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을 세우는 크리스챤
고린도전서 8:1-13 우상의 제물에 대하여는 우리가 다 지식이 있는 줄을 아나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 2 만일 누구든지 무엇을 아는 줄로 생각하면 아직도 마땅히 알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요. 3 또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면 이 사람은 하나님의 아시는바 되었느니라. 4 그러므로 우상의 제물 먹는 일에 대하여는 우리가 우상은 세상에 아무 것도 아니며 또한 하나님은 한분 밖에 없는줄 아노라. 5 비록 하늘에나 땅에나 신이라 칭하는 자가 있어 많은 신과 많은 주가 있으나 6 그러나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났고 우리도 그를 위하여 또한 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니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우리도 그로 말미암았느니라. 7 그러나 이 지식은 사람마다 가지지 못하여 어떤이들은 지금까지 우상에 대한 습관이 있어 우상의 제물로 알고 먹는고로 그들의 양심이 약하여지고 더러워지느니라. 8 식물은 우리를 하나님 앞에 세우지 못하나니 우리가 먹지 아니하여도 부족함이 없고 먹어도 풍족함이 없으리라. 9 그런즉 너희 자유함이 약한 자들에게 거치는 것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 10 지식 있는 네가 우상의 집에 앉아 먹는 것을 누구든지 보면 그 약한 자들의 양심이 담력을 얻어 어찌 우상의 제물을 먹게 되지 않겠느냐. 11 그러면 네 지식으로 그 약한 자가 멸망하나니 그는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형제라. 12 이같이 너희가 형제에게 죄를 지어 그 약한 양심을 상하게 하는 것이 곧 그리스도에게 죄를 짓는 것이니라. 13 그러므로 만일 식물이 내 형제로 실족케 하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치 않게 하리라.
오늘 본문 고린도전서 8장 1절부터 13절까지의 내용은 고린도교회가 사도 바울에게 질문한 문제에 대한 사도바울의 답변입니다.
지금부터 약 1900년전 고린도교회가 세워진 고린도라는 도시는 우상숭배로 가득찬 도시였습니다. 우상이란 무엇입니까?
시편 115:4-7절에 보면 우상이란 사람의 손으로 만든 물건으로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는 존재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는 존재,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존재, 코가 있어도 냄새 맡지 못하는 존재, 발이 있어도 걷지 못하는 존재"를 가리킵니다.
우상숭배
출애굽기 32장이 그 당시의 생활을 자세하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모세가 시내 산에 올라가 하나님의 십계명 돌 판을 받기 위해 머물러 있는 사이, 모세를 기다리다 지친 백성은 아론에게 청해서 금을 녹여 부어 수송아지를 만들게 합니다. 그 수송아지야말로 애굽 땅으로부터 자기들을 인도하여 온 신이라고 선언하고 새로운 신을 위하여 축제를 엽니다.
백성이 모세가 산에서 내려옴이 더딤을 보고 모여 아론에게 이르러 가로되 일어나라 우리를 인도할 신을 우리를 위하여 만들라 이 모세 곧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사람은 어찌 되었는지 알지 못함이니라. 2 아론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 아내와 자녀의 귀의 금고리를 빼어내게로 가져 오라. 3 모든 백성이 그 귀에서 금고리를 빼어 아론에게로 가져 오매 4 아론이 그들의 손에서 그 고리를 받아 부어서 각도로 새겨 송아지 형상을 만드니 그들이 말하되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신이로다 하는지라. 5 아론이 보고 그 앞에 단을 쌓고 이에 공포하여 가로되 내일은 여호와의 절일이니라 하니 6 이튿날에 그들이 일찌기 일어나 번제를 드리며 화목제를 드리고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놀더라.
