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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고대 올림픽의 역사

거듭난 삶 2016. 8. 25. 1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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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올림픽의 역사

 

 

[사진 제공 : 서울 올림픽 기념관]

 

 

 

고대올림픽은 제우스신에게 바치는 그리스인들의 정성어린 제전행사로 종교, 예술, 군사훈련 등이 삼위일체를 이룬 헬레니즘문화의 화려하고도 찬란한 결정체였다. 알페우스강과 클라데우스강의 물줄기가 합쳐지는 올림픽 평원에 웅장한 신전과 경기장을 세워놓고 각 도시국가의 시민들이 4년마다 한번씩 이곳에 모여 펼친 제전이 바로 고대올림픽이다. 고대올림픽의 발상 연대에 관해서는 아직 정확히 고증되고 있지 않지만 기원전 776년 앨리스 출신의 '코로 에부스'가 스타디온 달리기에서 우승했다는 문헌상의 기록을 근거로 통상 이때를 올림피아의 원년으로 보고 있다.

 

고대올림픽은 종교와 예술과 스포츠의 혼합이었다. 각종 신을 섬기던 그리스인들은 올림픽 대회 때면 각지에서 올림피아로 몰려들어 신전에 참배하며 제례를 지냈다. 종교의식 못지않게 예술문화행사가 중요한 의미를 차지하였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올림픽경기가 훈련의 성격을 띠었다는데 있다. 헬레니즘문화의 결정체로 1천2백여년동안 면면히 이어 내려온 고대올림픽은 그리스가 로마인의 지배를 받으면서 헬레니즘문화와 함께 몰락의 길로 접어 들었다. 기독교를 로마제국의 국교로 정한 테오도시우스황제는 394년 올림픽 제전을 이교도들이 종교행사로 규정, 폐지를 명령하는 칙령을 선포함으로써 바로 전해에 열린393년 제293회를 마지막으로 고대올림픽의 역사는 막을 내리게 되었다.

 

 

 

그리스 펠로폰네소스 반도 서부에 위치한 올림피아는 기원전(주전) 776년 시작된 고대 올림픽의 발상지입니다. 사진은 올림피아에 있는 "승리의 여신 니케 조각상" 입니다. [ 제공 = AP 연합 그리스 산불 자료 ]

 

올림픽의 기원

 

전 세계를 열광의 도가니로 몰아넣는 올림픽이란 어떻게 해서 생겼을까요? 우리가 호머(Homer)의 서사시 일리아스(Ilias)와 오디세이(Odyssee)를 통해서 알고 있는 그리이스의 세계는 벌써 지나고 기원전 10~9세기의 암흑기도 지나고 새로운 시대를 향해서 내딛는 발걸음은 사뭇 달랐습니다. 그리고 이 시기는 호머를 비롯한 전승문학들이 조금씩 싹을 틔워서 다가올 헬레니즘시대를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기원전 776년. 이로부터 1200년 가까이 당시 세계의 문화중심지 그리이스를 하나로 묶는 역할을 했으며, 현대에 이르기까지 그 영향을 끼친 사건이 바로 고대올림픽입니다. 핀다르(Pindar 518~442 ?)를 비롯한 여러 고대 그리이스의 작가들이 노래한 최대의 축제, 주후 393년에 이의 불꽃이 사라진 후에도 중세를 통털어서 잊혀진 적이 없었으며 꾸준히 되살리기 작업이 진행되었던 전 인류사의 문화적 사건인 올림픽의 기원은 그러나 이 문화적인 비중만큼 그다지 평화적이지는 않았던 듯 합니다.

 

 

 

고대올림픽은 어떻게 열렸나 / 판크라티온이란 / 알몸으로 참가한 경기자들 / 고대 올림픽의 중지 /

 

고대올림픽은 어떻게 열렸나

 

행해진 시기 : BC776 - AD393 (1169년 동안 4년마다 한번씩) 고대올림피아 제전이 BC776년 처음 시작되었다는 말은 사실 적당한 말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 이전에 이미 제전경기가 있었기 때문이고, 이것이 그리이스의 고대 역사속에서 한동안 중단되었다가 다시 시작되었다고 보아야 정확하다. 그리이스의 신화에 보면 제전경기에 대한 이야기가 가끔 나오며, 심지어 헤라클레스 조차 놀이삼아 아우들에게 경주를 시켜 이긴자에게 올리브나무 가지로 만든 관을 씌워주었다고 한다. 아득한 신화와 전설속에서 시작한 제전경기가 그리이스인들에 의해 주기적인 행사로 시작된 것이 BC776년이라고 보면 될 것 같다.

