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자료

美·러 누구도 원치 않았던 '한국 독립'

거듭난 삶 2012. 3. 23. 1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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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美·러 누구도 원치 않았던 '한국 독립'

  • 허동현 경희대 교수·역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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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 2012.03.22 23:42

    1908년 3월 23일과 이듬해 10월 26일, 두 날 모두 오전 9시 30분, 미국 샌프란시스코 오클랜드역과 중국 하얼빈역 플랫폼에서 총성이 울렸다. 사진 속 대한제국 외교 고문 스티븐스(왼쪽)와 통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는 죗값을 치렀다. 일본 정부의 추천에 따라 1904년 한국에 온 스티븐스는 이듬해 부임한 이토 통감을 도와 대한제국의 멸망을 기획했다. 스티븐스는 "이토 통감의 존재는 한국의 큰 행복"이라고 했고, 이토는 "스티븐스의 죽음은 국가적 재앙"이라고 말할 정도로 이들은 가까운 사이였다. "국가의 공적이나 도적을 대하는 데 공법(公法)을 들먹일 여지가 없다." "무고한 한국인들을 학살한 죄요, 정권을 강탈해 통감 정치를 한 죄다." 장인환과 안중근 두 의사(義士)가 남긴 거사의 변은 정당하다. 그들의 의거가 한국 병탄을 앞당겼다는 일본 우익의 주장은 어불성설이다.

    이토와 스티븐스 - 대한제국 멸망의 두 ‘기획자’였던 이토 히로부미 조선통감(오른쪽)과 스티븐스 대한제국 외교고문이 1907년 서울 덕수궁에서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러일전쟁 이후 만주에서 미·일·러 삼국의 각축전이 벌어졌다. 러시아와 일본은 기득권을 지키려 했고, 미국은 이를 뚫고 들어가려 했다. 그때 러시아는 두 번 일본의 손을 들어주었다. 1차 러·일협약(1907년 7월 30일)은 우리의 내정 관할권과 군대를 앗아갔으며, 2차 러·일협약(1910년 7월 4일)은 일본의 한국 병탄을 기정사실화했다. 각축전의 최종 승자는 국제 정세를 효율적으로 이용한 일본이었다. 1908년 스티븐스의 미국행은 들끓고 있던 미국 조야의 배일(排日) 정서를 달래려 함이었고, 1909년 이토 히로부미의 하얼빈 방문은 러시아가 미국과 손잡는 것을 차단하기 위해서였다.

    선열들의 핏빛 투쟁에도 불구하고 그때 우리는 국망(國亡)을 피하지 못했다. 뼈아픈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으려면 부인할 수 없는 사실들을 기억해야 한다. 당시 우리는 국제 정세에 무지했고 나라를 지킬 최소한의 힘조차 갖지 못했다는 것, 어느 누구도 우리 편이 아니었다는 것을 말이다. 실패의 역사에서 우리가 져야 할 책임의 몫부터 찾는 것이 순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