이렇게 수송아지 모습의 신을 만드는 것이 하나님께 대한 대단히 엄청난 죄이며, 그것이 맹세를 배반하는 것이라는 사실은 이스라엘 백성이 시내 산기슭에서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돌 판 즉 십계명의 첫째가 우상을 금하는 계명입니다.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며(출20:4)
여기서 나타나는 것과 같이 우상숭배를 금지하는 명령은 구약성서 전체에 걸쳐 있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민족이 탄생하기 시작한 최초로부터 그리스도의 역사가 시작하기까지 끊임없이 반복하고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경고로서 나타나 있습니다(참조 수 24:2 여호수아가 모든 백성에게 이르되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에 옛적에 너희 조상들 곧 아브라함의 아비, 나홀의 아비 데라가 강 저편에 거하여 다른 신들을 섬겼으나).
바꾸어 말하면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끊임없이 우상숭배에 빠지는 경향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 즉 참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지는 위험에 항상 내놓아져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우상숭배의 마음
그러면 이 우상숭배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그리고 어째서 이스라엘 백성이 그토록 끊임없이 그 잘못에 빠지고 있었던 것인지를 말씀드립니다.
古代 近東에는 돌과 나무, 소와 뱀 등을 신의 상징으로 하여 그 像을 만들어 예배하는 풍습을 널리 볼 수 있었습니다. 이것을 성서가 우상숭배라고 부르며 그것을 엄격하게 금지하고 있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먼저
첫째 이유는 하나님의 참모습을 왜곡하는 것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눈으로 볼 수 없는 초월하신 분이며 우리들이 느끼고 생각하고 이해하는 방법을 넘어 훨씬 깊고 우리들 인간이 느끼고 생각하는 영역에 포함할 수 없는 존재이십니다. 우리들이 생각하는 대로의 하나님의 모습을 찾는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우리들의 수준으로 낮춰버리는 것이 되어 참다운 하나님의 모습을 왜곡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갓난아기가 자기가 생각하는 대로 장난감을 이리저리로 살펴보고 만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자기 생각이 닿는 대로 하려는 것과 같다하겠습니다. 하나님을 인간의 수준으로 낮추려고 하는 태도는 하나님께 대한 참사랑의 태도가 모자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인간 편에서야말로 하나님을 그분의 진실한 모습에서 이해하고 신뢰함으로써 하나님께로 나아가야만 하는 것입니다.
우상숭배를 금하는
두 번째 이유는 인간의 욕망에 있습니다. 실제로 고대 중근동 세계의 신들은 인간에게 구체적인 풍요로움을 약속하는 신들입니다.
어떤 신은 豊作, 어떤 신은 生殖과 번영을, 어떤 신은 쾌락을 약속합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어떤 형태로 만들 때, 거기에 나타나는 마음이란 그 하나님을 통하여 자기를 위한 구체적인 이익을 추구하는 욕망이 담겨있습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서 예배하는 것보다는 자기에게 구체적인 이익을 가져오고 물질적인 결실을 구하는 동기가 앞서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거기에는 하나님을 자기의 이익을 위하여 이용하려고 하는 위험한 마음이 담겨있습니다. 좀 더 깊이 생각해보면 거기에는 하나님의 세계, 영원의 세계보다도 이 지상의 세계에서 생활의 안정과 즐거움을 찾는 마음이 있어 하나님의 세계를 무시하고 地上의 것에만 마음을 빼앗기는 모습이 나타나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실제로 사람들이 종교를 찾는 많은 동기 중에는, 지금 지적한 것과 같이 자기의 행복만을 찾고 있는 자세를 볼 수 있습니다.
우상숭배를 금지하는
세 번째 이유는 두 번째 이유와 관련을 갖고 있는데, 즉 우상숭배에 의해서 인간이 이 지상생활 위에 절대적인 목적을 두게 된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자기의 욕망을 어떻게 해서든 달성하고 싶을 때, 어느새 그것을 절대화하고 마치 하나님과 같이 자기의 중심에 가두는 경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을 성경에서는 우상숭배라고 합니다.
예를 들면, 시편 가운데에는 어떤 사람은 자기의 생각을 하나님으로 하고 자기의 지위, 명예를 자기의 하나님으로 한다는 표현이 나옵니다. 말하자면 지위나 명예를 얻는 것, 쾌락을 구하는 것을 마치 자기의 하나님인 것처럼 중요하게 여기고 그것을 위하여 자기의 모든 것을 쏟아 넣는것입니다. 이런 행위들을 성경에서는 우상숭배의 형태로 보고 있는 것입니다.
