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자료

아직도 개운찮은 5.18 광주 민주화운동?

거듭난 삶 2016. 5. 13. 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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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사태인가 5.18 광주민주화운동인가

   : 내가 본 영화들아 | 작성자 : harrison

국민 10명 중 7명은 5.18 민주화 운동이 국가의 부당한 폭력에 대한 정의로운 저항으로 불순세력이 주도한 폭력사태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5.18 기념재단이 2016년 올해 초 여론조사 전문기관인 현대리서치에 의뢰해 국민(만 19세 이상) 1천명을 대상으로 시행한 ’2016년 국민 5.18 인식조사’ 결과, 국민의 과반수 이상인 70%가 ‘국가의 부당한 폭력에 대한 정의로운 저항이었다’고 답변했습니다.  


또 국민 과반수 이상인 70%가 ‘북한과 연결되지 않았다’, ‘불순세력이 주도한 폭력사태가 아니다’라고 각각 답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5.18 민주화 운동이 한국 민주화에 기여하였다는 의견은 72.8%로 조사됐습니다.

 

1. 뉴스 프레임

 

뉴스를 전하는 미디어는 일정한 프레임(Frame, 틀 짓기, 즉 특정한 방향으로 이슈 규정하기)을 통해 뉴스를 만들고 편집합니다. 뉴스제목 자체가 뉴스를 바라보는 틀입니다. XX사건을 ‘OO사태 ‘라고 호칭하는 프레이밍(Framing) 자체가 편집 과정이기도 합니다.

 

뉴스를 듣고 보는 정보수용자도 세상 소식을 체험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해당 뉴스프레임 시각을 받아들입니다. 자신에게 이익이 되고 좋은 정보가 되는 소식에는 집중하고 귀를 쫑긋합니다. 반면 충격적이고 자신의 현 처지를 악화시킬 수 있는 뉴스에는 이맛살을 찌푸립니다. 즉 자신의 이해관계 호불호에 비춰 순방향일 때 긍정적인 태도를 취하고 역방향일 때 부정적으로 반응하는 것이 인지상정입니다.

 

뉴스 프레임들은 한 사회의 가치관을 반영합니다. 대중적 정서가 투영되며 뉴스가치의 판단 잣대가 됩니다. 한 사회의 지적 성숙도를 반영합니다. 개별 인권과 민주주의가 조화를 이루고 공동체적 질서가 뿌리내리는 가운데 개인주의적 가치가 보장되는 사회는 뉴스프레임이 다양합니다. 나를 존중하듯이 너의 권리도 존중하는 사회는 나의 시각과 너의 시각이 공존합니다. 대립적인 담론들이 맞설지라도 비판을 할지언정 비난은 하지 않습니다.

 

 

2. ‘광주사태’

 

1980년 5월 18일에서 27일까지 호남의 중심 광주 시민들이 계엄령 철폐와 전두환(全斗煥) 퇴진을 요구하며 벌인 민주화운동은 한동안 ‘광주사태’ 라고 불렸습니다. 1995년 ‘5·18 민주화운동’에 관한 특별법 제정이 이뤄지기 전까지 한국사회는 그냥 광주사태라고 호칭했습니다. 우리 사회에서 ‘00사태’라고 일컫는 것은 대단히 부정적인 호명입니다. 사회 안정과 발전을 위해 일어나지 말았어야할 돌발적 사변을 의미하지요.

 

대한민국 국회는 1995년 특별법을 제정하면서 ‘5·18 민주화운동’으로 규정합니다. 1997년엔 ‘5·18 민주화운동’을 국가기념일로 제정하고 역사교과서에도 정식 명칭으로 기술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1980년 5월 17일부터 27일까지 열흘 상황은 한동안 입에 담아서는 안 되는 불문율에 싸여 있었습니다. 대신 비제도권의 진실들은 지하 문건과 귓속말로 숨죽이며 흘러 다녔습니다. 1980년 집권 군부세력은 ‘광주를 말하는 자는 국가내란을 획책하는 자’라는 압제 프레임을 드리웠습니다.

