만적인 문화 속에서 우리 안에 숨겨져 있던 보화를 찾아내고(마 13:44) 뱀에게 빼앗겼던 영안(靈眼)을 되찾아야 한다.
하나님을 창조주로 인정하고 그 분을 아버지로 섬기는 민족은 특별한 선택을 받은 민족이다(사 64:8). 그 하나님이 우리 민족에게서 무엇을 바라시길래 3600명의 신들이 우굴거리는 메소포타미아에서 우리 조상들을 꺼내어 이 동방으로 이끌어 오셨을까. 1960년대부터 우리는 민족의 자존심을 되찾겠다는 결의로 목숨을 걸고 경제개발을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여러가지 무리가 있기는 했으나 어쨌든 우리는 길고 긴 가난의 세월을 벗고 한강의 기적을 연출해 내었다. 1997년 12월 외환위기로 IMF의 구제금융을 신청하기 직전까지 무역거래 규모는 197개 국가 중에서 제11위였다. 나는 그것을 생각할 때마다 야곱의 열한번째 아들 요셉을 생각한다.
야곱이 늦게 얻은 아들 요셉을 너무 편애하여 그 형들은 요셉을 시기했다. 형들은 그 요셉을 잡아 장사꾼들에게 팔았고 장사꾼들은 그를 애굽왕의 시위대장에게 팔았다. 그러나 요셉은 낙심하지 않았다. 그는 하나님을 신뢰하며 어디를 가든지 최선을 다했고 심지어는 감옥에서도 감옥 총무를 했다. 그는 결국 왕을 만날 기회를 잡아 애굽의 총리가 되었고 풍년기에 양곡을 저축하여 전 세계에 기근이 왔을 때 그들에게 양식을 제공하는 것이다. 혹시 하나님이 우리 민족을 이 시대의 요셉으로 지명한 것은 아닐까. 비록 IMF 사태로 발목을 잡혔지만 우리가 낙심하지 않고 하나님을 신뢰하며 최선을 다하면 홍익인간의 정신으로 인류를 구원하게 될지도 모른다.
도대체 무엇이 우리 조상들로 하여금 멀고 먼 시베리아를 지나 바이칼 호를 건너 아사달까지 오게 하였으며 또 무엇이 중앙 아시아와 알타이 산맥을 넘어서 송화강까지 오게 했던 것일까? 우리 조상들의 정신속에는 ‘천손사상’ 외에 또 어떤 것이 있었을까. 그들이 동방으로 오기까지에는 아리랑 가사처럼 수많은 ‘떠남’의 동기들이 있었을 것이다. 아마 아우들과의 사이에 분쟁이 생길 때마다 땅을 양보하고 떠나온 ‘장자의 정신’(창 13:9)과 형제간의 싸움을 피하려는 ‘평화정신’(마 5:9) 때문에 땅의 끝까지 오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또 우리의 본향은 저 천국에 따로 있기 때문에 이 세상을 자리잡을 곳으로 생각하지 않는 ‘나그네 정신’(히 11:13)도 아마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우리 조상들이 그 자손에게 단단히 부탁했던 것은 나의 유익보다 여러 사람의 유익을 먼저 생각하라는 홍익인간(弘益人間)의 정신이었다.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나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하라”(고전 10:33)
필자는 사도 바울의 이 말씀으로 졸고를 끝맺는다. 논란도 있고 이의도 있을 것이나 2001년 벽두에 드린 이 화두를 시작으로 하여 많은 분들이 이 방면의 연구에 나서 주셨으면 하는 것이 필자의 바람이다. 그동안 읽어주신 여러분께 감사를 드린다.
Written by 김성일 장로
1965년 서울대 기계공학과 졸업
현재 한세대 겸임교수, 창조사학회 부회, 이태원 감리교회 장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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