성서는 인간의 참사랑의 대상, 마음을 다하고 영혼을 다하여 사랑해야만 하는 대상을 언제나 하나님으로 합니다. 만약 사람이 하나님 이외의 것을 얻으려고 힘을 다한다면 그것은 우상숭배가 되는 것입니다. 우상숭배야말로 가장 높으신 하나님께 대한 배반이 되는 것입니다.
인간의 나약함
인간이란 대단히 쉽게 하나님을 놓치고 지상의 세계에 끌려가버리는, 하나님을 배반하기 쉬운 존재입니다. 인간은 눈에 보이지 않고 손으로 만져지지 않는 하나님께 자신을 바치기보다도 자기의 욕망이 실제로 채워지고 즐거움을 얻는 쪽으로 흘러가기 쉬운 존재입니다. 이 우상숭배는 현대에도 여러 종교 속에 존재하고 있습니다.
나의 가정, 출세, 쾌락, 기술의 진보 등은 새로운 형태의 인간의 우상이며 그것이야말로 인간의 행복을 약속해 주는 신들인 것이다.
구약성경에 보시면 약 40여종의 우상의 명칭이 등장합니다.
불레셋 나라에는 다곤(삼상 5:2)이라는 우상이, 아람 나라에는 드라빔(창 31:19)이라는 우상이, 모압 나라에는 그모스(민 21:29)라는 우상이, 바벨론 나라에는 담무스(겔 8:14)라는 우상이, 암몬 이라는 나라에는 밀곰(왕상 11:5)이라는 우상이, 시돈이라는 나라에는 아스다롯(왕상 11:5)이라는 우상들이 있었습니다.
사람의 손으로 만든 이같은 물건을 하나님처럼 섬기는 것을 가리켜 우상숭배라고 합니다.
지금부터 약 1900년전 고린도라는 도시에는 특별히 비너스,라는 여자 신을 섬기는 신전이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사랑의 여신. 방종스러운 정욕의 여신으로 알려지고 있음)
당시 고린도에 사는 대다수의 사람들은 신전을 찾아가 제물을 바치고 제사를 드립니다. 제물을 바치면 세 부분으로 나누어 그 짐승의 일부는 제사를 집례한 제사장에게 주었고, 또 일부분은 제단에서 불사르고, 일부분은 그 제물을 바친 사람의 소유불로 사용 되었습니다. 그리고 제사장에게 주어진 물건은 일반 시장에 내다 팔았습니다. 그러므로 당시 고린도라는 도시에서 예수를 나의 구세주, 나의 하나님으로 믿고 고린도교회 안에 들어온 신자들에게 있어서 우상 앞에 드려졌던 제물을 먹어도 되는가? 아니면 먹어서는 아니되는가? 하는 문제는 매우 실제적이고 예민한 문제였습니다.
오늘 우리 주변에서도 이런 문제를 쉽게 생각 해 볼 수 있습니다.
제사 지낸 음식은 예수믿는 신자가 먹어도 되는가? 아니면 안 먹어야 하는가?
여러분은 어떻게 알고 있습니까? 사도바울의 결론은 한마디로 덕을 세우는 성도가 되라는 것 입니다.
성도들은 나 좋은 대로만 살지 않고 남에게 유익을 나누며 더부러 사는 덕스러운 삶을 살라고 명하십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이 덕을 세우는 성도입니까?
1) 다른 형제를 사랑하는 성도입니다.
우상의 제물에 대하여는 우리가 다 지식이 있는 줄을 아나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
당시 고린도교회 성도들 가운데는 우상의 제물에 대해 나름대로 지식을 갖고 있었습니다. 우상 앞에 바쳐졌던 고기도 시장에 내어놓아 파는 고기는 먹는다 해서 해 될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우상이 아무것은 아니기 때문이라는 지식이 있었기 때문 입니다.