 

당시 제도권 언론도 입을 다물어야 했습니다. “북괴의 사주를 받는 간첩들이 광주에 침투, 사회불안을 야기하는 폭도들과 야합, 공권력을 탈취, 시민들을 위협하는 무정부 상태가 벌어지고 있다” 언론들은 열흘 동안 앵무새처럼 반복했습니다.

 

3. 5·18 광주민주화운동

 

12.12사태를 일으켜 군권을 장악한 전두환 신군부는 비상계엄기간 내내 강력한 언론통제를 실시합니다. 그때 서울 광화문 주변 신문사는 인쇄 직전에 곧 발행될 지면의 대장(臺帳, 기사 사진 제목 등을 거의 실제 신문처럼 제작한 초벌구이 지면)을 시청에 있는 계엄군 언론검열관에게 확인 도장을 받아야만 윤전기를 돌릴 수 있었습니다. 언론검열관이 삭제하라고 표시한 기사는 대장에서 들어내야만 했다고 합니다. 광주를 현장 취재한 소식은 원천 삭제되기 일쑤였습니다. 대신 신군부의 주의주장이 크게 나갔었습니다.

 

이 기가 막힌 일들은 1980년 실제 있었던 상황입니다. 신문 방송은 권총 찬 계엄권력 앞에서 국가안보를 명분으로 내세운 보도지침에 따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때 미디어들은 총체적으로 무장권력의 앵무새였습니다. 동시에 상상할 수 없는 일이 5월 열흘간 광주에서 일어납니다.

 

한번 ‘광주사태’로 낙인찍힌 광주는 수십 년 동안 지역적 편견과 네거티브 이미지 한 중간에 갇히고 맙니다. 광주 ‘5·18 민주화운동’을 바라보는 기존 프레임은 오랜 기간 “빨갱이 폭도들이 일으킨 유혈폭동의 난리”라는 극단적 편견으로 꾸준히 존속되어 왔습니다. 좁아터진 이 땅에서 특정지역을 깎아내려 정치적 우월을 과시하려는 재래식 ‘완장의식’은 웃지못할 역사의 퇴행이었습니다.

 

권력을 찬탈한 신군부의 일방적 프로파간다와 이에 강제적으로 동원된 미디어에 의해 ‘5월 광주’는 피해자가 가해자로, 시민의 자위권이 폭도의 광란으로, 양심의 표현이 사회불안 야기로 뒤범벅되고 말았습니다.

 

2007년에 개봉된 영화 <화려한 휴가>(감독 김지훈). 진실을 매몰시킨 채 폭압적 뉴스프레임만 국민에게 전달됐던 그 암울한 시기를 영상으로 되살립니다. 바로 36년 전 한국에서 발생했던 10일간의 사건입니다.

 

 

4. 왜 총을 들었나

 

영화 <화려한 휴가>는 계엄군의 무차별 유혈진압에 맞선 시민군 이야기입니다. 신군부의 정권탈취에 대해 문제의식을 느끼고 문제제기를 하는 대학생들은 공수부대의 무자비한 곤봉에 두들겨 맞습니다. (이 장면을 옆에서 보기에) 너무도 잔인한 진압에 항의하는 시민까지 봉변을 당합니다. 다음날 늘어난 시민 학생 항의대열. 어디선가 애국가가 확성기를 통해 울려 퍼지자 시위중인 시민들은 일제히 그 자리에 서서 ‘국기에 대한 맹세’를 합니다. 이를 신호로 광주 금남로에 도열한 무장 공수부대의 M16 총구가 불을 뿜습니다. 실제 일어난 사실입니다. 한 나라 한 민족의 계엄군이 비무장 민간인 시위대를 향해 무차별 사격을 시작한 것입니다. 시위대 그들은 누군가의 아버지, 삼촌, 형, 누나, 동생, 아들, 조카였습니다.

