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과 말씀

거기 삼십팔 년 된 병자가 있더라

거듭난 삶 2016. 10. 3. 00:17
728x90

삼십팔 병자를 고치시다.

 

 

: [ 5:1-18] 후에 유대인의 명절이 있어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니라

2) 예루살렘에 있는 양문 곁에 히브리 말로 베데스다라 하는 못이 있는데 거기 행각 다섯이 있고

3) 안에 많은 병자, 소경, 절뚝발이, 혈기 마른 자들이 누워 [물의 동함을 기다리니

4) 이는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동하게 하는데 동한 후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됨이러라]

5) 거기 삼십팔 병자가 있더라

6) 예수께서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랜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

7)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동할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8) 예수께서 가라사대 일어나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9) 사람이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니라 날은 안식일이니

10) 유대인들이 나은 사람에게 이르되 안식일인데 네가 자리를 들고 가는 것이 옳지 아니하니라

11) 대답하되 나를 낫게 그가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더라 한대

12) 저희가 묻되 너더러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사람이 누구냐 하되

13) 고침을 받은 사람이 그가 누구신지 알지 못하니 이는 거기 사람이 많으므로 예수께서 이미 피하셨음이라

14) 후에 예수께서 성전에서 사람을 만나 이르시되 보라 네가 나았으니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시니

15) 사람이 유대인들에게 가서 자기를 고친 이는 예수라 하니라

16) 그러므로 안식일에 이러한 일을 행하신다 하여 유대인들이 예수를 핍박하게 된지라

17)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시매

18) 유대인들이 이를 인하여 더욱 예수를 죽이고자 하니 이는 안식일만 범할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의 친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심이러라.

 

 

 

[ 5:1] 후에 유대인의 명절이 있어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니라 -

 

여기 이른 "유대인의 명절" 이란 말은 어느 명절을 가리킨 것인가?

 

사건의 순서를 따져 본다면, 예수님께서 유월절을 지나서 유대를 떠나셨고, 도중에 사마리아에서 전도를 하시던 때는 추수하기 4개월 (?)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때는 오순절인 듯하다(Calvin). 오순절은, 유월절 둘째날 부터 7주를 계수하여 50일을 말함이다.

 

( 16:9-12 주를 계속할지니 곡식에 낫을 대는 첫날부터 주를 계수하여

10) 하나님 여호와 앞에 칠칠절을 지키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복을 주신 대로 힘을 헤아려 자원하는 예물을 드리고

11) 너와 자녀와 노비와 성중에 거하는 레위인과 너희 중에 있는 객과 고아와 과부가 함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에서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즐거워할지니라

12) 너는 애굽에서 되었던 것을 기억하고 규례를 지켜 행할지니라).

 

칼빈(Calvin) 그렇게 보았어도, 많은 정통 학자들은 절기를 유월절이라고 해석하여, 2:13 6:4과의 사이에 유월절 하나를 둔다.

 

그리하여야 예수님의 공생애(公生涯) 3년이 넉넉하다.

 

예수님께서 이런 명절에 예루살렘에 올라가신 목적은, 그런 절기에 많은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모이기 때문이다. 그는 많은 사람들에게 생명의 말씀을 전하기 원하셨다.

 

 

 

[ 5:2] 예루살렘에 있는 양문 곁에 히브리 말로 베데스다라 하는 못이 있는데 거기 행각 다섯이 있고 -

 

여기 "양문" 영국 왕역(A.V.) "양의 시장"(Sheep market)이라고 하였으나, "양문"이란 번역이 채택된다.

 

3:32, 12:39에도 양문이란 성문이 있다.

 

( 3:32 모퉁이 누에서 양문까지는 금장색과 상고들이 중수하였느니라,

 

12:39 에브라임 위로 말미암아 옛문과 어문과 하나넬 망대와 함메아 망대를 지나 양문에 이르러 감옥 문에 그치매)

 

"행각" 현관식으로 지은 시설을 가리킨다.