또한 그 우상 숭배자들의 집에 차려진 상에있는 그 고기를 먹는다 해도 해 될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우상이 아무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고린도교회 안에는 우상 앞에 드려졌던 고기는 먹어서는 아니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음식을 먹는 행위는 곧 우상숭배를 인정하는 행위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고린도교인들은 바울에게 문의했던 것입니다.
이에대해 바울은 대답했습니다.
1절 하반절을 보면,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
여기서 말하는 지식은 사람을 교만하게 만드는 신앙이 없는 지식을 가리킵니다. 사람을 교만하게 만드는 사랑이 없는 지식을 가리킵니다.
신앙 없는 지식이나, 사랑 없는 지식은 자신을 교만하게 만들고, 나아가 남에게 상처를 주는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사랑이 결핍되고 신앙이 없는 지식은 마귀의 도구가 되어 불량한 글을 써서 사람의 마음을 부패 시킵니다. 무서운 무기를 만들어 사람들을 다치게하고 죽입니다.
불순한 사상, 부도덕한 사상은 사람의 마음에 심어주는 글을 써서 수많은 영혼들을 지옥에 몰아넣게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나온 지식은 언제나 건설적이어서 모두의 행복을 증진 시키는 역할을 합니다.
여러분들은 무슨 말이나 일이나 할 때마다 다른 사람의 행복과 유익을 위하여 하는 덕을 세우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과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은 무슨 음식을 먹는 일에 있어서도 자기 지식대로 행동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사람 앞에 겸손하게 행동합니다.
겸손의 반대가 무엇입니까? 교만입니다.
무엇이 교만입니까? 2절 말씀을 보면
만일 누구든지 무엇을 아는 줄로 생각하면 아직은 마땅히 알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요
나는 다 안다. 내가 아는 것이 가장 확실하다. 라고 생각하는 것이 교만이라는 뜻 입니다. 자만심을 갖고 행동하는 것이 교만입니다.
그러면 무엇이 겸손입니까? 항상 하나님과 사람 앞에 배우고자 하는 마음이 겸손입니다. 하나님과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은 매사에 겸손합니다.
고린도전서 13:4절 이하에는
사랑은 오래 참고...라고 했습니다.
고린도교회 안에는 우상의 제물을 먹을 수 있다는 지식을 가진 사람과 먹을 수 없다는 지식을 가진 사람들 사이에서 분쟁이 있었습니다. 다툼이 있었습니다. 서로 판단하고 남을 비방하는 비방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사도바울은 이런 교만에서 나오는 惡을 교회안에서 제거하기 위해 덕을 세우는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이 되라 하였습니다.
덕을 세우는 사랑이란 어떤 사랑입니까? 겸손히 오래 참는 것입니다. 모욕을 당했을 때 오래 참는 것이 덕을 세우는 사랑입니다. 상처를 입었을 때 오래 참는 것이 덕을 세우는 사랑입니다. 도전을 받았을 때 오래 참는 것이 덕을 세우는 사랑입니다.
덕을 세우는 사랑이란 또한 어떤 사랑입니까?
온유하며→"온유란 가혹하거나 까다롭거나 성가시게 하지 않는 것"입니다.
모든 도전과 화나게 하는 상황에서도 사랑은 온유하고 부드럽습니다. 증오심은 가혹하게 만들고 말이나 행동을 거칠게 하고 노하게 만듭니다.
하나님과 사람을 참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어떤 경우에도 친절하고 선을 행하고자 시도 합니다. 가혹하지 않고 온유할 것입니다. 남의 행복을 바라므로 친절하고 정중(Courteous) 할 것입니다.
예의 바르게 다른 사람의 행복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여러분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덕을 세우는 사람은 투기하지 않습니다.
덕을 세우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나 물건에 대해 시기심을 내지 않습니다.
덕을 세우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의 행복을 시기하지 않습니다.
덕을 세우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행복을 즐거워하고 저들의 행복이 증가하기를 원합니다.