 

 

 

1. 장소 : 올림피아 언덕 - 고대에 제우스의 신전이 있었던 곳

 

2. 방법 : 그리이스의 신들에 대한 제전경기

 

3. 종목 : 스타지온 달리기, 도약, 투창, 투원반, 씨름, 권투, 판크라티온, 전차경주, 무장경주, 수상경기 등 올림피아 제전경기가 열리던 초기에는 스타지온 달리기 하나만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횟수를 거듭할 수록 종목이 늘어나 말기에 이르면 20여종목에 이르렀다고 한다.

 

4. 중단이유 : 로마의 테오도시우스황제가 기독교를 국교로 선포하면서 당시 로마의 영향력아래 있던 그리이스에서 행해지던 제전경기가 우상숭배로 규정되면서 중단됨

 

근대올림픽의 부활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던 고대 올림픽경기는 미케네문명의 중심지였던 그리이스에서 있었던 역사적인 사실이다. 근세에 이르기까지 신화와 전설로만 전해져오던 그리이스의 제전경기는 인류학자 쿠르티우스의 발굴에 의해 후세 인류앞에 실재화 했다. 기원전부터 시작하여 기원후까지 1천년을 넘게 이어져온 고대 올림픽 경기의 면면은 다음과 같다.

 

올림피아 이외에 행해졌던 제전경기

 

1. 피디아 : 아폴로 신전이 있는 델피에서 개최. BC586 - AD4세기. 4년마다

 

2. 이스트미아 : 포세이돈에 대한 제전경기. 2년마다. 플라톤이 이 경기의 레슬링 종목에서 우승하였다고 함

 

3. 네미아 : 제우스신을 받들기 위해 시작. BC573 - . 4년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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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크라티온이란

 

판크라티온은 그리이스말로 '격투'라고 한다. 이 경기는 씨름과 권투를 합친 경기였다. 이 경기에서는 물어뜯거나 할퀴는 것외에는 어떤 공격방식도 허용되었다. 또한 체급, 시간제한, 휴식이 없이 무제한으로 누군가 하나가 먼저 항복할 때까지 싸우는 경기였다. 올림피아에서 세번, 피디아에서 두번, 네미아와 이스트미아에서 도합 열두번이나 우승한 경력이 있는 시퀴온의 소스라토스는 [손가락장이]라는 별명을 얻었는데, 상대의 손가락을 비틀어서 항복시키는 방법을 썼기 때문이라고 한다.

 

경기는 서서 시작했다. 서로 얻어맞지 않기 위해 상대의 손을 견제하다가 기회를 보아 상대의 팔을 잡고 비틀어서 항복시키려 했다. 서서 승부가 나지않으면 상대를 넘어뜨려서 조르거나 팔을 비틀었다. 고통을 참지못하면 둘째손가락을 펴서 올리거나 상대의 등을 손바닥으로 쳐서 항복을 표시했다. 무승부란 없었다. 승리냐 항복이냐 오직 그뿐이었다.

 

스파르타에서는 시민이 이 경기에 나가는 것을 금지했다고 한다. 그 까닭은 다른 경기에서 지는 것은 지려고 해서가 아니지만 이 경기는 스스로 패배를 선언하는 경기였기 때문이다. 이렇게 격렬한 경기였기에 불행을 초래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제54회(BC 564년)때 그전에 두 번이나 우승한 일이 있는 피갈리아의 아라키온은 상대에게두 다리로 몸을 죄이고 목을 졸리면서도 굴하지 않고, 상대의 발가락을 비틀어서 상대의 항복을 받아냈으나, 동시에 그 자신이 숨지고 말았다. 이에 심판관들이 그의 승리로 판정했다고 한다. 그만큼 격렬한 경기였기 때문에 참가자가 그리 많지는 않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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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몸으로 참가한 경기자들

 

그리이스의 올림피아 경기에 참가하는 출전자들이 옷을 벗고 있는 모습을 우리는 자주 확인한다. 이렇게 옷을 벗은 이유는 무엇이고 언제부터 였을까?