 

 

 

[ 5:3-4] 안에 많은 병자, 소경, 절뚝발이, 혈기 마른 자들이 누워 [물의 동함을 기다리니

4) 이는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동하게 하는데 동한 후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됨이러라] -

 

유력한 사본들(* , B, C, D)에는 3 끝의 "물의 동함을 기다리니" 문구부터 4절까지의 말씀이 없고, 이것이, 보다 열등(劣等) 사본들(A,C ) 나와 있을 뿐이다.

 

그래서 이것이 논쟁건이 되어 있다.

 

(1) 어떤 학자들은 괄호 안의 말이 사도적 원본은 아닐 것이라고 한다.

 

크로솨이데(Grosheide) 말하기를,

"참으로 이것의 사본상 권위는 무겁지 않다" 하였고

(Het Heilige Evangelie Volgens Johannes, Kommentaar I, 1950,PP.342-343),

 

고데이(Godet),

"이것이 일반 민중의 전설이었는데, 후에 어떤 사본에 기입되므로 이렇게 전승되었다" 하였고,

 

헨드릭센(Hendriksen) 말하기를,

" 문구에 대한 사본 증거가 무겁지 못한 사실을 보아서, 그곳에 물의 동함이 초자연적 능력으로 되었다는 것이 저자 요한의 소신(所信) 아니었을 것이고, 성령님의 교훈도 아니었을 것이고, 아마도 병자의 신념이었을 것이다". 라고 하였다. (W.Hendriksen, New Testament Commentary, The Gospel of John, P.191).

 

(1) 옛날 터툴리안(Tertullian, 145-220 A.D.), 부분 말씀을 사용한 실례가 있다(On Baptism V).

 

칼빈(Calvin), 부분의 사본 문제를 전연 취급하지 않고, 이것을 사도적 원본으로 그저 받아들인 태도로 말하였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으니,

 

, "물이 동한 것은, 하나님께서 자기의 기쁘신 뜻대로 물질을 자유로이 사용하신다는 증표이다. 아니라, 것은, 때에 병자들의 치료된 원인이 오로지 직접적으로 하나님에게 있음을 알려주는 증표이기도 하다"라고 하였다. (Calvin's Commentaries, John's Gospel I,1847, P.189).

 

 

 

[ 5:5] 거기 삼십팔 병자가 있더라 -

 

"삼십 " 여기 38년이란 연수는, 병자가 실제로 앓고 있었던 기간일 것이다.

연수는, 예수님의 연령보다 많으니 치료가 어려울 것이라는 것이 암시된다.(A.Marack).

 

 

 

[ 5:6] 예수께서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랜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 -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모습을 보시고 정확히 아신다.

그는 병자가 절망 상태에 빠진 것도 아셨다.

그러나 그는 절망 자에게 길을 주신다. ,

 

(1) 그의 마음 속에 소망을 일으키시며,

(2) 고쳐 주시기를 약속하시는 의미에서,

 

"네가 낫고자 하느냐"라고 물으셨다.

 

물으심은 병자에게 믿음을 일으킬 만한 적당한 말씀이었다.

 

믿음은, 소망과 약속에서 생긴다. 주님께서는, 긍휼에 의하여 병자를 고쳐 주시고 병자 자신의 심리 상태의 어떠함을 알아보시지 않은 때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종종 사람의 몸보다도 심령을 살리기 위하여, 죽은 심령에 생기를 주시려고 힘쓰신다.

 

그러므로 그는, 절망한 자에게 소망을 일으키시며, 거기에 믿음을 건설하시려고 하신다.

 

우리가 가지 주목할 만한 것은,

그곳에 병자들이 많았는데 하필 38 앓던 병자 사람만 고쳐 주셨을까 하는 문제이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주권에 의하여 그렇게 되었다.

 

( 4:25-27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엘리야 시대에 하늘이 여섯 달을 닫히어 땅에 흉년이 들었을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과부가 있었으되

26) 엘리야가 사람에게도 보내심을 받지 않고 오직 시돈 땅에 있는 사렙다의 과부에게 뿐이었으며

27) 선지자 엘리사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문둥이가 있었으되 중에 사람도 깨끗함을 얻지 못하고 오직 수리아 사람 나아만뿐이니라).