 

영화는 1980년 격변의 정치상황 구도를 그리지 않습니다. 시민들의 평안한 일상, 그리고 그 일상이 어떻게 처참하게 파괴되는 지를 찬찬히 보여줍니다. 실제 5월 광주를 몸으로 겪고 목격한 분들의 증언에 의하면 영화의 표현수위는 실제적 리얼리즘에는 한참 못 미칩니다.

 

영화 <화려한 휴가>는 다큐멘터리가 아닙니다. 신파조로 흘렀지만 국가 폭력이 시민의 일상을 한순간에 이처럼 무참하게 파괴할 수 있다는 점을 처연하게 드러냅니다. 스토리라인은 정교하지 않습니다. 카메라 앵글로 방대한 역사적 정치적 실타래를 풀려하지 않고 갑남을녀의 일상 프레임에 국한시켰습니다.

 

방금 대화를 마친 혈육이 주검으로 변해 리어카에 실려 왔을 때, 스스로 광주를 지키지 않으면 모두가 죽는다는 절박함에 시위대는 무장을 합니다. 이제 시민군이 됩니다. 민가에서 주먹밥이 전달되고 교련복을 입은 고교생까지 총을 잡으려 자원합니다.

 

5. 광주를 왕따시켜라

 

1980년대 내내 우리시대 의식 있는 지식인과 문인들은 ‘5월 광주’에 대해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죄책감을 느껴왔습니다. 이 광주에 대한 죄의식은 바로 광주에서 벌어진 그 국가폭력사태에 대해 아무런 항의조차 못하고 침묵으로 일관했다는 무력감에서 비롯됩니다. 문제의식을 자각하고도 그저 침묵했고 자기 안위와 허위의식에 무릎 꿇었다는 양심이 작동되는 것입니다.

 

광주는 결코 특별한 도시가 아닙니다. 한국의 여느 도시와 다를 바 없습니다. 그런 광주는 5월 그 열흘 내내 외부 소식을 목마르게 기다렸습니다. “광주 시민은 외롭지 않다! 우리 도시도 비정상적 신군부의 탄압에 항의한다! 광주시민을 더이상 죽이지 말라! 광주시민은 폭도가 아니다! 계엄군은 물러가라!” 이런 소식을 타는 목마름으로 기다렸습니다.

 

하지만 결코 들려오지 않았습니다. 광주소식을 제대로 내비친 뉴스 한 꼭지를 듣지 못합니다. 이미 광주는 대한민국 ‘非광주’ 전체에 의해 ‘폭동의 도시’로 낙인찍힙니다. 언론보도의 모든 프레임은 ‘폭동’이었습니다.

 

광주는 시대의 ‘왕따’ 자체였습니다. 외부로부터 차단당하고 고립무원 속에 정권찬탈 세력에 맞서는 그들에게 다가온 것은 ‘빨갱이 폭도’라는 시뻘건 불도장이었습니다. 광주 시민은 말합니다. “무작정 무조건 무기력하게 매도당하는 기분을 아시나요… 아무 소리도 못하고…”

 

  

6. 폭동의 도시로 몰아라

 

한국 사회에서 ‘빨갱이’란 타의적 낙인은 영원한 타자(他者) 틀짓기입니다. 불구대천의 적(敵)인 것입니다. 권력자가 항거하는 피권력자에게 구사하는 빨갱이 낙인은 전가의 보도입니다.