 

두 가지 설이 있다.

 

 

 

제 15 회 경기(BC 720년)때 스타지온 달리기에 출전한 메가라의 오립포스는 옷을 벗고 알몸으로 달려 우승을 했는데, 심판관들은 이에대해 별 제지를 하지 않았다.

 

제 15 회 경기 때 장거리 달리기에서 우승한 스파르타의 아칸토스는 올림피아 제전이 끝난 후 귀국하여 알몸으로 뛰곤했다 한다. 옷을 입는 것보다 벗는 것이 편한지라 그는 자주 옷을 벗고 경기에 참가했는데, 결국 이런 관행이 일반화되고 올림피아경기의 심판관들도 이를 허용했기 때문에 알몸으로 경기에 출전하는 일이 일반화되었다.

 

위 두 가지 설을 종합해 볼 때 알몸으로 출전하는 관행은 제 15 회 대회부터 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경기자들이 옷을 벗은 이유는 단순하다. 경기하기에 편했기 때문이다. 현대 스포츠에 출전하는 선수들의 옷이 점차 작아지거나 몸에 밀착된 스타일로 변하고 있는것과 같은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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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올림픽의 중지

 

313년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와 리키니우스는 [밀라노 칙령]으로 기독교를 공인하였다. 건국초부터 유지되어 오던 로마의 다신교체제가 붕괴되고 유일신체제가 시작된 것이다. 그리하여 기독교의 오랜 박해의 역사가 막을 내렸다. 이것은 한편으로 올림피아 경기의 시련을 의미하는 전주이기도 했다.

 

379년 테오도시우스 1세는 올림픽 제전에 최후의 1격을 가했다. 카톨릭의 세례를 받은 그는 381년에 신전에 희생을 바치거나 그것으로 점치는 것을 금지시켰다. 신전에 참배하는 것을 금지하지는 않았으나, 그때부터 그리이스 전역에 산재한 신전의 파괴와 약탈이 시작되었다.

 

293회 경기가 열리던 393년 마침내 테오도시우스는 올림피아 제전을 금지하였다. 그리고 426년 동로마제국 황제 테오도시우스 2세는 신전의 파괴를 명령하고, 올림피아에도 파괴와 약탈이 자행되었다. 제우스신상의 머리는 잘리워져 멀리 콘스탄티노플까지 운반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1천년을 넘게 이어져온 올림피아 제전이 쉽게 중지되지는 않았다. 유스티니아누스 황제가 다시 금지령을 내린 것을 보면 5세기 중엽까지 명맥을 유지한 것을 알 수 있다.

 

 

 

[테오도시우스와 기독교 ,백과 사전에 실린 일반 자료]

 

 

니케아 기독교의 국교화

 

379년경 테오도시우스가 통치하던 동방 제국내에서 니케아 신경을 옹호하는 그리스도인들과 아리우스주의자를 비롯한 다른 종파 사이에 적대 관계가 고조되면서 복잡한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테오도시우스 자신은 심한 병을 앓고 난 뒤 380년 세례를 받고 니케아 신경를 신봉했다. 그는 제국 내에서 신앙의 통일을 이루기 위해 열성적으로 노력했는데 380년 2월 28일 테오도시우스는 병에서 회복되자마자 교회 당국자들에게 아무런 자문도 구하지 않고 모든 시민들이 니케아 신경을 신봉해야 한다고 규정한 칙령을 발표했다. 이 때부터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일체설을 믿는 사람들만 보편적 기독교인(가톨릭)으로 인정되었다. 가톨릭이라는 호칭이 문서에 등장한 것은 이 때가 처음이었다.

 

이듬해 열린 제1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 에서 주교 150명이 모여 아리우스파와 그 종파를 이단으로 확고히 했으며 콘스탄티노폴리스 교구는 향후 로마 교구와 버금가는 명예와 위신을 가진다고 발표하였다. 이 무렵 아리우스파 기독교도들은 모든 도시에서 집회를 금지당했고 정통 가톨릭교회로 개종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385년부터 테오도시우스는 동물을 제물로 바치는 제사를 더욱 엄격히 금지하였고, 391년 로마와 이집트에서 일체의 비기독교 의식을 금지하고 이듬해에는 공적이든 사적이든 모든 형태의 이교 숭배를 제국의 전역에서 불법으로 규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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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모퉁이돌 선교회 카타콤 소식 “평양에서 예루살렘까지” 통권 제215호

 

제목 : 바알 신전에서 올림픽 까지

 

 

바알신전에서 올림픽까지 (1)

 

성경에는 우상인 바알 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그런데 그 바알에 대한 내용을 잘 모르고 있다.