 

그리스도의 구원 실시가 하나님의 주권대로 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이와 같은 구원을 받는 사람들은 항상 감사할 처지에 있다. 이유는, 그들은 유달리 저런 놀라운 구원을 받았기 때문이다.

 

 

 

[ 5:7]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동할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 말씀을 보면, 그때 예루살렘의 인심이 무정하였다는 것을 있다.

 

어디나 언제나 인심은 이렇게 무정하다. 가장 불쌍한 사람들은 세상에서 내버림이 되는 일들이 너무 많다. 그들은 세상이 모르게 죽을 지경의 고생을 당하다가 모르게 죽는다.

 

 

 

[ 5:8-9] 예수께서 가라사대 일어나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9) 사람이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니라 날은 안식일이니

 

예수께서 가라사대 일어나 자리를 들고 걸어 가라 하시니 - 예수님께서 명령을 내리심이, 동시에 사람을 고치시는 능력이 되었다. 주님의 명령하시는 말씀은 동시에 능력이 되는 법이다.

 

사람이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 가니라 - " 나아서" 말은 예수님의 말씀의 비상 능력을 보여 준다.

 

주님의 고치시는 능력의 역사(役事) 저렇게 완전하여 병자를 즉각적으로, 또는 완전히 고쳐 주셨다.

 

크로솨이데(Grosheide) 말하기를,

"그것이 그렇게 것은 예수님의 영광이 나타나도록 하며, 또한 그의 전도에 도움이 되게 하려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주님께서 고치신 날은 안식일이었다.

 

 

 

[ 5:10] 유대인들이 나은 사람에게 이르되 안식일인데 네가 자리를 들고 가는 것이 옳지 아니하니라 -

 

안식일에 짐을 지는 것은 성경에 금지되었다.

 

( 13:19 안식일 예루살렘 성문이 어두워 때에 내가 명하여 성문을 닫고 안식일이 지나기 전에는 열지 말라 하고 종자 두어 사람을 성문마다 세워서 안식일에 아무 짐도 들어오지 못하게 하매;

 

17:21-22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는 스스로 삼가서 안식일에 짐을 지고 예루살렘 문으로 들어오지 말며

22) 안식일에 너희 집에서 짐을 내지 말며 아무 일이든지 하지 말아서 내가 너희 열조에게 명함 같이 안식일을 거룩히 할지어다).

 

그러나 말씀은 영업과 관계된 운반을 금지시킨 것이고, 부득이한 휴대품을 운반하는 것까지 금지시킨 것은 아니다.

 

그런데 때에 바리새인들은, 머리털을 쪼개듯이 번쇄하게 사람들의 행동을 정죄하는 일에 율법을 오용하였다.

 

 

 

[ 5:11] 대답하되 나를 낫게 그가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더라 -

 

이것은, 그가 예수님께 책임을 돌리고 자기는 발뺌을 하려고 말한 것이 아닐 것이다.

 

그것은, 그가 예수님의 권위를 승복하고 그에게 의지하는 생각에서 나온 말일 것이다.

 

난치병에서 건져 주신 이의 말을, 그로서는 복종할 만하였다.

 

* 참조 (9:11 대답하되 예수라 하는 사람이 진흙을 이겨 눈에 바르고 나더러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 하기에 가서 씻었더니 보게 되었노라;

 

3:9-10 모든 백성이 걷는 것과 하나님을 찬미함을 보고

10) 본래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사람인 알고 그의 당한 일을 인하여 심히 기이히 여기며 놀라니라)

 

 

 

[ 5:12] 저희가 묻되 너더러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사람이 누구냐 하되 -

 

유대인들이 강퍅하였던 것이 여기 드러난다.

 

그들은, 불쌍한 병자의 고침 받은 반가운 사실을 묵살시키고, 안식일에 자리를 들고 가게 사실만을 추궁한다.