 

4.19 혁명의 실마리는 2차례의 마산 의거였습니다. 경찰이 죽여 은닉한 어린 김주열 학생의 시신이 마산 중앙부두 앞바다에서 떠오른 것을 계기로 마산의거가 거세게 타오릅니다. 곧장 이승만정권은 이를 공산주의 빨갱이 불순분자들의 책동이라고 몰아붙였습니다. 결국 4.26일 이승만대통령은 하야하고 부통령 이기붕 일가는 집단 자살하고 맙니다

 

정당성이 결핍된 권력은 애궂은 지점을 찾아내 붉은 색칠을 시도합니다. 진실이 군화발에 무력하게 유린당할 때 유일하게 항거한 그들과 그들의 가족들은 광주 그 이후, 시대의 범죄자처럼 숨죽이고 살아야 했습니다. 시민이 시민의식을 발휘하고도 그 흔적을 침묵 속으로 잠수시켜야하는 이 아이러니… 연약하고 취약한 한국 시민사회는 1987년 6월 민주 항쟁을 거치며 겨우 싹을 틔웁니다.

 

광주 ‘5·18 민주화운동’ 10일 동안 165명이 숨졌습니다. 평균 나이 27세. 그 가운데엔 대학생 13명 고교생 11명 중학생 6명 초등생 2명이 포함됩니다. 행방불명자는 65명, 부상 후 완치가 안돼 병들어 숨진 사망자는 376명. 25년이 지난 2005년. 5.18 유가족 대표단체들이 합동으로 첫 공식집계한 통계를 발표합니다. 이에 의하면 5.18 관련 사망자는 606명(중상으로 인한 후유증 사망자 포함)으로 나타납니다. 계엄군 사망자는 23명. 이중 14명은 공수부대와 향토사단 간의 자체 오인사격으로 사망합니다. 5.18 관련 시민 1394명이 구속 연행되고 427명 기소, 7명이 사형 12명이 무기형을 받았습니다.

 

석 달 후 장충 체육관에서 희한한 대통령선거가 치러졌고, 전두환은 99.9%의 지지로 대통령에 당선됐다고 보도됩니다.

 

7. 우리를 잊지 말아주세요

 

대구 출신 감독이 만든 <화려한 휴가>의 엔딩 씬은 외부로부터 철저하게 고립당한 도청 사수 시민군들이 무전기로 서로를 위로해가며 마지막까지 도청을 지키다 죽어가는 모습을 절절하게 그립니다. 시민군-계엄군 양측간 무력 공방은 게임이 되지 않습니다. 그들은 죽어가면서도 누군가와의 소통을 원했습니다. 하지만 그 누구도 그들에게 달려가지 못했습니다. 쓰러진 주검의 손안엔 무전기가 외롭게 쥐여져 있습니다.

 

그들은 외로웠을 것입니다.

지금 살아있는 우리들은

죽음에 직면한 그들의 그 외로움에 대해

무언가 미안해해야 하지 않을까요.

 

피의 살육작전 최고위급 명령권자는 “29만원”을 움켜쥐고 연희동에 건재합니다. 광주를 희생양 삼아 갓 피어난 민주주의를 공포로 바짝 압살했던 그들의 발포명령 하달과정 규명은 여전히 미궁에 빠져있습니다. 그는 국가원로로서 가끔 청와대로 초청받기도 합니다.

 

극중 여자 주인공 이요원(간호사 박신애 역할)은 심야 시내 가두방송에 나섭니다. “시민 여러분! 지금 계엄군이 광주 시내로 쳐들어오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우리 형제, 우리 자매들이 계엄군의 총칼에 숨져가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 계엄군과 끝까지 싸웁시다. 우리는 광주를 사수할 것입니다. 우리를 잊지 말아 주십시오. 우리는 최후까지 싸울 것입니다. 시민 여러분….”

 

감동이 물결치는 영화가 아닙니다.

참으로 끔찍한 영화입니다.

가슴이 먹먹해집니다.

이 영화는 그 날 광주로 가는 첫 계단에 불과합니다.

이제 5.18 민주화운동이 36돌을 맞이합니다.

5.18이 우리들 모두에게 남긴 화두는 민주 – 인권 – 희생입니다.

이제 광주는 미래로 방점을 찍습니다.

오늘도 우리가 누리는 일상의 평화가 얼마나 소중한지

광주는 가르쳐주었습니다.

 

 

 - harrison. 