 

더군다나 그 근원들이 희랍 신화의 신들의 이야기와 비슷한 내용을 갖고 있고 오늘에도 그 영적의미는 많이 있다. 폭풍의 신인 ‘바알’ 이 누가 땅의 주인이며 진정한 왕인지를 놓고 강과 바다의 신인 ‘얌'과 싸우는 이야기 로 바알 신화는 시작된다. 바알은 대장장이 신이 만들어 준 마술 무기로 ’얌신‘을 제압한 후 땅의 주인으로 자기가 거할 궁전이 필요하다는 것을 그의 누이이며 아내인 아스다롯(아낫) 여신을 시켜 최고의 신 ’엘‘의 아내인 아세라에게 도움을 청하여 허락 받도록 하였다. 신들과 인간의 아버지인 ’엘‘ 신은 그 청탁에 허락을 하였다. 그러자 대장장이 신은 금과 은으로 바알에게 멋진 궁전을 지어 주었다. 바알은 궁전이 완공 되자 신들을 위한 거대한 잔치를 베풀어 자신이 신들의 왕으로 인정을 받는다. 그러나 여름 가뭄의 신이여 죽음의 신인 모트가 바알이 왕이 된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해 전쟁을 하게 된다. 바알은 전투에 패하고 죽음을 당해 지하세계에 묻히게 된다. 이에 비가 오지 않아 땅이 마르고 갈라지기 시작한다.

 

 

 

 

그러자 바알의 아내이며 전쟁의 신인 아스다롯이 모트의 왕국에서 남편의 시신을 찾는데 성공한다. 그리고 모트와 전쟁하여 그를 살해 하여 마치 씨앗처럼 들판에 뿌렸다. 그러자 죽었던 바알이 소생하여 살아나 왕위에 오르고, 땅은 다시 생명력을 얻어 풍요롭게 되었다. 가나안 사람들은 자연의 힘에 수동적으로 의존하여 생존하는 것은 불안정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자연의 힘을 조종, 통제하는 신을 섬겨 풍요와 다산을 보장받기를 원하였다. 그래서 바알과 그의 아내인 아스다롯을 농사의 신으로 섬겼다. 농경지역인 가난안 땅에서의 신화는 자신들의 필요에 의하여 만들어지고 섬기고 있었다. 그 땅을 지배하는 신인 바알이 즐거운 가운데 있으면 모든 자연 만물도 풍요로워진다고 믿고 그들은 바알과 아스다롯 부부신의 성적 활동을 자극하여 그들이 만족함을 느끼게 하기 위해서 신전에서 신도들과 제사장 혹은 신전 창기와 소위 “매음”을 행하였다. 그러면 그 모습을 보고 바알과 아낫도 성적활동에 참여하고 그 만족으로 풍요와 다산을 가져 올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요단강가에서 바벨론물가까지” 참고)

 

※ 참조 자료 : 저높은 곳을 향하여 (야후 블로그) 구약 BibleStudy 중에서 ↓

 

 

가나안의 도시 돌(Dor)에서 발견된 아스다롯 여신상.

풍요의 여신으로 알려진 이 여인상들은 후에

그리이스 미술의 영향을 받기도 했다. BAR-89-4-28]

 

 

야훼의 징표를 확인한 기드온은 바알의 제단을 헐고 그 옆에 있는 아세라 여신상을 찍어 그 나무로 번제를 바친다(삿 7:25-26).

 

이것을 본 성읍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와 기드온에게 항의하면서 죽이려고 하자 기드온이 그들을 설득하여 위기를 모면한다. 이로 인해 기드온은 바알을 대항하는 인물이라고 해서 '여룹바알'이라는 별명을 얻게 되고 하나님의 신(spirit)이 기드온에게 강림하자 더 힘을 얻는다(삿 7:28-35). 이 사실을 볼 때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야훼보다는 오히려 바알신앙에 더 젖어 있었다. 그런데 기드온이 야훼의 영을 받아 이스라엘을 구하고 다른 사람들도 야훼를 따르게 된다는 이야기다.