다른 사람의 은사, 다른 사람의 지위, 명성, 부, 다른 사람의 가정 화목 등이 증가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덕을 세우는 사랑이란 남이 불행 해 지기를 원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저들은 남들이 잘 되는 것을 불평하거나 원망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교만한 사람들은 남들이 잘되고, 행복해지고 유명해 지는 것을 불안해하며 불만스럽게 여깁니다. 다른 사람이 잘 되는 것에 투덜댑니다. 남들이 우월한데 대해서 화를 냅니다.
내가 病들었을 때 남들이 건강하면 시기하기 쉽습니다. 내가 무시를 당할 때 남들이 존중을 받으면 시기하기 쉽습니다. 내가 실망할 때 남들이 행복하면 시기하기 쉽습니다. 내가 미천할 때 남들이 성공하면 우리가 시기하기 쉽습니다. 남이 나보다 더 좋은 집을 가졌을 때 우리는 시기하기 쉽습니다.
다른 사람이 나보다 좋은 집이나 학식을 가졌다면 그것은 저들의 뜻대로 된 것이 아닙니다. 모두가 하나님의 뜻대로 된 것입니다.
만약 남들이 가진 것이 저들의 근면과 노력과 성실 때문이라면 우리는 저들을 더욱 존중해 주어야 마땅할 것입니다. 우리는 그런 이웃들을 불행하게 만들고자 해서는 안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저들을 축복해 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겸손히 배워야 합니다. 무엇을 배워야합니까? 그들의 근면과 노력과 성실을 배워야 합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행복을 기뻐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저들을 축복해 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덕을 세우는 사람은 자랑하지 않습니다. 경솔하게 행동하지 않습니다. 경솔한 행동은 내가 남보다 우월하다는 생각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사랑은 다른 사람을 존중합니다. 사랑은 자기가 가진 것을 하나님의 선물로 알고 감사합니다. 그러나 그 일로 자랑하지 않습니다. 되도록 많은 사람에게 선을 행하고자 합니다.
사랑은 교만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무례히 행치 않습니다. 서로 존대하고 저들의 의견을 존중합니다. 사랑은 삶의 모든 관계에서 바로 행하도록 만듭니다. 사랑은 더러운 말, 불결한말, 외식, 상스러운 말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것들은 서로의 마음을 상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사랑은 이기적이 아닙니다. 사랑은 남을 희생 시켜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합니다. 참 사랑은 자기부인과 자기희생을 우리에게 가르칩니다. 덕을 세우는 참사랑은 타인의 행복을 원합니다.
덕을 세우는 사랑은 성내지 아니합니다.
덕을 세우는 사랑은 성급하게 화를 내지 않습니다. 덕을 세우는 사랑은 차분하고 진지하며 인내합니다.
만약 우리가 어떤 사람에 대한 사랑으로 충만하다면 우리는 갑자기 감정을 폭발 시키지 아니할 것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행동을 찬찬히 살피고 그의 동기를 좋은 방면으로 해석하고 그 모든 일들이 분명하게 밝혀지기까지 인내로 참고 기다릴 것입니다. 덕을 세우는 사랑은 악한 것을 생각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의 행동과 동기를 최대한 좋게 해석 하고자 합니다.
덕을 세우는 사람은 남들에게서 악한 동기를 찾지 아니하고, 남을 비난하거나 중상하지 아니합니다.
사랑은 쉽사리 성내지 아니할 뿐더러 우리를 화나게 하는 경우들에서 조차도 악한 의도가 없을 것이라 생각하게 만듭니다. 내가 상처를 입은 말이나 행동에서도 좋은 방향으로 우리는 해석하고자 할 것입니다. 덕을 세우는 사랑은 그의 동기나 행동 의견들을 가장 확실한 증거가 나타나기까지는 가장 좋게 해석을 하고자 합니다.
여러분들은 좋게 생각하고 관대하게 평가하고 판단할 줄 아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덕을 세우는 사람은 불의를 기뻐하지 않습니다.
덕을 세우는 사람은 타인이 잘 되는 때에 기뻐합니다.
덕을 세우는 사람은 진리와 함께 기뻐합니다.
덕을 세우는 사람은 남의 악을 기뻐하지 않고 남의 미덕을 기뻐합니다.
덕을 세우는 사람은 저들이 잘 될 때 기뻐합니다.