 

(1) 그들은 죽을 사람을 살린 긍휼보다, 사람들의 헛된 유전을 중대시 하였으며,

 

( 15:2 당신의 제자들이 어찌하여 장로들의 유전을 범하나이까 먹을 때에 손을 씻지 아니하나이다,

9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 하시고),

 

(2) 사람을 살리는 것보다 사람을 헛되이 정죄하여 죽이는 것을 유쾌하게 여겼던 것이다.

 

 

 

[ 5:13] 고침을 받은 사람이 그가 누구신지 알지 못하니 이는 거기 사람이 많으므로 예수께서 이미 피하셨음이라 -

 

예수님이 병자를 고치신 뒤에, 많은 병자들이 고침 받기를 원하여 그에게로 모여들 우려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자리를 피하셨다.

 

그는 고쳐 주심보다 복음 전하기를 원하신 것이다.

사람들이 고침 받고 믿는 것보다 말씀을 듣고 믿는 것을, 그는 더욱 원하신 것이다.

 

 

 

[ 5:14] 후에 예수께서 성전에서 사람을 만나 이르시되 보라 네가 나았으니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시니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시니 - 귀절에 대하여는 가지 해석이 있다.

 

(1) 고침 받은 자의 병들었던 원인이 그의 어떤 특별한 범죄에 있었는데, 이제는 그런 죄를 다시 범치 말라는 뜻이라고 한다(Luther).

해석에는 난제가 있으니,

 

 그것은, 성경말씀이 한편, 어떤 질병의 원인을 특수한 죄악에 돌리지 않은 사실이다.

 

( 9:1-3 예수께서 길 가실 때에 날 때부터 소경 된 사람을 보신지라

2) 제자들이 물어 가로되 랍비여 이 사람이 소경으로 난 것이 뉘 죄로 인함이오니이까 자기오니이까 그 부모오니이까

3)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

 

그러나 성경은 다른 한편, 어떤 질병의 원인이 사람의 특수한 죄악이라고 하므로( 16:46), 우리는 해석을 옳게 밖에 없다.

 

그러나 그보다는 다음 해석을 더욱 적합하다고 본다.

 

(2) 여기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말씀의 헬라 원어는, " 이상 범죄를 계속하지 말라" 뜻이다.

 

이것은, 하필 그의 38 전의 범죄(처음에 그가 병든 원인) 염두에 두신 것이 아니고, 38 동안 중에서도 계속 범죄 하던 것을 염두에 두신 것이다.

 

크로솨이데(Grosheide), 이것이 그리스도에게로 돌아오지 않는 그의 죄악을 가리킨다고한다.

(Maar de man leefde nu in zonde, had zich niet aan den Heiland gegeben.-Het Heilige Evangelie Volgens Johannes, Kommentaar I.P.352).

 

그렇다면, 여기 " 심한 " 영적 형벌을 가리켰을 것이다.

 

* 참조 ( 12:43-45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에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되 얻지 못하고

44) 이에 가로되 내가 나온 집으로 돌아가리라 하고 보니 집이 비고 소제되고 수리되었거늘

45) 이에 가서 저보다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욱 심하게 되느니라 악한 세대가 또한 이렇게 되리라)

 

위의 예수님의 말씀은 다음과 같은 중대한 뜻을 보여준다.

 

(1) 예수님께서 친히 38 병자의 과거의 죄악들을 모두 용서하여 주신 사실,

(2)그가 고침 받은 자의 성화(聖化) 요구하신다는 사실,

(3)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도 성화를 힘쓰지 않는 자는, 무서운 심판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 2:2-3 천사들로 하신 말씀이 견고하게 되어 모든 범죄함과 순종치 아니함이 공변된 보응을 받았거든

3) 우리가 이같이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어찌 피하리요 구원은 처음에 주로 말씀하신 바요 들은 자들이 우리에게 확증한 바니).

 

그러므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의미심장하다.

 

고침 받은 자는 말씀에서 살아야 되며,

마디 말씀이 그의 심령에 살아 있어야 된다.