 

   

9 thoughts on “광주사태인가 5.18 광주민주화운동인가

  1. “1980년 5월 18일에서 27일까지 호남의 중심 광주 시민들이 계엄령 철폐와 전두환(全斗煥) 퇴진을 요구하며 벌인 민주화운동은 한동안 ‘광주사태’ 라고 불렸습니다” 아닙니다. 5월 18일 아침에 김대중 고은 사주를 받은 폭도들이 전남도청앞에 있는 계엄군을 기습해서 시작으로 폭도들이 예비군 무기고 파괴로 총으로 완전무장으로 경찰 수십명 죽인 폭동짓을 했는데 해결 나서는 국가지도부 대신에 전두환을 끌려나와 10일동안 폭도들에게 죄를 묻지 않헸다고 투항 선전지 뿌리고 방송을 했으나 끝내 거부로 10일만에 무장 계엄군들이 진압. 김영삼 정권에서 밝혀진 사실이지만 폭도들은 칼빈과 M1총,계엄군은 M16갖고 있어 시체의 총구멍 보고 의사들이 폭도들이 많은 광주시민 죽였다고 진술로 광주사테는 잠잠. 5.18 유가족을 어느 국가유공자보다 대우 좋게해주는데 지금까지 대한민국 위하는 언행은 없고…지금이라도 광주폭동으로 재검토해야 함. 좌익들 수법은 가장 중요한 증거 단서는 앞뒤로 모두 빼고 덮어씌워 도는 거짓말로 선동짓뿐입니다

  2. auk815

    광주사태후 처음치른 총선에서
    전두환의 민정당이 광주호남에서 90%이상의 지지를 받고 당선한 바가 있습니다
    그 당시 부산은 대부분야당이 이겼습니다
    그래서 한때는 광주사람들 스스로가
    광주놈 부산분이라는 유행어를 만들어 유행시키기도했었습니다

  3. 광주사태후 대선에서 노태우 당선하고 2위는 김영삼,3위는 김대중였습니다. 광주민주화항쟁이면 당연히 김대중은 대통령됐습니다. 2위도 아닌 3위가 말이 됩니까? 매년 5.18기념식에서 5.18단체 간부가 경과 보고하는데 5.18일 아침에 전남도청앞에서 계엄군이 먼저 광주시민을 공격한것처럼(또는 충돌로 덮어씌움)해서 5.18 사태가 일어난 것처럼 합니다. 지금 경기 서울에 전라도 사람들이 향우회 이름으로 조직화 하여 가공할 공포의 사회를 만드는 것 같습니다. 저는 김대중 노무현 정동영 문재인을 욕설 비속어 없이 기사댓글로 비판했는데 야당이 선거때마다 선거법으로 긴급 체포 구속해서 징역 3년이상 살았는데 구치소 교도소 경찰서 검찰청 구치감에서 전라도 교도관이 조폭 동원해서 죽을뻔 했습니다. 지금 조폭과 향우회의 감시는 북한을 능가합니다.

  4. 5.18을 민주화운동으로 만든 것은 순전히 정치인들이 표를 의식해서 만들어 놓은 것에 불과 하다. 어떻게 선량한 시민이 무기고를 습격해 총기를 탈취하고 군용 장비를 탈취해 타고다니면서 국군에게 총질 한 것을 민주화 운동이라 할 수 있겠나?취재 사진도 일방적으로 얻어맞는 장병들은 보도 하지 않고 국군의 구타장면만 보도하고 있다.광주 청문회 시에 이해찬 당시 국해의원이 사진 한장을 들고나와 광주 학살 사진이라고 떠벌렸는데 한 공수부대원이 청문회 장에 전화를 걸어 “그 사진은 본인이 간첩을 사살하고 찍은 사진이라”고 폭로한 에피소드도 있었다. 그리고 여론조사 결과라는 게 광주와 평양에서 하면 민주화 운동이었다는 결과 가 99.% 가 나올 것은 뻔하다. 어디서 했는지 밝혀주기 바란다.