 

 

 

[사마리아 북부의 산당에서 발견된 황소상]

 

당시 가나안에서의 바알신앙은 보편적으로 인정되는 종교였다. 계절에 따라 비를 내려 농사를 지을 수 있게 해준 신은 바알이며 그 상대 여신 바알라트와 아세라(혹은 아스다롯)가 동시에 섬겨졌다.

 

그들은 비가 오지 않을 때 바알을 대신하는 제사장들과 바알라트를 대신하는 성전의 창녀들이 (holy prostitutes) 서로 성적인 교합을 함으로써 바알과 바알라트를 자극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이 자극에 의해 하늘을 상징하는 바알과 땅을 상징하는 대지의 여신(바알라트)이 조화를 이루어 비가 오고 농사를 지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야훼주의자들에게는 혐오스런 것이었으며 결국 타도의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바알신앙은 고대사회에서 오랫동안 그 명맥을 유지하였으며 이스라엘 역시 왕국이 멸망할 때까지 그 종교전통을 완전히 버리지 못했다. 예언자들은 이러한 종교혼합주의를 비판했던 야훼주의의 선봉자들이었다. 사사시대 역시 아직까지 야훼주의가 확립되지 못하고 바알신앙과 병행되어 그 명맥이 유지되고 있었다. 300명의 작은 군대로 거대한 미디안의 군대를 물리친 기드온은 전리품을 이용해 에봇을 만들어 성읍에 둔다(삿 8:27). 이 에봇은 작은 신상으로서 신점(神占)을 위한 도구가 되기도 했다. 사람들이 그 에봇을 경배하면서 음란한 행위를 하자 이것이 기드온 집안의 올무가 되었다고 보도하고 있다(삿 8:27). 하지만 기드온이 에봇을 만든 것은 당시의 사정으로 보아 별 문제가 아닌 것으로 보인다. 그 에봇은 마치 바알신앙과도 어울리는 신적인 힘을 가진 물건(聖物)으로 간주되었다. 후대의 기록자인 신명기사가(DH)가 생각할 때 기드온의 행위가 결과적으로 야훼신앙을 해치는 것이 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기드온의 행위에 대한 아무런 비판이나 하나님의 심판이 없는 것을 보아 그것이 전혀 이상한 행동이 아니었음이 드러난다.

 

 

 

기원전 14-13세기 경으로 추정되는 천둥을 동반하는 바알의 모습이다.

우가릿의 바일신전에서 발견된 것으로서,

투구를 쓰고 한 손에 곤봉을 들고 다른 한 손에

창을 들고 있는 것이 이채롭다(BAR-83-5-65)]

 

어쨌든 기드온이 사는 날 동안 사십년 간 이스라엘은 평안한 상태를 유지했고 기드온은 여러 명의 아내와 첩을 소유하고 살았다(삿 8:28-32). 야곱도 레아와 라헬을 정식 부인으로 맞이했던 점을 볼 때 이스라엘은 일부일처제만을 고집했던 것 같지 않다(창 29:15-30). 그러나 기드온 처럼 여러 명의 아내와 첩을 둔 사실은 흔한 경우가 아니다. 사사시대까지만 해도 이스라엘은 율법의 규정이 분명하게 정립되지 않았을 것이다. 일부일처제를 기조로 하고 있는 이스라엘의 율법에 비추어 볼 때 기드온의 경우는 예외적이라고 볼 수 있다.

 

 

텔 도르( Tel Dor)에서 발견된 가나안의 성창들(Sacred Prostitutes).