성령충만 하면 덕을 세우는 사랑의 성도님들이 될 수 있습니다. 성령 하나님을 순간순간 사모하여 성령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과 사람을 사랑하는 덕을 세우기 위해서 기도하며 더욱 노력하는 모든 교회들와 교인들이 늘어나기를 힘써야 할 것입니다.
덕을 세우는 사람은 모든 것을 참습니다.
여기서 모든 것을 참는다는 말의 뜻은 모든 것을 덮는다는 뜻입니다.
사랑은 다른 이들의 허물을 숨긴다는 뜻입니다. 남에게 알리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또한 덕을 세우는 사랑은 모든 것을 믿습니다. 여기서 믿는다는 말은 타인의 행동을 선의로 해석한다는 뜻입니다. 좋은 방면으로 본다는 뜻입니다. 덕을 세우는 사랑은 모든 것을 바랍니다. 모든 것이 잘 되기를 바란다는 뜻입니다. 덕을 세우는 사랑은 모든 것을 견딥니다. 사람들의 핍박을 견디고, 비방을 견딥니다. 하나님의 선한 뜻이 있음을 믿고 견디는 생활에 익숙하도록 노력하는 것입니다.
2) 형제를 실족치 않게 하는 성도 입니다.
그러므로 만일 식물이 내 형제로 실족케 하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치 않게 하리라
사실 우상이란 세상에서 아무 것도 아닙니다.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헛된 물건에 불과 합니다. 온 우주만물은 유일하신 하나님이 만드셨으며 주관하고 계십니다. 만물이 그 분에게서 나왔습니다. 모든 음식은 하나님이 내신 것입니다. 또한 우상이란 이 세상에 아무 것도 아닌데 어떤 음식을 우상의 제물이었다고 하여 먹지 못할 것입니까? 대답은 너무 분명합니다. 그 음식을 먹지 못할 이유는 전혀 없습니다. 음식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므로 감사함으로 먹을 수 있습니다.
디모데전서 4:3-5절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 짐이라
그러나 이런 지식을 교회의 모든 성도들이 다 갖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이런 진리의 지식이 없는 약한 형제들이 양심에 꺼리면서 제물을 먹게 될 때 그 약한 양심이 더러워지고 상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음식물 때문에 형제를 실족케 한다면 그런 식물은 영원히 먹지 않겠다고 말한 것입니다.
9절에서도
그런즉 너희 자유함이 약한 자들에게 거치는 것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
우상은 아무 것도 아니라. 모든 식물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니 먹어도 된다는 지식이 있는 사람이라는 너희 자유 함이 弱한 자들에게 그런 지식이 없는 사람들에 거치는 것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는 것입니다.
지식 있고 믿음이 강한 성도라도 지식 없고 믿음 약한 사람들을 실족시키지 않도록 먹을 권리와 자유를 포기할 줄 아는 덕을 세우는 성도가 되라는 말씀입니다.
지식과 믿음이 있는 사람이 우상의 집에 앉아 제물 먹는 것을 누구든지 보면, 지식도 믿음도 약한 사람이 그런 것을 보고 양심에 담력을 얻어서 우상의 제물을 먹게 되는데 그렇다면 그것은 지식 있는 자가 지식을 앞세우다가 그 지식으로 약한 자를 넘어지게 만드는 결과가 되고 맙니다.
그렇다면 나는 먹어도 될 만한 지식과 믿음이 있지만 약한 형제들을 넘어지지 않게 하기 위해 덕을 세우기 위해 나의 먹을 권리를 영원히 포기하겠다. 이것이 바로 사도 바울이 오늘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덕스러운 믿음의 표본을 우리에게도 가르쳐 주고 있는 것입니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도 우상은 여러 가지로 존재하고 있습니다.
지식이나 믿음 약한 형제들을 실족 시키지 않게하기 위해 자신의 권리를 스스로 포기하는 바울의 모습이 곧 우리 산정로교회 여러분들의 진정한 모습이 되어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덕을 세우는 성도, 남에게 유익을 주는 성도들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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