  5. sungwoo1946

    예비군 무기고를 습격한것, 자동차공장 탈취,사망자의 총상자국,총칼 든 군인앞에 달려 든다,등 보통 시민이 한것이라고는 도저이 납득이 안되는 의문 투성이인데 큰 애국이나 한것 처럼 떠드는것에 공감이 안된다. 가령 4.19 김주일 그리고 부마사태에는 왜 시민들이 무기고를 탈취 않았는가? 광주시민은 용감하고 부산 마산 시민들은 용기가 없어 그랬는가?

  6. 허수오빠

    제대로 된 정보도 없는 국민이 생각하면 다 맞는 것인가?
    황장엽도 말했고 탈북한 사람 중에 본인이 광주에 내려왔었다고 증언하는 사람이 한두 명이 아니다.
    죽은 광주시민 중 70%가 탈취한 칼빈총에 맞아 죽었고 건장한 20대 청년 중 15명이 지문으로 신원이 확인되지 않는다. 대한민국 청년 중 지문으로 신원확인이 안되는 사람이 있던가?
    갑자기 나타나 귀신 같이 사라진 연고대생이라고 주장하는 600명은 지금도 그 행방을 알 수 없고, 연고대생 중 그 누구도 광주에 내려갔다는 자가 없다.
    폭도들은 정확히 무기가 있는 지역을 찾아가 바로 기습하여 무기를 탈취했고 장갑차를 운전하고 기관총 등 중무기를 자유자재로 다뤘다.
    무엇보다도 탈북자가 중 장성급 인물도 광주사태는 북한이 개입한 것이라고 증언했다고 한다.
    동아일보 같은 민족언론이 야당이 국해의원 많이 냈다고 이런 기사를 올려서야 되겠는가?
    조금의 의문이 있어도 함부로 말하면 안되거늘 이렇게 많은 의문이 있는데 광주사태를 미화하려고 하는가?

  7. whgdmsskf

    왜 기준을 5.18로 하는가? 5.18이전엔 광주에서 어떤일이 일어 났는지에 대해선 왜 말을 안하나? 직접 격은 이들의 말을 종합하면 그때부터 무정부 상태였다는데 왜 5.18이후만 말을 하는데…진실을 덥을 생각을 말자. 김영삼이 한마디에 민주화운동이 되었지만 5.18을 민주화로 말하기엔 아직 멀었다. 5.18기준으로 할 것이 아니라 5.1~17까지 어떤일이 일어 났는지 밝히는 것이 우선이고, 무기고 탈취,교도소,기아차공장 침법이 언제 발생했는지도 밝혀야 한다.

  8. myulgong

    시민군은 예비군이었으며 따라서 예비군에 예비군용 총기가 불출되었던 것이며 폭동은 전두환씨가 일으켰던 것임. 즉 시민군은 국군 예비군으로서 불법적인 군사 쿠데타를 진압한 것인데 12.12 및 5.17 군사반란은 최종적으로 6월 항쟁에 의해 7년만에 진압된 것임.

  9. myulgong

    한국은 징병제 국가이며 당시 고등학교-대학 3학년까지 군사훈련을 받았는데 대학 2학년을 마친 대학생은 전시 분대장 임무 수행이 가능했으며 고등학생은 M1 소총 대학생은 M16으로 훈련받았으며 대학생 교련수업용으로 당시 대학마다 공이가 절단된 M16소총과 M60이 있었다. 그리고 당시 예비군 무기고는 동대 파출소 등 외부에 있었는데 93년에 군부대로 이관 완료되어 현재 군부대 영외에는 예비군용 총기가 없다. 장갑차는 1종면허 있으면 조종할 수 있고 예비군은 다 주특기가 부여되어 있다. 대학생 군사교육은 88년도를 마지막으로 폐지되고 90년대 말에 고교생 교련도 폐지되었다. 즉 시민군은 예비군 임무를 수행한 것으로 생각하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