 

루터(Luther) 말하기를,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는 말씀은, 무엇보다도 다음과 같은 것을 권장한다. , 사람이 마땅히 그리스도의 충족성을 믿어야 된다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dass man an die Genugtuung Christi glauben soll.-Evangeliem Auslegung, 4,P.206).

 

 

 

[ 5:15-16] 사람이 유대인들에게 가서 자기를 고친 이는 예수라 하니라

16) 그러므로 안식일에 이러한 일을 행하신다 하여 유대인들이 예수를 핍박하게 된지라 -

 

고침 받은 자가 저렇게 보고한 것은 예수님을 배반하는 의미가 아니었을 것이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공적으로 핍박하기는 여기 사건에서부터이다(Bernard).

 

"핍박하게 된지라." 말은 핍박하기를 계속한다는 뜻이다.

사건에서도 예수님은, 남들을 대신하셔서 항상 고난을 받으신 분으로 드러난다.

 

그는 병자를 고쳐 주셨고, 자신은 때문에 고난을 받으신다.

 

 

 

[ 5:17]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시매 -

 

하나님 아버지께서 천지 만물 창조를 마치시고 안식하셨다는 것은,

 

( 2:2-3 하나님의 지으시던 일이 일곱째 날이 이를 때에 마치니 지으시던 일이 다하므로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3) 하나님이 일곱째 날을 주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날에 안식하셨음이더라),

 

결코 하나님의 무활동을 의미하지 않고, 그의 창조 역사에서 쉬심을 의미하는 것이다.

 

우리가 아는대로 그가 계속하여 만물유지와 구원과 심판의 역사를 하신다.

그와 같이, 예수님도 구원과 심판의 역사를 하신다는 것이, 5:17,19-30 나타난 변론이다.

 

(5:17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시매,

 

19-30 그러므로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들이 아버지의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

20)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자기의 행하시는 것을 아들에게 보이시고 그보다 일을 보이사 너희로 기이히 여기게 하시리라

21)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 같이 아들도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살리느니라

22)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아들에게 맡기셨으니

23) 이는 모든 사람으로 아버지를 공경하는 같이 아들을 공경하게 하려 하심이라 아들을 공경치 아니하는 자는 그를 보내신 아버지를 공경치 아니하느니라

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말을 듣고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25)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26)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 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속에 있게 하셨고

27) 인자됨을 인하여 심판하는 권세를 주셨느니라

28)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29)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30) 내가 아무 것도 스스로 없노라 듣는 대로 심판하노니 나는 나의 원대로 하려 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이의 원대로 하려는고로 심판은 의로우니라)

 

그가 이와같은 일을 하신다는 것은, 그가 하나님과 동등되신 증표이다.

 

예수님의 변론(5:17) 들은 유대인들 자신도 그의 변론을 가리켜,

 

(5:17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시매)

 

그가 하나님과 동등이란 의미의 변론이라고 하였다.

 

(18 유대인들이 이를 인하여 더욱 예수를 죽이고자 하니 이는 안식일만 범할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의 친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심이러라).

 

예수님의 하신 일들은, 하나님 아버지와 동등이신 그로서 안식일에 오히려 하실 만한 것이었다.

 

아브라함 카이퍼(Abraham Kuyper), 안식에 속하는 일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

"안식은 사람의 활동 능력을 정지시킴이 아니고, 보다 참된 일로 돌림이다"라고 하였다. (Asleep in Jesus, P.55).

 

 

 

[ 5:18] 유대인들이 이를 인하여 더욱 예수를 죽이고자 하니 이는 안식일만 범할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의 친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심이러라. -

 

"이를 인하여" 말은,

 

위의 17절에 있는 예수님의 말씀을 이유로 함을 가리킨다.

 

,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하신 것과 하나님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므로 자기도 일하신다는(하나님과 자기는 동등이라는 의미) 말씀을 이유로 한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은혜로운 계시(啓示) 보여 주신 것이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그것 때문에 그를 죽이고자 하였다.

이것은, 하나님의 계시의 가장 요긴한 점을 반대한 셈이다.