이들은 바알신전에서 제사장들과의 성적교제를 가졌던 것으로 생각되며,

풍요를 상징하는 여신의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BAR89-4-54)]

 

 

바알신전에서 올림픽까지 (2)

 

400년 동안 종살이하던 이스라엘의 출애굽을 진두지휘 했던 모세가 입성을 앞두고 모든 이스라엘을 세겜에 모아 하나님만을 섬기고 다른 신들을 섬기지 않을 것이며, 분배받은 땅에 거하는 가나안 족속들을 멸하라고 명령 하였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다른 신을 쫓지 말라는 것을 귀에 딱지가 앉게 들어 왔음에도 불구하고 여호수아가 죽고 난 후에 가나안의 신 바알과 아스다롯을 섬기는 것도 부족해 그들을 딸들을 취하여 아내를 삼고 자기 딸들을 그들의 아들에게 주어 통혼하는 죄악으로 하나님을 진노케 하였다.(사사기2~3장). 결국 여호와가 앞서가며 싸우심으로 정복한 가나안은 그 땅의 이방인들이 믿었던 바알과 아스다롯을 섬기는 죄악으로 인하여 무너지고 만 것이다.

 

가나안 종교는 인간의 풍요를 위해서 신을 지배하고자 하는 종교였다.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선택받은 이스라엘을 무너트린 것은 전쟁과 무기가 아니라 사람의 눈에 좋게 보이는 물질과 풍요로움을 쫓는 마음이었다. 이러한 성과 종교의 결합은 유랑생활을 했던 이스라엘인들의 마음을 빼앗아 버렸다.

 

놀랍게도 세계인들의 축제로 4년마다 열리는 올림픽의 역사로 거슬러 올라가면, 가나안의 바알 신전에 서 일하던 창기들과 풍요와 다산을 추구하며 성적 매음하는 이방신을 섬기고 통혼했던 이스라엘을 무너뜨린 간교한 문화와 잇닿는다. 그것이 고대 그리스의 올림푸스 신전에서 제우스신에게 제사했던 여제들을 통해 동일하게 음란한 문화들이 자리 잡았고, 오늘날 개최되는 올림픽에 이르고 있다.

 

사진설명 : 올림피아와 아테네에 있는 제우스 신전,

현재는 제우스신상은 남아 있지 않다.

 

BC776년을 기원으로 삼는 고대 올림픽은 종교적의미가 강한 축제였다. 아테네, 스파르타, 테베 등 여러도시국가가 모여 이루어진 연합 국가였던 고대 그리스는 서로의 화합을 다지고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신들에게 참배하기 위해 시작되었다. 올림피아는 그리스 문명에 중요한 성역이며 제우스 신앙의 중심지이기도 했다. 올림피아가 신들과 우주의 주인인 제우스 신 신앙의 중심지가 되고, 제우스에게 바치는 스포츠 제전이었다.

 

 

사진 설명: 올림피아의 가장 오래된 헤라 신전,

제우스의 아내 헤라 여신을 모신 신전에서 처음 성화채화식이 거행됩니다.

 

성화(?) 불받은 봉송주자들이 전세계 5개 대륙을 뛰어 다니다 08년 08월 08일 20:00 베이징 주 경기장에 성화탑에 불을 놓게 됩니다. (채화된 성화는 그리스 전역 3월 31일부터 올림픽 역사상 가장 긴 기간인 130일 동안 총 13만 7천km 여정을 달렸다고 합니다)

 

지금도 올림픽개최지역이 결정되면 가장 먼저 그리스 아테네에 위치한 올림피아 신전에서 머리를 털어 올리고 하늘거리는 긴치마를 입은 여인들이 줄지어 서서 성화에 불을 붙이면서 시작된다. 이 여인들은 신전에서 일하는 여제들이다. 고대그리스 신전의 여제들이 했던 중요한 임무가운데 하나가 풍요와 다산을 빌려 바알과 아세라 신전에서 처럼 성적행위를 행하는 일이다. 이 여제를 다 만족시킬 만한 한 건강한 남자를 찾는 것으로부터 운동이 시작되었다. 근대사에 더하여 진 마라톤과 몇 종류의 게임을 빼고는 가장 힘센 남자를 찾는 신들의 놀음이었다.

 

 

 

 

 

 

 

 

놀라운 것은 지금도 올림픽 개최를 알리는 의식이 매번 그리스의 여제들에 의해 시작된다는 것이다. 결국 올림픽의 유래는 성스러운 올림픽제전이 아닌 가나안의 이방신 바알과 아세라를 섬길 때처럼 불러왔던 영적간음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러하기에 올림픽이 개최되었던 도시마다 문화가 더럽혀지고 타락하는 현상들을 나타내었다.

 

 

글쓴이: sunbee

 

 

 

 

 

출처 : 우림과 둠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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