 

예수님께서 자기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신 것은,

 

특수한 의미에서 아들이라고 하신 것이다.

 

예수님은 자기만이 저런 특수한 아들,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을

 

" 아버지" 라고 하셨고, "우리 아버지" 라고는 하지 않으셨다.(Zahn).

 

그런데, 예수님의 신자격(神子格) 다른 뜻으로 오해한 학설들이 있다.

 

(1) 성령적 신자설(聖靈的神子設).

학설이 성립된다면, "하나님 아들" 이라는 이름은, 영원 자존하신 하나님 아들이라기보다도 인간으로서 성령과 함께 한다는 의미의 하나님 아들일 것이다.

 

, 뤼트겔트(Lutgert) 이론에 의하면,

 

요한복음에는, 예수님께서 하늘의 일들을 문견(聞見)하신다는 어귀들에 하나님 아들이란 칭호가 많이 나오는데,

천적(天的) 문견은 현세에 있어서 성령을 통하여 되는 일일 것이라고 하며,

이렇게 성령을 충만히 받으신 의미에서 예수님을 하나님 아들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학설의 관계 장절들을 연구하면, 예수님께서 성령을 받으신 고로 하나님 아들이 되셨다는 것이 아니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시므로 성령을 받으셨다는 것이다.

 

( 1:33-34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를 보내어 물로 침례를 주라 하신 그이가 나에게 말씀하시되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성령으로 침례를 주는 이인줄 알라 하셨기에

34) 내가 보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였노라 하니라).

 

아니라, 하늘 일에 대한 문견이, 그의 현세적 경험에 국한한 것이 아니고 그의 화육(化肉) 이전의 것도 있다.

 

예를 들면, 3:32

 

"그가 보고 들은 것을 증거하되 그의 증거를 받는이가 없도다" 어귀의 문견에 관한 동사는 완료 시상이다.

 

그것은 그의 화육 이전의 경험을 말함이다.

이유는, 윗절에 있는 그의 화육 사실은 "위로부터 오시는 "라고 하는 현재 사상으로 되었기 때문이다.

 

(2) 종교 윤리적 신자설(宗敎倫理的神子設).

하르낙(Harnack) 학설의 대표자이다.

 

그는 말하기를, 요한복음에 있어서 예수님은 영원 자존하신 하나님 아들이 아니고 종교 윤리적으로 그가 하나님과 일체이신 의미에서 하나님 아들이라고 하였다 한다.

 

요한복음을 읽으면, 예수님의 신자격(神子格) 하나님 아버지에게 대한 그의 순종(종교 윤리) 관련되어 있다고 한다.

 

(10:18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계명은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하시니라,

 

12:49 내가 자의로 말한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나의 말할 것과 이를 것을 친히 명령하여 주셨으니,

 

14:31 오직 내가 아버지를 사랑하는 것과 아버지의 명하신 대로 행하는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라 일어나라 여기를 떠나자 하시니라,

 

15:10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같이 너희도 계명을 지키면 사랑 안에 거하리라).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의 종교 윤리적 생활이 신자격의 성립 원인이라고 하지 못한다. 요한복음의 어느 부분에서도 이런 교훈을 찾을 없다.

 

그의 종교 윤리적 생활은 그의 신자 격의 결과로 나타는 일종의 수반 현상이고, 결코 그것이 신자격의 성립 원인은 아닌 것이다.

 

(3) 역사적 신자설(歷史的神子設).

독생자란 술어를 기초로 하여 역사적 신자설을 지지할 있을까?

 

독생자란 말은, 예수님의 화육(化肉) 사실을 의미한 것이라기보다 차라리 영원 자존의 신자격을 가리킨다.

 

3:16, 18; 요일 4:9 보면,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18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요일 4:9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독생자 되도록 보내신 것이 아니고, 독생자를(화육 전에도 이미 독생자였음) 보내셨다고 까닭이다.

 

독생자가 독생자 되심은,

역사상의 어떤 사건으로 말미암아 것이 아니고 우리로서 측량하기 어려운 영원(永遠) 속한 일이다.